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FE

평화에 기여하는 것으로서 사회적 대화

작성자성은정 마리아|작성시간14.02.15|조회수15 목록 댓글 0

VI. 평화에 기여하는 것으로서 사회적 대화

 

  
 

238. 복음화는 대화의 길도 포함하고 있습니다. 오늘날 교회에는 세 대화 영역이 있습니다. 이 대화들은 교회가 인간의 완전한 발전을 증진하고 공동선을 추구하기 위해 존재할 필요가 있다는 것을 드러냅니다. 국가와의 대화, 사회와의 대화 - 이는 문화와 대화, 학문(과학)과 대화를 포함합니다. - 그리고 비 가톨릭교회의 다른 신앙인과의 대화가 그 세 영역입니다.

 

이 모든 대화에서 “교회는 신앙이 제공하는 빛을 통해 말합니다.” 교회는 지난 이천년 동안 이 신앙의 빛을 체험 했으며, 항상 인간의 생명과 고통을 간직하고 있습니다. 이 빛은 인간의 이성을 초월합니다. 그러나 이 빛은 믿지 않는 사람도 풍요롭게 할 수 있고, 그들의 삶도 의미가 있으며, 이성을 자극해서 이성의 전망을 확대시킵니다.

 

239. 교회는 “평화의 복음”(에페소 6,15)를 선포하며, 이 광대한 보편적 선을 수호하는 데 모든 국가와 국제 공권력과 협력하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평화 자체이신(에페소 2,14 참조) 예수 그리스도를 가르침으로써, 새 복음화는 모든 세례 받은 사람에게 평화를 이루는 사람, 화해를 이룬 생활에 대해 믿을만한 증인이 될 것을 요청하고 있습니다.

 

대화가 만남의 한 형식으로서 자리 잡은 그런 문화에서는, 공정하고, 반응하며, 포괄하는 사회라는 목표를 추구하면서, 일치와 합의를 구축하기 위한 수단을 만들어야 합니다. 그런 과정에서 역사적 주체, 곧 주요 장본인은 전체로서의 백성과 그들의 문화입니다. 단일한 계급, 소수, 그룹, 혹은 엘리트가 주체가 아닙니다. 우리에게는 소수를 위한 소수나, 모든 이를 위해 발언하는 것이라고 주장하는 계몽된 소수나, 혹은 목소리 큰 소수가 만들어낸 계획이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이 계획은 함께 살자고 초대하는 사회적 문화적 합의에 관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240. 사회의 공동선을 증진하고 수호하는 것은 국가의 책임입니다. 보조성과 연대성의 원리에 기초해서, 그리고 충분하게 이루어진 정치적 대화와 합의에 기초해서, 국가는 모든 이의 통합적 발전을 위한 작업에 있어서 근본적인 역할을 수행합니다. 이 역할은 위임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현재 이 역할은 사회적 겸손을 필요로 합니다.

 

241. 국가와 대화를 나누고, 사회와 대화를 나누면서, 교회는 모든 개별 현안을 위한 해결책을 갖고 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사회의 다양한 분야와 함께 교회는 각 사람의 존엄과 공동선에 가장 잘 부합하는 그런 프로그램들을 지지하고 지원합니다. 그 일을 할 때 교회는 인간 생활에 근본적인 가치들과 정치 활동에서 드러날 수 있는 확신들을 분명하게 제시합니다.

 

신앙과 이성과 학문(과학) 사이의 대화

 

242. 학문(과학)과 신앙 사이의 대화 역시 평화에 기여하는 복음화 활동에 포함됩니다. 실증주의와 과학만능주의가 “확실한 과학의 지식이 아닌 다른 모든 형태의 지식의 유효성을 받아들지 않는” 반면에, 교회는 다른 길을 제시합니다. 그 길은 경험과학에 적합한 학문방법들과 철학, 신학, 그리고 신앙 자체 같은 다른 영역의 지식 사이의 종합을 요청합니다. 철학과 신학, 그리고 신앙 영역의 진실은 자연과 인간의 지성을 초월하는 신비에로 우리를 끌어올려 줍니다.

 

신앙은 이성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그 반대로 신앙은 이성을 찾고 신뢰합니다. 왜냐하면 “이성의 빛과 신앙의 빛은 모두 하느님에게서 나오며,” 서로 모순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복음화는 과학의 진보를 존중합니다. 그러면서 교회는 어느 단계에 있든 인간 생명이 중심이며 최고의 가치라는 것을 과학의 진보가 존중하도록, 그 진보에 신앙의 빛을 비추고 자연법이 스며들게 하고자 합니다. 이 대화로 사회의 모든 분야는 풍요로워질 수 있습니다. 이 대화는 새로운 사상의 지평을 열고, 이성의 역량을 확장시킵니다. 이 대화는 조화와 평화의 길이기도 합니다.

 

243. 교회는 과학의 놀라운 진보를 억누를 뜻이 전혀 없습니다. 반대로 교회는 하느님께서 인간의 마음에 심어주신 무궁한 가능성을 인정하면서 즐거워하고 기뻐하기까지 합니다. 엄격하게 특정 영역의 탐구에 집중하는 - 과학이 이성이 논박할 수 없는 어떤 결론에 도달할 때마다 신앙은 그것을 부정하지 않습니다.

 

믿는 사람은 사람의 마음을 끌지만 충분히 입증되지 않은 과학적 의견이 신앙의 도그마와 같은 비중을 갖는다고 주장할 수는 없습니다. 때때로 일부 과학자들은 자신의 진술과 주장을 확신함으로써 자신의 과학적 역량의 한계를 넘어섭니다. 그러나 여기서 문제는 이성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참되고, 고요하며 생산적인 대화의 길을 차단하는 특정 이데올로기의 전파에 있습니다.

 

교회일치를 위한 대화

 

244. 교회일치에 대한 책무는 주 예수님께서 “그들이 모두 하나가 되게 해주십시오.”(요한 17,21) 하신 기도에 응답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 그 분열을 극복할 수 있다면, 교회가 “세례로 교회에 들어왔지만 교회와 완전한 친교를 이루지 못한 교회의 자녀들에게서 교회의 그 고유의 충만한 보편성”을 실현할 수 있다면, 그리스도교 메시지의 신뢰성은 훨씬 더 커질 것입니다. 우리는 동행하는 순례자들임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그것은 우리가 모든 의심이나 불신을 제쳐두고 동료 순례자를 진심으로 신뢰하여야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것은 우리 모두가 찾고 있는 것, 즉 하느님의 얼굴에서 빛나는 평화에로 시선을 돌리는 것입니다. 다른 이를 신뢰한다는 것은 일종의 예술이며 평화도 예술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행복하여라, 평화를 이루는 사람들!”(마태오 5,9)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평화의 임무를 수행함으로써, 우리 가운데에서는 물론이고, 우리는 다음과 같은 오랜 예언을 실현합니다. “그러면 그들은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리라.”(이사야 2,4)

 

245. 이런 전망으로, 교회일치는 인류가족의 일치에 기여하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인 바르톨로메우스 1세 총대주교(His Holiness)와 캔터베리 대주교인 로완 윌리엄스 대주교(His Grace)가 시노드에 참여한 것은 하느님께서 주신 참된 선물이면서, 그리스도교임을 드러낸 값진 증언입니다.

 

246. 그리스도인, 특히 아시아와 아프리카의 그리스도인 사이의 분열을 드러내는 증언이 갖는 심각성을 고려할 때, 일치의 길을 모색하는 것은 무엇보다도 시급합니다. 이 대륙의 선교사들은 빈번하게 갈라진 그리스도인이라는 악한 표양(스캔들)이 불러일으키는 비판, 불평, 조롱을 언급합니다. 만일 우리가 공유하는 신념에 집중하고, 진리의 위계질서 원리를 명심한다면, 우리는 선포, 서비스, 그리고 증언을 공동으로 드러내기 위해 확실하게 나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은 수많은 사람들에게도 무관심할 수 없습니다. 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받아들이는 것을 돕는 일치에의 헌신은 더 이상 단순한 외교의 문제나 강요된 굴종의 문제일 수 없습니다. 오히려 그것은 복음화에 절대 필요한 길이다. 폭력으로 황폐하게 된 여러 나라에서 보이는 그리스도인들 사이의 분열은 평화의 누룩이 되어야 할 사람들에게 갈등의 또 다른 원인이 됩니다.

 

얼마나 많은 중요한 일들이 우리를 결합시키고 있습니까! 우리가 만일 성령께서 풍부하게 무상으로 하시는 일을 믿는다면, 우리는 서로 얼마나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습니까! 이는 상대에 대해 그저 더 잘 아는 것에 관한 것만이 아니라, 그보다 성령께서 그에게 뿌린 것(은사)을 거두어들이는 것에 관한 것입니다. 성령께서 상대에게 그것을 뿌리신 목적은 우리에게도 하나의 은사가 되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한 가지 예만 들자면, 정교회 형제자매와 나누는 대화에서 우리 가톨릭신자들은 주교의 단체성(episcopal collegiality)의 의미에 대해서, 그 집회성(synodality)의 경험에 대해서 더 많이 배울 기회를 갖습니다. 성령께서는 당신 은사의 교환을 통해 보다 완전한 진리와 선에로 우리를 이끄실 수 있습니다.

 

유대교와 맺는 관계

 

247. “하느님의 은사와 소명은 철회될 수 없이기 때문에”(로마 11,29) 유대 민족이 맺은 하느님과의 계약은 결코 철회되지 않습니다. 그 때문에 우리는 유대 민족을 특별히 존중합니다. 성경에서 중요한 부분을 유대인과 공유하고 있는 교회는 계약의 백성과 그들의 신앙을 교회 자신의 그리스도교적 정체성의 거룩한 뿌리 가운데 하나로 여깁니다.(로마 11,16-18)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는 유대교를 낯선 종교로 여길 수 없습니다. 우리는 유대인들을 버리고 하느님께 돌아서서 그분을 섬겨야 할 사람들(1테살로니카 1,9)에 포함시키지 않습니다. 우리는 그들과 함께 역사 속에서 활동하시는 한 분 하느님을 믿습니다. 우리는 그들과 함께 그분의 계시된 말씀을 받아들입니다.

 

248. 이스라엘 자녀들과의 대화와 우정은 예수님의 제자 생활의 일부입니다. 그동안 우리는 우정을 나눴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들이 견뎠고, 계속해서 견디고 있는 끔찍한 박해를, 특히 그리스도인을 포함시킨 박해를, 통렬히 그리고 진정으로 후회하고 있습니다.

 

249. 하느님께서는 구약의 백성 가운데에서 계속해서 일하시며, 그들이 당신 말씀과 만남으로써 흘러나온 지혜의 보물을 계속해서 낳습니다. 그 때문에 유대교의 가치들을 받아들일 때 교회도 풍요로워집니다. 그리스도교의 일부 믿음이 유대교에서 받아들여질 수 없다는 것과 교회가 예수님을 주님이며 메시아라고 선포하는 것을 포기할 수 없다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럼에도 상호 보완할 수 있는 것이 많습니다. 즉 히브리 성경 본문을 함께 읽을 수 있으며, 서로 도와서 하느님 말씀의 보고를 조사할 수 있습니다. 또한 우리는 많은 윤리적 확신과 민족들의 발전과 정의에 대한 공동의 관심을 나눌 수도 있습니다.

 

종교간 대화

 

250. 비그리스도교 종교인과의 대화는 다양한 장애와 어려움, 특별히 양 쪽의 근본주의 형식 때문에 장애와 어려움이 있더라도 반드시 진리와 사랑에 대한 개방적 태도를 지녀야 합니다. 종교간 대화는 세상의 평화를 위한 필요조건 가운데 하나입니다. 그래서 그것은 다른 종교 공동체는 물론 그리스도인의 의무입니다. 이 대화는 우선 인간 실존에 관한 대화, 혹은 인도의 주교들이 말한 것처럼, 단순히 “그들에게 개방하고 그들과 기쁨과 슬픔을 나누는 것”에 관한 대화입니다. 그 과정에서 우리는 그들의 삶의 방식과 사고방식, 이야기방식을 받아들이는 것을 배울 수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정의와 평화에 기여해야 할 의무를 수행하면서 서로 결합할 수 있습니다. 평화와 정의에 기여할 의무는 우리가 무엇이든 교환할 때 기초원리가 되어야 합니다. 사회의 평화와 정의를 추구하는 대화는 그 자체로 윤리적 헌신입니다.

 

그것은 단순하고 실질적인 검토 이상의 무엇입니다. 그것은 새로운 사회 상황을 이끌어낼 것입니다. 특정 주제를 다룰 때 기울여야 할 노력은 하나의 과정이 될 수 있습니다. 그 과정에서 서로의 이야기를 들음으로써 양측은 정화되고 풍요로워질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런 노력들은 진리에 대한 사랑을 드러낼 수도 있습니다.

 

251. 항상 친밀하고 진지한 이 대화에서는, 반드시 대화와 선포 사이의 본질적 유대에 항상 주의를 기울여야 합니다. 이 유대는 교회가 비그리스도인과 맺은 관계를 유지하고 강화시켜 줍니다. 손쉬운 혼합주의는 궁극적으로 전체주의적 몸짓이 될 것입니다. 이는 보다 큰 가치들의 주인이 아닌데도 그 가치들을 무시하려는 이들이 지배하는 전체주의적 몸짓을 말합니다.

 

 참된 개방성은 항상 자신의 심오한 확신에 변함없고, 자신의 정체성에 분명하고 기뻐합니다. 그러면서도 동시에 “다른 쪽의 확신과 정체성을 개방적으로 이해하고, 대화가 서로를 풍요롭게 한다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도움이 되지 않는 것은 문제를 회피하기 위해 모든 일에 “예”하는 외교적 개방성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다른 이들을 속이는 방식이며, 진정으로 나눔을 위해 자신이 받은 선물을 그들에게 주지 않으려는 거절의 방식이기 때문입니다. 복음화와 종교간 대화는 반대되기는커녕 서로를 지지하고 살찌게 합니다.

 

252. 이슬람교도와의 관계는 매우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많은 그리스도교 전통의 국가에서 그들은 상당히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그리스도교 전통의 국가들에서 자유롭게 경배할 수 있으며 완전히 사회의 한 부분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그들이 “아브라함의 신앙을 간직하고 있다고 고백하며, 마지막 날에 사람들을 심판하실 자비로우시고 유일하신 하느님을 우리와 함께 흠숭하고 있다”는 것을 결코 잊어서는 안 됩니다.

 

이슬람의 경전들은 일부 그리스도교 가르침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과 마리아를 깊이 존경하고 있습니다. 얼마나 많은 무슬림들이 매일의 기도에 시간을 할애하고 있는지, 충실하게 종교 예절에 참여하고 있는지 경탄할 만합니다. 많은 무슬림들은 생명의 영원성이 하느님에게서 오고 하느님을 향하고 있다는 굳은 확신을 갖고 있습니다. 그들도 윤리적 생활과 가장 어려운 사람을 향한 자비로 하느님께 응답해야 한다는 것을 인정합니다.

 

253. 이슬람과의 대화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관련 당사자 모두에게 적합한 훈련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그들이 흔들림 없고 기쁘게 자신의 정체성을 간직하기 위해서뿐만 아니라, 상대가 갖고 있는 가치를 인정하고, 상대가 강조하는 관심을 존중하고, 공유하는 믿음들에 빛을 비추기 위해서이기도 합니다. 이슬람 전통의 국가에서 그리스도인이 존중받고 수용되기를 희망하고 요구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 그리스도인은 우리의 나라에 온 무슬림 이민자를 존중하고 사랑하며 포용해야만 합니다.

 

저는 그리스도인에게 하느님을 흠숭하고 신앙을 실천할 자유를 허용해달라고 이슬람 전통의 나라들에게 요청하며 또 겸손하게 탄원합니다! 이슬람교도가 서구의 여러 나라에서 누리는 그 자유를 생각해서 말입니다! 우리를 좌절시키는 폭력적인 근본주의에 관련된 일들을 대하더라도, 참된 이슬람교도에 대한 우리의 존중이 이슬람 전체에 대한 증오에 찬 일반화를 피하도록 해줘야 합니다. 왜냐하면 진정한 이슬람과 코란에 대한 올바른 이해는 모든 형태의 폭력과 대립하기 때문입니다.

 

254. 비그리스도인도, 하느님의 은혜로운 초대로 자기 양심에 충실할 때, “하느님의 은총으로 의롭게” 살 수 있으며,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의 파스카 신비와 관련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성화은총의 성사적 차원 때문에, 하느님의 활동은 그들 안에서 표징과 의례, 거룩한 표현을 낳기 쉽습니다. 그 다음에 그것들은 다른 이에게 하느님을 향한 여정이라는 공동체적 경험을 깨닫게 해줍니다. 비록 그런 것들이 그리스도께서 세우신 성사의 의미와 효과를 갖고 있지 않지만, 그것들은 비그리스도인을 무신론적 내재론이나 순전히 개인적인 종교 체험에서 해방시키기 위해서 성령께서 일으켜 세우신 매개들일 수 있습니다. 같은 성령께서는 어느 곳에나 다양한 형태의 실천적 지혜를 가져다주시는데, 이 실천적 지혜들 덕분에 사람들은 고통을 견디고 더 큰 평화와 조화 속에서 삽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는 수세기에 걸쳐 형성된 이 보화에서 이익을 얻을 수도 있는데, 그 보화는 우리가 믿음을 갖고 사는 데 도움이 될 수 있습니다.

 

종교자유의 환경에서 이루어지는 사회적 대화

 

255. 시노드의 교부들은 종교자유를 기본적 인권으로 보았으며, 종교자유를 존중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밝혔습니다. 종교자유는 “자신이 참되다고 판단한 종교를 선택할 자유와 자신의 믿음을 공개적으로 드러낼 자유”를 포함합니다. 건전한 다원주의는 차이를 진정으로 존중하고 있는 그대로 가치를 인정하는 것입니다. 건전한 다원주의는 종교들을 개인의 양심이라는 고요한 어둠 속으로 몰아넣거나, 혹은 교회, 회당, 모스크 건물이라는 폐쇄된 경내로 추방하려고 시도함으로써 종교를 사적인 것으로 만들지 않습니다. 그런 것들은 사실상 새로운 형태의 차별과 권위주의를 드러내는 것입니다. 불가지론자 혹은 믿지 않는 소수를 존중한다고 해서, 그것이 믿고 있는 다수의 확신을 억누르거나, 풍부한 종교적 전통을 무시하는 그런 무차별적 존중이 되어서는 결코 안 됩니다. 장기적으로 볼 때, 그런 것은 관용과 평화보다는 분노를 키울 것입니다.

 

256. 종교가 공공생활에 미치는 효과를 고려할 때 우리는 종교를 실천하는 다양한 방법들을 구별해야만 합니다. 지성인들과 진지한 언론인들이 종교의 결점을 말할 때 자주 유치하고 피상적으로 일반화시킵니다만, 그들은 믿는 이들 모두가 - 혹은 종교 지도자들 모두가 - 똑같지 않다는 것을 깨달지 못하고 있음이 분명합니다. 일부 정치인들은 차별하는 행동을 정당화하기 위해 이런 혼동을 이용합니다.

 

또 다른 경우는 종교적 고전들이 모든 시대에 의미가 있을 수 있다는 사실을 간과하면서 종교적 확신을 반영하는 글들을 경멸하려는 것입니다. 그런 글들은 새로운 지평을 열고, 사상을 자극하고, 마음과 심장을 확장하는 영구적인 힘을 갖고 있습니다. 그런 경멸은 일종의 이성주의라는 근시안에 기인합니다. 단순히 종교적 믿음을 배경으로 태어났다는 이유만으로 그 작품들을 버리는 것이 과연 이성적이고 사리에 맞습니까? 그런 작품들은 심오한 인본주의적 원리들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그 작품들을 종교적 상징과 가르침으로 채색되었지만 이성에 부합하는 어떤 가치를 담고 있습니다.

 

257. 우리는 이 진선미의 최상의 표현과 원천이 하느님 안에 있다고 믿습니다. 신앙인으로서 우리는 스스로 어떤 종교전통에도 속하지 않는다고 여기지만, 여전히 진지하게 진리와 선과 미를 추구하는 이들과도 가까이 있음을 느낍니다. 우리는 인간존엄을 수호하고, 백성들 사이의 평화로운 공존을 구축하고, 피조물을 보호하는 데 있어 이들을 귀한 협력자들로 여깁니다. 이방인의 법정 같은 새로운 아레오파기는 만남의 특별한 장소가 됩니다. 이곳에서 “믿는 이와 믿지 않는 이가 윤리, 예술, 그리고 과학의 근본적인 주제들에 관한 대화에, 그리고 초월의 탐구에 관한 대화에 참여할 수 있습니다.” 그것도 문제를 안고 있는 이 세상에서 평화를 찾는 한 길이기도 합니다.

 

258. 인류의 미래에 분명히 중요한 사회적 현안에서 출발해서, 저는 복음 메시지가 불가피하게 사회적 차원을 갖는다는 것을 분명히 하고자 했으며, 모든 그리스도인이 그들의 말과 태도와 행동으로 그 메시지를 드러내도록 격려하고자 했습니다.


번역: 박동호 신부
서울대교구 신정동 성당, 서울대교구 정의평화위원회 위원장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http://www.catholicnews.co.kr>

 
다음검색
현재 게시글 추가 기능 열기
  • 북마크
  • 공유하기
  • 신고하기

댓글

댓글 리스트
맨위로

카페 검색

카페 검색어 입력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