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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 미사 성경 묵상

2025년 7월 10일 연중 제14주간 목요일

작성자이정식 베드로|작성시간25.07.10|조회수15 목록 댓글 0

제1독서
창세기의 말씀 44,18-21.23ㄴ-29; 45,1-5

 

그 무렵 

18 유다가 요셉에게 나아가 말하였다.
“나리, 이 종이 감히 나리께 한 말씀 아뢰겠습니다.
나리께서는 파라오와 같으신 분이시니, 이 종에게 노여워하지 마십시오.
19 나리께서 이 종들에게 ‘아버지나 아우가 있느냐?’ 물으시기에,
20 저희가 나리께 대답하였습니다.
‘저희에게 늙은 아버지가 있고, 그가 늘그막에 얻은 막내가 있습니다.
그 애 형은 죽고 그의 어머니 아들로는 그 애밖에 남지 않아, 아버지가 그 애를 사랑합니다.’
21 그러자 나리께서는 ‘그 아이를 나에게 데리고 내려오너라. 내 눈으로 그를 보아야겠다.
23 너희 막내아우가 함께 내려오지 않으면, 너희는 다시 내 얼굴을 볼 수 없다.’ 하고 이 종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24 그래서 저희가 나리의 종인 저희 아버지에게 올라갔을 때, 나리의 말씀을 아버지에게 전하였습니다.
25 그 뒤에 저희 아버지가 ‘다시 가서 양식을 좀 사 오너라.’ 하였지만,
26 저희는 이렇게 대답하였습니다.
‘저희는 내려갈 수 없습니다. 

막내아우가 함께 가야 저희가 내려갈 수 있습니다.
막내아우가 저희와 함께 가지 않으면, 저희는 그 어른의 얼굴을 뵐 수 없습니다.’
27 그랬더니 나리의 종인 저희 아버지가 저희에게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내 아내가 나에게 아들 둘을 낳아 주었다는 것을 너희도 알지 않느냐?
28 그런데 한 아이는 나를 떠났다.
나는 그 애가 찢겨 죽은 것이 틀림없다고 말하였고, 사실 나는 지금까지도 그 아이를 다시 보지 못하였다.
29 그런데 너희가 이 아이마저 나에게서 데려갔다가 무슨 변이라도 당하게 되면, 너희는 이렇게 백발이 성성한 나를, 비통해하며 저승으로 내려가게 하고야 말 것이다.’”
45,1 요셉은 자기 곁에 서 있는 모든 이들 앞에서 더 이상 자신을 억제하지 못하고, “모두들 물러가게 하여라.” 하고 외쳤다.
그래서 요셉이 형제들에게 자신을 밝힐 때, 그 곁에는 아무도 없었다.
2 요셉이 목 놓아 울자, 그 소리가 이집트 사람들에게 들리고 파라오의 궁궐에도 들렸다.
3 요셉이 형제들에게 말하였다.
“내가 요셉입니다! 

아버지께서는 아직 살아 계십니까?”
그러나 형제들은 요셉 앞에서 너무나 놀라, 그에게 대답할 수가 없었다.
4 그래서 요셉은 형제들에게 “나에게 가까이 오십시오.” 하고서는, 그들이 가까이 오자 다시 말하였다.
“내가 형님들의 아우 요셉입니다. 

형님들이 이집트로 팔아넘긴 그 아우입니다.
5 그러나 이제는 저를 이곳으로 팔아넘겼다고 해서 괴로워하지도,자 신에게 화를 내지도 마십시오.
우리 목숨을 살리시려고 하느님께서는 나를 여러분보다 앞서 보내신 것입니다.”

 


복음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 10,7-15

 

그때에 예수님께서 사도들에게 말씀하셨다.
“가서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하고 선포하여라.
앓는 이들을 고쳐 주고 죽은 이들을 일으켜 주어라.
나병 환자들을 깨끗하게 해 주고 마귀들을 쫓아내어라.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
전대에 금도 은도 구리 돈도 지니지 마라.
10 여행 보따리도 여벌 옷도 신발도 지팡이도 지니지 마라.
일꾼이 자기 먹을 것을 받는 것은 당연하다.
11 어떤 고을이나 마을에 들어가거든, 그곳에서 마땅한 사람을 찾아내어 떠날 때까지 거기에 머물러라.
12 집에 들어가면 그 집에 평화를 빈다고 인사하여라.
13 그 집이 평화를 누리기에 마땅하면 너희의 평화가 그 집에 내리고, 마땅하지 않으면 그 평화가 너희에게 돌아올 것이다.
14 누구든지 너희를 받아들이지 않고 너희 말도 듣지 않거든, 그 집이나 그 고을을 떠날 때에 너희 발의 먼지를 털어 버려라.
15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심판 날에는 소돔과 고모라 땅이 그 고을보다 견디기 쉬울 것이다.”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님의 묵상글

 

<주님의 평화를 건네주는 평화의 사도>

 

오늘도 우리는 ‘한마디’ 말씀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말씀’은 항상 우리의 마음을 꿰찌르며, 마음을 불편하게 만듭니다.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

(마태 10,8)

인색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줄 때는 손해 본다는 마음이 없어야 하고, 그저 못 주어서 안달이 난 사람처럼 퍼 주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용서를 그렇게 베풀어주어야 하고, 사랑을 그렇게 하여야 하고, 가진 물질을 그렇게 내어주어야 하고, 하늘 나라를 그렇게 전해 주어야 합니다.

 

또한 마음을 그렇게 내주어야 하고, 시간을 그렇게 내주어야 합니다. 

그러려면 먼저 우리가 그것들을 거저 받았음을 정확히 알아야만 합니다.

줄 수 있는 것, 그것은 자신이 만들거나 획득한 것이 아니라, 거저 받은 것이라는 사실을 명확히 알아야 합니다.

 

더구나 신앙은 자신이 스스로 만든 것이 아니라, 자신의 응답에 의해 받아들여진 것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은총이요, 선물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래야 받아들여진 것, 그것을 선포하고 증거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예수님께서는 파견 받은 자가 갖추어야 할 조건과 자세를 이렇게 제시하십니다. 

“전대에 금도 은도 구리돈도 지니지 마라. 

여행 보따리도 여벌옷도 신발도 지팡이도 지니지 마라. 
일꾼이 자기 먹을 것을 받는 것은 당연하다.”

(마태 10,9-10)

그렇습니다. 

당신께서 당신의 일꾼을 챙겨 주실 것입니다. 

 

그러니, 입을 것, 먹을 것, 몸에 필요한 것, 그 어떤 안전장치도, 불투명한 미래에 대한 걱정도 말고, 오로지 주님께만 의탁하여 신뢰로 사명을 수행하라 하십니다. 

그러기에 이제 자기의 신발이 아니라 ‘당신의 신발’을 신고 걸어야 하고, 자기의 옷이 아니라 ‘당신의 옷’을 입고 다녀야 하고, 자신의 능력을 담은 보따리가 아니라 ‘하늘 나라의 보물을 담은 보따리’를 짊어지고, 자기의 힘이 아니라 ‘당신 말씀의 지팡이’에 의탁하라는 말씀입니다. 

또한 자신을 받아주거나 받아주지 않거나 사사로운 이해관계에 얽매이지 말고 자신에게 집착하지 않고 자유롭기를 바라십니다.

 

언제나 주님의 평화를 몸에 달고 다니며, 먼저 입으로 축복의 인사를 하라고 하십니다. 

“집에 들어가면 그 집에 평화를 빈다고 인사하여라.”

(마태 10,12)

그러니 오늘 하루만이라도 우리가 만나는 모든 이에게 평화의 인사를 하고, 축복을 빌어주어야겠습니다.

마음으로 계산하지 말고, 군말 없이 주님께서 하라는 대로, 형제에게 평화의 인사를 해야 할 일입니다. 

진정으로 주님의 평화를 건네주는 평화의 사도가 되길 바랍니다.

아멘.

 

<오늘의 말 · 샘 기도>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

(마태 10,8)

 

주님!

당신은 거저 주시는데도 제가 받지 못함은 제 그릇이 가득 차 있어 주어도 받아들이지 못한 까닭입니다.

나누지 못해 비워지지 않은 까닭입니다.

더러는 비워져도 엎어져 있어 담을 수가 없는 까닭입니다.

아니, 잘못 기울어져 있어 다른 데서 오는 것을 담고 있는 까닭입니다.

이제는 제 자신을 비우고, 당신을 향하여 있게 하소서.

목숨까지 내어주신 당신 사랑을 따라 거저 내어주게 하소서!

아멘.

 

- 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도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의 묵상글

 

<인간의 악행을 구원 기회로 바꾸시는>


"이제는 저를 이곳으로 팔아넘겼다고 해서 괴로워하지도, 자신에게 화를 내지도 마십시오. 

우리 목숨을 살리시려고 하느님께서는 나를 여러분보다 앞서 보내신 것입니다."

(창세 45,5)

자기 일이든 공동체의 일이든 일이 잘못되었을 때 그 탓을 남에게 돌리는 것은 윤리적으로 비열한 짓일 뿐 아니라 자기 인생의 성공과 성장과 행복 면에서도 미성숙하고 어리석은 짓입니다.

어떤 일이 잘못되었을 때 남의 탓도 있겠지만 나의 탓도 있는 것이기에 나의 탓을 탓해야 다시 그 잘못을 반복하지 않을 뿐 아니라 자기 잘못을 고치고 성장하고 성숙해지게 되고 행복하게 되는 것이지요.


그러므로 지나친 자책(自責)은 나쁘지만, 자책 자체는 좋은 것이겠지요.

비슷한 맥락에서 자신에게 화내는 것이 남에게 화내는 것보다 나을 것입니다.
인간적으로 화란 어떤 화도 나쁜 것이지만 남에게 화내는 것보다는 내게 화내는 것이 낫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오늘 요셉은 형제들에게 자기를 괴롭히지도 말고 자기에게 화를 내지도 말라고 하는데, 그 이유가 앞에서 얘기한 그런 인간적인 이유 때문만이 아니라 신앙적인 이유 때문입니다.

일이 잘못되었을 때나 잘되었을 때나 하늘을 보는 것이 신앙인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일이 잘되었을 때는 자기 공이라고 하고 일이 잘못되었을 때는 남 탓이라고 하는 것은 가장 미성숙하고, 반대로 일이 잘되었을 때 다른 사람 덕분이라고 남을 추어주고 일이 잘못되었을 때는 자기 탓이라고 하는 것은 성숙하다고 할 수 있는데,
이것으로 그친다면 인간적으로 성숙한지 몰라도 신앙적으로는 부족합니다.

 

거듭 말하지만 일이 잘되건 잘못되건 하늘을 볼 수 있어야 신앙적입니다.

 

요셉의 형제들이 요셉에게 잘못한 것은 분명합니다.

그런데 요셉의 형제들이 요셉을 시기하고 미워하게 된 데는 아버지 야곱의 잘못도 큽니다.

곧 야곱의 편애가 형제들의 시기를 사게 한 것인데, 형제들은 자기들의 잘못을 아버지 탓으로 돌리거나 변명하지 않고 자기들의 잘못이라고 하기에 성숙하고 진실한 회개의 모습이니 칭찬할 만한데, 요셉은 더 높은 신앙적 의미를 부여하며 자기에게 화내지 말라고 하는 겁니다.

하느님은 인간이 잘못해도 일이 잘되게 하실 수 있고 잘되게 하시는 분입니다.

 

하느님은 우리 인간이 어떻게 하든 잘되게 하려는 좋은 뜻을 가지고 계시고 구원의 계획을 가지고 인간의 잘잘못을 활용하십니다.

요셉이 팔려 간 것은 인간들이 한 짓이요 잘못된 것이지만, 인간의 잘못을 구원 기회로 바꾸시는 분이 하느님이십니다.

이것을 이해하는 것은 어렵지 않습니다.
우리의 부모도 자식이 어떠하든 잘되기를 바라고, 우리도 자식이 어떠하든 잘되도록 돕지 않습니까?

그러므로 하느님의 이런 사랑을 이해하는 것은 어렵지 않은데, 하느님의 이런 사랑을 늘 보는 것은 우리가 자주 놓치는 것입니다.

인간의 악행을 구원 기회로 바꾸시는 하느님의 사랑을 볼 줄 아는 관상의 눈을 요셉에게서 배우는 오늘 우리입니다.

 

- 작은형제회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의 묵상글

 

<무소유를 추구하라>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파견하시면서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주어라. 전대에 금도 은도 구리돈도 지니지 마라. 여행 보따리도 여벌옷도 신발도 지팡이도 지니지 마라.”(마태 10,9-10) 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철저한 무소유를 가르치셨습니다.

 

그것은 제자들이 헛된 것에 마음을 빼앗기지 않도록 하신 것입니다.

오직 근본에 충실할 것이지 말단을 걱정하지 말라는 가르침입니다.

 

특별히 성직자, 수도자, 선교사들은 돈에 구애받지 않고 일합니다.

 

사적인 이익을 추구하지 않을 때 사람들의 마음에 주님의 사랑을 불태울 수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저는 부끄러움이 많습니다.

 

우리 믿는 이들도 철저한 무소유를 통해 가진 자들을 이길 수 있는 힘을 간직해야 하겠습니다.

사실 재물을 소유하는 것이 나쁜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사용해야 할 곳에 제대로 써야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물질 때문에 하느님을 소홀히 합니다.

배부르고 등 따뜻하면 아쉬울 것이 없습니다.

 

그래서 ‘하느님이 다 뭐냐’ 고 합니다.

그리고 돈이면 뭐든지 다 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야말로 하느님께서 우리를 내셨으며 물질에 앞서 사람이 먼저라는 사실을 한 순간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성경말씀을 기억합니다.

 

“저를 가난하게도 부유하게도 하지 마시고 저에게 정해진 양식만 허락해 주십시오.

그러지 않으시면 제가 배부른 뒤에 불신자가 되어 ‘주님이 누구냐?’하고 말하게 될 것입니다.

아니면 가난하게 되어 도둑질 하고 저의 하느님 이름을 더럽히게 될 것입니다”

(잠언 30,8-9)

 

“하늘에 보물을 쌓아라.

거기에서는 좀도 녹도 망가뜨리지 못하고, 도둑이 뚫고 들어오지 못하며 훔쳐가지도 못한다.

사실 너의 보물이 있는 것에 너의 마음도 있다.”

(마태 6,19-21)

나의 삶에 있어서 참으로 보물로 생각하고 있는 것은 무엇인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신앙이 보물일 수 있고, 부모나 배우자, 자녀나 어떤 물질이 보물이 될 수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이든 보물을 잘 간수하고 빛나게 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마더 데레사 수녀님은 “쌓아놓으면 쌓아놓을수록 줄 것이 없다” 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주면 줄수록 줄 수 있는 능력이 생기는 법입니다.

그야말로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야 합니다.

 

내가 가지고 있는 것이 무엇이든 그것은 주님께서 주신 것이니 만큼 주님의 영광을 위해서 잘 사용해야 하겠습니다.

남에게 무엇을 준다는 것은 보통 돈과 물품만을 주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이상입니다.

 

금전적인 도움은 즉각적으로 수혜자에게 도움이 될 수 있지만, 받은 돈이 떨어지면 또 다른 도움을 필요로 합니다.

근본적인 해결이 되지 않습니다.

 

더 중요한 것은 상대의 마음을 공감해 주고 베풀 수 있는 마음을 회복시켜 주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것입니다.

세상은 물질보다 사랑에 굶주려 있습니다.

 

요즘은 재능 기부도 많이 합니다.

더 많이 사랑하고 자기의 경험과 지식, 삶의 경륜을 나눌 수 있어 행복한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줄 것이 없다고 말하지 마십시오.

여러분 자신을 주십시오.

 

그렇지만 기왕이면 물고기를 잡아 주지 말고, 물고기를 낚는 법을 가르쳐 주십시오.

 

그리고 결코 물질 때문에 하느님께 소홀히 하는 일은 없기를 기도합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말씀입니다.

 

"교회 안에서 돈에 사로잡히고 출세를 노리는 사람은 안 됩니다.

그런데 교회 안에도 이런 사람들이 있습니다.

봉사하고, 다른 사람들을 생각하고, 기본적인 것을 버리고, 교회에 봉사하는 대신에 출세하려고 안달하고, 돈에 얽매인 사람들이 있습니다.

우리는 얼마나 많은 사제들과 주교들이 그러고 있는지 보았습니다.

이런 말을 하는 것은 슬픕니다.

복음의 근본, 예수님의 부르심의 근본은 이것입니다.

봉사하는 것, 자기 자신을 잊고 봉사에 몸 바치는 것, 멈추지 않고 언제나 저 너머로 가는 것입니다.

지위의 편의성.

저는 하나의 지위에 이르렀습니다.

저는 다른 사람들에게 보이기 위해 광장을 지나다니던,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그 바리사이들처럼, 정직하지 않게 편하게 살고 있습니다.

봉사하지 않는 교회는 교회를 장사꾼이 되게 합니다."

 

미루지 않는 사랑을 희망하며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 청주교구 내덕동 주교좌 성당

 

 

 

 

 

 

 

♠ 전삼용 요셉 신부님의 묵상글

 

<참된 나눔의 출발점: 잃을 것이 없는 존재라는 확신>

오늘 예수님께서는 열두 제자를 파견하시며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가서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하고 선포하여라.

앓는 이를 고쳐 주고 죽은 이를 일으켜 주며, 나병 환자를 깨끗하게 해 주고 마귀를 쫓아내어라.”

 

그리고 이 모든 놀라운 권능을 주시면서, 가장 중요한 행동 원리를 덧붙이십니다.

 

바로 오늘 복음의 핵심이자, 우리 모든 그리스도인 사도의 삶의 정수가 담긴 말씀입니다.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

(마태 10,8)

이 말씀은 단순히 ‘공짜로 받았으니 너도 공짜로 줘라.’라는 식의 거래 원칙이 아닙니다.

 

이것은 나눔과 사랑의 가장 깊은 근원에 관한 통찰입니다.

 

참된 나눔, 진정한 자기 봉헌은 오직 ‘내가 먼저 충만히 받았다.’라는 깊은 감사와 마음의 평화에서만 흘러나올 수 있다는 뜻입니다.

사람의 행동은 냉철한 이성에서 나오기보다 따뜻한 감정에서 시작됩니다.

 

내가 이미 모든 것을 받아 아무것도 잃을 것이 없다는 충만함과 기쁨, 그 평화로운 감정이 우리를 진정으로 ‘주는 사람’으로 만듭니다.

이러한 마음의 평화와 감사 없이 무언가를 ‘주는’ 행위가 얼마나 위험하고 거짓된 것이 될 수 있는지, 영화 <위플래쉬>는 극단적으로 보여줍니다.

영화의 주인공은 최고의 드러머가 되기를 꿈꾸는 학생 ‘앤드류’이고, 그를 가르치는 사람은 악명 높은 교수 ‘플레처’입니다.

플레처는 앤드류에게 최고의 기회를 ‘주고’ 그를 전설적인 연주자로 ‘만들어주겠다.’ 라고 말합니다.

겉으로 보면, 이것은 스승이 제자에게 베푸는 가장 큰 선물이자 나눔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플레처의 마음속에는 평화가 없습니다.

거기에는 제자에 대한 사랑과 존중 대신, 제2의 전설을 만들어내고야 말겠다는 자신의 뒤틀린 집착과 광기만이 가득합니다.

 

그는 앤드류에게 칭찬 대신 모욕을, 격려 대신 폭언을, 가르침 대신 쇠 의자를 집어 던지는 폭력을 ‘줍니다’.

그의 모든 ‘주는’ 행위는 앤드류의 영혼과 재능을 자신의 만족을 위해 착취하는 이기적인 폭력일 뿐입니다.

그가 주는 것은 사랑이 아니라 상처이고, 가르침이 아니라 거짓입니다.

이것은 마치 사울 왕이 다윗에게 왕의 사위가 되는 명예와 군대의 지휘권을 ‘주는’ 척했지만, 그 마음에는 시기와 불안이 가득하여 실제로는 다윗의 목숨을 ‘빼앗으려’ 했던 것과 같습니다.

 

마음의 평화 없이 주는 것은 이처럼 주는 것이 아니라, 교묘하게 빼앗는 행위일 뿐입니다.

반대로 우리가 먼저 ‘거저 받았다.’라는 사실을 깨달을 때, 우리의 삶이 어떻게 변화하는지를 영화 <어바웃 타임>이 아름답게 보여줍니다.

주인공 ‘팀’은 자기 가문의 남자들에게 시간을 되돌리는 능력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처음 그는 이 엄청난 능력을 첫사랑을 얻고 실수한 순간을 되돌리는 등 자신의 삶을 완벽하게 만드는 데 사용합니다.

그러나 그의 아버지는 아들에게 이 능력의 진짜 사용법을 알려줍니다.

그것은 과거를 바꾸는 것이 아니라, 그저 평범한 하루를 두 번 살아보는 것입니다.

 

첫 번째는 온갖 긴장과 걱정 속에서 평범하게 하루를 살고, 두 번째는 똑같은 하루를 다시 살면서 첫 번째에는 미처 보지 못했던 세상의 아름다움, 주변 사람들의 미소, 일상의 작은 기쁨들을 온전히 느껴보는 것입니다.

팀은 아버지의 가르침을 통해 놀라운 진실을 깨닫습니다.

바로 자신의 하루하루가 이미 선물이었고, 자신은 이미 모든 것을 ‘받은’ 존재라는 사실입니다.

 

이 깨달음 이후, 그는 더 이상 시간을 되돌릴 필요를 느끼지 못합니다.
실수해도 괜찮고, 일이 뜻대로 되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이미 사랑하는 가족과 함께하는 이 하루가 얼마나 소중한 선물인지 알기 때문입니다.

 

그는 시간을 되돌릴 수 있는 전능한 능력이 있지만, 그저 현재를 충실히 받아들이고 기쁘게 살아갑니다.

 

그는 이미 모든 것을 ‘거저 받았기에’ 잃을 것이 없다는 믿음 안에서, 주변 사람들에게 조급함 대신 여유를, 불안 대신 평화를, 인색함 대신 사랑을 아낌없이 ‘내어주는’ 사람이 됩니다.

기쁘게 내어주는 사람이 되려면 주님께서 얼마나 큰 사랑으로 나를 채워주시는지, 내가 얼마나 많은 것을 거저 받았는지를 마음으로 느끼는 시간을 가져야 합니다.

 

기쁘게 주려면 다 가졌다는 감정을 느껴야 합니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하느님께서는 기쁘게 주는 이를 사랑하십니다.”

(2코린 9,7)

그렇다면 다 가져서 잃을 것이 없다는 확신은 어떻게 가질 수 있을까요?

 

갖는 것의 정점은 새로운 ‘정체성’입니다.

 

어머니가 아이에게 해 주는 모든 것들, 아까운 마음이 들까요?

어머니에겐 자녀가 전부입니다.

 

그리스도의 제자로 살아가는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이미 시간을 되돌리는 능력보다 더 위대한 선물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죄를 용서받았고, 영원한 생명을 약속받았으며, 성령을 선물로 받았습니다.

 

그래서 하느님을 아빠, 아버지라 부릅니다.

 

우리가 하느님이 되었다고 믿을 때에야 부족함이 없습니다.

사도 바오로의 말씀처럼, “그대가 받은 것이 아니고 무엇이 있단 말입니까?”(1코린 4,7) 

 

성체성사를 통해 이 믿음을 가지면 비로소 이젠 내어주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 수원교구 조원동 주교좌 성당

 

 

 

 

 

 

 

♠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의 묵상글

 

<세상의 힘을 믿기 보다는 주님 섭리의 손길에 맡기십시오>

 

예수님께서 사목 실습을 떠나는 제자들에게 실습 기간 동안 준수해야 할 지침을 건네시는데, 이를 ‘여장규범’이라고도 합니다.

 

여러 말씀 가운데 유독 다음의 말씀이 가슴이 꽂힙니다.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

전대에 금도 은도 구리 돈도 지니지 마라.

여행 보따리도 여벌 옷도 신발도 지팡이도 지니지 마라.”

(마태 10, 8-10)

 

돌아보니 저도 젊은 수도자들 선생 역할을 할 때, 젊은 형제들에게 무리한 요구를 자주 하곤 했었는데, 예수님의 제자들을 향한 요구는 무리한 요구를 넘어, 해도 해도 너무한 상상을 초월하는 요구였습니다.

 

짧지 않은 여행길이었을 텐데, 적어도 갈아 입을 여벌 옷 몇벌, 그리고 옷을 넣을 보따리 하나 정도는 지니는 것이 기본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여벌 옷도, 보따리도 챙기지 말라고 하십니다.

 

당시 여행 중에 강도나 산짐승들을 만날 경우가 종종 있었는데, 방어용 지팡이 하나는 기본이었습니다.

그런데 최후의 생존 수단인 지팡이도 지니지 말라고 하십니다.

 

뿐만 아닙니다.

긴 여행길에 많은 돈은 아니어도 만일을 대비한 비상금은 필수입니다.

그런데 비상금 한푼 조차 지니지 말라고 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전도 여행길에 오르는 사도들에게 럭셔리한 부자의 모습이 아니라 가장 가장 가난한 자의 모습으로 떠날 것을 요구하신 것입니다.

 

전도 여행길에 오르는 사도들이 자신의 힘이나 세상의 힘을 믿기 보다는 주님 섭리의 손길에 맡기라고 당부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여장 훈시와 유사한 말씀이 ‘열두 사도의 가르침’ 11장 6절에 제시되고 있습니다.

 

“사도가 떠날 때에는 다른 곳에 유숙할 때까지 필요한 빵 외에 다른 것은 받지 말아야 합니다.

만일 사도가 돈을 요구한다면 그는 거짓 예언자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사목자들이 교우들로부터 생활비를 지원받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바오로 사도 자신은 스스로 천막 짜는 노동을 해서 생활비와 전도 여행 경비를 마련했습니다.

 

부끄러운 마음으로 오늘 날 우리 교회와 수도회를 돌아봅니다.

예수님의 여장 훈시와는 너무나 동떨어진 모습의 부유한 모습입니다.

 

오늘날 우리 교회는 청빈의 삶, 무방비의 삶, 머리 둘 곳 조차 없는 떠돌이로서의 삶을 포기한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철저히 정착하고 안주했으며, 충분한 기득권을 누리고 있습니다.

 

복음적 청빈을 목숨처럼 소중히 여기며 살아가는 몇몇 수녀회 수녀님들을 바라보며 실낱같은 희망을 지닙니다.

 

그분들은 가장 가난하고 불우한 이웃들보다 덜 일하고, 덜 고뇌하고, 더 편안하고 안락한 삶을 사는 생활을 큰 죄악으로 여기고 있습니다.

 

그분들의 사목 활동 지역은 언제나 가장 가난하고 소외된 이웃들이 살아가는 거주 지역입니다.

그 지역이 개발되어 부촌으로 탈바꿈하면 아무 미련없이 또 다른 가난한 지역으로 떠나갑니다.

 

제가 몸담고 있는 현실 안에서 어떻게 하면 청빈 정신을 실천할 수 있겠는가, 고민해봅니다.

 

열심히 피정 집을 운영한 결과 창출한 결실을 절대 오래 모아두지 않습니다.

 

수시로 박박 긁어 수도자 양성 기금이나 해외 선교 기금으로 활용될 수 있도록 보냅니다.

여러 정황상 여유 있는 쉼과 힐링의 시간을 갖지 못하는 이웃들을 적극적으로 초대합니다.

 

- 살레시오회

 

 

 

 

 

 

 

 송영진 모세 신부님의 묵상글

 

<구원의 기쁜 소식은 심판의 무서운 소식이기도 합니다>

 

1)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하느님 나라가 이미 시작되었다.”, 즉 “종말과 심판이 이미 시작되었다.”입니다.

 

“그러니까 늦기 전에 회개하고 믿어라.” 라는 선포이기도 하고, “회개하고 믿어서 하느님 나라의 구원을 얻어라.” 라는 선포이기도 합니다.

 

‘구원 선포’이기 때문에 ‘기쁜 소식(복음) 선포’입니다.

 

“앓는 이들을 고쳐 주고 죽은 이들을 일으켜 주어라. 나병 환자들을 깨끗하게 해 주고 마귀들을 쫓아내어라.” 라는 말씀은, ‘복음 선포’는 ‘말’로도 이루어지고, ‘하느님의 자비’를 전해 주는 ‘일’로도 이루어진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복음을 선포하기 위해서 병자들을 고쳐 주는 것이 아니라, 병자들을 고쳐 주는 일 자체가 복음 선포입니다.

 

하느님의 자비를 받는 병자 입장에서 생각하면, ‘치유의 은총’을 받음으로써 하느님 나라를 체험하게 되고, 그 체험이 곧 복음이 됩니다.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 라는 말씀은, 하느님의 자비는 누구에게나 무상으로 주어지는 선물이라는 뜻입니다.

 

복음 선포는 세속적이고 물질적인 어떤 이익을 얻기 위해서 하는 ‘영업 활동’이 아닙니다.

하느님의 자비라는 선물을 전달해 주는 ‘사랑 실천’입니다.

2)

“전대에 금도 은도 구리돈도 지니지 마라. 여행 보따리도 여벌옷도 신발도 지팡이도 지니지 마라.” 라는 말씀은 복음을 전하러 가는 것이니까 복음만 가지고 가고, 물질적으로는 ‘빈 손’으로 가라는 명령입니다.

 

이 명령은 ‘지금’ 그런 것들을 가지고 있으면 놓아두고 가라는 명령이기도 하고, 복음 선포 활동 과정에서 그런 것들을 얻으려고 하지 말라는 명령이기도 합니다.

 

사도들은 ‘빈 손’으로 떠나서 ‘빈 손’으로 돌아와야 합니다.

 

‘빈 손’으로 가라는 명령은 선교활동에만 적용되는 명령이 아니라 신앙생활에도 적용되는 명령입니다.

신앙생활은 부자가 되고 싶어서 하는 생활이 아니라 구원을 받고 싶어서 하는 생활이기 때문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권고합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 아무것도 가지고 오지 않았으며 이 세상에서 아무것도 가지고 갈 수 없습니다.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으면, 우리는 그것으로 만족합시다.

부자가 되기를 바라는 자들은 사람들을 파멸과 멸망에 빠뜨리는 유혹과 올가미와 어리석고 해로운 갖가지 욕망에 떨어집니다.

사실 돈을 사랑하는 것이 모든 악의 뿌리입니다.

돈을 따라다니다가 믿음에서 멀어져 방황하고 많은 아픔을 겪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1티모 6,7-10)

 

“만일에 먹을 것도 없고 입을 것도 없으면 어떻게 해야 하나?” 라고 물을 수 있는데, 실제로 그런 상황에 처해 있는 사람이 있다면, 공동체가 나서서 도와주어야 합니다.

 

여기서 “돈을 따라다니다가 믿음에서 멀어진 사람들이 있다.” 라는 말은, 그런 사람들이 더러 있다는 뜻이 아니라, “돈을 따라다니다가는 믿음에서 멀어지고 구원에서도 멀어진다.” 라는 뜻입니다.

3)

“일꾼이 자기 먹을 것을 받는 것은 당연하다.”는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일꾼들을 당연히 먹이신다.”입니다.

 

아버지 하느님께서 당신의 자녀이며 일꾼인 사람들을 먹이시는 방법은 ‘마땅한 사람을 통해서’입니다.

 

“마땅한 사람을 찾아내어” 라는 말씀은 음식과 숙소를 제공해 줄 사람을 찾아다니라는 뜻이 아니라, “너희를 맞아들여서 음식과 숙소를 제공하는 사람이 있다면”이라는 뜻입니다.

 

“떠날 때까지 거기에 머물러라.”는, “더 좋은 대접을 받으려고 옮겨 다니지 말고, 주는 대로 먹어라.”입니다.

 

복음 선포는 ‘주님의 평화’를 전해 주는 일이기도 합니다.

따라서 “그 집에 평화를 빈다고 인사하여라.”는 “그 집에 평화를 전해 주어라.”입니다.

 

“평화를 누리기에 마땅하면”은 “복음을 받아들이면”이고, “마땅하지 않으면”은, “복음을 믿기를 거부하면”입니다.

 

“그 평화가 너희에게 돌아올 것이다.”는 “복음을 믿기를 거부하는 사람이 구원받지 못하는 것에 대한 책임은 그 사람 자신에게 있다.”입니다.

 

“발의 먼지를 털어 버려라.”는, “심판을 경고하여라.”입니다.

 

복음은 믿고 받아들이는 사람에게만 ‘구원의 기쁜 소식’이 되고, 복음을 믿지 않고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에게는 ‘심판의 무서운 소식’이 됩니다.

 

“심판 날에는 소돔과 고모라 땅이 그 고을보다 견디기 쉬울 것이다.” 라는 말씀은 믿지 않고 회개하지 않는 사람들이 받게 될 심판과 멸망이 얼마나 무서운 일인지를 강조하신 말씀입니다.

 

그런데 심판 날이 언제인지는 아무도 모르기 때문에, 믿고 회개해야 하는 때는 언제나 항상 ‘바로 지금’입니다.

이미 신앙인이 되어 있더라도 그것을 잊으면 안 됩니다.

 

- 전주교구 상지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의 묵상글

 

<하느님의 얼굴 - 믿는 우리가 하늘 나라의 실현입니다>

 

“주님과 그 권능을 구하여라.

 언제나 그 얼굴을 찾아라.”

(시편 105,4)

 

어제에 이어 오늘 제1독서 창세기에서 요셉과 그 형제들의 만남이 이야기의 절정입니다.

말 그대로 해피엔딩입니다.

 

요셉의 고백이 참 감동적입니다.

오늘 독서는 요셉의 일부 고백만 전하지만 이어지는 장문의 고백은 정말 장관입니다.

 

“내가 형님들의 아우 요셉입니다.

형님들이 이집트에 팔아넘긴 그 아우입니다.

그러나 이제는 저를 이곳으로 팔아넘겼다고해서 괴로워하지도, 자신에게 화를 내지도 마십시오.

우리 목숨을 살리시려고 하느님께서는 나를 여러분보다 앞서 보내신 것입니다,

...나를 이곳으로 보낸 것은 여러분이 아니라 하느님이십니다.”

 

요셉을 통해 온전한 참사람 하나 만나는 느낌입니다.

 

요셉은 물론 우리의 삶은 결코 우연이 아니라 모두가 하느님의 손길 안에서 일어난 섭리의 역사임을 깨닫습니다.

 

아직은 미완인 내 고유한 삶의 성경책 자주 렉시오 디비나 하며 묵상해 보시기 바랍니다.

 

이어 요셉은 그의 아우 벤야민의 목을 껴안고 울었고, 형들과도 하나하나 입을 맞추고 그들을 붙잡고 울었다 합니다. 

 

요셉의 너그럽고 관대한 모습이 그대로 하늘 나라의 실현인 듯, 요셉을 바라보는 형제들은 흡사 하느님의 얼굴을 뵙는 듯 했을 것입니다.

 

앞서 야곱이 밤새 하느님과의 치열한 대결 후 에사우 형을 만났을 때 에사우의 너그러운 환대에 대한 야곱의 선물과 더불어 고백도 연상됩니다.

 

“이 선물을 받아주십시오.

정녕 제가 하느님의 얼굴을 뵙는 듯 주인의 얼굴을 뵙게 되었고, 주인께서는 저를 기꺼이 받아 주셨습니다.”

 

참으로 인간의 얼굴은 곧 ‘프니엘’ 하느님의 얼굴을 드러낼 때 하느님의 모상으로서 온전한 참나의 실현임을 깨닫습니다.

다음 옛 현자의 말씀은 그대로 요셉은 물론 예수님과 모든 성인들에게 해당된다 싶습니다.

 

“어른스러움이란 곧 관대함이다.

타인에 대한 너그러움은 자신에 대한 엄격함에서 나온다.”

<다산>

 

“군자는 세 번 변한다.

멀리서 바라보면 위엄이 있고, 가까이 다가서면 온화하며, 말을 들어보면 엄정하다.”

<논어>

 

채근담에 나오는 춘풍추상春風秋霜, ‘남에게는 봄바람처럼 부드럽게 대하고 자신에게는 가을서리처럼 엄격하게 대하라’는 고사성어와 일맥상통합니다.

 

흡사 요셉은 복음의 예수님의 예표처럼 보입니다.

 

요셉을 통해, 마침내 예수님을 통해 환히 드러난 하느님의 얼굴이요 하늘 나라입니다.

단숨에 읽혀지는 오늘 복음의 예수님 말씀입니다.

 

“가서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다.’하고 선포하여라.

앓는 이들을 고쳐주고, 죽은 이들을 일으켜 주어라.

나병 환자들을 깨끗하게 해 주고, 마귀들을 쫓아내어라.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져 주어라.”

 

오늘 지금 여기서부터 실현되는 하느님의 꿈, 하늘 나라입니다.

 

하늘 나라의 실현인 주님을 만날 때 온전한 치유에 감사요 관대함이요, 우리 하나하나는 하느님의 얼굴을 반사할 것입니다.

그대로 이 거룩한 미사전례 은총입니다.

 

이어 주님은 소유가 아닌 존재에, 가난과 겸손, 무소유의 정신에 투철할 것을 명령하십니다.

 

“전대에 금도 은도 구리 돈도 지니지 마라.

여행 보따리도 여벌 옷도 신발도 지팡이도 지니지 마라.

일꾼이 자기 먹을 것을 받는 것은 당연하다.”

 

말 그대로 무소유는 아니더라도 무소유의 초탈한 삶일 때 그대로 우리는 하느님의 얼굴을 드러낼 것이며 하느님 은총의 통로가 될 것입니다.

 

주님은 너그러운 형제들의 환대에 의존하되 민폐를 최소화하면서 어느 집에 들어가든 먼저 그 집에 평화를 빈다고 인사하라 하십니다. 

 

말 그대로 하늘 나라를 실현하는 주님 평화의 사도로, 선교사로 살라는 것입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날로 ‘프니엘’, 하느님의 얼굴을 닮게 하시고, 오늘 지금 여기 각자 삶의 자리에서 평화의 사도가 되어 하늘 나라를 살게 하십니다.

 

“주님이 얼마나 좋으신지 너희는 맛보고 깨달아라.

 행복하여라, 주님께 바라는 사람!”

(시편 34,9)

 

아멘.

 

- 성 베네딕도회 요셉 수도원

 

 

 

 

 

 

 

♠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의 묵상글

 

<먼저 받은 이에게는 다른 이를 위해 봉사할 거룩한 사랑의 의무가 주어지는 법>

 

어제에 이어 오늘 복음은 열두 제자를 파견하실 때 하신 예수님의 당부를 담고 있습니다.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

(마태 10,8)

이 말씀은 복음 선포, 치유, 되살림, 구마 등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주신 "권한"으로 이루어질 모든 일들의 원리가 될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볼 때, 제자들의 소박한 출신 성분이나 기질적 부족함이 오히려 하느님 도구로서의 자질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율법에 능통한 학자 계급도 아니고 의술에 출중한 재주를 지닌 것도 아닌 그저 평범하고 투박한 이들이 하느님의 도구가 될 때, 그 자신이 아닌 하느님의 권능이 더욱 드러나기 마련이니까요.

 

또 자기 것이 아닌 능력에서 나온 결실에 대해 아무도 소유권이나 독점권을 주장할 수 없을 겁니다.

 

그 권한의 원천이 자신이 아닌 하느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제자들은 앞으로 하느님의 기쁜 소식을 듣게 될 이들보다 한 발자국 앞서 은총을 체험한 이들입니다.

순서에 조금 차이가 있을 뿐이지요.

 

오히려 먼저 받은 이에게는 다른 이를 위해 봉사할 거룩한 사랑의 의무가 주어지는 법입니다.

예수님은 길 떠나는 이가 준수해야 할 가난과 의탁, 머무름, 평화의 기원, 거부당할 때의 대응 방법을 차례로 일러 주십니다.


"마땅한 사람."

(마태 10,11)

 

"평화를 누리기에 마땅하면 ... 마땅하지 않으면..."

(마태 10,13)


마땅함이라는 말씀에 머무릅니다.

합당하고 적합하며 제격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지요.

 

권력이나 재산, 지식, 힘을 소유한 존재를 가리키기보다, 길을 나선 제자들을 환대하고, 가난하고 부족한 그들을 통해서도 하느님 현존을 감지해 존중하는 이들을 가리킬 겁니다.

"누구든지 너희를 받아들이지 않고 너희 말도 듣지 않거든..."

(마태 10,14)


제자들은 충분히 거부와 배척을 당할 수도 있습니다.

누구에게도 꽃밭만 주어지지는 않으니까요.

 

예수님은 그에 맞서지 말고 평화의 사람으로서 대응하기를 바라십니다.

담담히 떠나되 어떤 마음의 앙금도 남기지 말고 "발의 먼지"와 함께 털어 버리라고요.

 

심판은 하느님의 몫이기 때문입니다.

제1독서는 요셉과 형제들의 화해를 다룹니다.


"우리 목숨을 살리려고 하느님께서 나를 여러분보다 앞서 보내신 것입니다."

(창세 45,5)


놀라고 두려워 당황하는 형들에게 요셉이 한 말입니다.

 

이는 요셉이 형들에게 버림받아 이국땅에 팔려가면서부터 시작된 고통의 순간마다 하느님께서 자기와 함께해 주시며 복을 내리셨음을 깨닫고 있기 때문에 가능한 말입니다.(창세 39,2.23; 41,38 참조)

 

내 잘난 덕에, 자기 능력으로 여기까지 온 것이 아니라 하느님이 아니고서는 누구도 베풀 수 없는 신비한 힘에 감싸여 왔으며, 비록 이방인이지만 자기를 지키시는 하느님의 힘을 감지하고 경외하며 존중한 여러 "마땅한 사람" 덕분에 살 수 있었다는 걸 놓치지 않는 그는 진정 "하느님의 영을 지닌 사람"(창세 41,38)입니다.

 

그는 하느님께서 자기 민족의 구원을 위해 자신을 먼저 준비시키셨다고 굳게 믿으며 고통과 슬픔의 앙금을 말끔히 털어내었습니다.

"우리 목숨을 살리려고..."


이집트의 최고 통치자가 된 요셉이 여전히 형제들을 "우리"라 부르고 있다는 사실이 눈길을 끕니다.

 

비록 자기를 배척하고 사지로 몰아낸 형들이지만 부인할 수 없는 소속과 생명의 원천인 가족, 그리고 그 가족을 돌보시는 하느님은 그가 우여곡절을 견뎌낼 수 있게 지탱해 준 구심점이었을 겁니다.

그렇다고 형들의 잔인한 죄악을 정당화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 큰 믿음과 신뢰가 과정 안에 있었던 아프고 슬픈 상처를 치유해 형들에게 먼저 손을 내밀 수 있게 해준 것입니다.

 

용서는 충분히 사랑받으며 치유받아 과거를 재해석할 내적 힘이 무르익으면 가식없이 흘러나오게 됩니다.

첫 파견에 나선 예수님의 제자들이 기대와 달리 행여 배척과 거부를 당하더라도, 하느님의 돌보심과 섭리를 믿으면서 묵묵히 가야 합니다.

 

아직 하느님을 맞이할 "때"가 되지 않은 그(그 고을)를 뒤로 하고 길을 떠날 때, 원망하지 않고 온유와 평화를 잃지 않는다면 언젠가 그들과 순수한 용서와 화해를 나눌 날이 찾아올 것입니다.

 

그때는 "우리"가 진정한 "우리"가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벗님 여러분,

특별나지도 않고 평범하기에 주님의 부르심을 받고 그분의 제자가 되어, 이제 그분의 파견을 받은 "평화의 사도"가 되신 벗님을 축복합니다.

 

거저받은 은혜를 거저 묵묵히 나눔으로써 파견하신 분의 영광을 드러내는 오늘 되시길 축원합니다.

- 작은형제회 

 

 

 

 

 

 

 

♠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의 묵상글

 

<은혜를 또 다른 사람에게 ‘거저’ 흘려보낼 때, 주님의 평화가 우리 가운데 머무르게 됩니다>

 

제가 좋아하는 한문 성어가 하나 있습니다. 

바로 ‘적선지가 필유여경(積善之家 必有餘慶)’이라는 말입니다.

“선을 쌓는 집에는 반드시 복이 따른다”라는 뜻입니다. 

 

하느님께서도 우리에게 좋은 것을 주시기를 바라시지, 벌을 먼저 내리시려는 분은 아니십니다. 

 

우리 교리에도 ‘상선벌악(賞善罰惡)’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착한 이를 상주시고 악한 이를 벌하신다는 말인데, 이 말의 핵심은 ‘상주심’에 있습니다.

 

2007년, 제가 캐나다 연수를 마치고 본당으로 발령받았을 때의 일입니다. 

지구장 신부님께 인사드리러 갔더니, 봉투 하나를 주셨습니다. 

꽤 큰 액수였기에, 저는 본당 신축 빚에 보태 쓰라는 뜻으로 알고 바로 본당 계좌에 입금했습니다. 

 

그런데 나중에 알고 보니 신부님은 저를 새로 분할되는 지구의 지구장 신부로 착각하셨습니다. 

그런데도 “그냥 써요” 하셨습니다. 

 

저는 그때 마음 깊이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인사만 잘해도 복을 주시는구나.” 

 

그 경험은 제게 한 가지 마음의 습관을 만들게 했습니다. 

 

'감사하면 감사할 일이 생기고, 고마워하면 고마울 일이 생긴다.

반대로 미워하면 미워할 일이 생기고, 불평하면 불평할 일이 생긴다.'

 

마음이 곧 현실을 이끄는 창문이 되는 것입니다.

 

이번에도 비슷한 일이 있었습니다. 

 

아시안 성당들이 모여서 주교님과 함께 다문화 미사를 했습니다. 

다음 주에 평가회 겸 식사 자리가 있어서 참석했습니다. 

공동체에서 성직자가 참석한 성당은 달라스 성당뿐이었습니다. 

 

그곳 성당은 9월에 성전을 새로 지어서 이사 간다고 했습니다. 

지금 성전의 의자가 좋아 보였습니다. 

 

본당 신부님에게 새로 성전 지으면 지금 성당의 의자를 옮겨가는지 물었습니다. 

본당 신부님은 새 성전에는 새 의자를 마련한다고 했습니다. 

 

그때 한가지 떠오는 생각이 있었습니다. 

지난 4월에 오스틴의 한인 성당을 방문했을 때입니다. 

그 성당은 성당에 긴 의자가 없었습니다. 

 

몇 년 전에 큰 비가 내려서 의자가 모두 상해서 버렸다고 합니다. 

새로 의자를 마련하려면 8만 불이 넘게 든다고 합니다. 

본당 재정상 엄두가 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저는 오스틴 본당 신부님께 연락했습니다. 

운송비만 있으면 좋은 의자를 가져갈 수 있다고 했습니다. 

기쁜 마음으로 평가회에 참석했더니 이렇게 좋은 일이 생겼습니다. 

 

감사하면 감사할 일이 생기는 것 같습니다.

 

따뜻한 마음으로 바라보면 주님께서 축복을 주시는 것 같습니다. 

감사하는 사람의 눈에는 기회가 보이고, 미워하는 사람의 눈에는 불만만 보입니다.

 

오늘 독서에서 요셉은 형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형님들이 저를 이집트로 팔았지만, 괴로워하지 마십시오. 

하느님께서 우리 목숨을 살리시려고 저를 앞서 보내신 것입니다.” 

 

어쩌면 요셉은 인생 최악의 배신을 경험했지만, 거기서도 하느님의 섭리를 본 사람입니다. 

 

그는 분노와 복수의 감정에 빠지지 않고, 감사의 눈으로 자신의 삶을 바라보았습니다. 

 

복음 말씀에서도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 

 

우리 인생에는 내가 노력한 결과도 있지만, 누군가의 호의로, 하느님의 은총으로 받은 것들도 있습니다. 

 

우리는 그 은혜를 또 다른 사람에게 ‘거저’ 흘려보낼 때, 주님의 평화가 우리 가운데 머무르게 됩니다.

 

‘감사는 추상적 정서가 아니라 구체적 삶의 방식’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어떤 일이 잘 풀릴 때만 감사하는 것이 아니라, 당장 이해관계를 넘어서 “어떻게 이 일이 나를 성장시키고 있는가?”를 질문하는 것이야말로 성숙한 감사의 자세라고 합니다.

 

오늘 하루, 우리가 어떤 마음으로 세상을 바라보느냐에 따라 우리 삶의 색깔이 달라집니다. 

감사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면 축복이 보입니다.

 

“주님이 얼마나 좋으신지 너희는 맛보고 깨달아라. 

행복하여라, 주님께 바라는 사람!” 

 

감사하면 감사할 일이 생기고, 사랑하면 사랑할 일이 생깁니다. 

 

오늘 하루, 하느님의 은총을 ‘거저 받은 자’로서, 누군가에게 ‘거저 나누는’ 하루가 되면 좋겠습니다.

 

- 미국 댈러스 성 김대건 안드레아 성당

 

 

 

 

 

 

 

 

♠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의 묵상글

 

 <하느님과의 약속>

 

지난 5월에 11번째의 책을 출판했습니다.

 

본당 학생 중에 한 명이 제게 이렇게 묻더군요.

“신부님! 어떻게 그 많은 책을 낼 수 있어요?”

 

그 바탕은 2001년부터 시작한 ‘새벽 묵상 글’입니다.

그 글들을 모아서 책을 한 권씩 내다보니 벌써 11번째의 책을 출판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사실 처음 이 묵상 글을 쓸 때는 부담이 컸었습니다.

매일 다른 내용을 쓴다는 것이 쉽지 않았거든요.

 

그런데 처음 인터넷 공간에 묵상 글을 올리면서 글쎄 약속하고 말았습니다.

매일 빠짐없이 매일 묵상 글을 이 공간에 올리겠다고 말입니다.

이 약속을 어길 수 없어서 힘들어도 멈출 수가 없었습니다.

 

25년이 지난 지금, 이제는 즐기면서 묵상 글을 쓰고 있습니다.

글 쓰는 재미를 깨닫게 된 것입니다.

 

아직도 글을 써야 한다는 스트레스가 없지는 않지만, 쓰고 나서는 또 하나의 글을 완성했다는 기쁨이 더 크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힘들어도 저 자신을 위해 필요함을 시간이 지날수록 느낄 수 있었기 때문에 멈추지 않았습니다.

 

이렇게 긴 시간을 쓸 수 있었던 것은 ‘약속’ 때문이었습니다.

 

약속은 지키기 힘듭니다.

그러나 그 약속을 지켰을 때의 이득은 훨씬 크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그런 측면에서 하느님과의 약속도 그러하지 않을까요?

 

하느님과 했던 약속을 지키기는 분명 어려울 것입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지켰을 때 우리의 이득은 세상의 그 어떤 것보다도 큽니다.

 

예수님께서 사도들에게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다‘하고 선포하라고 명령하십니다.

 

하느님 나라가 하늘에서 지상으로 내려오고 있는 것일까요?

 

그보다 예수님의 현존을 통해 하느님의 통치가 시작되었음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병자들을 고쳐주고, 마귀들을 쫓아내라고 하시지요.

선포는 말만 하는 것이 아니라 행동이 함께 따라야 함을 보여줍니다.

 

여기에 전대에 금도 은도 구리 돈도 지니지 말라고 하시면서 전교 여행이 쉽지 않다는 것을 암시합니다.

 

그런데도 제자들은 이 명령을 받아들입니다.

그리고 오늘 복음에는 나오지 않았지만, 성공적인 전교 여행이었음을 제자들의 증언을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바로 주님의 명령을 따르겠다고 약속했고, 그 약속을 실천하면서 얻는 기쁨이 컸던 것입니다.

무엇보다 하늘에 그들의 이름이 기록되었다는 것 자체가 가장 큰 기쁨일 것입니다(루카 10,20 참조).

 

약속을 지켜야 합니다.

특히 주님과의 약속은 반드시 지켜야 합니다.

 

물론 그 순간에는 지키기 힘들고, 과연 필요가 있을까 라는 의구심이 들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지키면 지킬수록 기쁨은 더 커질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당신을 믿고 흠숭하는 사람에게 더 큰 은총과 사랑을 주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인천가톨릭대학교 성김대건성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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