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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도 지역

[스크랩] 흥해구제기적비---흥해군수 김영수

작성자이미르|작성시간26.06.19|조회수42 목록 댓글 0

 

흥해 구제 기적비

포항 흥해에 있는 권무정에는 군수 김영수가 백성을 위해 제방을 쌓아 백성을 이롭게 했다는 구제비가 있다.
권무정은 흥해 읍내 흥해읍  중성로 32번길 7-3 번지에 있었다.
에 있었으나, 도시개발로 인해 현재의 자리로 옮겼다.
권무정은 김영수 흥해 군수를 기리는 사당이며, 영조 때 흥해 군수로 부임하여, 왜적의 침입을 막고 당시 극심한 가뭄 극복을 위한 보를 조성해 농민들에게 공급하는 등 활약을 펼쳤기에, 군민들은 김 군수의 死後 그의 공적을 기리기 위해 왕에게 건의하여, 이 사당을 마련하고 김 군수의 업적을 기려 온 것으로 알려졌다.
필자가 권무정에 관심을 가진 것은 흥해 군수를 지낸 김영수가 경상좌도병마사를 지냈기에, 그의 선정비를 찾는 과정에서이다.
김영수 장군의 흔적은 제주, 여수 통영, 한산도 선정비와 필체를 남겼으며, 흥해에는 백성들이 구제 기적비를  세웠다.

필자가 그러한 흔적은 다 찾아 보고 다녔으며, 파주에 묘역 까지 다녀 오기도 하였다.

흥해에 있는 구제 기적비의 명문은 다음과 같다.

”興海  전액이다.
九堤 記績 남달리 특별히 쌓은 놀라운 공적
 碑 頭記(두기)로 여기의 비석의 전액과 두기를 따로 두어 다른 곳과 달리 표현 하였다.


郡守 金公 九堤 記績 碑

生民之本在農。農之本在漑。故利民之政。莫善於廣漑。興海傍海而邑。澤農多而漑源少。邑民病焉。英宗壬午。今統制使金公永綬以郡守至。乃築十有一堤。曰太平。曰松洞。曰柿木。曰都沱。曰德城。曰余峴。曰予美。曰城谷。曰小長生。曰大谷。而南星則因前人之績。公之視役。便衣菲屨雜跡畚鍤。寄宿近堤之閭。晨出昏息。手桴鼓以倡作。懸錢布以賞勤。具牛酒以餉勞。一如治軍之法。衆皆樂趍。役必先期。用民之隙。一歲十一堤成。太平之趾。捐粟百斛。購受漑之田。按使金尙喆亦助之粟百斛。歲收租數十斛。屬之民帑。以當公費。其惠不止漑也。小長生,大谷二堤今廢。而九堤沄沄。民饜其惠。久益頌之。公安東人。以武擧歷守州閫。所至盡力民國。輒有成績。時議以戎垣待之。不幸罹

풀이:

백성이 살아 가는데 있는 근본은 농사에 있으며, 그  농사의 근본은 관개(灌漑)에 있으므로 백성을 위한 정사(政事)는 농사짓는데 넓게 물을 대는 것(광범위한 관개)보다 더 좋은 것은 없다." 흥해 고을은 바닷가에 있어 읍이 윤택하고 농사는 많이 짓고 있으나 수원(水源)이 딸려 읍민들이 걱정하고 있었다. 영조 임오년(1762년)  승정원일기에는 1761년 1월에 하직 인사를 한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통제사 김영수(金永綬)公이 흥해군수로 부임한 후 11개의 제방을 쌓았다. 이름은 태평, 송동, 시목, 군타, 덕성, 여현, 여미, 성곡, 소장생, 대곡이고, 남성은 지난 사람의 유적을 따라 쌓았다.
군수 김 공이 洑를 막을 때에 본인이 직접 현장에 나가 일을 시키면서, 입을 옷과 신고 다니는 신발까지도 현장 가까운 곳에 가져다 놓고, 기숙하면서 새벽 일찍 공사장에 나갔다가 저녁 늦게 돌아오며, 일하는 자 가운데 부지런한 사람에게는 현전(縣錢)으로 상을 주며, 쇠고기와 술대접을 해가면서 노고를  치하 함에 마치 군대를 통솔 하는 것 같이 하였고, 때로는 백성들이 여가를 
가지도록 해가면서 일 년에 洑 11개를 쌓았다. 
농사를 다 지은 후에는 태평들에서 수세 100석을 거두어 살기 어려운 김상철(金尙喆)등을 도와주고 10석은 민폐를 끼친 자에게 혜택을 주는 등 골고루 백성들에게 은혜를 미치게 하니 그의 공적은 洑를 막는 데에만 국한되지 않았다. 지금은 소장생 洑와 대곡보가 없어졌으나 당시 공적은 백성들이 칭송했었다. 公은 본디 안동 사람으로 무과에 급제하여 여러 고을 수령으로 다니면서 백성과 나라를 위해 진력한 기록이 뚜렷이 남아 있다.

후면:

重獄置對。如高允之直。上始以其罪罪之。未幾宥還。置年格而除郡。旋擢之湖閫。不踰期。授統制使。盖賞其不欺也。聖上之勵世如此。爲臣下者孰不願爲之死哉。惜乎。公則老矣。興海之績。直公之末也。然亦可謂識農之本而勤民也。宜民頌之久不衰也。郡民舊嘗治碑。圖紀公績而文未具。後二十餘年。大中適守是郡。因衆請而記之。辭不必侈。特書公之受知於聖上者。以告興人。

上之 十年 丙午 五月 日 

郡守 昌寧 成大中 謹記

築祭 監官 閑良  金 信得
堅石 都監 折衝  崔 奎炯


풀이:


그러다가 죄가 있다고 獄 살이를 하게 되었으나 얼마 후 임금께 죄를 용서받아 통제사(統制使) 삼도수군통제사를 말한다.
를 제수 받았다고 한다.
그것은 곧 남을 속이지 않았으므로 임금에게 죄를 용서받을 수 있었으리라! 이런 사실을 들어본 사람은 누구나 죽음으로 나라에 보답하기를 원하지 않으리요! 애석하게도 당시 洑를 막은 김공은 벌써 늙어버렸으니 흥해 군수로 재직 당시 보를 막은 업적은 거의 기록이 없어졌다. 그로부터 20년 후에 백성들의 간청에 의하면 공적을 특서(特書)하여 성상(聖上)에게도 알리고 흥해 백성들에게도 알리는 도다.

上之 정조를 말한다.
 十年 丙午 五月 日 상지 10년 병오 5월 일

郡守 昌寧 成大中 謹記    군수 창녕 성대중 성대중(1732년~1812년)본관은 창녕. 자는 사집(士執), 호는 청성(靑城). 아버지는 찰방 효기(孝基)이며, 해응(海應)이 그의 아들이다. 노론 성리학파 중 낙론계(洛論系)인 김준(金焌)에게서 배웠다.1756년(영조 32년) 정시문과에 급제했다. 서얼이었기 때문에 순조로운 벼슬길에 오르지 못할 처지였으나, 영조의 탕평책에 따른 서얼들의 신분상승운동인 서얼통청운동(庶孼通淸運動)에 힘입어 1765년 청직(淸職)에 임명되었다. 1763년 서기관으로 통신사 조엄(趙曮)을 수행하여 일본에 다녀왔으며, 1784년(정조 8년)에 흥해군수가 되었다.저서로 〈청성집〉이 있다.
 근기
築祭 監官 閑良  金 信得  축제 감관 한량 김신득
堅石 都監 折衝  崔 奎炯  견석 도감 절충 최규형

흥해군수 김영수가 군수에 임명되는 시기는 1761년이며, 그 기록은 다음과 같다.

“승정원 한국사데이타베이스에서 발췌 하였다.
일기  영조 37년 1월 24일 갑자  1761년 

興海郡守 金永綬이 下直함


○ 下直, 興海郡守金永綬。 흥해 군수 김영수가 하직 인사를 하였다.”

성대중 선생이 지은 명문에는 1762년에 김영수가 흥해 군수로 부임하였다 하였는데, 승정원일기에는 1761년이라 되어 있어, 성대중 선생의 착각 인 것으로 생각된다.

 

흥해구제비 전면
흥해구제비 후면

서영보 서영보(1759년~1816년)본관은 달성(達城). 자는 경세(慶世), 호는 죽석관(竹石館), 옥경산인(玉磬山人). 영의정 서종태(徐宗泰)의 고손이며, 좌의정 서명균(徐命均)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영의정 서지수(徐志修)이고, 아버지는 대제학 서유신(徐有臣)이다. 어머니는 유성제(柳聖躋)의 딸이다. 증조와 할아버지가 모두 영의정으로 직계 가문에서 3대에 걸쳐 정승이 나온 명문 태생이다.

가 지은 죽석관유에는 김영수에 관한 글이 전해지고 있으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죽석관유집 고전번역원데이타베이스(DB)에서 발췌하였다.
 제2책 / 서(序)
어떤 사람을 전송한 글〔送人序〕

---생략---
내가 소보(少保)의 소전(少傳)을 보건대 “공이 절강에 있을 때에는 《기효신서》를 지었고, 계진(薊鎭)에 있을 때에는 《연병실기(練兵實紀)》를 지었는데, 북로(北虜)가 공과 담륜(譚綸)을 무서워하여 담척(譚戚)이라고 병칭하여 불렀다.”라는 내용이 실려 있었다. 
그렇다면 《기효신서》의 전법은 공이 직접 사용해 보아도 호적(胡賊)을 제어하는 데에는 불리했기 때문에 《연병실기》를 지은 것이 아니겠는가. 
그런데 뒷사람들은 피아(彼我)의 장단(長短)과 적세(敵勢)의 동이(同異)를 헤아려 보지도 않은 채, 한결같이 이것만을 가지고 종사(從事)하고 있으니, 이는 용(龍)을 낚으려는 미끼를 가지고서 범을 잡으려는 것과 같고, 범을 잡고자 함정을 파 놓고서 용이 낚이기를 기대하는 것과 같으니, 또한 잘못되었다고 해야 하지 않겠는가.
대개 임진왜란 뒤에 징창(懲創)을 하여 뒷날을 도모하고 환란을 생각하여 예방하려는 목적으로 이루어진 일을 보면 그래도 언급할 만한 것이 있는데, 병자년(1636, 인조14)에 패한 것과 관련해서는 그와 같은 일이 있었다는 말을 듣지 못하였다. 모르겠다만, 이 호로(胡虜)에 승리하기 위해서는 들판에서 싸워야 하는가, 아니면 성을 지켜야 하는가? 속전속결(速戰速決)을 해야 하는가, 아니면 지구전(持久戰)을 벌여야 하는가? 이런 점에 대해서 우리는 알지 못한다. 비포(飛砲)로 격퇴해야 하는가, 아니면 철기(鐵騎)로 짓밟아야 하는가? 장궁(長弓)으로 사격해야 하는가, 아니면 단병(短兵)으로 접전해야 하는가? 이런 점에 대해서도 우리는 알지 못한다. 이런 몇 가지 사항에 대해서 정론(定論)이 있지 않다면, 갑자기 그들을 만날 경우에 겁을 잔뜩 집어먹고 우왕좌왕하다가 졸지에 패하고 말 것임을 우리는 알 수가 있다.
남과 북의 두 오랑캐가 모두 우리를 보고 항상 으르렁거렸지만, 지금의 근심으로 말하면 또 북쪽에 있지 남쪽에 있지 않다고 할 것이다. 그 이유는 무엇이겠는가?
만력(萬曆 명 신종(明神宗)의 연호) 연간에 섬 오랑캐가 강성하여 사방으로 나와 침략하였으므로 중국의 복건(福建)과 민제(閩淛) 지방이 항상 고달프게 그 피해를 당하곤 하였는데, 우리가 병화(兵禍)를 입은 것도 바로 그중에 하나였을 뿐이다. 



그런데 근세 이래로 그 나라가 날로 피폐해져서, 심지어는 신사(信使)처럼 늘상 행해 오던 일도 오래도록 청하지 않고 있으니, 그들이 바야흐로 자기 앞가림도 못하는 고달픈 처지에서 어떻게 남을 해치려는 생각을 감히 낼 수나 있겠는가.
청인(淸人)이 천하를 점유한 것이 오래되었다. 전해 오는 말에 “호인(胡人)에게는 100년의 운세도 없다. 중국의 민간에 전해지는 《소병가(燒餅歌)》라는 예언서에 나오는 말이다. 명 태조(明太祖) 주원장(朱元璋)이 국사(國師)인 유기(劉基)와 미래의 일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다가, 명나라가 망한 뒤에 호인이 지배하는 세상이 올 것이라는 말을 듣고서 “예로부터 호인은 100년 동안의 국운(國運)도 없다고 하는데, 이 나라는 끝내 200여 년의 운세를 누린단 말인가.〔自古胡人無百年之國運 乃此竟有二百餘年之運耶〕”라고 반문했다는 내용이 실려 있다.
”라고 하였다. 
그들이 참으로 하루아침에 중국에서 버티지 못해서 무리를 모두 이끌고 북쪽의 선창(船廠)으로 올라선창(兀剌船廠)의 준말로, 원래 만주족의 본거지였던 심양(瀋陽)과 영고탑(寧古塔)의 중간에 있는 지역 이름이다.
 돌아갈 경우에는, 평일에 우리를 환대하며 우호적으로 지내려 하던 그들이 장차 좌권(左券 채권(債券))을 손에 쥐고서 부채를 갚으라고 다그칠 것인데, 이러한 때를 당하여 그들의 요구대로 따르자면 그들의 욕심을 채우기에 재물이 부족할 것이요, 그들의 요구를 거역하자면 노여워하는 그들을 대처하기에 병력이 부족할 것이니, 아, 무엇을 믿고 응하지 않을 수가 있겠는가.
주상이 즉위한 지 9년(1785년, 정조9년)째 되는 해에, 홍충절도사(洪忠節度使) 김공(金公)을 김영수(金永綬, 1716년~1786년)이다. 1785년(정조9년)에 삼도수군통제사(三道水軍統制使)에 임명되어, 부임한 지 반년 만에 병사(病死)하였다.
 발탁하여 통제사(統制使)로 삼았다. 
김공은 충성스럽고 강직하며 청렴하고 소탈한 위에 나랏일에 마음을 모두 기울여서, 가는 곳마다 반드시 갑병(甲兵)을 수선하고 성지(城池)를 수리하였다. 통제사의 직책은 실로 영남ㆍ호남ㆍ호서 등 삼로(三路)의 주사(舟師)를 통령(統領)하는 것인 만큼 바다를 방어함에 있어 첫째가는 직임이라고 하겠다. 
그리고 거처하는 관사(官舍)가 웅장하고 화려할 뿐만 아니라, 어염(魚鹽)의 이익과 귤유(橘柚)의 꾸러미 《서경(書經)》 〈우공(禹貢)〉에 “귤과 유자는 꾸러미로 싸 두었다가 천자가 바치라고 하면 바친다.〔厥包橘柚 錫貢〕”라는 말이 나온다.
와 죽전(竹箭)의 아름다움 《이아(爾雅)》 〈석지(釋地)〉에 “동남의 아름다운 것으로는 회계의 대나무 화살이 있다.〔東南之美者 有會稽之竹箭焉〕”라는 말이 나온다.
을 소유하여 그 부유함이 일국(一國)에 으뜸이 된다. 
또 매양 전함(戰艦)의 해상 훈련을 벌일 때마다 거함(巨艦)의 이물과 고물이 백리(百里)에 서로 바라다보이는 가운데, 각종 깃발이 해를 가리고 피리와 북 소리가 뒤엉기며 마치 귀신이 울부짖는 것과 같아서 사람들이 두려움에 떨게 하는데,  《장자(莊子)》 〈외물(外物)〉에 “흰 파도가 산더미처럼 일고 바닷물이 뒤집힐 듯 요동치니, 그 소리가 귀신의 울부짖음과 같아서 천리 밖에 사는 사람들까지 두려움에 떨게 하였다.〔白波若山 海水震蕩 聲侔鬼神 憚赫千里〕”라는 말이 나온다. 대본에는 ‘燀爀侔鬼神’으로 되어 있으나, ‘燀爀’은 ‘憚赫’의 잘못이기에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절도사(節度使) 이하의 관리가 모두 종종걸음을 치며 그 호

령을 들으니, 그 직임이 중하다고 이를 만하다.
그런데 지금은 성상의 교화가 동쪽에 미쳐서 바다에 왜구(倭寇)의 물결이 일어나지 않기 때문에, 이 관직을 맡은 자들 대부분이 기악(妓樂)으로 즐거움을 삼고 재화(財貨)로 자신을 풍요롭게 하면서, 그 부귀와 즐거움을 향유하기만 할 뿐이요 걱정해야 할 일은 잊고 있는 형편이다. 
그러나 김공의 현명함으로 말하면 유속(流俗)의 구차한 행태와는 완전히 다른 만큼, 하루아침의 편안함에 물들어서 백세(百世)의 환란을 소홀히 할 분이 아니니, 반드시 거북선에 올라타고 대양(大洋)에 임하여 충무(忠武)의 유적을 찾아보고는 개연(慨然)히 그와 같이 되기를 생각할 것이다. 
그리고 어찌 이와 같기만 할 뿐이겠는가. 앞으로 전임(轉任)하여 관서(關西)의 곤수(閫帥)가 되고 승진하여 상장(上將)이 될는지도 모두 알 수 없는 일이니, 그렇다면 왜인(倭人)을 제어하고 호인(胡人)을 제어하는 것의 동이(同異)와 장단(長短)을 알고서, 무엇이 먼 훗날 염려할 일이 되고 무엇이 가까운 날의 걱정이 될 것인지에 대해서 공은 익히 강구 할 수 있을 것이다.
公도 척소보(戚少保)의 장수 됨됨이에 대해서 일찍이 사모했을 것이니, 남방을 진무(鎭撫)함에 반드시 《기효신서》와 같이 걸맞게 하는 점이 분명히 있을 것이요, 그러고 나서 또 전임(轉任)하여 관서(關西)의 곤수(閫帥)가 되고 상장(上將)이 되어서는 《연병실기》와 같이 시설(施設)하는 바가 있으리라는 것을 믿겠다. 
公이 이번에 가서 작위(作爲)하는 것을 내가 장차 들으면 공이 충무처럼 될 수 있을지 소보(少保 주(周)나라 때 태자를 보익하던, 삼공의 다음 가는 벼슬로서 소사(少師), 소부(少傅), 소보(少保)를 가리킨다.
)처럼 될 수 있을지 알게 될 것이요, 이와 함께 천리 밖에서 절충(折衝)하는 그 무위(武威)가 맹수가 산에 있는 것과 같을지에 대해서도 점칠 수 있을 것이다.
공의 막객(幕客)인 모(某)가 떠나려 하면서 나에게 말해 줄 것을 청하였다.
모(某)는 사람됨이 근실하고 신실하니, 좌막(佐幕)의 임무를 수행함에 무슨 어려움이 있겠는가. 그래서 유독 내가 공에게 기대하는 것을 써서 공에게 바치게 하였으니, 공이 서생(書生)의 말이라고 하여 소홀히 하지 않는다면 다행이겠다.“

흥해군수 김영수는 통제사에 임명 된 후 6개월 만에 별세하기에, 士民들이 타루비(墮淚碑)를 세웠다.
필자가 조사 한 바로는 한반도에 타루비는 십여좌가 되며, 통영 세병관에 있는 통제사 김영수 타루비도 그 중에 하나이며, 타루비에 보이는 명문은 다음과 같다.

”統制使金公諱永綏墮淚碑(통제사김공휘영수타루비)“

六朔莅營 6 개월 동안 통제사를 맡으셔서
一心圖報 한마음으로 일을 도모하시었네.
身無兼衣 몸에는 사치를 하지 않으셨고

言不及私 언행에는 사사로움이 없었네
規劃未半 계획 한 것은 절반도 이루지 못하시고
送下遞棄 공께서는 어찌 급하게 가시나이까!
父老咸嗟 모든 백성들이 한탄 하고
士卒相弔 비석의 후면의 글을 생략한다.

 선비와 군사 서로서로 조문 하였도다.



김영수의 생애는 다음과 같다.
金永綏(1716년~1786년) 안동김씨, 자는 중약, 초휘는 영적이다. 
흥해군수(지금의 포항)와 전라우, 좌수사를 거쳐 함경도병사, 제주목사 겸 방어사, 홍충도 병사를 역임하고 통제사에 부임하여 통영임소에서 순직 하였다. 통영의 세병관에 타루비와 사적비가 있고 흥해군(포항)에도 선정비가 있으며 후에 청덕사에 배향되었다. 死後에 두 차례에 걸쳐 청백리에 천거되었으나 녹선 되지 않았다. 조부는 청백리 탁청헌(濯淸軒) 두남(斗南)이며 아버지는 의영고직장을 지낸 홍석(弘錫)이고, 어머니는 貞夫人全州李氏와의 三男二女중 三男으로 태어났다.

김영수 선생의 기록이 많지만 여기서 줄인다.

 

필자가  김영수 공을 위해  詩를  하나 지어 추모 한다.

 

 

 

統制使 金公 永綏 追慕詩 (통제사 김공 영수 추모시)바다를 품은 호국(護國)의 별, 눈물로 새긴 청풍(淸風)

 

 

흥해의 들판 위에 흙을 나르고

백성들 가뭄 눈물 씻어주던 이,

베옷에 짚신 신고 보(洑)를 쌓으니

일 년 만에 열한 제방 푸르게 흘렀네.

척소보(戚少保)의 거룩한 전법을 가슴에 품고

이충무(李忠武)의 붉은 충절 바다에 물들여,

가는 곳마다 갑병을 닦고 성벽을 높이니

맹수가 산에 있음이라, 외적들이 떨었도다.

삼도수군 통제사의 무거운 소임 맡아

깃발은 해를 가리고 북소리 바다를 뒤흔들제,

한 나라의 으뜸가는 부유한 영지(營地)에서도

몸에는 두 벌 옷 없고, 말에는 사사로움 없었네.

아, 하늘이 시기하여 여섯 달 만에 꺾이니

기획한 원대한 책략 다 펴지도 못하고

통영의 한산도 달빛 아래 급히 가셨구려

, 아비들은 통곡하고 군사들은 서로 조문하네.

포항 흥해의 구제비(九堤碑)엔 따스한 애민(愛民)이,

통영 세병관 타루비(墮淚碑)엔 슬픈 충혼이,

두 차례 청백리 천거에 이름은 오르지 못했어도

백성들 마음속 사당(淸德祠)엔 영원한 별로 남았으리.

 

 

옥산 이희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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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원문 : 옥산국가유산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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