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밑줄긋는 여자

그리스 비극에 대한 편지- 김상봉 철학 이야기

작성자김순희|작성시간13.01.13|조회수303 목록 댓글 0

'아트 앤 스터디'에서 김상봉의 독일 관념론 미학에 대한 강의를 듣다가 이 책을 소개 받아 사게 되었다. 

수술한 후 칩거 중 제레미 다이아몬드의 '총, 균, 쇠', 아놀드 하우저의 '문학과 예술의 사회사 1,2,3,4'권, 그리고 미셀 푸코의 '광기의 역사'를 읽었다. 번역체의 책에 질려서 우리나라 저자의 책을 읽고 싶기도 했고, '호모 에티쿠스'를 읽고 난 후 착한 철학자 김상봉이 예술을 어떻게 바라보는지도 궁금했다.

 

책장을 열고 서문을 읽던 중, "내가 지금의 나로서 존재하기 위해서 타인에게 져야만 했던 슬픔의 빚", 그것이 그 많은 인간의 존재 근거 가운데서 우리가 가장 먼저 기억해야 할 것이라는 문장을 접하고는 가슴이 싸해졌다.

 

그가 이 책을 쓴 이유는 다음과 같다.

" 그리스 비극은 어떻게 가장 숭고한 예술이 가장 정치적인 예술이며 동시에 가장 비극적인 예술인가를 보여준다. 이 책에서 내가 하려했던 일은 그 내적 연관성을 밝히는 것이었다. 어떻게 정치가 숭고한 예술의 모태일 수 있는가? 그리고 어쩌면 가장 더럽고 비열할 수도 있는 정치적 권력의지가 어떻게 비극적 슬픔에 대한 감수성과 한 뿌리일 수 있는가? 한마디로 말해 자유와 숭고 그리고 슬픔이 어떻게 하나의 뿌리에서 자라난 가지일 수밖에 없는가? 이런 것들을 해명하는 것, 그것이 내가 하려 했던 일이다. "

 

"그리스 비극은 슬픔의 의미에 다가가기 위해 그렇게 내가 의지해야만 했던 사다리였다. 그러므로 이 책은 단순한 그리스 비극에 대한 책이 아니다. 사실 나는 그리스 비극을 핑계삼아 비극예술의 의미를 물었으며, 더 나아가 세상에 넘치는 슬픔의 존재 의미를 물었다."

 

그리스 비극은 아테네가 직접민주정치의 절정기, 그리스적 의미의 정치적 자유가 최고조에 이르고 아테네의 물질적 번영이 절정이었던 시기에 꽃핀 문화이다. 기원전 543년 페이시스트로토스의 참주정치 하에서 시작되어 민주정치하에서 전성기를 누린 예술이다. 그렇다면 왜 이런 그늘이라고는 없던 이 빛나던 시기에 그리스 시민들은 운명이라는 피할 수 없는 장애앞에서 고통 받는 인간의 슬픔을 함께 지켜보았던 것일까? 

 

인간 정신의 크기와 깊이는 고통에 직면했을 때만 드러난다. 슬픔과 고통의 체험은 사람을 이기적이로 자기 중심적으로 만들기도 하지만 사람을 지혜롭게 만들 수도 있다. 고통의 감수성없이 정신이 지혜로와지고 깊어질 수는 없는 것이다. 문제는 고통 자체의 성격이 아니라 고통에 대한 우리의 태도가 이런 차이를 낳은다는 것이다. 그 태도는 반성하는 것이다. 비극을 탄생시킨 그리스 정신의 첫번째 미덕은 그것이 고통에 대해 반성했다는 사실이다. 즉, 고통의 의미를 묻는 것이다. 고통의 의미를 묻고 그것에 정당한 가치를 부여하는 것이 역사 속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의 의무인 것이다. 

 

오디세우스의 서사시, 사포의 서정시를 거쳐 그리스 예술은 비극으로 나아간다. 그렇다면 왜 그런 순서로 그리스 예술이 발전해 나갔는가하는 것을 서사시의 총체성과 서정시의 개별성 그리고 비극의 만남의 총체성, 대립을 통해 건너감으로 설명하고 있다. 즉 세계와 소외된 정신의 출현으로 등장한 개별성은 고독을 낳는다. 그 고독이 두려워 주체의 개성을 무시하는 눈먼 총체성을 지향할 때 파시즘이 등장한다. 그런 눈먼 총체성이 아니라 개별성들이 치열하게 대립하는 능동적 행위(Drama)를 통해서 오직 만남을 그 자체 목적으로 하는 예술을 추구했다는 것이다.

 

비극은 만남을 추구하되 그것을 고정된 합일점으로 찾지 않는다. 비극은 다만 대립되는 다양한 관점을 보존하면서 서로 매개하려 할 뿐이다. 만약 비극이 보여주는 대립이 언제나 해소되고 지양되어버렸다면 그리스 비극은 처음부터 비극이 아니었을 것이다. 도리어 비극은 해소될 수 없는 삶의 어떤 본질적 대립 속에서 파멸해가는 인간을 보여주었기 때문에 비극으로 남을 수 있었던 것이다. 그리스 비극이 우리에게 주려 하는 것은 하늘나라의 영원한 삶에 대한 가르침이 아니라 대지의 진실이다. "투쟁은 모든 것의 아버지다." 고대 그리스 철학자 헤라클레이토스의 말이다. 이런 극단적인 대립상을 통해 시인은 우리를 하나의 입장에서 다른 입장으로 건너갈 수 있게 한다. 그것은 우리로 하여금 나와 다른 입장도 나름대로의 정당성을 갖는다는 것을 이해하게 한다. 그리고 이처럼 다양한 입장들로 건너감을 통해 비극은 궁극적으로 우리로 하여금 삶을 전체로 바라볼 수 있도록 도야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고정된 합일점이 아니라 보편적 이행가능성에서 총체성을 찾았다 하는데 그 이행은 무엇을 통해서 가능해지는 것일까? 그것은 개념적 파악이 아니라 오직 고통과 슬픔을 통해서이다. 참된 의미로 타자를 이해하려면 고통의 동질성을 히해하는 것이다. 슬픔은 얼마나 평등한 것인가? 슬픔 속에 있는 모든 사람들의 차이를 하나로 이어지는 눈물의 바다에서 용해시키는 것이다. '슬픔 속에서의 만남'이야말로 비극이 우리에게 감동을 주는 요체이다.

 

모든 예술이 쾌감을 준다고 할 때, 비극이 주는 쾌감은 무엇인가? 아리스토텔레스는 '시학'에서 그 쾌감을 '연민과 공포를 통하여 이런 정념들의 카타르시스를 완수한다'라 말했다. 그렇다면 그 카타르시스란 무엇인가? 플라톤은 연미과 공포의 감정을 혐오했다. 플라톤에 따르면 비극적 공감은 겉보기에는 타인에 대한 연민인 것처럼 보이지만 본질적으로 자기 자신에 대한 연민이라는 것이다. 플라톤은 비극이 선사하는 쾌감은 바로 이 자기연민의 달콤함이라 했고 타인의 고통을 나의 고통에 견주어보고 타인의 고통에 공감할 수 있기 위해서가 아니라면 자기연민 따위는 없으면 없을수록 좋은 정념이라 했다. 슬픔의 감정이나 한의 감정에 길들여지고 중독될 경우 이러한 감정들은 일종의 천성으로 굳어지고 슬픔이란 일상의 삶을 현명하게 꾸려나가는 데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하는 비생산적인 감정인 것이다. 중요한 것은 고통에 대한 강건한 정신이다. 슬픔의 문제란 철학에서든 문학에서든 일단 정신의 강건함이 증명되었을 때만 의미 있는 탐구대상이 될 수 있다. 삶과 존재의 어둠의 깊이는 결코 허약한 감상을 통해서 측량되지 않는다. 오직 강건한 정신만이 그 어둠의 깊이를 뚫고 들어갈 수 있는 것이다. 

 

과연 우리는 언제 그런 사사로운 슬픔을 넘어서는 것일까? 그것은 오직 내가 나 자신을 참된 의미에서 잊어버릴 수 있을 때다. 우리가 말해야만 하는 슬픔은 내가 내 손에 움켜쥔 모든 것을 스스로 버렸을 때, 그때도 남는 어둠이다. 오직 그런 경우에만 우리는 슬픔 속에서 자기 자신의 구차하고 처량한 모습이 아니라, 보편적인 슬픔의 어둠 속에 감추어진 존재의 깊이를 응시할 수 있기 때문이다. 카타르시스란 우리가 타인의 고통에 동참함으로써 자기의 고통을 초월하고 극복한다는 말이다. 우리가 타인의 고통에 대해 연민을 느낄 수 있기 위해서는 우리가 고통받는 타자의 자리에 우리들 자신을 위치시킬 수 있어야 한다. 나도 저런 고통을 겪을 수 있다는 가능성을 인정함으로써 타인의 고통을 가능한 나이 고통으로 느끼고 이를 통해 잠재적 공포를 느낄 수 있을 때에만 타인의 고통에 대하여 연민을 느낄 수도 있는 것이다. 가능성의 세계에서 두려움과 공포를 느끼지만 현실의 세계에서 그런 고통에 지금 놓인 사람에 대한 무한한 연민과 동정심을 느끼게 된다. 그리고 이를 통해 비록 잠시라도 자기 자신에 대한 연민 또는 자기를 사로잡고 있는 공포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철학이 사람들에게 말해주어야 할 것은 과연 우리가 고통스런 현실 속에서도 어떻게 참된 기쁨에 참여할 수 있는 가 하는 것이다. 자기 자신에 관계된 고통에 대한 예민한 감수성이 자동적으로 타인의 고통에 대한 예민한 공감과 연민으로 이해하는 것은 아니다. 비극의 힘은 자기 자신의 고통에 대한 연민과 공포의 정념들을 타인의 고통, 아니 나아가 우리 모두가 같이 겪을 수 밖에 없는 보편적 고통에 대한 연민과 공감으로 이행하도록 하는 데 있다. 정화되어야 할 연민과 공포는 자기 자신에 대한 연민과 공포이며 정화해주어야 할 연민과 공포는 타인에 대한 연민이며 보편적 고통에 대한 공포이다. 비극은 타인의 고통을 미적 아우라 속에서 그려 보여줌으로써 우리로 하여금 자기 자신에 대한 몰입과 집착에서 벗어나 타인의 고통에 눈길을 돌리는 것이다. 

 

<오이디푸스>왕을 보면서 느끼는 공포에 가까운 전율이 정체는 무엇인가? 그것은 나와 너를 떠나서 내가 인간 일반의 자리에서 보편적 주체로서 전체로서의 삶의 바탕에 놓여 있는 본질적인 비극성을 응시하면서 느끼는 공포와 전율이다. 그러니까 비극은 고통을 보편화시키는 것만큼 또한 그것을 바라보는 우리는 각자를 개별적 주체성의 한계에서 해방시켜 보편적인 주체성에 참여하게 한다고 말할 수 있다. 유감스럽게도 니체가 알지 못했던 것이 바로 이것이다. 인간은 오직 타인의 고통에 적극적으로 동참하는 정도만큼만 자기 자신을 괴롭히는 고통으로부터 해방될 수 있다. 그리고 이를 통해 그것은 우리들 자신의 사사로운 고통을 가볍게 해준다. 바로 그 가벼움이 주는 유쾌함과 명랑함. 끝끝내 벗어날 수 없은 페시미즘에도 불구하고 내가 결코 홀로 외로이 고립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는 유대감, 그런 것들이 비극적 카타르시스 속에 감추어진 기쁨의 요체인 것이다. 여기서 페시미즘과 비극적 카타르시스는 공속한다.

 

비극은 그렇게 위험한 페시미즘 속에서 도리어 삶에 대한 명랑한 긍정을 가능하게 하는 마술이다.

삶을 진정으로 긍정하기 위해서는 치명적인 고통까지도 긍정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고통을 긍정하기 위해서는 고통의 의미를 납득할 수 있어야만 한다. 그렇지 않을 때 우리는 우둔한 맹목에 빠지게 되며 결과적으로 고통스러운 삶을 긍정할 수 없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결국 문제는 고통의 의미, 고통의 존재 이유를 해명하는 일이다. 세상에 널려 있는 슬픔과 고통은 다 무엇을 위해 있는 것일까? 비극은 이 물음에 대해 철학적으로 논증하지 않는다. 그러나 고통의 정념을 강화하고 증폭시킴을 통해서만 카타르시스가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줌으로써 우리의 삶에서 고통이 가지는 의미가 무엇인지 말없이 증거한다.

 

카타르시스란 무엇인가? 그것은 내가 편협한 이기심과 고립된 개별성을 벗어나 열린 광장에서 타인과 만나고 더 나아가 보편적인 주체성에 참여할 때 느끼는 기쁨인 것이다. 카타르시스는 그렇게 내가 확대되고 고통은 가벼워질 때, 내가 느끼는 충만한 생명력의 기쁨인 것이다. "멈추어라, 너 참 아름답구나."그러게 파우스트처럼 삶을 향해 외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존재에 대한 긍정, 존재의 의미에 대한 이 깊은 신뢰는 어디서 비롯되는 것일까? 그것은 타인의 고통 그리고 삶 그 자체에 놓여 있는 측량할 수 없이 큰 고통에 내가 참여함으로써 가능해지는 것이다. 우리의 삶에서 고통과 슬픔을 치유하고 위로하는 것은 또 다른 고통과 슬픔이다.

 

비극은 고통을 통한 만남의 기쁨을 우리에게 가르치는 예술이다. 타자에게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관심을 가지고 손을 내밀게 되는 것은 언제나 불완전한 존재에게 해당하는 일로서, 간단히 말해 슬픔과 불행을 안고 사는 존재만이 타자와의 만남을 필요로 하는 것이다.

 

오직 사랑을 완성하기 위해 그 많은 슬픔이 존재하는 것이라고, 사랑은 만남에 존립한다. 우리가 인간의 삶에 널려 있는 슬픔과 고통 앞에 몸서리치면서도 인간의 가난한 삶의 가치를 부정하지 않은 것은 오직 고통과 슬픔 속에서만 우리는 서로에게 손을 내밀고 서로에게 말건네며 서로 서로 온전히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리스의 정신은 명랑하다. 오직 고통을 통해서만 도달할 수 있는 명랑함이야 말로 그리스 비극이 보여주는 정신의 크기요, 숭고이다. 그리스 비극이 보여주는 명랑함은 삶에 대한 맹목적인 천진난만함이 아니라 가장 깊은 고통 속에서 길어낸 기쁨이다. 삶에 대한 긍정은 고통에 대한 긍정이다. 그리스인들은 다른 어떤 민족보다 깊은 비극적이고 염세적인 감수성의 소유자들이다. 그러나 그리스 정신은 허무주의나 데카당스에 빠지지 않았다. 그들은 가장 깊은 비극적 감수성에도 불구하고 어린아이와 같은 천진함을 가지고 그렇게 고통스러운 삶을 긍정했다. 그리스적 명랑함은 고통을 모르는 어린아이와 같은 정신의 경박함도 아니고 어떤 고통에도 상처받지 않은 초인의 무감동도 아니다. 도리어 그것은 가장 깊은 고통을 통과한 정신에게만 깃들 수 있는 숭고한 명량함이다. 숭고란 무엇인가? 약함 속에서만 자기를 드러내는 정신의 힘이며, 고통을 통해서만 피어나는 긍지에 찬 기쁨이다.

 

그리스 시인들은 바로 그런 지혜를 동료 시민들에게 전하기 위해 비극을 썼겠지요.

어떻게 삶의 참된 기쁨이 오직 깊은 슬픔 속에서만 가능한 것인지,

내가 어떻게 타인의 고통에 참여함으로 통해서만 내 삶의 고통을 초월할 수 있는 것인지,

어떻게 슬픔 속에 명랑함이 있고 명랑함 뒤에 슬픔의 그림자가 어리는지를 보여주기 위해,

그리하여 지금 슬픔 속에 있는 사람을 위로하고,

지금 기쁨 가운데 있는 사람을 타인의 슬픔으로 인도하기 위해,

그리고 끝끝내 모든 사람들을 슬픔의 어둠 속에서도 손에 손에 밝힌 감동의 불꽃으로 서로 만나게 학 위해

비극을 썼던 것이지요.

 

....

 

연극원에서도 시학을 배우면서 질문하지 않았던 물음에 대해서 아주 친절한 고민을 펼쳐 보여주었던 책이다.

사실 그 당시 수업을 들어면서도 왜 디오니소스 제전에서 비극을 상연했는지, 그런 정치적 전성기에 왜 하필 비극이었는지, 왜 비극이 시민들 전체가 관람하는 축제의 한 부분이었는지, 카타르시스라는 것의 진정한 의미에 대해 이해할 수 없었던 애매함, 그런 감정적 해소가 아놀드 하우저의 말처럼 관변예술로써 지배 도구로 활용되었던 것은 아닌지... 등등의 궁금점이 있었지만 그냥 넘어갔었다.

 

김상봉님은 슬픔과 고통의 의미에 대해서 늘 생각한다. 80년 광주를 겪은 지식인의 화두이다. 이번 대선의 결과를 보면서 역시 깊은 슬픔에 빠져있던 중, 이 책은 크 위로를 준다. 이 책에는 광주항쟁, 전두화, 노무현 등의 인물등이 거론된다. 아마도 이번 대선을 치루면서 김상봉님은 또 한번의 깊은 고민... 그리고 또 다른 반성에 대한 책을 써내야 할 것이다.

 

아무래도 우리는 파시즘을 직면하고 있다. 개별적 슬픔의 기억을 총체성 속에서 망각하고자 하는 광기, 전체주의적 획일성, 가짜 총체성.... 우리 한국 사회가 직면한 가장 커다란 문제점은 김상봉님의 말처럼 반성되지 않은 고통과 슬픔이다. 그것이 우리의 역사을 왜곡하고 있다.

 

 

 

 

드라마 수업에서 reflection(반성)활동에 대해서 생각하게 하는 부분

*자기 기만이 없는 참된 공감

*정신의 힘 : 자기인 동시에 모두일 수 있다 :

*주체성은 보편성이 매개되지 않으면 안된다.

*참된 의미의 시민적 주체성과 공공적 이성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자기의 주체성을 잃지 않으면서도 동시에 전체를 사유할 수 있는 균형이 요구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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