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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웰빙과 번영의 신학..복음 아니다

작성자성은정 마리아|작성시간14.02.04|조회수6 목록 댓글 0

영성
웰빙과 번영의 신학..복음 아니다교황 프란치스코의 권고 <복음의 기쁨> 76-109항 번역문
교황 프란치스코  |  editor@catholic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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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4.02.03  11:09: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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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I. 사목활동가들이 직면한 유혹들

 

   
 

76. 저는 교회를 위해서, 그리고 교회 안에서 헌신적으로 일하시는 분들에게 무한한 고마움을 느끼고 있습니다. 저는 이 자리에서, 주교로부터 시작해서 가장 겸손하게 숨어서 봉사하는 사람들에 이르기까지, 사목활동가의 그 많은 활동들을 길게 논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그보다 저는 우리 모두가 오늘날 세계화된 문화 속에서 직면할 수밖에 없는 도전에 대해서 성찰하고자 합니다.

 

먼저 오늘날 세상에서 교회가 기여하고 있는 것이 대단히 많다는 것을 밝혀둡니다. 그것이 정의롭습니다. 우리의 죄에 대해, 그리고 수많은 교회의 사람들이 범한 죄에 대해 우리는 고통과 부끄러움을 느낍니다. 그러나 그 부끄러움과 고통 때문에 수많은 그리스도인이 사랑을 실천하며 자신의 삶을 내어놓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결코 잊어서는 안 됩니다.

 

그들은 수많은 사람을 치유하거나, 임시병원에서 평화로운 죽음을 돕습니다. 그들은 지구상에서 가장 빈곤한 지역에서 다양한 의존(중독)의 포로가 된 사람들에게는 선물입니다. 그들은 어린이들과 젊은이들의 교육에 헌신합니다. 그들은 모든 사람이 잊고 있는 노인을 돌봅니다. 그들은 적대적인 환경에서도 가치를 소통시킬 길을 모색합니다. 그들은 사람이 되신 하느님께서 불러일으키신 무한한 사랑을 드러내기 위해 다양한 방법으로 헌신합니다. 저는 자신의 생활과 시간을 즐겁게 희생하는 수많은 그리스도인이 보여준 아름다운 모범에 대해 고마워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저의 이기심을 극복하고 저 자신을 보다 완전히 내놓으려는 노력에 있어서 저를 지탱해주고 위로해줍니다.

 

77. 그러나 이 시대의 자녀로서 우리 모두는 어떤 식으로든 오늘날 세계화된 문화의 영향을 받습니다. 이 문화는 나름의 가치와 새로운 가능성을 제공하면서도, 우리를 제한하고, 익숙하게 하고, 그리고 궁극적으로 해를 끼칠 수도 있습니다. 저는 사목 활동가들이 도움과 치유를 받을 수 있는 공간을 만들 필요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 공간은 “선한 것과 아름다운 것을 향한 개인적 사회적 결정을 이끌어내기 위해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시고 부활하신 그리스도께 대한 신앙을 새롭게 하는 곳, 가장 심오한 물음과 일상의 관심을 공유하는 곳, 우리의 생활 자체와 경험을 복음의 빛으로 깊이 있게 식별하는 곳”을 말합니다. 동시에 저는 사목 활동가들에게 영향을 끼치는 몇 가지 특별한 유혹에 대해서도 주목하고 싶습니다.

 

선교 영성이라는 도전에 응답합시다

 

78. 오늘날 우리는 축성된 사목자를 포함해서 많은 사목 활동가한테서 자신의 개인적 자유와 안락함에 대한 무절제한 관심을 보고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마치 자신이 하는 일이 자신의 신원의 일부가 아닌 것처럼, 즉 자신의 생활에 덧붙여진 것쯤으로 보게됩니다. 동시에 이들은 영성생활을 다른 사람과의 만남, 세상과 관계 맺기, 혹은 복음화를 위한 열정을 촉진하지는 않는, 단지 특별한 위로를 주는 경건한 실천 정도로 여깁니다. 그 결과, 복음화를 위해 일하는 많은 사람들한테서, 비록 그들이 기도할지라도, 극도의 개인주의, 정체성의 위기와 열정의 소멸을 볼 수 있습니다. 극도의 개인주의, 정체성의 위기, 그리고 열정의 소멸은 서로를 키우는 악입니다.

 

79. 때때로 우리의 미디어 문화와 일부 지성계는 교회의 메시지와 관련해서 냉소주의와 회의주의를 유포시킵니다. 그 때문에 많은 사목 활동가들은, 비록 그들이 기도할지라도, 일종의 열등감 콤플렉스를 갖게 되고, 그럼으로써 자신의 그리스도인 정체성과 신념을 숨기거나 상대화합니다. 이것은 악순환합니다. 그들은 결국 자신이 누구인지, 자신이 무엇을 하는지와 관련해서 불행해집니다. 그들은 자신의 복음화 사명에 공감하지 않으며, 이는 자신의 헌신을 약화시킵니다. 그들은 결국 다른 모든 사람처럼 되려는 집착 때문에 사명이 갖는 기쁨을 억누르고, 다른 사람도 갖고 있는 것을 가지려합니다. 따라서 그들의 복음화 활동은 억지로 하는 것이 되고, 거의 힘을 쓰지 않으며, 극히 제한된 시간만 여기에 할애합니다.

 

80. 사목 활동가들은 그렇게 (실천적) 상대주의에 빠질 수 있습니다. 상대주의에 빠진 그들의 영성이나 사고방식의 스타일이 무엇이든, 상대주의는 교조적 상대주의보다 더 위험하기까지 합니다. 이 상대주의는 자신의 삶의 방식을 형성하는 깊은 마음의 결정과 관계가 있습니다. 이 실천적 상대주의는 마치 하느님이 계시지 않다는 듯이 행동하고, 가난한 사람이 존재하지 않다는 듯이 결정하고, 다른 이들이 존재하지 않다는 듯이 목표를 세우고,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은 사람이 존재하지 않다는 듯이 활동하는 것입니다.

 

교리와 영성에 대한 확실한 신념을 분명하게 갖고 있는 사람들조차도, 사명을 수행할 때 자신을 다른 사람에게 건네주기보다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재정적 안전, 권력에의 욕망, 현세의 영광을 찾는 생활태도에 빠지는 일이 빈번하게 일어납니다. 이는 두드러진 현상입니다. 우리 스스로 선교의 열정을 빼앗기지 않도록 합시다.

 

이기심과 영적 나태를 거부합시다

 

81. 세상에 소금과 빛을 가져다 줄 선교의 활력이 우리에게 가장 필요할 때, 많은 평신도들은 자기가 사도의 일 가운데 상당부분을 수행해야 하는 것이 아닌지 두려워하고, 자기의 자유로운 시간을 할애해야 할 책임에서 벗어나려고 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몇 해 동안 교리교육에 기꺼이 매진할 뜻을 갖고 있는 훈련된 본당 교리교사를 찾는 것이 오늘날 매우 어렵습니다. 더군다나 자신의 자유로운 시간을 지키는 데에만 사로잡힌 사제들도 생기고 있습니다. 그것은 사람들이 주로 자기의 개인적 자유만을 지키려 하는데서 원인을 찾을 수 있습니다.

 

복음화 과업이 우리를 불러 사명을 부여하고, 우리를 그것으로 채우고, 열매를 맺게 하시는 하느님의 사랑에 기쁘게 응답하는 것이라기보다는, 마치 위험한 독인 것처럼 치부됩니다. 어떤 이들은 이 사명에 자신을 온전히 내어놓는 것을 거부하고, 그럼으로써 결국 무기력하고 나태한 상태에 이르게 됩니다.

 

82. 문제는 과도한 활동이 아닙니다. 오히려 적합한 동기도 없고, 그 활동을 통하여 자신을 기쁘게 하는 영성이 없이, 잘못 수행하는 활동이 문제입니다. 그렇게 되면 일은 필요이상으로 힘들어지고, 때로는 질병을 불러오기도 합니다. 그것은 만족스럽고 행복한 피곤함과는 거리가 멀고, 긴장, 부담, 불만, 그리고 결국에는 감당할 수 없는 피로가 됩니다.

 

이렇게 나태한 사목을 불러오는 이유는 여러 가지입니다. 비현실적인 계획에 몰두하고, 자기가 합리적으로 할 수 있는 일에 대해 만족하지 않기 때문에 그렇게 되는 이들이 있습니다. 그 일이 제대로 이루어질 때까지 인내심을 갖지 않아서 그렇게 되는 이들도 있습니다. 그들은 모든 일이 하늘에서 떨어지기를 바랍니다. 몇 가지 계획에만 집착하거나 부질없는 성공을 꿈꾸어서 그렇게 되는 이들도 있습니다. 사람들과 직접 만나지 않음으로써 자기의 일을 비인격화시키기 때문에 그렇게 되는 이들도 있습니다.

 

그들은 사람들과 함께 하는 여정보다는 지도에 더 큰 관심을 기울입니다. 기다릴 수 없기 때문에 나태해지는 이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생활의 리듬을 지배하고 싶어 합니다. 즉각적인 결과에 집착하는 시대에, 사목활동가가 불일치, 가능한 실패, 비판, 곧 십자가의 낌새를 견딘다는 것은 어렵습니다.

 

83. 그렇게 해서 이 모든 것을 갖춘 거대한 실타래가 그 모습을 띠고 있습니다. “교회의 일상생활에서 ‘잿빛 실용주의’가 그것입니다. 그 속에서 모든 일이 정상으로 진행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는 사이에 신앙은 그 힘을 잃고 소심해집니다.” 일종의 무덤의 심리가 발전하고 교회를 천천히 박물관의 미라로 바꾸어 버립니다. 그들은 현실, 교회, 그리고 스스로에게 환멸을 느끼는 가운데, 희망을 잃은 채 무기력한 우울함에 빠져드는 유혹을 체험합니다. 이 무기력한 우울은 “죄악 가운데 가장 두드러진 것”으로서 그들의 마음을 지배합니다.

 

빛을 발하고 생명을 전해야 하지만, 결국 어두움과 내적 싫증만을 만들어내는 그런 일에 사로잡히고, 천천히 사도직을 향한 모든 열정을 소비하고 맙니다. 이 모든 것을 생각하면서, 저는 다시 말씀드립니다. 우리 스스로 복음의 기쁨을 빼앗기지 않도록 합시다.

 

헛된 염세주의를 거부합시다

 

84. 복음의 기쁨은 결코 누구도 혹은 어떤 것도 우리에게서 빼앗을 수 있는 그런 것이 아닙니다.(요한 16,22 참조) 세상의 죄악이, 그리고 교회의 죄악이 우리의 헌신과 열정을 약화시키는 핑계가 되어서는 절대로 안 됩니다. 오히려 그 죄악을 우리의 성장을 도울 수 있는 도전으로 바라봅시다.

 

신앙의 눈으로 보면, 어둠 속에서 항상 비추는 성령의 빛을 볼 수 있습니다. “죄가 많아진 그곳에 은총이 충만히 내렸다.”(로마 5,20)는 것을 절대로 잊지 않으면서 말입니다. 우리의 신앙은 물에서 어떻게 포도주가 나오는지, 어떻게 잡초 속에서 밀이 자라는지를 식별하라는 도전을 받습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를 연지 50년이 되었습니다. 우리 시대는 순진한 낙관론과는 거리가 멀고, 여러 어려움에 힘겨워하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보다 강해진 우리의 현실주의가 결코 성령과 성령의 풍부함에 대한 신뢰를 떨어뜨리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그런 의미로, 우리는 다시 복자 요한 23세가 1962년 10월12일 제2차 바티칸 공의회 개막일에 하신 말씀을 들을 수 있습니다.

 

“정말 유감스럽게도, 때로는 우리는 신중함과 기준을 갖고 있지 않지만 열정를 불태우는 백성의 소리를 들어야만 합니다. 오늘날 백성은 파괴와 변명만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마치 세상의 종말이 임박했다는 듯이 항상 참화만을 예견하고 있는 파멸의 예언자들과 달라야만 한다고 느낍니다. 이 시대에 하느님의 섭리는 인간관계의 새로운 질서로 우리를 인도하고 있습니다. 이 새로운 인간질서는, 인간의 노력으로 그리고 모든 예상을 뛰어 넘어서, 탁월하고 측량할 수 없는 하느님 계획의 완성을 향하고 있습니다. 그분의 계획안에서는 모든 것은, 하다못해 인간의 방해까지도, 교회에 보다 큰 선익이 될 것입니다.”

 

85. 열의와 대담함을 질식시키는 보다 심각한 유혹 가운데 하나는 패배주의입니다. 패배주의는 흠을 잡고 환멸을 느끼는 염세주의로, “음침한 성격의 사람”으로 만듭니다. 승리를 온전히 확신하는 사람이 아니라면 누구도 전투에 나설 수 없습니다. 만일 우리가 자신감 없이 출발한다면, 우리는 이미 전투에서 반쯤 진 것이며, 우리는 재능을 묻어버리는 것입니다.

 

우리가 고통스럽지만 우리 자신의 나약함을 알고 있다면, 우리는 주님께서 바오로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음을 마음에 새기며, 굴복하지 않고 전진해야 합니다.

 

“너는 내 은총을 넉넉히 받았다. 나의 힘은 약한 데에서 완전히 드러난다.”(2코린토 12:9)

그리스도인의 승리는 항상 십자가입니다. 그러나 이 십자가는 동시에 승리의 표지로서, 악의 공격 앞에서도 진취적인 부드러움은 낳습니다. 패배주의라는 악령은 때가 되지도 않았는데도 밀과 잡초를 분리시키려는 유혹의 형제입니다.

 

86. 어떤 곳에서는 분명히 영성의 “사막화”가 진행되었습니다. 그것은 하느님 없이 사회를 건설하거나 혹은 그 그리스도교적 뿌리를 제거하려 한 결과입니다. 그런 곳에서는 “마치 과잉으로 착취되어 사막으로 변하고 있는 땅처럼, 그리스도교가 결실을 내지 못하고, 스스로 고갈되어가고 있습니다.”

 

다른 나라에서는 그리스도교에 가하는 폭력적 반대가 그리스도인으로 하여금 자신의 사랑하는 조국에서 자신의 신앙을 숨기도록 강요합니다. 이런 곳 역시 다른 형태의 고통스러운 사막입니다. 아무리 그래도 가정과 일터는 신앙을 보존하고 전달해야 할 곳입니다. 그럼에도 이 가정과 일터마저 메마른 땅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사막 체험부터, 텅 빈 곳에서부터 우리는 시작해야 합니다. 우리는 믿는 사람이 갖는 기쁨을, 그 기쁨이 갖는 생생한 중요성을 다시 발견할 수 있습니다. 사막에서 우리는 삶에서 본질적인 것이 갖는 가치를 재발견합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이 세상에는 종종 함축적으로 혹은 부정적으로 드러내는 하느님에 대한 갈망의 표징들, 인생의 궁극적 의미에 대한 갈망의 표지들이 수도 없이 많습니다. 그리고 이 사막에서는, 모범된 삶으로 약속의 땅을 가리키고 그 희망을 이어가게 하는 신앙의 백성이 있어야 합니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는 다른 사람이 마실 수 있는 살아있는 샘물이 되어야 합니다. 때때로 이것은 무거운 십자가가 됩니다. 그러나 우리의 주님께서 자신을 생명을 주시는 물의 원천으로 우리에게 건네주신 것은 십자가에서입니다. 창에 찔린 옆구리에서였습니다. 그리므로 우리 스스로 희망을 빼앗기지 않도록 합시다!

 

그리스도께서 가져다주신 새로운 관계에 동의합시다

 

87. 오늘날 통신 수단과 네트워크는 유래 없는 발전을 이루었습니다. 이 시대에 우리는 함께 사는 “비법”, 어울리고 교류하는 “비법”, 서로 포용하고 지지하는 “비법”을 찾아내고 공유해야 할 도전에 직면했습니다. 혼돈스럽지만 참된 형제애의 체험, 연대의 행렬, 거룩한 순례가 될 수 있는 밀물에 발을 담구는 “비법”을 찾아내고 공유해야 하는 도전에 직면한 것입니다.

 

커뮤니케이션 분야에서 발생하는 더 많은 가능성은 모든 사람들이 교류하고 연대할 수 있는 더 많은 가능성을 줍니다. 만일 우리가 이 경로를 취할 수 있다면, 그것은 그 만큼 좋을 것이며, 그 만큼 고통 따위를 누그러뜨릴 것이며, 그 만큼 자유롭게 하며 희망을 충족시킬 것입니다! 우리 스스로 울타리에서 나와 다른 이들과 결합하는 것이 우리에게는 유익합니다. 자기 안에 갇혀 있는 것은 ‘내재주의’라는 쓴 독약을 맛보는 것입니다. 그리고 인류는 우리의 이기적 선택 때문에 악화될 것입니다.

 

88. 그리스도교의 이상은 의심, 습관적 불신, 우리만의 자유의 상실에 대한 두려움, 오늘날 세상이 우리에게 강요하고 있는 모든 방어적 태도들을 극복하라고 요구하고 있습니다. 많은 이들이 다른 사람으로부터 벗어나서 자신의 자유가 주는 편안함으로 피하려 합니다. 혹은 복음이 갖고 있는 사회적 측면인 현실을 부정하면서 몇 몇 가까운 사람들 끼리만의 소규모 모임 속으로 피하려 합니다.

 일부 사람들이 육체가 없고 십자가가 없는, 그런 순수하게 영적이기만 한 그리스도를 바라는 것과 마찬가지로, 그들은 세련된 장치가 제공하고, 명령에 따라 켜고 끌 수 있는 시스템이나 스크린이 제공하는 인간적 상호 관계만을 원합니다.

 

그렇지만 복음은 위험을 무릅쓰고 끊임없이 다른 사람을, 우리에게는 도전이 되는 그들의 물리적 현실을, 그들의 고통과 탄원을, 친밀하고 지속적인 우리의 상호활동에 영향을 주는 그들의 기쁨을 직접 만나야 한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육화하신 하느님의 아드님에 대한 참된 신앙은 자기를 내어 주는 것, 공동체의 구성원이 되는 것, 봉사하는 것, 다른 사람과 화해하는 것과 분리될 수 없습니다. 하느님의 아드님은 사람이 되심으로써 우리를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것의 순환에로 부르셨습니다.

 

89. 고립은 내재주의의 한 형태입니다. 이 고립은 하느님께서 자리잡을 수 없는 거짓 자율성으로 드러납니다. 그러나 종교의 영역에서 고립은 해로운 자신만의 개인주의에 맞춘 영적 소비주의의 형태를 취할 수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 시대를 특징짓는 영성에 대한 요구와 거룩한 것에로의 회귀는 분명치 않은 현상입니다.

 

오늘날 우리에게 도전은 무신론이라기보다는 오히려 많은 사람이 하느님을 갈망하는 것에 적합하게 응답하는 것입니다. 그들이 고립의 길로 가면서 그 갈증을 풀지 않도록, 혹은 다른 이들에 관해 아무것도 원하지 않는, 영혼이 육체에서 이탈한, 그런 예수로 자신의 갈증을 풀지 않도록 말입니다.

교회 안에서 이런 사람들이 자신에게 치유와 해방을 주고, 생명과 평화를 주는 영성을 발견하지 못한다면, 그들은 결국 자신의 생활을 참으로 인간적인 것으로 만들지도 못하고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지도 못하는 그런 다른 해결책에 사로잡히게 될 것입니다.

 

90. 대중적 종교심의 참된 형태들은 사람의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대중문화 속에 그리스도교 신앙이 구체화된 결과이기 때문입니다. 그 때문에 그것들은 모호한 영적 힘이나 에너지와의 관계가 아니라, 성인들과 마리아, 그리고 그리스도와 하느님과 맺는 인격적 관계를 수반합니다. 그것들은 몸과 얼굴을 갖고 있습니다. 그것들은 단순히 도피주의를 키우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관계 맺기를 키웁니다.

 

우리 사회의 일부에서, 우리는 공동체 생활과는 전혀 무관한 “웰빙 영성”의 다양한 형태가 사람들을 끌어들이고 있음을 알고 있습니다. 혹은 우리 형제자매에 대한 책임을 멀리하는 “번영의 신학”에, 혹은 자기중심성 이상이 아닌 자아감 없는 체험들에 사람들이 몰리고 있음을 알고 있습니다.

 

91. 한 가지 중요한 도전은 인격적이며 헌신적인 하느님과의 관계, 그리고 우리로 하여금 다른 사람에게 헌신하도록 하는 하느님과의 그런 관계에서 벗어나는 것은 절대로 해결책이 될 수 없다는 것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하느님과의 관계에서 도망치는 것은 오늘날 우리 그리스도인이 깊고 탄탄한 유대를 맺지 않은 채, 스스로 숨으려 하거나, 다른 이들과 거리를 두려 하거나, 한 곳에서 다른 곳으로 조용히 훌쩍 떠나려 하거나, 혹은 이 임무에서 저 임무로 떠나려 할 때 빈번하게 발생합니다.

 

“다른 곳들을 꿈꾼다. 그리고 이곳저곳으로 떠돌아다닌다. 그러나 많은 이들을 꾀어낸다.”

 

그것은 마음을, 때로는 몸까지도 비틀거리게 하는 잘못된 처방입니다. 우리는 유일한 길은 다른 사람이 어떻게 올바른 태도로 다른 사람을 만나는지 배우는 것임을 인정하도록 도와야 합니다. 마음으로부터 저항감 없이 다른 사람들을 같은 길을 걷는 동료로 받아들이고 존중하는 것을 말입니다. 더 나아가 그것은 다른 사람의 얼굴에서, 그들의 목소리에서, 그들의 탄식에서 예수님을 발견하는 방법을 배우는 것입니다.

 

 우리가 부당하게 공격을 당하거나 배은망덕한 일을 당할 때조차도, 형제애로 살겠다는 우리의 결정을 포기하지 않으며, 십자가의 예수님을 포용하면서 겪는 고통을 배우는 것을 의미합니다.

 

92. 실제 우리는 참된 치유를 발견합니다. 왜냐하면 다른 사람과 결합시키는 그 길은 우리를 쇠약하게 하는 대신에 치유하는데, 그 길은 바로 신비로운 형제애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이웃의 거룩함을 보게 하는 것은, 모든 사람 안에서 하느님을 발견하게 하는 것은, 하느님의 사랑에 마음을 열게 하는 것은, 하느님 아버지께서 하신 것처럼 다른 이들의 행복을 추구하게 하는 것은 바로 형제적 사랑입니다. 지금 여기서, 특히 우리가 “작은 양 떼”(루카 12,32)하고 할 때, 주님의 제자들은 땅의 소금으로, 세상의 빛인 공동체로 살아야만 합니다.(마태오 5,13-16 참조) 우리는 항상 복음에 충실하면서 새로운 삶의 길을 증언해야 합니다. 우리 스스로 공동체를 빼앗기지 않도록 합시다!

 

영적인 세속성을 거부합시다

 

93. 영적인 세속성은 경건함과 교회에 대한 사랑의 모습 속에까지 숨어 있는데, 이는 주님의 영광이 아니라 인간의 영광과 인간적 웰빙을 추구하는 데 있습니다. 이것은 주님께서 바리사이들을 다음과 같이 질책하신 이유입니다.

 

“자기들끼리 영광을 주고받으면서 한 분이신 하느님에게서 받는 영광을 추구하지 않으니, 너희가 어떻게 믿을 수 있겠느냐?”(요한 5,44)

 

이는 곧 “자기 것만 추구할 뿐 예수 그리스도의 것을 추구하지 않는”(필리비 2,21) 길이기도 합니다. 그것은 사람들과 그룹 속에 스며들어서 그 사람들과 그룹들에 의지하면서 여러 형태를 띠고 나타납니다. 그것은 정교하게 개발된 모습을 갖고 있기 때문에 항상 외적인 죄와 결합되는 것은 아닙니다. 죄를 범하지 않기 때문에 마치 그것이 당연한 것처럼 보이기까지 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교회에 스며들었다면, “단순히 도덕적인 다른 모든 세속성보다 정말로 훨씬 불길한 것이 될 것입니다.”

 

94. 이 세속성은 서로 깊게 결합된 방법으로 불타오를 수 있습니다. 하나는, 영지주의의 매력, 곧 순전히 주관적인 신앙인데, 이는 자신을 위로해 주고 빛을 밝히기 위한 특정 체험이나 일군의 사상과 일단의 정보에만 관심을 둡니다. 그렇지만 결국 자신만의 생각과 느낌에 자신을 가두어버리고 맙니다.

 

다른 하나는, 특정 규칙을 준수하거나 과거의 특정 가톨릭 스타일에 철저하게 충실하기 때문에 우월감을 느끼고 자신의 힘만을 믿는 사람들이 갖고 있는 자아 도취의 신펠라지오주의입니다. 이 경우 교리와 규칙에 충실한 것으로 보이지만, 대신 자아도취적이고 권위적인 엘리트 의식을 갖게 합니다. 복음화 대신에 다른 사람을 분석하고 분류합니다. 은총을 향하는 문을 여는 대신에 자신의 힘을 조사하고 검증하는 데 소진합니다.

 

이 두 경우에, 누구도 실제로는 예수 그리스도나 다른 사람에게 아무런 관심을 보이지 않습니다. 이것들은 인간중심의 내재론을 드러낸 것입니다. 그리스도교를 혼합한 형태인 이 두 개의 세속성에서 참된 복음화의 추동력이 나타나기란 불가능합니다.

 

95. 이런 교활한 세속성은 여러 태도에서 분명히 나타납니다. 이 태도들은 서로 맞서는 것처럼 보이지만 모두가 똑 같이 “교회의 공간을 점유하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전례와, 교리, 교회의 특권에 여봐란 듯이 몰두하지만, 복음이 하느님의 충실한 백성에게 실제로 미치는 영향과 현 시대에 구체적으로 필요한 것에는 아무런 관심도 기울이지 않습니다. 그런 경우 교회의 생활은 박물관의 일부 혹은 선택된 소수의 재화 같은 것으로 전락되고 맙니다.

 

다른 경우, 이 영적인 세속성은 사회적 정치적 소득이 주는 매력 뒤에, 혹은 실용적인 일들을 관리할 수 있다는 그들의 자부심이 주는 매력 뒤에, 혹은, 자기에게만 도움이 되며 자아를 실현하는 프로그램에 대한 강박이 주는 매력 뒤에 숨어 있습니다. 그것은 보여주기 위한 관심으로 나타나며, 겉치장, 만남, 저녁식사와 연회로만 이루어지는 사회생활로 나타납니다. 그것은 경영, 통계, 계획과 평가에 몰두하는 기업가 정신으로 이어질 수도 있는데, 그 수혜자는 물론 하느님 백성이 아니라 조직으로서 교회입니다.

 

여기에는 육화와 십자가 죽음과 부활이라는 그리스도의 흔적은 없습니다. 폐쇄된 엘리트 그룹이 형성될뿐입니다. 길을 나서고 멀리 있거나 그리스도를 갈망하는 수많은 사람들을 찾지 않습니다. 복음적 열정 대신에 만족과 방종이라는 공허한 즐거움이 자리를 차지합니다.

 

96. 이런 식의 생각은 작은 권력에도 만족하는 사람들의 허영을 키우기도 합니다. 싸우기를 멈추지 않는 분대의 이등병이 되기보다는 패배한 부대의 장군이 되기를 바라는 그런 허영 말입니다. 우리는 얼마나 자주 대단한 사도적 계획을 꿈꿉니까! 패배한 장군처럼 얼마나 꼼꼼하게 계획을 세웁니까! 그렇지만 그것은 하나의 교회로서 우리의 역사를 부정하는 것입니다.

 

교회의 역사는 희생과 희망, 매일의 투쟁과, “우리 이마의 땀”을 만들어내는 노동 속에서 출실하게 보낸 삶의 역사이기에 영광스러운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주로 “이뤄야 할 일이 무엇인가”에 관해 이야기하면서 시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스페인어로 이것을 “habriaqueismo”라고 부르는데, 높은 데에서 지시를 내리는 사목전문가와 영적 지도자처럼 행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끝없는 환상에 사로잡히고, 우리 백성이 겪는 어려움이나 실제적인 삶과 만나지 않습니다.

 

97. 이런 세속성에 빠진 사람은 위에서 그리고 멀리서 지켜보기만 합니다. 그들은 자기 형제자매가 예언하는 것을 배척합니다. 그들은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들을 불신합니다. 그들은 다른 사람들의 실수를 끊임없이 지적합니다. 그들은 자기들이 어떻게 보이는지에만 매달립니다. 그들의 마음은 오직 자신만의 내재성과 이익이라는 제한된 지평에만 열려 있습니다. 결과적으로 그들은 자신의 죄에서 아무것도 배우지 않고, 진정한 용서를 향해 문을 열어놓지도 않습니다. 이것이야말로 선한 것으로 가장된 엄청난 부패입니다

.

우리는 끊임없이 자신의 울타리에서 나와 예수 그리스도에 초점을 맞추고 가난한 사람들에게 헌신하는 사명을 유지함으로써, 그 같은 부패를 피할 필요가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천박한 영적 사목적 장식을 갖고 있는 세속의 교회에서 우리를 구원하십니다! 교회를 숨 막히게 하는 이 세속성은 오직 성령의 순수한 공기를 들이마심으로써만 치유될 수 있습니다. 성령께서는 하느님을 잃어버린 외적인 광신 속에 숨은 교회의 자기중심성에서 우리를 자유롭게 하십니다. 우리 스스로 복음을 빼앗기지 않도록 합시다.

 

우리들 가운데서 서로 싸우는 것을 거부합시다

 

98. 하느님 백성 가운데에서, 그리고 교회의 여러 공동체 안에서 얼마나 많은 싸움이 벌어지고 있습니까! 우리의 이웃 속에서 그리고 작업장에서, 그리스도인 사이에서 조차 얼마나 많은 싸움이 질투와 시기 때문에 벌어집니까! 영적 세속성은 일부 그리스도인을 다른 그리스도인과 싸우게 합니다. 자신의 권력, 특권, 즐거움, 그리고 경제적 안전 추구에 방해가 된다고 말입니다.

 

 어떤 이들은 더 큰 교회 공동체의 일부로 사는 것에 더 이상 만족하지 않고, “권력 중추부의 측근 그룹”을 만들어냄으로써 일종의 배타의 정신을 갖고 삽니다. 풍부한 다양성을 갖고 있는 전체 교회에 소속되어 있는 대신에, 그들은 그 자체로 다르고 특별하다고 생각하는 이런 저런 그룹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99. 우리의 세상은 전쟁과 폭력으로 찢어지고 있습니다. 사람을 나누는 광범위한 개인주의로 상처를 받고 있습니다. 개인주의는 자기만의 웰빙을 쫓아감으로써 사람을 서로 맞서게 하고 있습니다. 여러 나라에서 과거의 갈등과 분열이 재등장하고 있습니다. 저는 전 세계의 그리스도인이 그 공동체에서 형제적 친교라는 빛나고 매력적인 증거를 제시해줄 것을 특별히 요청합니다. 여러분이 서로를 얼마나 돌보는지, 여러분이 서로를 격려하고 동행하는지를 모든 사람이 보고 감탄케 합시다.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모든 사람이 그것을 보고 너희가 내 제자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요한 13,35)

이것이야말로 예수님께서 온 마음으로 아버지께 바친 기도입니다.

“그들이 모두 ... 우리 안에 ... 하나가 되게 해 주십시오 ... 그리하여 ... 세상이 믿게 하십시오.”(요한 17,21)

질투라는 유혹을 경계하십시오! 우리 모두는 한 배를 타고 같은 항구를 향하고 있습니다! 각자가 갖고 있는 은사, 모두를 위한 그 은사에 기뻐하는 은총을 청합시다.

 

100. 역사의 분열 때문에 상처를 입은 사람들이 우리의 이 용서와 화해로 부르는 초대를 받아들이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우리가 그들의 고통을 무시하거나 그들의 기억을 포기하라고 요구하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만일 그들이 진정으로 형제적 화해를 이룬 공동체를 실제로 보게 된다면, 그 증거가 빛나고 매력적임을 알게 될 것입니다.

 

저는 얼마나 많은 그리스도 공동체가, 또 봉헌생활을 하는 사람조차 다양한 형태의 적개심, 분열, 중상, 비방, 뿌리 깊은 반목, 시기, 그리고 무슨 수를 써서라도 특정 이념을 강요하는 것, 심지어는 분명히 마녀사냥으로 보이는 박해까지 견뎌야 하는 것을 생각하면 너무나 고통스럽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견뎌야 할 길이라면, 우리는 누구에게 기쁜 소식을 전해야 하겠습니까?

 

101. 사랑의 법을 이해할 수 있도록 주님께 도움을 청합시다. 우리에게 사랑의 법이 있다는 것이 얼마나 좋습니까! 이 사랑의 법이 우리가 어떤 경우에도 서로 사랑하도록 한다는 것이 얼마나 좋습니까! 바오로 사도는 우리 모두에게 권고했습니다.

 

“희망 속에 기뻐하고 환난 중에 인내하며 기도에 전념하십시오.”(로마 12,12) 그리고 다시 “낙심하지 말고 계속 좋은 일을 합시다.”(갈라디아 6,9) 우리 모두에게는 좋아하는 것과 좋아하지 않는 것이 있습니다. 이 순간 아마 우리는 누군가에게 화가 나 있을 수 있습니다. 적어도 주님께 다음과 같이 말씀드립시다. “주님, 저는 이 사람에게, 또 저 사람에게 화가 납니다. 저는 그를 위해 기도합니다.” 내가 화를 내는 사람을 위해 기도하는 것은 사랑을 향해, 그리고 복음화 행위를 향해 내딛는 아름다운 발걸음입니다. 오늘 기도합시다! 우리 스스로 형제적 사랑이라는 이상을 빼앗기지 않도록 합시다!

 

교회의 다른 도전들

 

102. 단순하게 말해서 평신도는 하느님 백성의 대다수를 차지합니다. 품을 받은 교역자는 소수이고, 그들 대다수는 하느님 백성에게 봉사하는 사람입니다. 교회 안에서 평신도는 자신의 신원과 사명을 점점 더 분명하게 자각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아직까지는 충분하지는 않지만 수많은 평신도에게 의지할 수 있습니다. 이 평신도들은 공동체의식이 매우 강하며, 사랑의 실천과 교리교육, 신앙의 기념에 대단히 충실합니다. 동시에 평신도의 책임을 분명하게 자각하고 있습니다.

 

세례와 견진에 기반을 둔 평신도의 책임은 모든 곳에서 같은 방식으로 드러나지 않습니다. 꽤 많은 경우에 평신도들은 중요한 책임을 맡기에 충분한 교육을 받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어떤 경우는 평신도를 의사결정에서 배제하는 과도한 성직자 중심주의 때문에 평신도들이 행동하고 말할 수 있는 여지가 교회 안에 없기 때문입니다.

 

비록 많은 사람이 평신도 사도직에 몸담고 있다고 하더라도, 그 사도직은 사회, 정치, 경제 영역에서 그리스도교적 가치를 상당 수준까지 침투시키는 일에는 충분히 반영되지 않고 있습니다. 평신도 사도직이 복음을 사회의 변형에 적용하는 데 쓰이지 않고, 대부분 사도적이 교회 안의 활동에 제한되어 있습니다. 평신도의 양성, 그리고 직업과 지성 생활의 복음화는 사목에 있어서 중요하고도 대표적인 도전입니다.

 

103. 교회는 여성이 남성보다 더 많이 갖고 있는 감수성, 직관, 다른 여러 탁월한 능력을 통해서 사회에 기여하고 있음을 알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서 저는 다른 사람에게 보이는 여성의 특별한 배려심, 절대적이라 할 수는 없을지라도 모성애에서 발견할 수 있는 그 특별한 배려를 생각합니다. 저는 많은 여성이 백성과 가정과 그룹을 인도하는 데, 그리고 신학적 성찰에 새롭게 기여하는 가운데, 사제들과 함께 사목의 책임을 공유하고 있음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이런 여성들이 교회 안에서 자신의 실재를 드러낼 수 있는 폭넓은 기회를 주어져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여성성은 사회생활의 모든 영역에서 필요하다. 여성이 일터에서 일할 수 있도록 보장해야 한다.” 그리고 중요한 결정이 이루어지는 다른 여러 환경, 즉 교회와 사회조직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104. 여성의 정당한 권리가 존중받아야 한다는 것은 남성과 여성이 그 존엄성에서 평등하다는 확고한 신념에 기반을 두고 있습니다. 이는 교회가 가볍게 피해갈 수 없는 무겁고 도전적인 물음을 제기합니다. 사제직을 남성에게만 유보하고 있는 것은 성찬례로 자신을 내어주신 신랑 그리스도의 표지입니다. 이것은 토론할 수 있는 주제가 아닙니다. 그러나 성사적 권한(sacramental power)과 일반 권한(power in general)을 지나치게 동일시한다면, 그것은 심각한 불화를 일으키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성사적 권한을 말할 때, “우리는 존엄함이나 거룩함의 영역이 아니라 기능의 영역에 있습니다.” 직무 사제직은 예수님께서 당신 백성에게 봉사하기 위해서 채택한 하나의 수단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귀한 존엄함은 모든 사람에게 열려 있는 세례성사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사제를 (모든 은총의 주요 원천이며) 머리이신 그리스도와 통합시킨 것(configuration)이 그를 다른 사람들 위에 세우려는 고양을 포함하는 것은 아닙니다. 교회에서 기능들은 “상호간에 상대적 우월성을 있음을 지지하지 않습니다.” 사실 마리아라는 한 여성이 주교들보다 더 중요한 분입니다. 직무 사제직의 기능이 “교계적”이라고 간주될 때조차 “그것이 전적으로 그리스도의 구성원들이 갖는 거룩함에 따라 배열된 것임”을 반드시 기억해야 합니다.

 

 직무 사제직의 핵심과 축은 지배를 의미하는 권력이 아니라 성체성사를 관리하는 힘입니다. 성체성사는 직무 사제직이 갖는 권위의 원천입니다. 그 권위는 항상 하느님의 백성에 대한 봉사입니다.

 이 점은 목자들과 신학자들에게 커다란 도전이 됩니다. 왜냐하면 교회 생활의 다양한 영역에서 이루어지는 의사결정에서 여성이 맡을 역할과 관련해서, 이 점이 무엇을 수반할 것인지를 보다 면밀하게 알아내야 할 위치에 있기 때문입니다.

 

105. 전통적인 방식의 청년 사목활동 역시 사회변화의 충격으로 힘들어하고 있습니다. 젊은이들은 종종 통상적인 구조 안에서 자신의 관심, 욕구, 문제, 그리고 상처에 대한 반응을 발견하지 못합니다. 어른으로서 우리는 그들의 목소리에 인내심을 갖고 듣는 것, 그들의 관심과 요구를 인정하는 것, 그들이 이해할 수 있는 언어로 그들에게 말하는 것이 어렵다는 것을 압니다.

 

똑 같은 이유로, 교육 분야에서 기울이는 우리의 노력이 기대하는 결과를 내지 않습니다. 젊은이들의 연합과 운동이 일어나고 자라는 것은 성령께서 하시는 일이라 볼 수 있습니다. 성령께서는 그들의 기대와 심오한 영성과 보다 실제적인 소속감 추구를 충족시킬 새로운 오솔길을 비추십니다. 그러나 이런 연합들이 교회의 전반적인 사목 노력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지에 대해서는 확실히 할 필요가 있습니다.

 

106. 젊은이에게 접근하는 것이 항상 쉬운 일은 아니더라도, 두 영역에서는 상당한 진전이 이루어졌습니다. 공동체 전체가 젊은이를 교육하고 복음화 해야 한다는 자각과 젊은이들이 더 큰 리더십을 행사해야 한다는 시급한 요구가 그것입니다. 오늘날 상호 관계 맺기와 헌신에 위기를 맞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많은 젊은이가 이 시대가 안고 있는 문제 앞에서 공동전선을 형성하고 있으며, 다양한 형태의 자발적인 사업과 활동을 펼치고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만 합니다. 어떤 젊은이들은 자기 교구와 다른 지역에서 봉사그룹이나 선교단체의 구성원으로서 활동합니다. 젊은이들이 예수님을 모든 거리에, 모든 마을에, 지구 구석구석에 기쁘게 전하는 “거리의 선포자들”이 되는 것을 보는 것은 얼마나 아름답습니다!

 

107. 많은 곳에서 사제와 축성생활에서 성소 부족 문제를 겪고 있습니다. 많은 경우 공동체 안에서 사도적 열정이 없어서 사람을 열광하게 하고 끌어들이는 힘이 식은 탓이기도 합니다. 그리스도를 다른 이에게 소개하려는 생활과 열정과 욕망이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 참된 성소가 일어날 것입니다. 유별나게 헌신적이거나 기쁘게 생활하지 않는 사제가 있는 본당에서도, 형제적 생활과 공동체의 열정은 젊은이가 하느님과 복음의 가르침에 자신을 봉헌하려는 열망을 일깨울 수 있습니다.

 

그 같이 살아있는 공동체가 끊임없이 성소를 위해 기도하고, 공동체의 젊은이에게 특별한 축성의 길을 용감하게 제시한다면 말입니다. 다른 한편으로, 성소의 부족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우리는 사제직 지망자들에 대한 보다 나은 선발과정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신학교는 그 동기가 특히 감정적 불안, 권력 추구, 인간적 명예, 혹은 경제적 풍요 따위와 관련되어 있다면 그 동기가 무엇이든 그 지망자를 받아들여서는 안 됩니다.

 

108.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저는 완전한 진단을 제시하려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저는 공동체를 초대해서 공동체와 그 이웃이 직면한 도전들을 알아내고, 제가 제시한 이러한 전망들을 풍요롭게 하고 완성해주기를 바랍니다. 저는 공동체들이 그렇게 하는 가운데, 우리가 시대의 징표를 읽으려 할 때마다 젊은이와 노인의 말에 귀를 기울이는 것이 많은 도움이 될 것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기를 희망합니다. 젊은이는 우리더러 희망을 새롭게 하고 확장하라고 요구합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인류에게 새 방향을 제시하고, 우리에게 미래를 열어줍니다. 우리가 오늘날 세상에 생명을 주지 않는 관습과 구조에 더 이상 향수를 품고 거기에 머물지 않도록 말입니다.

 

109. 도전은 극복하기 위해 존재합니다! 현실주의자가 됩시다. 그러나 우리의 기쁨, 우리의 담대함, 우리의 희망으로 가득 찬 헌신을 잃지는 맙시다. 우리 스스로 선교의 활력을 빼앗기지 않도록 합시다.


번역: 박동호 신부
서울대교구 신정동 성당, 서울대교구 정의평화위원회 위원장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http://www.catholic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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