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7.13. 하느님의 은총 안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성공회 대전교구 사회선교기관협의회.
사는 길을 그에게서 배우고 그 길을 따라가자(이사야2장 3절).
The Lord will teach us what he wants us to do;
He will walk in the paths he has chosen.
“진리를 위하여 몸을 바치는 사람이 되게 하여 주십시오(요한17:17).” 이 요한복음의 17장은 전부 주님의 기도입니다. 특히 이 17절의 기도는 예수님이 우리들을 위하여 하느님께 간절히 청한 기도입니다. 주님의 이 간절한 기도에 근거하여, 성공회 대전교구 사회선교기관협의회원 여러분이 진리가 온몸을 휘감고 사시는 불꽃이기를 바라는 마음입니다.
사회에서 배제된 사람들의 아픔과 없이 사는 가난한 사람들의 좌절을 보고 배우고 익히면서 때로는 불꽃으로 만나고 때로는 깊은 친밀함으로 인간적으로 일치된 경험을 하면서 이 길 덕분에 자신의 결여와 천박함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는 현장의 고백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사시는 성공회 사회선교기관의 한 형상이 그려집니다. “그리스도처럼 친밀하게” 사는 사람은 가난이 준 절망감을 다른 사람에게 독으로 내뿜지 않는 길을 이미 터득한 것으로 만나기에 깊은 친밀감의 연대가 강하게 된 것입니다.
“성공회 사회선교기관”이러 함은 Organization 오거나이제이션이기 보다는 Organism 오거니즘을 뜻합니다. 문제가 있으면 그 문제를 제거하면 해결된다는 방식을 자기 방식으로 채택한 것이 조직, 시설이라는 Organization오거나이제이션이고, 어디 한 곳이 아프면 그 아픔이 나을 때까지 함께 기다리고 견뎌 내는 삶의 방식을 유기체라는 Organism오거니즘이라 한다면 성공회 사회선교기관은 바로 Organism오거니즘입니다. 어떤 점은 본인이 우수할 것이지만 어떤 다른 점에서는 다른 사람이 우수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Organism오거니즘이라는 유기체에서는 나와 너가 분리된 것으로 보지 않고 나와 너가 연결된 것으로 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는 당신의 한 부분’이라고 서로가 서로에게 고백하게 되는 관계로 사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공회는 기본적으로 공동체를 향하는 곳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들은 “여기가 내가 속한 곳이다”라고 말합니다. 어딘가에 속해 있다는 것이 얼마나 복된 것인지 모릅니다. 그 속에서 좋아하고 기대하고 알게 됩니다.
오늘은 정기총회입니다. 작년에 세워져서 올 일월에 정기총회를 했어야 합니다. 그런데 하질 못했습니다. 부족한 자질로 인해 하느님의 도우심을 얻어 이제야 정기총회를 하게 되었습니다. 이 자리에 성령이 오셔서 우리들을 한 유기체로 형성시켜 달라는 기도를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느님의 은총은 우리를 각각 홀로 잘난 맛에 살게 내버려 두질 않습니다. 서로가 서로를 간절히 필요하다는 가슴을 지닐 때까지 우리들의 일들을 늦추시는 분이 바로 하느님이십니다. 하느님은 우리를 너무나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오늘은 성령의 힘으로 여기에 모이게 된 것입니다. 성령 없이 살 때 공허로운 마음 한 켠이 매우 커다랗다는 것을 경험하셨을 것입니다. 그 공허로운 한 커다란 공간이 성령의 인도로 채워지는 곳임을 숱한 곡절을 겪은 후에 깨닫게 된 것입니다. 세상에서 자주 내려지는 판단은 어쩌면 하느님의 고유영역일 수도 있을 터인데 그것마저 내 뜻을 앞세워 획일적으로 하느님의 주권을 빼앗기도 했던 것을 볼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면서 참으로 부끄러운 모습이 내 안에 있음을 보고 절망도 했지만 그러나 한편에는 하느님을 향한 선함을 많이 주신 것에 감사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오늘 이 자리는 그러한 곡절을 경험하면서 하느님 앞에 아직은 유약한 선함으로 겉과 속을 드러내는 자리입니다. 하느님은 깊은 친밀함에서 드러나니까요. 그래서 하느님을 뵙는 것을 생일잔치가 아닌 혼인잔치로 말씀하신 것입니다. 오늘 이 자리는 혼인잔치입니다. 서로 속 깊이 만나는 자리이기를 빕니다.
“내 모습은 이렇게 작고 찌그러진 부분도 있어요. 그런데 당신 모습은 진주가 속에 있어 빛이 참 아름다워요.” 이렇게 속 얘기를 나누면 형식적인 계획과 그러한 일들은 사라지고 하느님의 크신 능력으로 우리들의 일들이 풍요로워질 것입니다( 참고: 하느님께서는 너희가 손으로 하는 모든 일들을 넘치게 해줄 것입니다 (신명기30:9)). 이렇게 속을 나눌 때 우리는 고독과 단절에서 벗어나게 될 것입니다. 결국 성령의 인도로 우리는 살게 되는 것입니다.
“성공회의 사회선교기관은 뭔가 달라” 라는 말을 듣는다면 그 뭔가가 무엇이어야 합니까? 정부지원만 목매다가 비인간적인 복지사업만 하는 사람이 돼갔다는 아픈 말들이 난무하는 이 시대상황 하에서 성공회의 그리스도 영성을 기반으로 하는 그 길은 무엇일까? 미완성인 나 자신의 문제가 해결될 그 길을 하느님이 제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길에서, 그리고 성공회 전통에서 균형잡힌 그러한 길을 찾을 수는 없을까? Up and down어팬다운이 심한 성질로 인해 성공회의 아름다운 균형잡힌 길을 제대로 걷지도 못하고, 나로 인해 성공회 사회선교기관이 욕을 먹는 짓은 말자고 다짐을 하지만 그게 쉽지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다시한번 그러한 다짐기도를 합니다. “영화롭게 부활하신 그리스도여! 우리 어두운 마음에 빛을 비추소서. 아멘.(부활초를 켜면서 하는 기도).”
영국에서 초기에는 교회나 수도원의 전유물이었던 사회복지가 지난 세기 후반기부터는 교회나 수도원이 사회복지기관에서 분리되고 공무원이 이들 기관을 전담으로 맡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수십 년을 이어오면서 뭔가 문제가 있다는 것을 발견하기에 이르렀습니다. 교회나 수도원에서 운영했던 시기의 인간과 사회복지전문기관을 국가의 공적체계인 공무원이 운영하는 시기의 인간은 차이가 생긴다는 것을 발견한 것입니다. 인간다움과 인간적인 삶과 종교적인 인간 형성에 문제가 생겼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최근에 들어 영국에서는 기존의 공무원 체계의 사회복지전문기관에 다시 교회나 수도원이 결합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하느님과 깊은 친밀감을 가진 기도 많이 하는 사람의 손길과 그렇지 않은 이의 손길은 분명 다르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바로 이러한 지점에서 고민을 하여야 할 것입니다. 나 스스로 그러한 고민으로부터 시작하는 것이 성공회 사회선교기관의 그 뭔가를 찾아가는 것이 아닐까요?
사회선교기관에 오래 있다 보니, 어떤 때는 내 자신이 너무 속물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하고 어떤 때는 세속의 사교계에 너무 발을 많이 적셨다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성공회 신도로, 혹은 성공회 사제로 사회선교기관에 있다는 의미는 무엇일까요? 하느님의 은총 안에서 그 하느님의 자비심으로 사는 그 방식은 지금 내가 수행하는 방식에서 공통점을 얼만큼 찾을 수 있을까요? 성공회 신도는 아니지만 성공회 사회선교기관에서 일한다는 뜻은 무엇일까요? “성공회사제나 신도들은 멋있고 아름답고 복되게 사는 사람들로 사람들에게 기운을 주는 사람들입니다.” 라는 말이 우리들 귀에 많이 들릴려면 지금 우리는 어떤 얘기를 나눠야 할까요? 오늘 그러한 자리이기를 바랍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성령의 인도하심대로 우리를 맡기는 시간이시기를 바랍니다.
성공회 사회선교기관의 정기총회 자리에 하느님이 보내 주신 사람들로 꽉 차 있습니다. 하느님, 감사합니다.
유낙준신부(성공회 대전교구 사회선교기관협의회장)
부언: 80세의 헨리무어 Henry Moore 조각가는 이렇게 말씀하였습니다.
“삶의 비밀은 전 인생을 바치는 일, 거기에 모든 것을 집중하는 일, 나머지 인생동안 하루하루 살아가면서 순간마다 초점을 맞추는 일을 갖는 것입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그 일을 너무 쉽게 이룰 수 없어야 한다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