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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체유심조, 일타대종사

작성자진성50|작성시간10.10.13|조회수64 목록 댓글 0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 동곡당 일타대종사

 

“천지는 춘하추동을 행하게 하며 만물을 양육해 낸다. 그러나 아무 말이 없다. 나 또한 말 없기를 좋아한다.” 이것은 공자의 말씀이다.

 

 

이른바 불립문자(不立文字)를 표방하고 깊은 산 깊은 골에서 면벽관심(面壁觀心, 벽을 향하여 좌선하여 자기 마음의 본 성품을 똑똑히 관조 하는 것)을 즐기는 산승선객이 무슨 말을 쓸 줄 알 것인가.

 

나는 숙세(宿世, 지난 세상의 생애, 즉 과거세)에 무슨 인연이 있어 불법의 선문(禪門)에 몸을 담고 믿음을 얻음에 이른 바, 일생을 바쳐 이것을 참구코자 하는 간절한 원이 있을 뿐이다. 그래서 호랑이가 산중에 묻혀 살 듯 평생을 바위틈 솔가지 아래에서 아무것도 아는 일 없이 지내다 가고 싶을 뿐이다. 이것은 독선이 아니고 내가 나를 알아 분수를 지키려는 것이니까 그야말로 안분(安 分)이라 해서 옳을 것이다.

 

 

그런데 때로는 온전히 타의에 의해서, 인정에 끌려 그 분수를 지키지 못하고 그래서 분수 밖의 일을 자주 범하게 되는 경우가 많다. 누가 말했듯이 글을 쓴다는 것은 낮잠을 자고 난 나머지요, 그림을 그린다는 것은 손재주를 부리던 나머지요, 늙어 빠지도록 산다는 것은 겁파(劫波, 헤아릴 수 없는 아득한 시간)의 나머지라 했는데 이것을 세 가지 여유(삼여三餘)라고 불렀다. 사람이 무슨 일에나 조금은 여유를 가지고 지낸다는 것이 또한 필요한 일이고 생활하는 사람의 맛이라고도 할 것이다.

 

 아무리 하기 싫은 일이라도 부득이 해야 할 것은 억지로라도 해 보는 것이 더러는 유리한 일일 수도 있는 것이니 공덕과 흑암은 언제나 간격이 없기 때문이다.

 

나는 어린 시절 어떤 스님으로부터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라는 이야기를 들었다. 모든 것은 마음 하나에 달려 있고 마음 하나로 조작되는 것이므로 좋고, 궂고, 슬프고, 괴롭고, 또 무슨 일이 되고 안 되고는 마음하나 때문이라고 했다. 그러기에 이 마음자리 하나가 “참 나”인 것이지 이 몸뚱이가 “참 나”는 아닌 것이라고. 이 몸이 자동차와 같은 것이라면 이 마음은 운전수와 같은 것이어서, 몸의 마음은 그림자에 불과한 것이라고 했다. 이 마음의 모양이 없으니 청황적백(靑黃赤白)도 방원장단(方圓長短)도 아닌 것이지만 여의보주와 같아서 검은 것이 오면 검게 비치고, 붉은 것이 오면 붉게 비춘다.

 

 또 한없는 허공과 같아서 눈 깜짝할 사이에 천리만리도 다녀오는가 하면 전파처럼 가지 못하는 곳도 없다. 또 천 백억으로 몸을 나타내고 우주를 포용하는가 하면 티끌 속으로 들어간다. 천년을 지내어도 늙지 않고 만겁이 되어도 그대로이다.

 

이것 하나를 바로 깨달아 믿어서 쓰면 바로 붓다(각자覺者)가 되어서 취생몽사(醉生夢死)하면서 업(業)을 짓고 과보를 받으며 세세생생을 윤회하게 마련이라고 했다.

 

그리고 다음으로 인과(因果) 법문에 젖었으며 이걸 해탈하는 것이 불법佛法)이고 열반을 얻는 것이 목적이라고 가르쳐 주셨다.

 

모든 경전에는 그저 한결같이 마음 하나를 보고 다스리고 닦아 증득하는 방법과 절차와 결과의 작용에 대한 맑고 깊은 이야기들뿐이다. 이를테면 마음하나의 세계로 향하는 노정이기에 열심히 배우고 읽고 익힌 터이지만, 그러나 약방문이 바로 약은 아니듯이 학문만으로 경지에 이를 수는 없는 것이었다. 언어와 문자의 세계를 해탈해야만 비로소 참 열반의 길에 오를 수 있음을 알게 되었다.

 

 일타 큰스님의 법문중에서.......은해사 통권10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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