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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한국 천주교회의 ‘늦봄’ 강우일 주교

작성자성은정 마리아|작성시간14.02.07|조회수26 목록 댓글 0

문화
한국 천주교회의 ‘늦봄’ 강우일 주교강연집 <기억하라 연대하라> 출간
한상봉 기자  |  isu@catholic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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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4.02.05  15:26: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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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의 이름으로 행동하는 사람들, 그들이 말하는 국가의 안보를 걱정하면서 일한다는 사람들이 행하는 일들, 그들이 말하는 국가의 정책이 국민들의 동의나 공감대 속에서 집행되는 것이 아니라 자기들만을, 그러니까 지배층의 소수 권력자들만을 위한 것인 경우가 많습니다.”

 

한국 천주교 제주교구장이면서 주교회의 의장인 강우일 주교의 강연집 <기억하라 연대하라>(삼인, 2014)가 출간됐다. 강우일 주교는 그동안 교회 지도자로서 사회 전반에 걸쳐 복음적 식별을 실행해 왔고, 특별히 제주 강정 해군기지 문제와 관련해 분명한 반대 입장을 표명해 왔다. 이러한 태도는 한국 천주교의 다른 주교들과 똑같은 입장은 아닐지라도, 최근 사제들의 시국미사가 연이어 봉헌되는 상황에서, 주교의 예언자적 발언으로 이들의 행동을 크게 고무하고 있다.

 

   
▲ <기억하라 연대하라>, 강우일, 삼인, 2014

마침 김수환 추기경 선종 5주년을 맞이하는 시점인데, 이 책을 기획한 오창익 인권연대 사무국장은 “마치 한창 때의 김수환 추기경을 보는 것 같았다”고 말했다. 우리 시대에는 진정한 원로가 없다는 이야기가 있다. 실제 2012년 <시사저널> 조사에서 천주교계 전문가들이 가장 만나고 싶어 하는 인물 4위 가운데 김수환 추기경과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이태석 신부는 이미 고인이 되었고, 3위를 차지한 강우일 주교만이 살아 있는 인물이다.

 

오 국장은 강우일 주교를 문익환 목사와 빗대어 ‘늦봄’ 같이 나타나신 분이라고 소개했다. 문익환 목사가 민주화운동에서 드러난 것은 1976년 명동성당 3.1구국선언 사건 때인데, 그 당시 문 목사 나이 58세였다. 문 목사는 늦은 나이에 이 길에 들어섰다는 이유로 자신의 호를 ‘늦봄’이라 지었다. 강우일 주교 역시 1986년 서울대교구 보좌주교가 된 이후 16년 동안 묵묵히 김수환 추기경을 보좌하는 역할에만 충실했다. 강 주교가 본격적으로 사회적 발언에 나선 것은 2002년 제주교구장이 된 다음부터였다.

 

한국에서 가장 큰 교구에서 요직 두루 거치고
나자렛처럼 작디작은 교구의 주교가 되어…

 

‘젊은이 치고 진보적이지 않은 사람이 없고, 늙은이 치고 보수적이 아닌 사람이 없다’는 말이 있지만, 60세 이후에 강우일 주교는 “점잖게 이미지 관리하며 철없는 젊은이들 걱정이나 해야 할 나이”에 오히려 “말과 행동이 과감해지고, 그 폭도 넓어졌다”고 오 국장은 평가했다. 그러나 강 주교의 변화는 김수환 추기경 장례미사에서 이미 예고된 것이었다. 강 주교는 이날 고별사에서 “가난하고 힘없는 이들에게 복음을 말로써 가르치는 것보다 그들 곁에서 그들과 같은 눈높이에서 함께 사는 것”이 김 추기경의 한결같은 소망이었다고 전했다.

 

강우일 주교는 주교가 되기 전인 1977년 김수환 추기경 비서로 일을 시작하면서 김 추기경이 은퇴했던 1998년까지 꼬박 21년을 보좌했다. 김수환 추기경의 분신 같던 그가 이제 와서 추기경의 빈자리를 채우고 싶었을 것은 자명한 일이다. 그가 2002년 한국 천주교회에서 가장 작은 교구인 제주교구를 맡게 된 것은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예수의 고향 나자렛도 작디작은 곳이었다”고 오창익 국장은 말한다.

 

오 국장은 “예수가 ‘나자렛 사람’으로 불린 것은 지역 차별적 규정이기도 했다. 변두리에서 온 사람이 뭐 하나 변변한 게 있겠냐는 힐난이 늘 예수를 따라다녔다”며 “하지만 예수가 만약 로마에서 온 사람이었다면, 적어도 예루살렘 사람이었다면, 그래도 예수는 우리에게 이토록 오래 기억되는 존재일 수 있었을까” 물었다. 이처럼 제주도도 역사적으로 배제와 소외가 강요된 섬이었다. 강우일 주교 자신은 엘리트코스를 밟으며 성장했고, 한국에서 제일 큰 교구인 서울대교구에서 요직을 두루 거친 사람이었지만, 제주에서 소수자 정서를 온몸으로 체험하며 새로운 면모를 보이기 시작했다.

 

   

2011년 10월 10일, 강우일 주교가 제주 해군기지 공사장 앞에서 ‘제주 평화의 섬 실현을 위한 천주교연대’ 2주년 기념 미사를 집전하고 있다. 이 자리에서 강 주교는 “국가는 국민의 생명과 평화에 봉사하기 위한 존재이며 그것을 빼앗을 권리가 없다”며 “권력자들은 그 권력이 어디서 비롯되고 무엇을 위한 것인지 깊이 생각해야 한다”고 말했다. ⓒ정현진 기자

 

2007년 노무현 정권이 제주 강정마을에 해군기지 건설을 결정했을 때, 제일 먼저 반응한 것은 강우일 주교가 이끄는 제주교구였다. 5월 14일 건설후보지 결정 이후 4일 만인 18일에 제주교구 사제단은 ‘평화의 섬 제주를 염원하는 평화기도회’를 열었다. 5월 21일에는 강 주교가 집전하는 시국미사가 봉헌됐다. 주민들의 의사가 제대로 반영되지 않은 국책사업은 원천무효라는 것이다.

 

정권을 가리지 않고 예언직 수행하는 강 주교의 복음적 평화주의
강 주교의 글과 말, 우리의 약한 곳 건드려 불편하지만, 진정한 삶으로 인도 

당시 노무현 대통령은 “무장 없이는 평화가 지켜질 수 없다”고 했지만, 강우일 주교는 “인간들이 의지하는 군사력이 결코 이 땅의 평화를 지켜주는 보증이 될 수 없음을 깨닫게 해” 달라는 기도문을 발표했다. 이명박 정권 이후 본격화된 해군기지 건설에도 한사코 반대 의사를 분명히 한 강우일 주교를 보면, 강 주교가 어떤 정권이든지 눈치를 보지 않고 주교로서, 예언자로서 복음적 판단을 내리고 있다는 확신을 갖게 한다.

 

2008년 부활절 사목교서에서 강우일 주교는 예수가 단순히 십자가 죽음에 이른 것이 아니라, “권력의 음모와 폭력에 철저한 무저항과 비폭력으로 맞서심으로써 폭력을 오히려 무력화하였다”고 말하고, 예수가 부활한 다음에 여성들에게 처음 모습을 드러낸 이유는 그들이 사회적 약자였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예수가 “아버지나 남편의 보호막이 없으면 세상에서 가장 무방비 상태에 놓인 연약한 신분”에게 먼저 다가간 것은 “작은이들에게 당신의 승리와 영광의 증인이 되고 그들에게 힘과 용기를 불어넣어주는 벗이 되기를 원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구제역 사건을 보면서, 밀양과 강정을 보면서, 후쿠시마 원전 폭발 사건을 보면서, 국정원 사태를 보면서 강우일 주교는 인간의 탐욕과 국가권력의 폭력을 직시했다. 오창익 국장은 강 주교의 말과 글에 “힘이 있다”면서 “그의 말과 글이 때론 우리의 약한 곳을 건드리기에 불편하기도 하지만, 그의 말과 글, 그리고 ‘가르침’은 우리를 진정한 삶으로 나아가게 한다”고 말했다. 그래서 강 주교의 세례명인 ‘베드로’처럼 “그가 진리로 이르는 문의 열쇠를 쥐고 우리를 이끄는 것 같다”고 말했다.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http://www.catholic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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