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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상층화된 한국교회, 어디로 가나?

작성자지성용신부|작성시간10.09.14|조회수67 목록 댓글 1

중상층화된 한국교회, 어디로 가나?
[교회는 누구인가-변진흥]
2010년 09월 14일 (화) 08:55:27 변진흥 04byunjin@hanmail.net

풍요 속 빈곤, 무늬만 신자?

천주교 신자라면, 매일같이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소서.” 라고 기도한다. 하지만 그 뜻을 오늘 내 삶과 일 속에서 어떻게 이루어나갈 것인지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하는 모습을 찾기가 쉽지 않다. 타성 때문일까? 교회 안팎을 불문하고 많은 사람들이 제2차 바티칸공의회를 말한다. 그렇지만 정작 그 뜻이 무엇인지 그리고 내 삶 속에서 어떻게 자리매김 되는 것인지에 대해 깊이 있게 성찰하는 모습 역시 찾아보기 어렵다.

천주교 신자 수가 5백 만을 넘는다고 개신교나 이웃 종교에서 부러워하면 뭐하나 하는 생각도 든다. 오히려 소금 5백 만 가마니가 있어도 그 뜻에 따라 쓰이지 못하고 창고에 차곡차곡 쌓여만 있다면, 지나가는 사람들이 그 창고를 보고 뭐라고 할지 신경이 쓰일 뿐이다. 요즘 정부가 농가에서 수매한 쌀을 주체하지 못하고 창고에 쌓아둔 채 이를 유지하는 데에만 수천 억 원의 세금을 낭비하는 것에 대해서도 시선이 곱지 않다. 더구나 아무리 남북갈등이 심하다 하더라도 북한 형제들은 굶어 죽어 가는데 하늘 끝까지 쌓아둔 쌀을 풀지 않고 있는 남쪽의 인색과 오만을 하늘에서는 어떻게 벌하실지..... 정말 걱정되고 수치스럽다.

어느 일간지 조사에 따르면 국무위원급 고위직 공무원과 국회의원 가운데 기독교 신자 수가 전체 숫자의 2/3에 달했다. 이 가운데 개신교 숫자는 천주교보다 10% 정도 상회했다. 예를 들면 18대 국회의원 가운데 개신교 신자가 전체의 39.5%인 118명, 천주교 신자는 전체의 26.1%인 78명으로 집계되었다. 재보선 선거에서 약간의 변동이 있었겠지만, 크게 달라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렇다면 78명에 달하는 천주교 신자 국회의원과 무려 118명에 달하는 개신교 신자 국회의원 모두가 정말 국회의사당에서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도록 기도하며 국정에 임하고 있는 것일까? 아니면 선거 때에만 표를 얻기 위해 신자 행색을 하는 것일까? 내가 알고 있던 다선 국회의원 가운데에도 매일 미사를 궐하지 않는 분들이 있었다. 그러나 성당에서 모범적이었던 그들이 의정활동에서는 전혀 달라보였다. 왜 그런 것일까? 이런 모습을 하느님께서는 어떻게 보실까?

요즘 한국천주교 평신도사도직협의회 산하에 있는 사회사도직연구소에서 봉사하면서도 답답한 느낌이 든다. 평협에는 무려 15개의 분과위원회가 있고, 위원회마다 상당수의 교회 지도층 인사들이 포진되어 있다. 만약 이분들이 위원회의 특성에 맞게 이 사회에서 벌어지는 무수한 갈등과 편견에 대해 복음적 해결 방안을 제시할 수 있다면, 비록 천주교 신자 5백만이 모두 함께 움직이는 것은 아니더라도 오늘 이 땅에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는 길을 열어나가는 모습을 보여줄 수 있을 것이다. 반대로 무늬만 신자이고, 무늬만 위원회인 상태에 머물러 있다면, 정부가 창고에 쌀을 가득히 쌓아놓고 비난의 대상이 되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 사진/한상봉 기자

반대를 받는 표징인 교회

선교는 삶의 현장에서 이루어진다. 그 삶의 현장을 정확하게 포착하지 못하면 선교는 실패한다. 신학자 크레머는 “엄격하게 말해서 교회는 항상 우리 상황 가운데 있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여기서 교회는 제도교회만을 뜻하지 않는다. 오히려 제2차 바티칸공의회가 선언한대로 삶의 현장 즉 ‘상황 가운데’ 있는 평신도를 함께 뜻한다. 문제는 크레머가 강조했듯이 교회가 가끔씩만 그것을 인식하고, 심지어는 망각한다는 사실이다.

중요한 것은 ‘교회인 우리’가 삶의 현장인 ‘시시각각의 상황 가운데’ 있으며, 그 상황은 “교회의 본질적인 성격과 경험적인 상태 간의 지속적인 긴장 때문에” 항상 위기상황을 빚어낸다는 점이다. 그래서 크레머는 “비록 교회가 자신의 존재에 충실하다 할지라도 항상 공격의 대상화 즉 ‘반대를 받는 표징’(루카 2:34)이 되게 되어 있다.“고 강조한다. 그러므로 종교개혁 이후 교회가 위기 없이 수세기를 보낸 것은 비정상이라고도 말한다. 오히려 위기를 대면하는 것이 온전한 교회가 되는 모습이라는 것이다.

앞에서 우리는 통계상 천주교 신자 수가 5백 만 명이 넘고, 이 가운데 오늘 우리 사회를 이끌어 가는 지도층 인사 가운데 적어도 절반의 절반 즉 25%가 천주교 신자라는 것을 확인했다. 이러한 통계 수치는 천주교 신자가 경제적으로나 사회적으로 상당히 업그레이드되었음을 말해준다. 이는 천주교가 전반적으로 중산층(中産層)에서 중상층화(中上層化)되었음을 뜻한다. 이런 현상은 한편으로 천주교가 우리 사회를 이끌어가는 힘을 지니게 되었음을 뜻하기도 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사회의 기득권에 더 가까이 다가서고 있음을 말해준다. 이러한 ‘상황’에 대해 사목적인 성찰은 깊이 이루어지고 있는 것일까?

루카 복음 2장에서 시메온은 성전에 봉헌하러 온 아기 예수를 보고 “제 눈이 당신의 구원을 본 것입니다.”라고 찬미했다. 그는 아기 예수가 다른 민족들에게 계시의 빛이며 이스라엘에게도 영광임을 말하면서 축복했다. 그렇지만 이어서 그는 성모님께 앞으로 예수가 많은 사람을 쓰러지게도 하고 일어나게도 하는, 즉 적대적인 분노와 반대의 표징이 될 것이라는 섬뜩한 예언을 했다. 이 표징으로 인해 “많은 사람의 마음속 생각”이 드러나게 될 것이라고 말한 시메온의 예언은 오늘 우리에게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만약 우리가 천주교 신자라고 하면서 그분의 영광만을 쫓고 반대의 표징이 되는 것은 회피한다면, 우리는 예수의 삶을 살지 못하는 것이 되고 말 것이기 때문이다. 

교회의 사회적 관심 표명, 어디까지?

미국 천주교 주교회의는 우리에 비해 훨씬 대사회적 발언이 잦다. 일례로 2000년부터 2009년까지 10년 동안 발표된 교서와 성명서가 60여 건에 달한다. 여기에는 정치 외교적으로 민감한 사항도 많이 포함되어 있다. 부시 정부의 중동정책과 팔레스타인 분쟁에 대해서 뿐만 아니라 이라크문제, 수단과 케냐, 그리고 쿠바 제재문제 등도 언급하고 있다. 특히 미국 주교회의는 주교회의나 주교회의 의장 명의의 문건뿐만 아니라 각 위원회 차원의 위원장 주교 서한을 통한 의사 전달이 많다. 지난 7월20일에는 아리조나주 이민법 시행에 관하여 그 부당성을 지적하는 서한을 미국 주교회의 이주위원장 존 웨스터 주교가 발표했으며, 심지어 1980년대에는 북한핵문제에 관해 미국 주교회의 정의평화위원장 주교가 미 상원 외교위원회에 서한을 발송하는 등 상당히 적극적인 행보를 보여준 바 있다.

이에 비해 한국주교회의의 사회적 관심 표명은 거의 침묵 수준이다. 1970년대와 1980년대에 민주화투쟁과 관련하여 한국교회 차원의 활발한 대응과 성명서 등이 발표되었지만, 이때에도 주교회의 차원의 사목교서 발표는 찾아보기 힘들다. 김수환 추기경의 경우도 주로 기도회 미사강론을 통해 발언했을 뿐 주교회의 명의의 입장 표명을 이끌어내는 데에는 한계가 있었다. 이런 모습은 한국천주교가 200년이 넘는 역사를 자랑하면서도 대부분의 시간을 포교지 미성숙 교회로 취급되었고, 교회 지도층도 스스로 ‘아버지의 뜻’을 ‘이 땅’에 이루어 나가는 ‘상황 속 교회’에 대한 문제의식을 지니는데 한계가 있었음을 말해 준다.

이런 한국교회의 모습은 평신도들에게도 지극히 순종적이고 수동적인 위치에 머무는 것이 타당하게 여겨지도록 만들었고, 평신도가 ‘병신도’로 둔갑되는 것이 당연한 미덕(?)으로 여겨지는 풍토를 조성했다. 교구 시노드를 개최해도 평신도 대표들의 발언은 결국 신학도 모르는 무식한 세속적 발언으로 간주되어 실제로 제2차 바티칸공의회에서 부각된 ‘평신도 교회상’ 실현은 위험한 발상으로 그치고 말았다. 이러한 상황은 일부 본당 사목자의 전횡과 이를 뒷받침하기에 바쁜 평신도 사목위원들의 관료의식으로 갈수록 전이되어 점점 더 ‘중상층화된 한국천주교’라는 벽만 높이 쌓아가고 있는 실정이다. 이 때문에 교회 내 자성의 목소리는 잦아들고, 본당 사목현실은 게토화 내지 파편화되어갈 뿐이다. 

교회가 왜 사회문제에 관여하는가?

   
▲ 강우일 주교 (사진출처/한국천주교주교회의 홈페이지)
이런 상황에서 지난 7월에 주교회의 의장인 강우일 주교가 <경향잡지>에 ‘가톨릭교회는 왜 사회문제에 관여하는가’ 라는 특별기고문을 게재한 것은 가뭄에 만난 단비처럼 느껴진다. 강 주교는 교회의 존재이유를 설명하면서 세상을 향한 관심과 연민은 교회의 태생적 소명이라고 밝혔다. 그 논거를 사회교리와 베네딕토 16세 교황의 교서 등을 통해 열거했다.

강 주교는 그리스도인으로서의 고달픈 여정을 강조하고,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 자체가 본질적으로 피곤하고 고달픈 삶의 선택이라는 점, 즉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에 대한 진정한 대면을 강조했다. 이는 바로 크레머가 강조했던 바로 그것, 즉 “교회의 본질적인 성격과 경험적인 상태 간의 지속적인 긴장 때문에” 항상 위기상황을 빚어내는 ‘그리스도인 삶의 현장성’을 뜻한다.

강우일 주교는 또 교회가 왜 환경문제까지 개입해야 하는가에 대한 답변을 시도했다. 이는 그 내용을 떠나 최근 교회 내에서조차 4대강 문제에 대한 주교회의 입장 표명에 대해 이견이 분분한 것에 대해 주교회의 의장으로서의 견해를 완곡하게 밝히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그토록 성명이나 교서를 내기 힘든 한국주교회의에서 가뭄에 콩 나듯이 사회적 관심을 표명한 것에 대해 주교회의 의장 주교가 이처럼 후속조처(?)를 취한 것은 무엇 때문일까? 그만큼 교회 내에서 파장이 컸다는 것을 뜻한다. 아마도 중상층화를 선도한 교회 내 유력인사들의 저항이 거셌기 때문일 것이다. 그로 인해 ‘피곤하고 고달픈 그리스도인의 삶’을 강조하게 된 것이 아닐까.

김수환 추기경은 암흑과 같았던 1978년 9월 기도회 미사에서 “어떻게 보면 오늘날 우리나라는 별 큰 문제가 없어 보입니다.....그런 마당에 유독 교회가 다시 평화니 사회정의니 하고 말하는 것은 오히려 사회에 혼란을 더욱 야기시킬 염려가 있지 않은가, 그럼으로써 평화를 더 해칠 염려가 있지 않은가 하고 생각할 수도 있겠습니다. 이런 때는 교회도 차라리 침묵을 지키고 가만히 있어 주는 것이 평화에 더 도움이 된다고 생각할 수 있겠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정말 아무런 문제가 없습니까? 우리는 진정 평화스러운 자유 대한입니까?.....우리 교회는 마치 신앙의 자유만 보장되어 있으면 기타 자유는 권력에 의해서 제한을 받고 있더라도 큰 관계가 없는 것처럼 오히려 사회질서 유지에 도움이 되는 것처럼 안이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설령 행위의 자유가 완전무결하게 있다고 합시다. 우리는 우리 자신에게 필요한 자유가 보장되었으니 다른 자유가 제한되어 있어도 우리와는 상관이 없다고 생각하는 태도가 과연 그리스도교적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까?” 라고 반문했었다.

아마도 지금의 강우일 주교는 30여 년 전의 김수환 추기경과 같은 심정인지도 모르겠다. 어떻든 오늘의 한국교회는 그 어려운 시절에 지켜온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으로 5백 만 신도를 자랑하고 있다. 만약 그 5백 만이라는 숫자가 상당 부분 허수라면, 이는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을 망각하고, 오로지 시메온의 축복만을 탐닉하는 ‘무늬만의 신자’ 수가 불어났기 때문일 것이다.

강우일 주교는 “교회는 본질적으로 처음부터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각별한 관심을 가져왔다.”는 점을 강조했다. 이 사실을 부인하는 신자는 아무도 없다. 문제는 이러한 관심을 어떻게 ‘아버지의 뜻’으로 ‘이 땅’에 이루는가 하는 점이다. 강 주교는 교회의 전통적인 가르침으로 그 해답을 제시한다. 즉 가진 자와 못 가진 자 모두에게 정의에 입각한 상호간의 의무를 상기시켜 서로 화해시키고 일치시키는 힘을 교회가 지녀야 한다는 것이다.

교회는 가난한 자를 우선적으로 선택하지만, 가진 자와 대립적 관계를 설정하는 것은 아니다. 단지 가난한 자를 우선적으로 놓고, 가진 자에게 부여된 ‘아버지의 뜻’ 실현 의무를 일깨우는 힘을 부여받은 것이다. 그리고 그 힘으로 이 혼란한 사회에 복음적 해결 방안을 제시하는 것이 한국교회 전체의 시대적 소명임을 강우일 주교는 오늘 우리에게 깨우칠 뿐이다. (<사목정보> 2010. 9월호에도 실렸습니다) 

변진흥 /야고보, 가톨릭대학교 겸임교수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http://www.nahnews.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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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메롱(시메온) | 작성시간 11.02.17 고 김수환추기경님이 사무치게 그립습니다...글구 강우일 주교님과 정의로운 사제들께 위로와 힘과 용기와 지혜와 슬기와 건강을 주시고 보호하여 주소서...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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