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 이공제(李公隄) 비각
성주 답사를 마치고 대구 신천에 있는 이공제 비를 보러 간다. 성주 왜관에서 칠곡으로 넘어 대구 시내로 진입하니
평일 이라도 차가 많이 밀린다.
성주 1시간을 달려 도착한 이공제 비각 그런데 주차 할곳이 없다. 그래서 다시 5km 달려 가서 차를 돌려 마땅한
골목 주차를하려니 할 곳이 없다.
그런데 마침 문 닫은 점포가보인다. 차를 돌려서 그곳에 주차하고 건널목을 건너 이공제 비각을 보러 간다,
바로 앞에 보이는 신천은 물은 흘러도 소리는 조용하고 사람소리와 차소리만 요란하다.
옛적에는 물이 많아겠지만 지금은 소리도 조용하다.
대구 신천에는 판관 이서 이서 李漵(1732년~1794년) 본관 덕수, 자는 계호 1759년 문음으로 입사하여 1776년 대구판관에 임명되어 2년 6개월 동안 활동 하였다.
를 기리는 “이공제” 비각이 있으며, 3좌의 비석이 있는데, 舊碑와 新碑 그리고 군수 이범선의 碑로 구성되었다,
“이공제”는 1778년(정조 2년) 대구 판관 이서(李溆)가 사비(私費)를 내어 신천에 제방 10여 리를 쌓아 하천 범람을 막았다. 이의 치적을 기리려고 1797년(정조 21년) 세운 비석이다.
구비는 1797년에 세웠는데 碑가 초라하여, 1808년에 새로운 비석을 다시 세웠다.
먼저 구비부터 소개한다.
비의 전면에는 “이공제(李公隄)”라 되어 있으며, 부러진 것을 접합하였다. 뒷면에는 명문이 있지만 마모와 마멸로 인해 일부 만 보이며, 내용은 다음과 같다.
“判官李 전일주 선생이 지은 대구광역시에 소재한 『조선시대의 송덕비 및 영세불망비』에서 발췌 하였다.
侯諱漵戊戌宰是邦而邑基
聖廟俱
川下下流每■水慮有沉溢之患故侯扵是■
■始防築不日■功■由是■基尊而 廟安
受賜蹟■■■■公議始發刻石以識都公任”
좌측면: 有司 崔■■
우측면: ■巳 正月 日 東西 ■ 立
명문이 마모가 많이 되어 전체적인 것은 확인이 어렵고 새로 세운 비석의 새긴 내용과 차이가 없어 풀이는 하지 않는다.
여기서 재미있는 것은 대구 판관 이서의 이름이다.
이서의 “서(漵 강 이름 . 호남성 (湖南省 ) 서포현 (漵浦縣 ) 동남의 돈가산 (頓家山 )에서 발원하여 원수 (沅水 )로 흘러드는 강이라는 뜻도 있다.
)” 개울, 포구라는 뜻이 있는데, 이름과 같이 비석이 있는 곳은 대구 신천이 흐르는 이서공원에 있고, 이름과 맞게 제방 공사도 하고 비석도 개울가에 있기에 너무나 딱 맞는 이름과 비석의 위치이다.
매년 음력 1월 14일, 수성문화원에서 이서와 이범선을 신천의 호안신(護岸神)으로 받들어 비각 앞에서 享祀 제사를 지내는 것을 말한다.
를 모시며 수해 없기를 기원하고 있다고 한다.
그 다음은 새롭게 세운 비석이다.
碑를 세운 지 10년 만에 다시 세웠는데, 그 이유는 처음 세운 것이 너무 거칠고 간단한 내용만 새겼기에, 다시 세웠다고 새로 세운 碑에서 밝히고 있다.
새로운 碑의 전면은 “이공제”라 되어 있으며 뒷면에 많은 명문이 남아 있으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判官李侯諱漵戊戌宰是邦而邑基聖廟曁邑基俱在新川下流每當潦水
慮有沉溢者久矣侯扵是憂之經始防築不日告功自玆基尊而
廟安且田賦粘來窮春傜役而捐出千金永爲蠲給 深息厚澤可與達城而
終始丁巳堅石免粗■更此刻石建■答■一之誠焉”
東西部 都監役 通德郎 羅成輝 有司 吳命德
閑良 徐百錄 崔■大
公任 幼學 金■源 ■ 南■■
戊辰 五月 日立 (1808년) 參奉 金聖得 前面■■■■■十二歲 書
우측면
石手 金石■
刻手 金福守
木手 金成玉
풀이:
“판관(判官) 이후(李侯)의, 휘(이름)는 서(漵)이고. 무술년(1778년)에 이 고을의 수령으로 계셨는데, 고을의 터와 성묘(聖廟, 문묘)가 모두 신천(新川) 하류에 있어, 매번 장마철이 되면 물에 잠기거나 넘칠 우려가 있은 지 오래였다.
이후(이서 판관)께서 이를 근심하여 제방을 쌓는 공사를 시작하시니 며칠 지나지 않아 완공하였다. 이로부터 (고을의) 터가 높아져 성묘가 평안해졌다.
또한 전세(田賦, 논밭의 세금)가 붙어 내려오면 늦봄까지 요역을 하느라 (백성들이) 곤궁하였는데, (판관께서) 천 금의 재물을 내어주어 영구히 그 비용을 대신하게 하시니 깊은 탄복과 두
터운 혜택이 달성(達城)과 더불어 영원할 것이다.”
정사년(1797년)에 비석 몇 몇 명문이 보이지 않아 풀이가 어색하다.
을 세웠는데 바위가 거칠어지고 벗겨져, 새로운 돌에 글을 새기고 세워 한결같은 정성에 보답하노라."
마지막으로 소개하는 碑는 군수 이범선의 것으로 “이공제” 비각에 있는 3좌의 비석 중 하나이다.
이 碑는 대구 군수 이었던 이범선의 치적을 칭송하기 위하여 세운 것이며, 1898년에 큰 홍수로 인해 판관 이서가 1778년에 신천에 쌓았던 이공제의 하류가 일부 무너지자 전답과 가옥의 피해가 심해 대구 군민들의 동요가 걷잡을 수 없게 되자, 군수 이범선이 수천금의 비용을 들여서 단시일 내에 완공 하였다.
그러지 백성들이 그 功을 기리기 위해 1899년에 비각을 세우고 “이공제” 碑 곁에 나란히 세운 것이다.
비석은 앞과 뒤에 명문이 있으며, 먼저 앞의 것부터 소개한다.
“군수이후범선 이범선(1835년~1905년) 본관은 전주 자는 치원 호는 수서 세종대왕의 다섯째 아들인 광평대군의 후손으로 1879년에 정릉참봉으로 발탁되어 1896년에 대구군수에 임명되었다.
영세불망비(郡守李侯範善永世不忘碑)
天降水灾 하늘에서 재앙의 물을 내렸으나
人能防塞 사람이 능히 이를 막았네.
本築更葺 축대를 쌓고 다시 수리하고
前後一則 앞과 뒤의 제방이 하나가되었네.
魚鼈咸若 물고기와 자라가 하나같이 좋아하고
黎庶安食 모든 백성이 편안하게 먹고 살았네
雙碑匹美 두 비석이 짝이 되어 아름다우니
萬古不泐 오랜 세월이 흘러도 갈라지지 않으리.
그 다음은 후면에 있는 명문을 소개한다.
二去戊戌 李侯諱漵 始築東川 基費功民無能名
昨年戊戌 大決下流 幾至衝成 知郡李侯諱範善
慨然自責 不借民財力 隨毁完築 費用數千金
告功四五日 何其神異 郡人建閣與前侯之碑
並立以表不忘之意
金仁佑 徐相禹
都監董 李景龍
풀이:
무술년이 두 번 지나 ”이서공“이 처음으로 동천에 제방을 쌓았는데, 그곳에 드는 비용과 백성들의 공로는 이루 말 할 수가 없었다.
작년 무술년에 하류 지역에 큰 홍수가 나서 거의 성벽을 무너뜨릴 지경에 이르렀으니, 군수 이범선이 슬퍼하고 스스로 책망하여 백성들의 재물과 노력을 빌리지 않고 제방의 허물어진 곳을 모두 쌓았다.
그 비용이 수 천금이 들었으며, 공사를 시작한 것을 보고한 지 불과 4~5일 만에 일이 마무리되었으니 이 어찌 매우 신묘하고 기이한 일이 아니겠는가.
郡民들이 비각을 세우고 앞의 ”이서공“의 碑와 더불어 碑를 나란히 세워 그 뜻을 잊지 않겠다는 것을 나타내고자 한다.
김인우 서상우
도감동 이경룡
현재 신천의 물줄기는 원래의 것과 달라 옛 물길은 용두산에서 수도산 기슭을 거처 반월당, 신명여고, 달서 천으로 흘러서 금호강에 합류하였는데, 큰 비가 올 때 마다 하천이 범람하여 가옥과 전답 뿐 만 아니라 지금의 교동에 있었던 향교까지 침수되어 주민들의 피해가 극심하였다.
1776년 (정조1년)7월 이서가 판관으로 부임하였고, 부임하진 2년 뒤에 1778년에 사재를 털어 제방공사를 단시일 내에 마쳤다.
이러한 이서 공의 공적을 기리기 위해 주민들은 이판관이 쌓은 제방이 중국 송나라 소식(蘇軾) 송나라 시대의 문인으로 자는 자담(子膽). 호는 동파(東坡)이다. 시(詩), 사(詞), 서예(書藝)에도 능했으며 당송팔대가 중의 한 사람이다. 정치적으로 수많은 고난과 영광을 겪었다. 시골에서 자신이 경작하던 땅을 '동파(東坡)'라 부르고 스스로를 '동파거사(東坡居士)'라 칭했다.
이 항주자사로 있을 때 축조한 제방을 소공제(蘇公堤)라 명명한 것으로 본따 이공제(李公堤)라 하였다.
비각의 向 왼 쪽에 있는 비는 1797년(정조21년)에 세운 것이며, 가운데 비는 왼쪽의 비가 초라하다고 하여 18018년에 다시 세운 것으로, 원래비가 서 있었던 곳은 수성교 서편 제방이었으나 제방 확장공사로 인해 1971년 10월 이곳으로 이건 하였다.----- 비석의 명문과 풀이 그리고 해설의 글은 전일주 선생이 지은 “대구광역시에 소재한 『조선시대의 송덕비와 영세불망비』에서 발췌 하였다.
옥산 이희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