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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분도 신부님 추모미사와 한국 가톨릭교회 역사 속의 일화

작성자인수호(미카엘)|작성시간11.03.28|조회수69 목록 댓글 0

+ 그리스도의 평화!

 

1960~70년대 한국의 슈바이쳐로 불리우신 최분도 신부님 선종10주기 추모미사가

지난 3월26일 부평3동성당에서 김병상 몬시뇰님, 이학노 몬시뇰님을 비롯한 교구사제단 15분과

최신부님의 서품 동창이신 메리놀 외방선교회 방인이 신부님(교동공소) 등 두 분도 오신 가운데

최신부님을 추모하고 기억하는 신자 400여명이 참석하여 성대히 거행되었습니다.

 

최분도 신부님이 산곡3동의 사목활동을 끝으로 한국을 떠나신 지 어느새 20년이 지났고

미국 뉴욕의 메리놀본부 인근 수녀원에서 골수암으로 선종하신 지도 벌써 10년이 지났지만

지금까지도 최신부님을 사랑하고 추모하는 마음은 부평3동성당을 꽉 채우게 되었습니다. 

 

최분도 신부님은 대개 덕적도를 비롯한 서해안 낙도개발을 위해 헌신한 사제로 기억하지만

사실 1974년에 인천지역으로 올라 오신 이후에는 우리나라의 민주화와 사회 정의의 실현과

정치적 탄압 속에 있는 가족의 보호, 억압 받는 노동자들의 인권보호에 앞장 서신 분입니다.

 

당시 우리나라 정부는 최분도 신부님의 활동을 못마땅하게 여기고 추방을 결정했는데

김수환 추기경께서 청와대로 박정희 대통령을 찾아가 "최신부가 한국 안에서만 행동하는 것이

미국으로 추방되어 나가서 전세계를 향해 떠드는 것보다 낫다"고 설득하셨다고 합니다. 

 

정부에서 최신부님의 비자기간 연장을 승인하지 않자 인천교구에서는 사제단 회의를 갖고

우리나라 가톨릭 역사상 처음으로 인천교구 전체 성당에서 주일을 포함하여 3일간(금,토,일)

미사봉헌을 전면적으로 중단하는 것을 결의했으며, 결국 한국 정부는 이러한 가톨릭 교회의

단호한 항거에 굴복하여 비자기간 마지막 날 오후 5시가 지나서야 연장해 주기도 했습니다.

 

최신부님은 이후에도 1990년 2월에 미국 메리놀본부의 부름을 받고 들어 가시기 전까지

"나는 한국 정부가 올바른 민주주의를 실현하지 않는다면,

 한국 정부가 나에게 준 메달(국민훈장 동백장)을 반납하겠다"고 말씀하시며

끝까지 우리나라의 민주화와 사회정의를 위해 노력하셨다는 점도 잘 기억을 해야 합니다.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라"는 가훈을 평생동안 온 몸으로 실천하신 최분도 신부님,

골수암으로 극도의 고통중에서도 끝까지 희망을 버리지 않고 러시아어 공부를 하신 신부님,

한국에서 문병을 가신 신자부부가 귀국하겠다는 인사를 드리자 암투병으로 말라서 헐렁해진

바지의 허리춤을 붙들고 뛰어 나오시며, "나도 한국에 같이 가겠다"고 애원하셨던 신부님,

 

우리는 이제 늦었지만 신부님의 참된 사제요 착한 목자의 삶을 체계적으로 조명할 것입니다.

단순히 신부님의 사목활동과 사회적 공적을 자랑하기 위한 기사로 세상에 밝히는 것이 아니라

우리도 이러한 신부님의 "사랑 방법"을 본받아 하느님과 이웃을 제대로 사랑하기 위함입니다.

 

최분도 신부님, 하느님 나라에서 저희들의 일을 기쁘게 도와 주세요...

하느님 아버지, 저희들이 추진하는 일을 이끌어 주시고 지켜 주세요...아멘.

 

사진자료:  http://emsuh.blog.me/701058366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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