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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웅적 순교와 개죽음 사이

작성자지성용신부|작성시간10.08.24|조회수48 목록 댓글 0

[생활하는 신학-정용택]
2010년 08월 20일 (금) 18:15:24 정용택 dawid99@hanmail.net

   
▲ 김은국 씨
재미소설가 김은국(金恩國, 미국명 Richard E. Kim, 1932-2009). 그는 함경남도 함흥 출신으로, 해방 후 월남하여, 대학 재학 중에 한국전쟁에 장교로 참전하고, 제대 후 미국으로 건너갔다. 유수의 대학들에서 문학을 전공했고, 나중에 성공한 전업 작가이자 교수로서 미국문단에서 활발히 활동했다. 바로 그의 대표작으로 꼽히는 작품이 1964년 발표된 The Martyred, 국내에는 이미 <순교자>라는 제목으로 여러 차례 번역된 바 있다. 최근 도정일 교수의 재번역으로 문학동네에서 새로운 판본으로 출간되어 반가운 마음에 읽기 시작했다.

이 소설을 꿰뚫고 지나가는 쟁점은 이렇다. 한국전쟁이 터진 날, 공산당에 의해 체포된 14명의 목사들 중, 처형된 12명(평양기독교의 지도자급 인물인 박목사를 포함한)의 최후, 그리고 그 가운데 두 목사(신목사와 한목사)만 살아남은 이유의 진실은 무엇인가 하는 점이다. 또한 사건의 진상이 드러난 후, 그것을 있는 그대로 공개하는 것이 과연 정당한지를 둘러싼 등장인물들(신목사, 이대위, 장대령, 고군목, 박대위 등) 사이의 의견대립이다.

1950년 10월 인천상륙전쟁의 성공 이후, 국군과 유엔군이 평양을 점령했을 때, 대학강사 출신의 이대위가 소속된 정치정보국은 전쟁초기 공산당에 의해 저질러진 잔악한 종교적 박해를 전세계에 폭로하기 위해, 일단 최후의 행적이 묘연한 목사들에 대한 조사를 시작한다. 그런데, 목사들의 죽음에 대한 조사가 완결되지도 않은 시점에서, 이 조사의 책임자인 장대령은 12명 목사들의 죽음을 '영웅적인 순교'로 확정지으려고 한다.

이 과정에서 실무 책임자인 이대위는 장대령과 충돌하고, 이대위는 진실은 다른 곳에 있을지 모른다는 의혹을 품게 된다. 그러던 중 육군방첩대가 생포한 평양 비밀경찰 소속 정소좌는 그 목사들이 “살려달라 아우성을 치고, 자기네 신을 부정하고 동료들을 헐뜯다"가 “개처럼” 죽어갔다고 폭로한다.

   

개죽음 또는 순교

단지 두 명의 목사, 곧 한목사와 신목사만이 처형을 모면했는데, 소설의 초반부에선 두 사람이 살아남은 이유가 그들이 배신자였기 때문인 것으로 추측하도록 묘사된다. 하지만, 결국 사건의 진실은 전혀 달랐다. 나머지 12명의 목사들은 순교자라고 하기엔 너무나 초라한 인간의 모습으로 죽어갔고, 오히려 살아남은 신목사야말로 끝까지 고문에 굴복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 용기에 감탄한 나머지 공산당이 그를 살려준 것이다.

한편, 또 한 명의 생존자인 한목사는 죽은 박목사가 총애했던 젊은 목사인데, 처형 직전에 다른 목사들로부터 그들을 대표하여 기도해줄 것을 요청받았을 때 박목사가, “난 당신들을 위해 기도할 수 없어. 나를 위해서조차도 기도할 수 없으니까. 정의롭지 못한 하나님에게 나는 기도하고 싶지 않아!”(170; 214) 라고 외치는 것을 보고 충격에 휩싸인다. 게다가 신목사로부터 그의 신앙의 비밀, 곧 신의 존재를 믿지 않는다는 고백을 들은 후, 한목사는 절망을 견디다 못해 끝내 실성했고, 공산당은 미쳐버린 그를 신목사와 함께 풀어준 것이다.

이처럼 목사 12인의 비영웅적인, 사실상 개죽음에 불과한 진상이 밝혀졌음에도 불구하고, 정치정보국의 지휘관인 장대령은 원래의 계획대로, 이들을 순교자로 추모하는 합동예배를 강행한다. 그리하여 이대위와 장대령의 갈등이 심화되고, 그 사이에서 신목사의 행동이 주목의 대상이 된다.

이대위는 진실이 왜곡되어서는 안 된다고 하면서, 신목사에게 순교자들에 관한 비참한 진실을 밝힐 것을 요구하지만, 장대령은 신목사가 국군의 프로파간다를 위해 진실을 덮고 군의 계획에 협조해주기를 기대한다. 신목사는 처음엔 자신이 12명의 처형현장에 같이 있지도 않았다고 주장했다가, 결국 그곳에 자신도 함께 있었다는 사실이 알려진 후 교인들로부터 배신자 ‘유다’로 몰려 고초를 겪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끝내 교인들에게 순교자의 진실을 말하지 않는다.

그리고 잠시 평양을 떠났다가 돌아와서는 추도예배에 참석하고, 또 부흥회를 열어서 자신이 배신자라고 참회한 후, 죽은 12명의 목사를 순교자로 찬양한다. 왜 진실을 은폐하는 것인지에 대한 이대위의 질문에 신목사는 이렇게 답변한다:

“젊은 친구, 그들이 진실을 원치 않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소?”(103)

무신론자인 동시에 신실한 목회자

신목사는 자신의 피신 중에도 전쟁으로 인한 대중들의 고통과 불행을 계속 목격하게 되고, 마음을 바꾸어 진실을 은폐하는 대신, 자신의 새로운 진리를 따르기로 한 것이다. 사실 전쟁 이전부터 이미 그는 무신론적 신앙으로 기울어지고 있었고, 전쟁을 겪으면서 인간의 고통의 무의미함과, 그 고통의 현장에 부재하는 신을 더욱 철저히 자각하게 된다.

“난 평생 신을 찾아 헤매었소.” 그는 소곤거리듯 말했다.
“그러나 내가 찾아낸 것은 고통받는 인간…… 무정한 죽음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인간뿐이었소.”
“그리고 죽음의 다음은?”
“아무것도 없소! 아무것도!”(255)


그런데도 왜 신목사는 다시 성도들 앞에 서서 목사로서 자기 역할을 하는 것일까? 더욱이 그는 중공군이 전쟁에 개입한 후, 전세가 역전되어 국군과 유엔군이 평양을 포기하고 남하할 때, 이대위를 따라가지 않고 평양에 남아 성도들을 돌보겠다고 선언한다. 결국 그는 다시 평양에서 공산군에 체포되어 감옥에 수감되었고, 그의 최후에 대해선 여러 가지 모순된 소문들이 떠돈다.

신목사는 왜 무신론자인 동시에 신실한 목회자의 길을 계속 간 것일까? 여기서 이 소설은 진상을 넘어 진실에서, 다시 진실을 넘어 진리의 차원으로 주제를 옮겨간다. 다시 말해, 은폐되어 있던 소위 ‘순교자’들에 관한 ‘진상’(그들의 개죽음) 뒤에 숨겨진 종교의 진실(신의 부재와 고통의 무의미함)을 폭로하는 데 그치지 않고, 이 소설은 그 진실 너머에서 작동하는 신앙적 진리(신의 존재와 구원이라고 하는 ‘위대한’ 환상의 가치를 긍정하는)에 대해 말하기 시작한다.

“날 좀 도와주시오. 불쌍한 내 교인들, 전쟁과 굶주림과 추위와 질병, 그리고 삶의 피곤에 시달리는 이들을 내가 사랑할 수 있게 도와주시오. 고난이 그들의 희망과 믿음을 움켜쥐고 그들을 절망의 바다로 떠내려 보내고 있소. 우린 그들에게 빛을 보여주어야 해요. 영광과 환영이 그들을 절망의 바다로 떠내려 보내고 있소. 우린 그들에게 빛을 보여주어야 해요. 영광과 환영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고 하나님의 영원한 왕국에서 마침내 승리를 거둘 것이라는 확신을 주어야 합니다.”
“희망이라는 환상을 준단 말입니까? 무덤 이후의, 죽음 이후에 대한 환상을 주란 말입니까?”
“그렇소! 그들은 인간이기 때문이오. 절망은 이 피곤한 생의 질병이오. 무의미한 고난으로 가득 찬 이 삶의 질병입니다. 우린 절망과 싸우지 않으면 안 돼요. 우린 그 절망을 때려 부수어 그것이 인간의 삶을 타락시키고 인간을 단순한 겁쟁이로 쪼그라뜨리지 못하게 해야 합니다.”
“목사님은요? 당신의 절망은 어떡하고 말입니까?”
“그건 나 자신의 십자가요. 그 십자가는 나 혼자서 짊어져야 하오.”
“용서하십시오. 목사님. 제가 목사님을 오해하고 있었습니다. 용서하십시오.”(255)

진실을 활용해 진리를 구현한다

참혹한 고통의 현장에 신은 부재했으며, 실상 인간이 당하는 고통엔 결국 아무런 형이상학적 의미도 없다는 것, 그것은 단지 이 사회의 현실적 역학관계가 만들어낸 폭력이자, 구조적 모순의 결과일 뿐이라는 것. 이 소설에서 이대위가 12명의 목사들의 죽음이 순교가 아니라고 말할 때, 대신에 그가 말하고 싶었던 죽음의 진실은 다름 아닌 전쟁의 결과물, 즉 “짐승 같은 국가들과 썩은 정치인들 사이의 눈먼 권력 투쟁이 빚어낸 구역질나는 결과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과연 진리일까? 그것은 진리가 아니라 진실에 속한 것이다. 진리는 그 진실을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다. 신목사처럼 그 진실을 은폐하고 교인들을 여전히 종교가 주는 희망으로 인도하는 것이 그에겐 진리이듯이, 또다른 조건과 상황 속에서는 그 진실을 다른 방식으로 처리함으로써, 끝내 인간을 구원하는 것, 그것이 바로 진리인 것이다.

인간을 구원한다는 것, 인간이 주체적 자아로 계속 살아갈 수 있게 만드는 일에 있어, 이 세계의 고통에 의미가 있는가 없는가를 따지는 ‘진실’의 문제는 사실 크게 보면 부차적인 사안에 불과할 수도 있다. 신목사와 이대위는 진실을 활용함으로써, 진리를 구현하는 데 있어 서로 상반된 생각을 갖고 있었다. 이대위는 진실을 밝히는 것이 곧 진리를 실천하는 것이라 생각했지만, 신목사는 달랐다.

그는 이대위가 생각하는 것(목사들도 인간일 뿐이라는) 이상으로 세계의 진실(신이 부재하며, 고통엔 아무런 의미도 없다는 것)을 깨달은 인물이다. 하지만, 그는 진실을 깨닫는 데만 머무르지 않았다. 그는 진실 너머 진리를 실천하는 방식까지 깨달은 사람이다. 진실은 진리를 어떻게 실천하느냐에 따라 언제든지 다르게 경험될 수 있는 것에 불과하다. 진실과 환상의 경계는 너무나 모호하기 때문이다.

그래도 인간의 역사적 경험과 성찰적 사유를 통해 밝혀진 진실은 엄연히 진실이다. 하지만, 그 진실의 차원을 넘어서 존재하는 것이 또한 진리이기도 하다. 신앙은 고통이라고 하는 진실(무(無))에서 출발하여 진리로 나아가는 여정이다. 물론 진실을 외면하고 얻어질 수 있는 진리는 진리가 아닐 것이다. 그렇지만 또 역설적으로, 진실의 가치가 드러나는 지점은 언제나 진리의 실천과정이다. 그렇기에 신앙은 여전히 포기될 수 없는 것이다.

구원이 없어도 여전히 구도적(求道的)일 수 있다

이 소설은 우리에게 몇 가지 중요한 진리를 가르쳐준다. 이 소설에 따르자면, 비록 진리가 존재하지 않는다 할지라도 인간은 여전히 진실할(truthful) 수 있다. 비록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 할지라도 인간은 여전히 신실할(faithful) 수 있다. 비록 구원이 존재하지 않는다 할지라도 인간은 여전히 구도적(求道的)일 수 있다.

아니 구원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오히려 그 구도의 열정은 더욱 솔직한 것일 수 있다. 그렇기에 진리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진실을 깨닫는 것을 넘어 ‘자신의 진리’, 곧 ‘이상한 형태의 사랑’을 실천하는 차원으로 나아감으로써, 신이 부재하는 시대에도 여전히 지속가능한 신앙윤리를 제시했다는 점에서 이 소설의 가치가 있다.

 정용택 /제3시대그리스도교연구소 상임연구원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http://www.nahnews.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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