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FE

소설자료실

[[무협자료]]무협의 단위 (도,량,형)

작성자☆sOuL★|작성시간06.01.17|조회수1,167 목록 댓글 0
중국의 도량형(度量衡)

우리는 흔히 증국의 도량형을 1척(尺)은 30.3cm, 1장(丈)은 3.03m라는 식으로 알고 있다.
언제부터 그렇게 되었을까? 그리고 그것이 과연 사실일까?
어느 날 문득 그 문제를 생각해 보고 내가 알고 있는 것이라는 게 그저 어림짐작. 어디선가 주워들은 것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중국, 그것도 현재가 아닌 옛 증국올 배경으로 글을 쓰면서 정확한 도량형도 모른다는 것이 창피해 그 자세한 사항을 공부하기로 결심했다.
그런데 맙소사 자료를 구하기 어려운 것은 둘째 치고라도 웬 시대마다 그렇게 다르고 지역마다 편차는 또 그리 많은가? 게다가 용도에 따라 또 다르다니!

나는 우리나라에서도 지역마다 마지기의 평수가 서로 다르고 돼지고기와 상추의 한근(斤)이 서로 다르다는 것을 생각하고 이해는 했다.
그러나 용서는 할 수가 없었다. 그대로 두고 그냥 사용했다간 여러 가지 문제가 생길 것 같아서였다

전국 시대를 종식시킨 진시황은, 도법(度法), 형석(衡石), 장척(丈尺)을 하나로 하고 수레는 바퀴 사이의 거리를 같게 하며, 문서에 쓰여지는 문자를 통일하는 등의정책을 추진하고 아울러 도량형을 통일하는 조칙(詔則)을 공포하고 표준기(標準器)를 대량으로 생산하여 반포했다고 한다.

그때 그가 정한 1척(尺)은 현대의 미터법으로 보면 23, 이 기준이 한나라 때까지 내려왔다. <삼국지>에 나오는 팔 척 장신이니,구 척 거한이니 하는 사내들을 알고보면 2m 40cm나 2m 70cm의 거인들이 아니라 1m 80cm와 2m의, 그냥 키가 큰사람들인 것이다,

이 아담한 척도가 이후 점점 커져서 명나라 말에 오면 1척이 32cm 이상이라는 정도까지 증가하는데, 그 이유는 재미있게도 세금 때문이었다.
모 중국의 조세제도는 실물지조(實物地租), 즉 베나 쌀 같은 실물을 받는 것을 원층으로 했다. 같은 베 10자[尺]를 세금으포 걷어도 23cm가 기준이면 230cm밖에 안되지만 32cm가 기준이면 320cm를 걷어낼 수 있는 것이다. 무게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였다.

즉, 곡물, 포목 등 현물을 증심으로 하는 납세제도하에서 봉건지배층은 도량형의 규격을 확대시킴으로써 그 차액만큼의 이득을 을릴 수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위의 사실은 척도의 분화라는 기현상을 가져왔다.
경제활동에 사용되는 규격이야 권력자들의 이해에 의해 변할 수 있는 것이지만. 천문관측에 사용되는 규격이나 토꼭사업에 관련된 규격은 승게 변해서는 안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천문척(天文尺)·영조척(營造尺)등 경제활동과 분톼된 청도들이 출현하게 된 것이다.
일레로 명나라 때를 기준으로 살펴보면 천문기구를 만드는 데 사용하는 척도인 천문척(天文尺)은 진시황 이후로 크게 변함이 없어 24.5이지만 건축용 자인 영조척(營造尺)은 32cm, 재봉용(裁縫用) 자, 즉 포목을 잴 때 쓰는 자인 재의척(裁衣尺)은 34cm였다.
이런 기준에 근거해 글을 쓸 수가 없지는 않겠지만, 그리 승지도 않을 것 같다. 예릍 들어, 이런 상황을 생각해 볼 수 있겠다.

"그러니까 그 비석에서 동쪽으로 10척, 남쪽으포 다시 10척을 가면 거기 비급을 숭겨두었다. 내가 죽거든 그걸 파내어 익혀서 복수를……, 으, 으, 으……!"
사부가 숨이 꼴딱꼴딱 넘어가면서 그렇게 유언하는데 제자가 죽어가는 사부의 어깨를 잡고 흔든다.
"사부님 그게 천문척에 근거한 거리입니까, 아니면 영조척? 10척이면 나증에 얼마나 차이가 나는데 그렇게 애매하게 말씀하십니까? 가시려거든 정확히 가르쳐 주고나 가셔야죠!"

별로 재미도 없고 짜증나는 상황일 것이다.
그래서 몇몇 작가들끼리 의논을 했다. 우리들만이라도 기준을 정해 눙고 도량형을 사용하자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기준은 현대 중국의 도량형이다.즉, 1척을 33.3cm로 보는 도량형이다.
참고 삼아 말해 두지만 1척이 30.3cm라는 것은 우리나라 단위이다.
마침 이 이야기가 나왔을 때, 하이텔 통신을 통해서 이홍기님의 화폐와 물가에 관한 자료를 얻게 되어 이 두 가지를 같이 정하기로 했다.
정확한 것은 아니지만, 또 그리 정롸한 척도를 끝요로 하는 것도 아니지만 대층 기준을 잡아 놓았으니 보시면 이해하는 데에 조금은 도움이 되지 않올까 생각한다.

첫째로 각 단위의 상호관계는 다음과 같다.
길이의 단위는 분(分)·촌(寸)·척(尺)·장(丈)·인(引)으로 커진타. 뒤에 나온것이 앞 단위의 열 배이다,
용적의 단위는 약·합(合)·승(升)·두(斗)·곡(斛)으로 커진다. 역시 뒤가 앞의 열배.무게의 단위는 조금 달라서 24수(銖)가 1냥( ), 16냥이 1근(斤), 30근이 1균(鈞), 4균이 1석(石)으로 되어 있다. 이는 일상 생활에서 가장 널리 사용되는 무게의 단위가 획일적인 체계화에 대해 가장 큰 저항력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으로 여겨진다.
둘째로 사람의 키를 지칭하는 수식어인 오척단구, 칠척장신 등등의 표현온 그대로 사용한킥. 엄밀하게 길이를 재어서 칭하는 말이 아니라 그냥 수식(修飾)이라고 생각할 수 있기 때문이다.실제 5척이 아니라 6척에 조금 옷 미치는 키면 어떤가. 그냥 키가 작다는 뜻만 전해지면 그만일 것이다.
그래서.

길이
1장(丈) : 3.33m
1척(尺) : 33.3cm--한 자[尺]라고 부를 때도 같다.
1촌(寸) : 3.33cm--한 치(寸)라고 부를 때도 같다.

1리(里) : 500m
* 이것도 우리 나라와 달라서 흔동이 되겠지만 옛날에는 1리가 2km인 때도 있었으니,
그것보다는 이게 나을 것이다.

무게
1근(斤) : 500g

시간
한 시진(時辰) : 2시간
일 각(刻) : 15분
한 식경(食頃) : 30분--밥 한끼 먹을 시간이라고도 한다.
일 다경(茶頃) : 15분--차 한잔 마실 시간.

무협소설에서 자주 쓰이는 도량형을 대층이나마 이렇게 정한다.
여타의 단의는 다음올 기준으로 설명하면 될 것이다.


중국의 화폐와 물가 *1

무렵소설을 보면 은자 열 냥이 4인 가족의 한 달치 생활비라는 이야기가 나오는데 과연 옛날 중국의 물가는 어느 정도일까?
뭐 확실히 알 수는 없지만 내 생각엔 은자 열 냥이라신 일반농민의 일 년치 수입이상이 아닐까 하고 생각된다.
고대 중국 준추전국(春秋戰國)에서 한초(漢初)까지는 일반 거래엔 동전이, 상업적 거래엔 황금이 사용되었는데 이때 황금과 구리의 가치비율이 1:130 정도였다. 정말 깜짝 놀랄 정도로 싼 값의 금이었다, 고대 중국에 황금이 어느 정도로 풍부했나를 알수 있다. 동전은 나라에 따라 여러 가지 형태로 제작되다가 진의 통일 이후 등근 모양에 사각형의 구멍이 뚫린 반량전으로 그 형태가 통일된다. 이것은 오수전으로 불리며 후대에까지 유통된다.
그러나 그토록 픗부하던 황금도 서역과의 교역이 시작되며 급격히 유출되어 후한(後漢)으로 들어오면 거의 현물경제로 바휀다.
우리가 흔히 보는 0.1냥짜리 동전은 당나라의 개통원보가 시작이며 송나라 때에 급격히 보급된다. 송나라 일대에 보급된 동전만 약 2억 관, 즉 2000억 개의 동전이 보급된다. *2 당시의 물가 상황은 확실히 알 수 없지만 당현종의 개원 년간에 쌀 1석 비단 1필이 동전 200개에 거래되었다고 한다.
물론 이것은 당시의 번영을 나타내기 위해 들먹인 수치이고 또 송대에는 급격히 보급된 화폐로 인해 이보다는 횔씬 물가가 높았을 것이다. 사실 이 정도로 막대한 양의 화폐가 민간에 보급되고도 인플레이션이 일어나지 않았다는 것은 말이 안된다.

*1 하이텔 무림동호회 게시판에서 발췌. 올린 이는 이홍기님(HITEL ID:Lrudla)
*2 약간의 절2전믈 포함해도 1500억 개 이상온 화실히 생산되었으며 증국의 구리광산은 송대에 거의 고갈되었다.

원래 상업의 발달로 인해 화폐의 유통량이 확대되고 자본주의가 발달하는 것이 원칙이겠지만 송대에 한하여 말하자면 오히려 정부에 의해 강제로 보급된 막대한 양의 화폐로 인해 상업의 발달과 자본주의의 발전이 일어나는 약간은 기이한 일이 일어났다.
은이 본격적으로 화폐로 사용된 것은 송대 증반부터로 보이고 어음이 둥장한 것도 이때포 보인다.원대에 들어와서는 은의 해외 유출로 인해 지폐--교초--가 사용되는데 지폐가 등장한 것은 금나라부터지만 이때의 지폐는 남발로 인해 가치가 없었고 원대의 지폐는 통화가치를 지닌 지페로 널리 통용되었다. *3

원대에는 중통초와 지원초 두 가지 지폐가 사용되었고 중통초 5에 지원초 1의 가치로 통용되었다. 어떻게 그 당시에 은과의 태환이 보증되지도 않는 지폐가 가치를 잃지 않고 통용되었냐 하는 의문이 생기겠지만 이유는 비교적 간단하다. 원대의 지폐는 은과의 태환이 아닌 소금과의 태환이 보증되었다.
증국에서 소금이 국가의 전매품이었고 높은 세금이 매겨겨 있던 것올 생각하면 될 것이다.
증통초는 처음엔 태환지폐였지만 은의 부족으로 인해 불환지폐로 바뀌고 그 가치가 급격히 떨어지자 지원초를 발1하여 이를 수습했다.
그러나 원이 멸망하며 이러한 지폐의 가치가 일거에 소멸하여 휴지가 되어 버리자 중국에서는 자본의 총소멸이라는 현상으로 나타난다. 이런 친상과 주원장의 개인적인 신념으로 인해 명대 초기에는 현물이 화폐의 역할을 한다.

*3 마르코 포로의 동방견문륵믈 보면 이에 대해 신기한 눈으로 보는 것이 보인다.

명대초기에는 은의 사용이 금지되었고 동전도 한정적으로만 사용되었으나 증기에 와서는 은이 실질적인 화세로 사용되며 국가의 재정도 은으로 처리되었다.
당시의 물가를 확실히 알 수는 없지만 강남의 조세 400만 석이 은 100만 냥으로 납부되었다고 하기도 하고 픗년에는 은 1냥에 쌀 8, 9석 정도 했다고도 한다. 흔히 무협소설에 나오는 황금 100만 냥이 얼마나 터무니없는 금액인지 알만 할 것이다.
당시 국가의 1년 세입은 명초에는 은 2백만 냥올 조금 초과한데 불과했고--이것으로도 흑자를 유지했다고 한다.--전쟁으로 인해 증과세가 부과되었을 때도 은 1천만 냥을 넘기는 일이 없었으며 임진왜랄에 응원군을 보내는 데 소요된 몇 백만냥 가량의 은이 명나라의 존폐를 흔들어 눙기도 했다.
욀씬 픗요해진 청나라에 와서도 국가의 1년 세입은 몇 천만 냥에 불과했다. 물론 당시 황실의 사치나 관리들의 축재 액수 등을 보면 당시 민간의 상업활동이 국가 재3에 비해 상당히 활기차고 픗요했음을 알 수 있는데 당시의 기록에 담비의 모피로만든 최고급 의복이 은 3냥이었다 하며 흥루몽에는 은 1냥의 월급을 받는 자리로 가기 위한 암투가 보이고 있다.
인삼은 귀물이었으며 은과 같은 무게로 거래되었다 한다.

황금과 은의 롼율은 자세히 알 수 없지만 20:1 이상으로 추측된다. *4
은과 동전의 환울은 공식적으로는 은 1냥에 동전 1관--1000문--이지만 민간에 유포된 은의 양에 따라 달라서 은 1냥의 가치가 동전 700개 정도에서 3000개 사이를 왕복한 걸로 보인다. *5

*4 마르코 플로의 동방견문륵을 보면 6:1이니 8:1이니 하는 이야기가 나오지만 이것은 특수한 이야기로 보인다.
*5 동전의 유통량이 막대했던 송대에는 4000개 이상으로 거쾌되었다는 기륵이 있다.

흥루몽에 보면 1냥의 가치가 동전 2000개 이상의 가치를 가진 것으로 보인다.
이렇게 봐서 우리가 보는 무협이 거의 명대를 시대 배경으로 하고 있다면 얼마나 평가절하된 화폐를 사용하는지 알 것이다.
결국 시대에 따라 다르겠지만 내가 보기엔 무협에서의 화폐가치는 은 1냥이 동전 2000개 정도로 보고 황금과 은의 비울온 1:20 정도, 은 1냥에 쌀 2석에서 5석 정도를 적절히 섞어서 사응하는 것이 타당하지 않을까 생각된다.
다음검색
현재 게시글 추가 기능 열기

댓글

댓글 리스트
맨위로

카페 검색

카페 검색어 입력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