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란분재의 유래
우란분재의 유래를 이렇게 전하고 있는 (우란분경)은 아주 짧은 1권의 경이며
보은봉분경(報恩奉盆經)이라고 최초 번역본이 있었는데 실전(失傳)되었고,
현존하는 것은 서진의 축법호가 한역한 것이며, 한글대장경으로는 신판
161(구판63권)에 수록되어 있다. 우란분경에서는 우란분재의 유래를
이렇게 전하고 있다.
이렇게 내가 들었다.
어느 때 부처님께서 사위국 기타숲 외로운 이 돕는 절에 계실 적에,
대목건련이 비로소 여섯 가지 신통을 얻고 부모를 제도하여 젖 먹여
길러준 은혜를 갚고자 하였다.
즉시에 도안(道眼)으로 세간을 관찰하니, 그의 어머니는 죽어
아귀도에 태어나 음식은 보지도 못하고 피골이 상접하여 있었다.
목건련이 슬피 울며 발우에 밥을 담아 어머니께 갖다 주었더니,
어머니는 발우와 밥을 보자 덥석 외손으로 움켜잡고 오른손으로
밥을 움켜쥐었다. 그러나 밥이 입에 들어가기도 전에 갑자기
불덩이로 변하여 먹지 못했다. 이걸 보고 목건련이 슬퍼 크게
소리쳐 울며 부처님께 달려가 이러한 광경을 자세히 여쭈었다.
부처님께서 목건련에게 말씀하시었다.
“너의 어머니는 죄의 뿌리가 깊이 맺어서 너 한 사람의 힘으로는
어찌할 수 없느니라. 네가 비록 효순하여 이름이 천지를 진동할지라도
천신· 지신· 사마외도· 도사· 사청왕신 들도 어찌하지 못할 것이요,
반드시 시방의 여러 스님 네의 위신력을 얻어야 해탈할 수 있으리라.
내가 이제 너에게 구제하는 법을 말해 주어 온갖 어려운 이에게 모두
근심과 괴로움을 여의고 죄업이 소멸하게 하리라.
시방의 여러 스님 네가 7월 15일에 자자(自恣)를 할 때에 7세(世 )의
부모나 현재의 부모가 액난에 있을 이를 위하여 밥과 백 가지 맛과
다섯 가지 과일과 물 긷는 그릇과 향유(香油)와 초와 평상과
와구(臥具)를 갖추고, 세상에서 제일가는 맛난 음식을 그릇에
담아 시방의 대덕 스님께 공양하여야 할 것이니라.
이 날에는 모든 성현들이 산간에서 선정을 닦거나, 네 가지
도과(道果)를 얻거나, 혹은 나무 밑에 경행(經行)하거나,
육신통이 자재하여서 성문, 연각을 교화하거나, 십지 보살이
방편으로 비구의 모습을 나타내어 대중 가운데 있으면서
모두 한결같은 마음으로 발우와 밥을 받느니라.
청정한 계와 성현들의 도가 구족하니, 그 공덕이 한량없느니라.
누구라도 이 자자하는 승가에게 공양하는 이는 현재의 부모와
7대의 부모와 육친 친속들이 삼도(三道)의 괴로움을 벗어나서
곧 해탈할 것아요, 옷과 밥이 자연히 이르리라. 만일 어떤 사람이
부모가 현존한 이는 백 년 동안 복락을 받을 것이요, 만일 이미
돌아가신 7대 부모는 천상에 태어나되 자재하게 희생하여
천화광(天華光)에 들어가 무량한 쾌락을 받으리라.“
그 때에 부처님께서는 시방의 여러 스님들에게 말씀하시었다.
“모두 먼저 시주 집을 위하여 선정에 들어 마음을 안정한 뒤에 공양을 받으라.
처음 그릇을 받았을 때에는 먼저 불탑 앞에 놓고 여러 스님들이 축원을
마치면 자기 밥을 받을지니라.”
그 때에 목건련 비구와 이 모임의 대보살들이 모두 크게 환희하였으며,
목건련의 슬피 우는 소리도 없어졌다. 이때에 목건련의 어머니는
이 날로부터 1겁 동안 받아야 할 아귀도의 고통을 벗어났다.
그 때에 목건련이 다시 부처님께 여쭈었다.
“저를 낳아준 어머니는 삼보의 공덕의 힘과 여러 스님들의 위신력을
입은 때문이지만, 만일 미래 세상의 불제자들이 효순을 행하는 이도
또한 우란분을 받들어서 현재의 부모와 7세의 부모를 구제할 수 있겠나이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시었다.
“매우 기특한 물음이다. 내가 바로 말하려는 것을 네가 다시 물었다.
선남자야, 만일 비구, 비구니, 우바새, 우바이, 국왕, 태자, 대신, 재상,
삼공(三共), 백관, 만민들이 효자(孝慈)를 행하는 이는 모두 현재의
부모나 과거의 7세 부모를 위하여 7월 15일 부처님께서 기쁘하는 날,
스님들이 자자를 하는 날에 백 가지 맛있는 것을 우란분 안에 담아
시방의 자자하는 스님에게 베풀고 발원하되, 현재의 부모는 수명이
백년이고 병 없으며, 모든 고뇌와 근심이 없게 하고, 7대의 부모는
아귀의 고통을 떠나서 천상이나, 인간 세상에 태어나서 복과 낙이
다함이 없게 할지니라.”
부처님께서는 선남자 선여인에게 말씀하시었다.
“이는 불제자로서 효순을 닦는 이가 생각 생각에 항상 부모를 생각하고
공양하되, 과거 7세의 부모까지 함이니라. 7월 15일은 항상 효순한
마음으로써 낳으신 부모와 내지 7세 부모를 생각하며 우란분을 만들어
부처님과 스님에게 공양하여 부모가 길러주고 사랑하여 준 은혜를
갚는 것이니라. 너희들 일체의 불자는 응당히 이 법문을 만들어 지닐지니라.”
그 때에 목건련 비구와 4백 제자가 부처님의 말씀을 듣고 환희한
마음으로 받들어 행하였다.
한글대장경 161권 불설우란분경
◎우란분절(백중) 영가 오신통
음력 7월15일은 우란분절이다.
우란분절은 하루 동안 지옥문이 열려서 괴로움을 받던 이들이 풀려나는 날이다. 우란분절은 우리들 7대 조상님을 위해 공을 들이고 이 분들의 극락왕생을 축원하는 날이다. 영가는 사람들과 달리 육신이 없기 때문에 영가라 한다. 영가는 다섯 가지 신통이 있다.(오신통)
1. 호명즉지(呼名卽至)이다. 곧 이름을 부르면 바로 온다. 이름 부른 사람이 아무리 멀리 있더라도 그곳으로 온다는 것이다. 육신을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사십구재를 올릴 때 장례를 치르거나 삼우재를 지내고 절에 모실 때 반혼재를 해서 영가를 절에 모시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2. 혜안천리(慧眼千里)이다. 눈으로 천리 밖을 볼 수 있다. 영의 세계는 과거, 현재, 미래, 이 삼세가 하나로 통해 있다. 시간과 공간에 매여 있지 않다.
3. 장벽무애(障壁無碍)이다. 영의 세계에서는 문과 벽과 같은 장벽이 있어도 거침없이 지나다닐 수 있다. 영가가 지나다니지 못하는 것은 부처님의 금강보좌와 어머니의 아기집뿐이다. 우리들은 애기할 때 흔히 남의 사정을 잘 알 때 ‘귀신같이 안다’고 애기한다. 사람이 죽어서 장례식을 할 때는 일체의 모든 생각을 거두고 오로지 극락왕생을 기원해야한다.
4. 지인심명(知人心明)이다. 사람의 마음을 먼저 안다. 과일과 음식을 차례 재를 지내는 것도 중요하지만 지극한 마음으로 조상님을 축원하는 것이 중요하다.
5. 족불이지(足不離地)이다. 살아있을 때 몸뚱아리나 물질세계에 매여 살기 때문에 죽어서도 몸뚱아리나 재산에 끄달리게 된다. 그 결과 귀신으로 이 세상에 남게 된다.
이러한 영가의 특성을 살아있는 사람들은 잘 이해하여 영가의 극락왕생을 기원하는 일에 소홀함이 없어야 한다.
◎기재 할 때의 참고사항
예:
망엄부 해주후인 최00 영가 (최00 복위)
망자모 김해유인 김00 영가 (최00 복위)
남편은 망가부 해주후인 최00 영가 (000 복위)
아내는 망실인 (본관)유인 박00 영가 (000 기부)
아들은 망자 해주후인 최00 영가 (000 기부)
낙태영가, 수자령 영가
망수자 00후인 000 영가 (000 기부)
◎지장보살 발원문
거룩하온 삼보님전 지심으로 귀의하와
다생겁래 내려오며 짓고지은 모든악업
이제청정 삼업으로 지성참회 드리옵고
대비대원 하시옵는 지장보살 대성존전
이마음을 다하여서 지성복원 하옵나니
불상하온 이중생을 애민하게 녀기시사
굽어살펴 주시옵고 가피내려 주옵소서
오직원해 바라건대 이차인연 공덕으로
지장보살 대성존의 자비하신 가피력에
무시이래 지은죄업 모두소멸 되여지고
다생겁래 맺친원결 모두풀려 다해지며
사대고루 순화하여 항상무병 건강하고
육근모두 청정하여 평생장애 없어지며
일체악업 소멸되여 모든재앙 멸해지고
일체마장 제해저서 모든일에 형통하며
복덕날로 더해저서 부귀공명 이뤄지고
횡액사를 받음없이 수명장원 하여지며
일체흉사 전하여서 모든경사 이뤄지고
일체악사 변하여서 길한일이 되여지며
백사만사 모든일이 뜻과같이 이뤄저서
일체모든 원하는바 모두성춰 되여지며
모든권속 화목하여 가내항상 편안하고
동기친척 모든사람 모두도와 위해주며
모든원결 일체악연 모두멀리 여여지고
좋은인연 선한반연 항상만나 도와지며
시절항상 잘되여서 년년풍년 이뤄지고
병난질병 남이없이 나라항상 편안하며
신심날로 더하여서 무량공덕 이뤄지며
임종시가 다다라선 모든성현 도움입어
일체병고 모든마장 모두소멸 되여지며
모든산란 제해저서 신심안정 이뤄지고
바른생각 일념으로 아미타불 염을하여
서방정토 극락세계 결정왕생 이루워서
아미타불 친근하와 무상불도 이뤄지다.
나무시아본사석가모니불 3편
나무대원본존지장보살마하살 3편
◎영가 축원문
이차인연 공덕으로 삼보님의 가피력에
영가다생 지은죄업 모두소멸 되여지고
속히해탈 이루워서 악도기리 여여지며
모던고난 받지않고 무상락을 받어지고
사바세계 삼게고해 기리멀리 여이여서
서방정토 극락세계 하루속히 왕생하와
아미타불 친견하여 무생인을 깨치옵고
생사기리 여이여서 열반락을 얻어지다 .
나무아미타불 (3번) 반배
◎임종에 갖추어야 할 주의 사항(지혜로운 배와 노)
부처님께서 입적한 승려를 화장하도록 규정하신 것은 본디 그로 하여금 산산이 부서질 가짜 형체를 떠나, 진실하고 영원한 법신(法身)을 증득(證得)하도록 가르치시기 위함이었소. 그래서 부처님께서 다비(茶毗)의 규정을 세우신 이후,승려 대중은 이를 항상적인 법도로 받들어 지켜 왔소.
그러나 법과 도가 쇠퇴하고,오랜 세월이 지나면서 폐단이 생겨나서, 지금 불자들은 경솔하게도 화장하는 일을 부처님의 법제에 따르지 않고 있소, 병든 이가 숨이 끊어 지려고 하는 임종 때에는,부랴부랴 옷을 갈아 입히고 몸을 움직여 감실(龕室:본래 탐 아래의 방,불상을 모셔두는 석실인테, 여기서는 시신을 안장하는 화장용 좌관(坐棺)을 가리킴)에 하루 이틀 넣어 두었다가 화장을 하니, 정말로 부처님 법에 크게 어긋난다고 말할 수 있소.
부처님께서 사람에게 여덟 가지 인식(팔식八識)이 있다고 말씀하셨으니, 곧 지식(知識:지각)이오.앞의 다섯 인식 전오식(前五識)은 눈(안眼), 귀(이耳), 코(비鼻), 혀(설舌), 몸(신身)이고, 제6식은 의식(의意: 뜻)이오, 제7식은 말나식(末那識)으로 전송식(傳送識)이라고도 하고, 제8식은 아뢰야식(阿賴耶識)으로 또한 함장식(含藏識)이라고도 부르오.
무릇 사람이 생겨날 때는, 제8식이 가장 먼저 오고,제7,6,5식이 차례로 뒤따라 온다오,그리고 죽을 때는,이 제8식이 가장 뒤늦게 떠나고, 나머지 인식은 역순으로 차례대로 떠나간다오.무릇 제8식은 곧 사람의 영적 인식 영식(靈識)으로,세속에서 흔히 말하는 영혼(靈魂)이라오.
그런데 이 제8식은 신령스러워, 사람이 어머니 뱃속에 수태(受胎)될 때에, 맨 먼저 찾아온다오. 그래서 어머니 뱃속에 자리잡은 태아가 살아 꿈틀거리는 것이라오. 사람이 숨이 끊어져 죽은 다음에는, 곧장 떠나가지 않고, 반드시 온몸이 다 차갑게 식기를 기다려, 따뜻한 기운이 조금도 남아 있지 않은 뒤, 비로소 이 제8식이 떠나간다오, 제8식이 떠나간 다음에는, 터럭 끝만큼도 지각(知覺)이 없소.
그래서 만약 몸에 한 곳이라도 따뜻한 기운이 조금만 있다면, 제8식은 아직 떠나가지 않은 것이오, 이때 몸을 만지고 움직이면 그 고통을 알아느끼기 때문에, 옷을 갈아입히거나, 손발을 펴고 굽히거나, 몸을 옮기는 따위의 일을 해서는 결코 안 되오, 만약 조금이라도 만지고 손댄다면 그때 고통은 가장 참기 어렵다오, 단지 입으로 말할 수 없고 몸을 움직일 수 없기 때문에, 표현하지 못하는 것 뿐이라오.
불경을 찾아보면 , 목숨과 따뜻한 기운과 인식 세 가지는 , 항상 서로 떨어지지 않는다고 적혀 있소. 만약 사람 몸에 아직 따뜻한 기운이 남아 있다면 인식도 존재한다는 뜻이고,인식이 존재하면 목숨도 아직 끝나지 않은 것이오, 옛부터 죽어다가 사흘 또는 닷새나 지나 다시 살아난 사람이 많은데, 역대 기록을 찾아 보면 하나하나 상세히 확인할 수 있소.
유교에서도 죽은 뒤 사흘 만에 대렴(大殮: 시신을 관 속에 넣고 뚜껑을 덮어 못 박는 일)의 예법을 행하는데, 이는 가족들이 사모와 비애의 감정으로, 만에 하나 혹시라도 살아나지 않을까 바라는 마음을 배려하기 때문이오, 우리 불교의 승가에서는, 비록 되살아나기를 바라는 것은 아니지만, 그러나 그가 몹시 고통스러울 수 있음을 염두에 두지 않을 수 없소, 부랴부랴 움직이고 옮기거나 변화시킨다면, 자비심은 과연 어디에 있겠소?
옛말에 "토끼가 죽으면,여우가 슬퍼한다"는 속담이 있소. 짐승 같은 미물도 비슷한 종류(처지)를 서글퍼함이 오히려 이와 같거늘 하물며 사람이고, 더구나 같은 불자인 우리들이 그러하지 않을 수 있겠소? 그리고 사람의 감정이란 게, 고통이 극도에 이르면 성질을 내기 마련이요.
불경에 보면, 아기달왕이 불탑과 사원을 세워 그 공덕이 매우 크고 높았는데, 임종에 시중들던 신하가 부채를 들고 있다가 왕의 얼굴에 떨어뜨리는 바람에, 왕이 고통스러워 성질을 낸 까닭에,죽어서 그만 뱀의 몸으로 떨어지고 말았다는 기록이 실려 있소,물론 생전의 커다란 공덕으로 말미암아, 나중에 사문(沙問: 수행스님)을 만나 자신에게 들려주는 설법을 듣고,뱀의 몸을 벗어나 천상에 올라갔다고 하오.
이로 미루어 보건대, 죽은 이의 인식이 완전히 떠나가지 않은 상태에서, 옷을 갈아 입히고 옮기거나 화장을 하면, 그로 하여금 고통스러워 성질을 내게 함으로써, 더욱 타락하도록 조장하는 결과가 되겠소, 잔인한 마음으로 이치를 어기고, 일부러 참혹한 독약을 베풀려는 자가 아니고서야, 어찌 이런 짓을 할 수 있겠소? 내가 죽은 이와 무슨 원수를 지고 무슨 한이 있다고, 선량한 마음으로 악한 인연을 맺으려고 하는지, 정말로 잘 생각해야 하오.
만약 이것이 눈에 보이지 않는 아득한 일이라, 증거를 댈 수 없다고 말하는 자가 있다면, 그는 경전에 기록된 내용도 믿을 수 없단 말이요? 지금까지 불어난 각종 폐단은, 결국 산 사람들이 죽은 이의 고통을 불쌍히 여기지 않고, 단지 신속하게 일을 끝마치려는 생각에서, 몸의 따뜻한 기운이 식어감을 자세히 살펴 볼 여유를 갖지 않았기 때문이오. 이러한 습관이 반복되어 일상처럼 되었기 때문에, 설령 이러한 이치를 언급하는 자가 있더라도,도리어 어리석다고 비웃음을 당하고, 죽은 이의 고통은 더욱 펴지기가 어려쁘게 되었소.
오호라! 세상에서 가장 고통스러운 일은 태어남과 죽음 밖에 없소. 태어남은 산 거북이의 등가죽을 벗기는 것과 같고, 죽음은 산 게를 끓는 물에 집어 넣는 것과 같다오. 여덟 가지 괴로움 (八苦)이 한꺼번에 번갈아 지지고 볶아댈 때, 그 아픔을 이루 다 말할 수 있겠소 ?
바라건대,환자를 보살피고 시중드는 모든 사람들은 세심하게 주의하고 신경쓰되, 특히 환자와 쓸데없이 한가한 잡담을 나누어, 그의 마음을 어지럽게 흩어 놓아서는 절대로 안 되오, 어수선하게 떠들어대거나 구슬픈 심기를 내색하지 말아야 하오. 오직 환자에게 몸과 마음을 모두 놓아버리고, 한마음으로 염불에 집중하여 극락 왕생을 발원하도록 권해야 마땅하오.
또한 자신이 스스로 염불 조력(助念)하여, 환자가 그 염불 소리를 듣고 마음 속으로 따라서 염송하록 이끌어야 하오, 만약 재력이 넉넉하다면, 여러 스님들을 초청하여,
조를 짜서 번갈아 염불 소리가 늘 염송하기만 한다면, 틀림없이 부처님의 자비 원력의 가피를 받아 극락 왕생할 것이오.
만약 재력이 없다면,가족 모두 함께 마음을 내서 직접 염불 조력함으로써, 최후의 연분을 잘 매듭짓도록 하여야 하오.사후에 처리할 일들일랑, 행여라도 환자 앞에서 발설하여서는 절대로 안 되오, 다만 목탁이나 요령의 박자에 맞춰 큰 소리로 염불하여, 한 글자 한 글자가 또렷또렷 환자 궛속에 들어가고, 환자 마음이 늘 염불에서 벗어나지 않도록 해야 하오. 소리가 둔탁한 목탁은 임종시 염불 조력에 결코 써서는 안 되오.
환자의 몸은 앉든지 눕든지,그의 자세에 자연스럽게 맡기고, 절대로 움직이거나 옮기지 말며,모두 염불에만 전심 전력하시오. 숨이 끊어지고 온몸이 싸늘하게 식어, 정신 의식이 완전히 떠나가기를 기다린 후, 다시 두어 시간은 지나야, 바야흐로 몸을 씻기고 옷을 갈아 입힐 수 있소, 만약 몸이 싸늘해져 딱딱하게 굳은 경우에는, 뜨거운 물로 씻기고 뜨거운 수건을 팔이나 무릎 관절에 덮어 씌우면, 한참 지나 다시 부드러워진다오. 그 때 감실안에 안치해도 늦지 않소.
할 일이 모두 끝나면, 더욱이 계속 염불해야 하오,독경이나 참회 예불과 같은 다른 불공은 그 어느 것도 염불만큼 커다란 이익을 가져다 주지 못하오, 출가나 재가를 막론하고,모든 권속들이 한결같이 이에 따라 실행 한다면, 죽은 이나 산 사람 모두큰 이익을 얻게 되리라.
그리고 우리 부처님께서는 열반하실 때, 본래 오른쪽 옆구리를 땅바닥에 대고 누우셨기 때문에, 그 자태 그대로 관에 넣어 다비(茶毗:화장)하였소, 그러므로 후대 사람들도 각기 자연스러운 자세에 따라서, 앉아서 입적한 사람은 감실에 안치하고, 누워서 열반한 사람은 관에 안치하는 것이 더 합당할 것이오. 그러나 지금 사람들은 오랜 습관이 풍습으로 굳어져, 아마도 그렇게 여기지 않을 것이니, 또한 각자 편리한 대로 행하도록 그 뜻에 맡기면 되오.
사람이 죽은 후에 나타나는 좋고 나쁜 모습과 감응은, 원래 사실상의 근거가 있소, 좋은 곳(선도善道)에 나는 사람은, 몸의 열기가 아래로부터 위로 올라가오, 그리고 나쁜곳(악도惡道)에 떨어지는 사람은, 열기가 위로부터 아래로 내려가오, 온 몸이 다 식은 뒤, 마지막 열기가 정수리(頂)에 모이면 성도(성도聖道:극락세계)에 올라가고, 눈(眼)에 모이면 천상(천도天道)에 생겨나며, 심장(心)에 모이면 인간(人道)에 환생하고, 배(복腹)에 이르면 아귀도(餓鬼道)에 떨어지며, 무릎에 이르면 축생(畜生道)으로 태어나고, 발바닥에 몰리면 지옥(地獄道)에 떨어진다오.
(옮긴이 진성50합장)
◎사람은 왜 죽음을 두려워하는가.
김동민· 서울시립대학교 명예교수, 참여불교재가연대 고문
먼저, 이 문제를 거꾸로 생각해 보자. 즉, 죽음이 전혀 두렵지 않은 경우를 말이다. 가령 그것이 잠자는 것 정도로 인식될 경우, 우리 인간들의 형태는 어떻게 달라질까. 우선 생각되는 것으로 자살률이 엄청나게 높아질 것이다. 종족 보존이 아예 안 될 정도로···.
이 세상은 고해(苦海)다. 성장기 내내 시달려야 하는 그 지긋지긋한 과외공부와 입학시험 준비, 한정된 여건 속에서 남들과 치열하게 경쟁하며 나와 권속들의 의식주를 확보하는 데서 더 나아가 오만 가지의 기타 욕구를 끊임없이 충족시켜야하는 삶, 성취와 탐욕 실현을 향한 몸부림, 자식들 뒷바라지와 노부모 봉양의 압력, 그러면서 사회 및 집단의 틀 속에서 겪어야 하는 수많은 갈등· 알력· 좌절, 질병과 신체 기능의 쇠퇴···. 이런 것들로 가득 찬 인생항로가 어찌 고해가 아니겠는가. 그리하여 엄청나게 많은 인간들이 그러한 도전과 고를 못 이겨, 인생항로의 초입 내지는 중도에서 남은 인생을 포기하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두려움’은 종족보전, 또는 그 이전에 개체(個體)를 확실하게 보전시키기 위한 정신적 장치인 것이다. 개체 또는 개개인이 그 존속(삶)을 쉽게 포기하지 못하도록, 자연이 DNA를 통하여 뇌의 신경체계 속에 박아놓은 공포장치의 다름 아니다. 그것은 멀게는 35억 년 전 시생대(始生代) 이래로, 그리고 가깝게는 250만 년 전 최초의 인류조상이 출현한 이래로 기나긴 진화의 과정을 거쳐 자연이 박아 놓은 단단하고도 확실한 장치인 것이다. 여담이지만 그러한 공포장치가 없었더라면, 인간은 지금과 같이 찬란한 고도의 문명을 이룩하지 못하고, 짐승보다 별로 나을 것이 없는 삶을 여태껏 살아왔을 것이다. 왜냐하면, 문명이란 지난(至難)한 어려움을 견디며 노력해야만 이룩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 인간에게 개체란 ‘나’를 뜻한다. 그런데 이 ‘나’는 신체의 면역체계(免疫體系)와 신경체계(神經體系)로 구성돼 있다고 한다. (서울대 수의과대학 우희종 교수, 면역학 2008) 즉, 면역체계는 ‘신체적 자기’를 보전하기 위해서 그것을 질병 및 외부로부터 침입하는 여러 병원체로부터 보호하고, 장기이식을 행할 때에는 어느 특정장기를 받아들일 것인지 아니면 거부할 것인지를 결정하기도 한다. 한편 신경체계는 ‘정신적 자기’의 바탕이 된다고 한다. 그러면서 이 두 체계는 전체적 ‘자기’의 보전을 극대화하기 위하여 서로 협력한다.
이 두 체계 중에서 면역체계가 파괴되면 ‘신체적 자기’만 죽는 것이 아니라 ‘정신적 자기’도 함께 죽는다. 왜냐하면 ‘정신적 자기’는 신체의 일부인 신경체계가 만든 것이기 때문이다. 반대로 신경체계만 파괴될 때에는 ‘신체적 자기’만이 사는 까닭에 ‘나’는 치매 상태 또는 식물과 같은 상태에서 존속하게 된다. 그리고 이 두 체계도 어찌 할 수 없는 초월적인 것이 있은즉슨, 인간의 생로병사가 바로 그것이다.
위의 논거로 미루어 볼 때, 그리고 다른 전문가의 연구에 의하면 (경대의대 강병조 교수, 정신의학 2008) ‘마음’은 신경체계가 그 정신기능을 통해서 만든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그리고 그 ‘마음’이 다시 정신적 ‘나’를 만들면서 몸의 행태를 관리하고, 더 나아가서 그것이 외부와의 일체 경쟁에서 우위(優位)를 점하며 존속하도록 작용하고 있는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경(經)에 의하면, ‘마음’은 색· 수· 상· 행· 식 (色受想行識)을 관장하는 다섯 가지
오온(五蘊)으로 구성돼 있다. 즉, 그
첫째로 물질적 현상을 감지하는 색온이 있고,
둘째로 느낌의 수온,
셋째로 생각의 상온,
넷째로 의지를 행사하는 행온,
다섯째로 인식작용을 하는 식온이 있다.
여기까지가 일반적 마음을 구성하는 다섯 가지 요소다.
관련 론(論) 해설에 의하면,(성광 스님 지음, 유식30송, 불광출판부2003) 눈· 귀· 코· 혀· 몸으로 감지하는 오감각식(五感覺識)과 육식인 의식(意識)이 있고, 그 뒤에 이 육식까지를 총괄하면서 나를 ‘나’ 위주로 행동케 하는 제7식 마나식(末那識)이 있고, 그 뒤로 모든 경험(행위) 종자를 저장하는 제8식 아뢰야식(阿賴倻識)이 있다고 한다. 그리고 ‘마음’은 제8식~제7식~제6식~5감각식의 역순으로 작용 또는 반연(攀緣)한다고 한다. (심식(心識) 활동에서 취해야 할 인식대상을 취하는 기능) 한편 육신이 소멸될 때, 제7식까지는 더불어 소멸되지만 제8식은 업식(業識)으로 남아 다음의 생으로 이어진다.
경에 의하면, 본시 나란 없다. 면역체계의 ‘나’인이 신체 또는 육신은, 사바세계의 물질들이 인연을 따라 잠시 모인 것에 불과하다. 육신의 신경체계가 만든 이 ‘마음’도 다 빈 것이고, 다만 업 식인 제8식만이 블랙박스처럼 잠복하고 있을 뿐이다. 그리고 어떤 ‘나’든, 오늘의 나는 어제의 나가 아니다. 10년 전의 나는 오늘의 나를 있게 한 인(因)일 뿐이고, 그것이 그간의 환경 또는 연(緣)을 만나 오늘의 나를 만들었다. 인간들은 그러한 나의 소멸(죽음)을 왜 그다지도 두려워하는가. 그러면서, 사후의 ‘영혼(靈魂)’ 존속을 왜 바라는가. 그 까닭은 위에서 누누이 밝힌 바와 같이, 뇌의 신경체계 또는 ‘마음’ 속에 박힌 죽음에 대한 공포장치가 너무나도 단단하고 확실하기 때문이다.
여담이지만, 나가 없으므로 천당도 지옥도 없다. 나가 없고 영혼도 없는데, 무엇이 천당으로 지옥으가겠는가. 다만 업식만이 내생으로 넘어 가면서 그 업의 모습대로 그 인간을 환생시킬 뿐이다. 필자에게는 신비스런 체험이 있다. 이른바 ‘초월’. 그것은 불교와 연이 닿기 한참전인 1975년 만44세 때에, 그 전까지 습성(習性)으로 해온 기나긴 명상이 있은 후에 왔다. 그 초월 상태에서, 필자는 ‘마음’이 사라짐과 함께 나가 없음을 확실하게 체험한 바가 있다. 주변에서 죽음에 관한 논쟁과 무아(無我)에 대한 시비가 끈이지 않는 것을 봐 왔다. 그래서 앞의 체험과 그간에 공부해서 얻은 지식을 바탕으로, 그리고 얕은 식견을 무릅쓰고, 나름대로의 견해를 감히 이 글로 나타내게 됐다. 필자의 견해에는 오류가 있을 수 있다. 현명하신 여러 도반들께서 그것에 관하여 가르침 주시기를 기대한다.
마하반야바라밀.
참여불교 2008. 10호
◎법륜 스님 불생불멸
죽음 앞에서 깨닫는 불생불멸의 이치
우리의 생명은 영원합니다.
생명에는 절대적인 삶과 죽음이 없습니다. 마치 해가 동쪽에서 서쪽으로 진다고 하지만 해는 하늘에서 언제나 빛나고 있는 것과 같습니다. 다만 지구에서 해가 보이는지 아닌지에 따라 해가 뜨고 진다고 착각하는 것처럼 사람이 태어나고 죽는 것도 역시 그렇습니다.
태어남도 죽음도 본래 없고
우리가 이 방에만 한정해서 보면 어떤 사람이 방문을 열고 들어올 때 ‘한 사람이 생겼다.’ 하고, 방문을 열고 나가면 ‘한 사람이 없어졌다.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나 그 방 밖에까지 이어서 보면 그 사람은 생긴 것도 없어진 것도 아닙니다. 바로 그 옆에 있는 것이지요. 그런 것처럼 어머니 뱃속에서 나오기 이전에도 나는 있었고, 나와서도 있고, 죽어서도 있습니다.
이 생명의 불생불멸하는 이치를 알게 되면 태어난다고 하지만 태어나는 것도 아니며 죽는다고 하지만 죽는 것도 아닙니다. 우리가 태어났다고 말하는 건 이 세상에 ‘왔다’는 것이며, 죽었다는 것은 저 세상에 ‘갔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래서 태어난다고 기뻐할 일도 아니고 죽는다고 슬퍼할 일도 아닙니다. 태어남도 죽음도 본래 없고 다만 윤회전생(輪廻轉生)할 뿐입니다.
영가가 이 이치를 안다면 죽으려야 죽을 수 없고, 태어나려야 태어 날 수가 없습니다. 언제나 이 생명에너지는 불생불멸해서 영롱한 그대로입니다. 그러나 어리석은 사람들은 자기 눈에 보이는 것만으로 자기가 아는 세계에 집착해서 태어나고 죽는다고 애기를 하지만 그것은 생명의 실상을 무르는 어리석은 사람이 하는 소리일 뿐입니다.
생명의 본래 입장에서 보면 불생불멸하기 때문에 우리는 울 일도 웃을 일도 없어요. 옷 갈아입는 것이 울 일도 웃을 일도 아닌 것처럼 그냥 일상생활처럼 허허로운 겁니다. 이걸 만약 영가가 깨쳐서 알게 되면 몸을 버렸다는 것에 전혀 슬퍼하지 않을 겁니다. 우리 인간이 100살 살면 오래 산다지만 생명 본래의 입장에서 보면 오래 사는 게 아닙니다.
하루 사는 하루살이에게는 오후 4시에 죽는 것과 오후 5시, 6시에 죽는 것 사이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지만 사람이 볼 때는 마찬가지지요. 개미에게는 7일 살지, 8일 살지, 9일 살지 그것이 대단히 중요하지만 우리 보기엔 매한가지죠. 구더기가 작은 똥 덩이를 갖거나 큰 똥 덩이를 갖는 건 우리 인간이 보기에는 별로 중요하지 않지만 그 작은 벌레에겐 아주 큰일이란 말입니다. 그것처럼 우리가 보기에 사회적 지위의 높고 낮음, 재물의 많고 적음이 굉장히 중요한 것 같지만, 저 생명 본래의 세계에서 볼 때는 참으로 하잘 것 없는 일입니다. 그래 이 하잘 것 없는 것에 집착해서 괴로워해서 되겠느냐 하는 것입니다.
영가를 위해 베풀고 참회해야
이제 영가는 집착을 놓아야 합니다. 만약 영가가 누군가를 아직 사랑하거나 미워하기 때문에 산 사람 곁을 계속해서 떠나지 못하고 있으면 길 떠나지 못하는 영가는 새 생명으로 태어나지 못하고 새 몸을 받지 못합니다. 헌 옷은 벗었는데 새 옷을 입지 못하니 벌거숭이로 있게 되는데, 바로 허공의 무주고혼(無住孤魂)이 됩니다.
그래서 살아 있는 자식에게 가까이 오면 자식이 큰 사고가 나거나 큰 병치레를 하게 되는 겁니다. 현대 의학으로 어떻게 설명할 수 없는 병 때문에 어디 가서 물어 보면 조상의 영가 때문에 그렇다는 애기를 듣는 경우가 있습니다. 영가가 좋은 마음으로 자식에게 집착해도 살아 있는 사람에게는 재앙이 되고, 또 원한을 품고 따라다녀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렇게 좋아서든 미워서든 영가가 살아 있는 사람 곁을 떠나지 않으면 다 좋지 않은 결과가 나타납니다.
이 도리를 꼭 깨달아야 합니다.
그리고 재 지내는 자식들, 살아 있는 사람들은 영가를 애타게 찾아, 울고 부르면 가야 될 사람이 가지를 못 합니다. 가지 못하고 되돌아오니까 무주고혼(無住孤魂)이 됩니다. 그러니까 ‘안녕히 가십시오.’ 하는 기쁜 마음으로 갈 사람은 잡지 말아야 합니다. 그래서 수행하는 사람들은 장례하는 집에서 죽은 사람을 앞에 두고 울고불고하는 모습을 보면서 ‘이 집 사람들이 수행이 덜되어 복은커녕 재앙이 오겠구나.’ 이렇게 아는 겁니다.
또 죽은 사람이 한 살이든 다섯 살이든 열 살이든 백 살이든, 나이가 많든 적든 먼저 감을 마음 아파하며 울고불고 할 게 아니라, 몸을 이미 버렸으니 잘 떠나가게 천도해줘야 합니다. 영가를 위해 베풀고 참회해야 합니다. 한편 영가는 몸을 벗고 식(識)이 영롱한 이때, 법문을 듣고 깊이 깨달아야 합니다. 눈으로 보아서가 아니라, 귀로 소리를 들어서가 아니라, 마음과 마음이 서로 오가는 중에 이 법문을 듣고 크게 깨달아야 합니다.
탐욕심과 진심
오늘 우리가 이렇게 태어남과 죽음이라는 고해(苦海)를 되풀이 하는 건 인연 과보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육도를 계속 돌게 하는 업을 짓는 것은 내 것이다. 네 것이다 하는 ‘탐욕심’이 그 첫째 원인입니다. 이 세상의 어떤 물건도 본래부터 내 것이라고 정해진 게 없습니다.
태어날 때 가져온 것도 죽을 때 가져가는 것도 아닙니다. 이 세상에 그냥 있을 뿐인데, 내 생각으로 ‘내 것이다. 네 것이다.’ 라고 마음에 새겨 두어 갖은 탐욕을 일으킵니다. 본래 내 것 아닌 줄을 알아 베푸는 마음을 냄으로서 모든 탐욕을 끊어야 합니다.
그리고 내 생각 판단이 옳다고 하는 ‘진심(瞋心)’이 그 두 번째 원인이 됩니다. 내가 옳다는 이 생각 때문에 우리는 언제나 성내고 짜증내고 그래서 남을 미워하게 됩니다. 만약 남편이나 자식, 부모나 친구에게 무언가 섭섭한 것이 있어 그것이 가슴에 맺혀 내가 원한을 품었다면, 그 섭섭함을 만든 것은 부모가 그렇게 한 것도 아니고, 자식이나 남편 또는 친구가 그렇게 한 것이 아니라 바로 ‘내 생각이 옳다’고 고집한데서 생긴 감정의 찌꺼기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나 이 세상에는 본래 옳고 그른 것이 없습니다. 사람마다 생각이 다를 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옳고 그른 것이 없는 줄을 알게 되면 모든 원한은 흔적 없이 사라지게 됩니다. 그리고 과거의 잘못을 깨달아 뉘우치고 고치는 참회(懺悔)를 함으로써 내 옳다는 생각을 버려서 이 어리석은 괴로움의 바다에서 바로 해탈해야 합니다.
49재를 지내는 의미
이것이 오늘 천도 법문하는 근본 뜻임을 영가와 제자들은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 특별히 49재를 지내는 이유는 부처님이 말씀하신 경전에 근거해서입니다. ‘정토삼부경’에는 ‘아미타경’, ‘무량수경’, ‘관무량수경’이 있습니다.
그 경을 보면, 그 어떤 사람도 죽기 전에 간절한 마음으로 아미타불에 귀의하는 ‘나무아미타불’을 열 번만 부르면 누구나 다 저 극락정토에 태어날 수 있다고 합니다. 나쁜 짓을 아무리 해도 죽을 때 간절히 아미타불을 열 번만 부르면 되느냐고 묻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데 나쁜 짓을 평생 하던 사람이 목숨이 다할 때 갑자기 부처님이 잘 불러질까요? 불러지지가 않습니다. 죽을 때 한 번 선한 마음을 내면 누구든 극락세계에 갈 수는 있지만, 그런데 죽을 때는 급할 때라 선한 마음이 잘 안 납니다.
보통 때의 우리 모습을 보면 기분 좋을 때 선한 마음을 내는 게 됩니다. 아주 선한 사람도 몸이 아프거나 괴로우면 선한 마음이 잘 안 나옵니다. 성질을 부립니다. 그런데 사람이 갈 때는 몸이 많이 아프고 마음이 바빠서 신경이 아주 날카로워 집니다. 그러니 보통 때 툭하면 성질내고 짜증내고 못된 생각하던 사람이 그 급한 상황에서 좋은 마음을 내기 어렵습니다.
그러니까 평소에 누가 욕해도 ‘나무아미타불’, 화나게 해도 ‘나무아미타불’, 내 재물 가져가도 ‘나무아미타불’, 몸이 아파도 ‘나무아미타불’ 할 정도로 연습이 되어야 숨이 끊어질 때 그 소리가 나오지, 그렇게 안하면 절대 안 나옵니다. 아무튼 죽기 전에 아미타불 열 번만 간절히 부르면 누구나 극락세계에 태어납니다.
우리 불자들이 평소에 그렇게 열심히 집중해서 염불하다가도 돌 뿌리에 탁 채어 넘어지면 그 순간 ‘엄마야!’ 이래요. 어릴 때부터 엄마를 불렀던 습관이 나오는 겁니다. 그런데 돌 뿌리에 채여 넘어지는 것보다 더 급한 때가 죽음에 즈음해서입니다. 그때 언제 관세음보살이 나오고 아미타불이 나오겠어요? 그러니 평소에 부지런히 정진해야 합니다.
기쁜 마음으로 재를 지내며
누구라도 마음을 맑게 하여 자기를 관찰하고 정진하는 사람은 목숨이 딱 끊어지면 바로 왕생극락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헌 옷을 벗고 새 옷으로 갈아입는 것처럼 거기엔 시간이 하나도 안 걸립니다. 그렇게 되려면 일심으로 나무아미타불을 부르며 정진해야 합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렇게 수행하지 못합니다.
일반 사람들이 죽을 때, 나무아미타불을 간절히 부르면 죽은 지 49일 만에 극락세계에 왕생한다고 해서 49재를 지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49재는 생명이 새로운 생명으로 나아가도록 하는 생명의 흐름을 순조롭게 하는 하나의 의식 절차인 것입니다.
근본은 어디까지나 한 마음을 바꾸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로 깨달으면 이런 절차가 필요 없습니다. 그게 안 되기 때문에 이런 의식을 하는 것이지요. 그래서 재를 지낼 때는 절대 울거나 슬퍼해서는 안 됩니다. 바로 영가를 위해 기쁜 마음으로 가시게 하고 좋은 과보로 다시 돌아와서 기쁜 마음으로 만나서 고통 받는 중생을 함께 구제하는 보살행을 하자는 마음으로 재를 지내야 합니다.
그래서 지극 정성으로 기도하여 영가를 천도시키면 그 공덕의 대부분은 천도를 하는 사람에게 돌아갑니다. 왜냐하면 베푸는 사람에게 공덕이 있고, 기도하는 사람에게 공덕이고, 법문 듣는 사람에게 공덕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깊은 뜻을 알아서 정성을 쏟아 기도해야 합니다.
영가여! 당신의 본래 면목은 무엇인가?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코로 냄새 맡고, 혀로 맛보고, 손으로 만져 보고, 머리로 알음알이를 하면서 ‘나’다, ‘나의 것’이다, ‘나의 생각이 옳다’고 지금까지 ‘나’를 고집해 왔는데, 이제 보지도 못하고, 듣지도 못하고, 냄새 맡지도, 맛보지도, 감촉하지도 못하고 알음알이도 하지 못하는 지금에 이르러 영가여! 무엇이 ‘참 나’ 인가? 영가여! ‘영가의 본래면목‘ 은 무엇인가?
이걸 깨우쳐야 해탈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한평생을 살아도 허깨비 같은 인생을 사는 겁니다. 이제까지는 이름이 나 인줄 알고 이름에 집착했습니다. 직장이 나 인줄 알고, 사장이라는 직책이 나 인줄 알고 직장과 직책에 집착했습니다. 이 허망한 육신이 나인 줄 알고, 재물이 나인 줄 알고 그것에 집착해서 우리는 헛된 인생을 살아왔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나가 아닙니다. 이제 나의 본래면목을 찾아야 영생불멸하는 생명의 실상을 보게 됩니다.
영식(靈識 )에게 남은 애착심(愛着心)을 씻어 드리는 것입니다. 사람의 영식은 육신을 떠나면 가장 먼저 생전에 익힌 애착심을 쫓아가게 되고 따라서 그 익힌 업력에 끌려 다음 몸을 받아나서 한없는 세상에 길이 윤회의 길을 돌게 됨으로 윤회에 끌려 다니지 않으려면 오직 생전에 익힌 애착심을 버려야 하는 것입니다.
애착심이란 마음이 무엇인가에 묶여있거나 그것 때문에 떠나지 못함을 말합니다. 예컨대 마음이 재물에 묶여 재물을 떠나지 못하면 명예의 애착심에 걸려 있는 것이고, 마음이 처자 권속에 걸려 처자와 권속을 떠나지 못하면 처자권속에 걸려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인간의 애착심은 그 수를 헤아릴 수가 없어서 애착심의 그물에 걸리기 쉬운데 이 애착심이 자리 잡게 되면 영식이 애착심의 대상을 멀리 떠나지 못하고 주위를 맴돌다가 그만 선택의 여지가 없어져 아무렇게나 악도에 몸을 맡기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애착심을 녹여 주거나 덜어주기 위해서 천도 재를 지내주는 것입니다. 애착심은 그 기운이 맑지 못하고 탁해서 형상 없는 영혼이지만 영혼도 무게가 있어 높이 뜨지 못하여 시야의 영역이 좁아져 아무렇게나 몸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듯 한번 몸을 잘못 받게 되면 다시 새 몸을 받을 기회가 쉽지 않으므로 그 후회 한탄이 이루 말로 다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영식(靈識)을 위해 희사(喜捨)와 불공(佛供)으로 죽은 이의 명복(冥福)을 지어 드리는 것입니다.
이것은 영식의 앞길에 복의 길을 열어주는 것으로 불법의 세계는 자업자득과 인과응보 법칙으로 즉 진리는 영원한 것이며, 지은대로 받게 되는 것입니다. 영식을 위해 영식의 이름으로 재물을 희사하고 삼보에 공양하고 특별한 사업을 해 드리는 것은 모두 영식의 앞길에 큰 복이 되게 하기 위함입니다.
사람이 잘 살려면 두 가지 요건을 갖추어야 하는데 두 가지란 지혜와 복덕입니다. 지혜만 있고 복이 없어도 안 되고 복만 많고 지혜가 없어도 안 될 일입니다.
영식을 위하여 희사로 복을 지어줘야 한다고 하면 - 진리를 모르는 사람은 종교가 영식을 미끼로 금전을 취한다고 오해를 하는 수가 있는데 - 그러나 이는 성인이 진리를 깨쳐 영혼과 진리세계의 실상을 전달하고 실천하여 영식이 갈 영로를 밝혀 드리고자 함이지 절집에서 수입을 올리기 위한 저속한 취리(取利) 행위가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선악간에 지은대로 받는 것이 진리 세계의 엄연한 법도이기에 지어놓은 것은 결코 없어지지 않는 것입니다. 추복(追福)은 마치 나무에 거름을 주는 것과 같아서 당장 열매가 많이 열리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지금까지 말씀드린 천도재의 의의와 영식에게 미치는 지대한 영향을 생각하여 앞으로 49재에 더욱 정성을 다하시기를 거듭 당부 드리는 바입니다.
한마디 더 첨언한다면 49재로 영식이 천도되었다 하더라도 가급적 백일재까지 모셔서 더욱더 영식에게 음덕이 쌓이도록 해드리는 것이 좋습니다. 또 불전 헌공도 명을 마친 직후가 영식에게는 가장 불안한 시기이며 무거운 업보 쪽으로 떨어지기 쉬운 때이므로 가급적 열반 직후에 최선을 다해 큰 복을 지어 복력으로 밀어줘야 선도 수행에 유리하다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