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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 미사 성경 묵상

2025년 7월 17일 연중 제15주간 목요일

작성자이정식 베드로|작성시간25.07.16|조회수24 목록 댓글 0

제1독서
탈출기의 말씀 3,13-20

 

그 무렵 떨기나무 한가운데에서 주님의 목소리를 들은 

13 모세가 하느님께 아뢰었다.
“제가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가서, ‘너희 조상들의 하느님께서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고 말하면, 그들이 저에게 ‘그분 이름이 무엇이오?’ 하고 물을 터인데, 제가 그들에게 무엇이라고 대답해야 하겠습니까?”
14 하느님께서 모세에게 “나는 있는 나다.” 하고 대답하시고, 이어서 말씀하셨다.
“너는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있는 나′께서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여라.”
15 하느님께서 다시 모세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너희 조상들의 하느님, 곧 아브라함의 하느님, 이사악의 하느님, 야곱의 하느님이신 야훼께서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여라.
이것이 영원히 불릴 나의 이름이며, 이것이 대대로 기릴 나의 칭호이다.
16 가서 이스라엘 원로들을 모아 놓고, ‘주 너희 조상들의 하느님, 곧 아브라함과 이사악과 야곱의 하느님께서 나에게 나타나 이렇게 말씀하셨다.’ 하고, 그들에게 말하여라.
‘나는 너희를 찾아가 너희가 이집트에서 겪고 있는 일을 살펴보았다.
17 그리하여 이집트에서 겪는 고난에서 너희를 끌어내어, 가나안족과 히타이트족과 아모리족과 프리즈족과 히위족과 여부스족이 사는 땅, 곧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데리고 올라가기로 작정하였다.’
18 그러면 그들이 너의 말을 들을 것이다.
너는 이스라엘의 원로들과 함께 이집트 임금에게 가서, ‘주 히브리인들의 하느님께서 저희에게 나타나셨습니다. 그러니 이제 저희가 광야로 사흘 길을 걸어가, 주 저희 하느님께 제사를 드릴 수 있도록 허락해 주십시오.’ 하고 말하여라.
19 그러나 강한 손으로 몰아세우지 않는 한, 이집트 임금은 너희를 내보내지 않으리라는 것을 나는 안다.
20 그러므로 나는 손을 내뻗어 이집트에서 온갖 이적을 일으켜 그 나라를 치겠다.
그런 뒤에야 그가 너희를 내보낼 것이다.”

 


복음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 11,28-30

 

그때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28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
29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그러면 너희가 안식을 얻을 것이다.
30 정녕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님의 묵상글

 

<참된 안식>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

(마태 11,28)

이는 듣기만 하여도 벅찬 감격이 밀려오는 말씀입니다. 

 

사실 우리는 ‘세상의 짐’과 ‘율법의 짐’을 지고서 잠자리에 누워서까지도 신음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러기에 '안식'으로의 초대는 이러한 인간의 비참을 보신 예수님의 성심에서 흘러나오는 다함없는 사랑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단지 '안식'으로 초대만 하시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얻는 방법을 가르쳐주시고자 오늘 우리를 제자로 부르십니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마태 11,29)

‘멍에’란 자신의 몸 위에 걸쳐지지만, 짐을 편하게 지거나 끌게 합니다. 

그것은 짐을 함께 지거나 함께 끌며, 짐 아래에 눌리지만 짐을 가볍게 합니다.

 

자신의 몸 위에 놓이지만 온유하고, 짐 아래에 놓여 겸손합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의 마음'과 같습니다. 

'멍에를 멘다'는 것은 스승과 제자의 관계를 말해줍니다.

 

당시의 팔레스타인의 '멍에'가 혼자 메는 것이 아니라 항상 짝을 이루어 두 노역자가 함께 메었듯이, ‘예수님과 함께’ 멍에를 메는 것은 '예수님과 하나가 되어 동행하는 것'을 말합니다. 

“나에게 배워라”는 말씀은 단지 ‘당신을 모방하라’ 혹은 ‘당신의 경험을 배우라’는 의미가 아니라, 당신만이 전달해 줄 수 있는 ‘진리를 배우라’는 의미입니다. 

 

그렇기에 예수님께서는 단순히 '길'을 제시하는 스승이 아니라, 당신 자신이 바로 '길'이십니다. 

 

그리고 '길'이신 당신은 '마음이 온유하시고 겸손'하십니다.

그리고 바로 그 마음을 제자들 안에 건네주십니다.

 

이 마음은 그저 화를 내지 않고 온순하다는 의미가 아니라 종으로서 타인을 섬기며, 고난을 겪어서 타인의 아픔을 아는 그런 마음입니다.

 

그리하여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그러면 너희가 안식을 얻을 것이다.”

(마태 11,29) 

이는 '안식'은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당신께서 주시는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얻을 것이다”의 원어의 뜻은 '찾다', '발견하다'는 뜻입니다.

 

곧 참된 '안식'은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 안에서 찾고 발견되는 것이며, 그분이 이를 주리라고 약속하십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참된 스승이신 예수님 안에서만이 참된 '안식'을 얻게 됩니다.

 

결국 '예수님의 제자'란 단순히 예수님을 뒤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이처럼 '예수님의 마음'이 되어 ‘예수님과 일치’를 이루는 일입니다.

 

우리는 바로 이 '예수님 마음'에서 사랑을 퍼올리는 그분의 제자들입니다.

그 사랑을 보고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당신의 제자임을 알게 될 것입니다.

 

'예수 마음'이 이미 안식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정녕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

(마태 11,30) 

 

아멘.

 

<오늘의 말 · 샘 기도>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마태 11,29)

 

주님!

당신의 멍에를 메게 하소서.

위에 있지만 짓누르지 않는, 묶지만 옭아 메지 않는, 오히려 편하게 하는 사랑의 멍에를 메게 하소서.

함께 지며 나누는, 함께 가며 끌어주는, 그 손을 놓치지 않게 하소서.

동행해 주고 길이 되어 주는, 온유하고 겸손하신 그 마음을 따라 살게 하소서.

아멘.

 

- 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도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의 묵상글

 

<내 마음의 평화와 안식을 위해서>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

(마태 11,28)

오늘 주님께서 무거운 짐을 진 우리보고 당신에게 오라고 하시고, 짐을 지면서도 안식을 누리게 해주겠다고 하시는데 그 짐이 무엇인지, 곧 몸으로 지는 짐인지 마음의 짐인지 생각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당신의 멍에를 메고 짐을 지면 멍에는 편하다고 하시는데, 그 멍에는 어떤 멍에인지에 대해서도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먼저 몸의 짐은 아닐 것이라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물론 몸으로 지는 짐도 가볍게 질 필요가 있고 지는 법을 배울 필요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짐꾼에게 배우면 되지 굳이 주님께 가서 배울 필요까지 없습니다.

오늘 주님께서 지는 법을 가르쳐주고 싶으신 것은 몸의 짐이 아니고 마음의 짐이기에 당신의 마음을 예로 들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마태 11,29)

우리는 자주 무엇이 또는 누가 부담스럽다느니 부담을 느낀다느니 합니다.

 

이것은 무엇이 또는 누가 싫은 것입니다.

 

좋은 것이 부담스러울 리 없지 않습니까?

특히 싫은 사람을 만나는 것이 너무도 싫은 것이며, 그런데도 만나야 한다고 하면 거부감과 부담감이 드는 것입니다.

마음의 짐이 이런 것이기에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면 그것은 몸에 잘 맞는 멍에처럼 멍에는 편하고 짐은 가벼워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음이 온유하면 왜 왜 멍에는 편하고 짐은 가벼운지에 대해 먼저 보겠습니다.

 

지금 우리 번역은 “마음이 온유하면”이라고 번역하였는데, 제가 번역하면 “마음이 온순하면”으로 번역하고 싶습니다.

이것은 공자가 나이 60에 이순(耳順)해야 한다는 것과 같은 맥락입니다.

 

나이 50에 지천명(知天命) 곧 하늘의 뜻 또는 명을 알게 되었다고 해도 아직 그것을 거역하는 마음이 들 수도 있는데, 60이 되면 이제 귀가 순해져서 거역하지 않게 되는 경지를 말함과 같습니다.

역경에 처해도 순경에 처할 때와 마찬가지로 순한 것이 온순함일 것입니다.

 

고생하고 무거운 짐을 지게 되었어도 ‘왜 내게 이것이?’라고 하지 않음이고, ‘예.’라고 하는 것입니다.

다음으로 겸손한 마음에 대해서 보겠습니다.

 

마음이 겸손할 때도 멍에는 편하고 짐은 가볍습니다.

마음이 겸손한 사람은 고생이나 무거운 짐을 자기 것으로 받아들이는 사람입니다.

 

예를 들어 무거운 짐이 있을 때 종과 주인 가운데 누가 그것을 지겠습니까?
아니, 종과 주인 사이에서 져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누구이겠습니까?
종이 아닙니까?

종은 자기가 마땅히 져야 한다고 생각하지요.
그래서 무거운 짐을 져도 마음에 분노가 일지 않고 평안할 것입니다.

마음이 겸손한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겸손하면 겸손할수록 그에게 무거운 짐과 많은 짐이 지워지겠지만, 그는 그 무거운 짐과 많은 짐을 져도 불평 없이 지고 불만이 없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다른 누구를 위해서가 아니라 내 마음의 평화와 안식을 위해서, 겸손과 온유라는 마음의 멍에를 메고,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소명과 책임을, 이웃이 우리에게 얹어준 십자가를 매일 잘 지기로 결심하는 오늘 우리입니다.

 

- 작은형제회

 

 

 

 

 

 

 

♠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의 묵상글

 

<내 멍에는 편하다>


‘하던 일도 멍석 펴 놓으면 안 한다.’는 옛말이 있습니다.

자기가 하던 일을 남이 권하면 오히려 안 한다는 뜻입니다.

 

무엇이든 자발적으로 하면 신이 나고 힘이 들지 않습니다.

그러나 억지로 하면 똑같은 일을 하더라도 힘이 들고 능률도 떨어집니다.

 

따라서 기왕이면 무슨 일이든 스스로 찾아서 했으면 좋겠습니다.

하고 싶은 일이라면 신이 나게 하고, 하고 싶지 않은 일이라도 옳은 일이고 해야 할 일이라면 기꺼이 해야 하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 …정녕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 (마태 11,28.30) 고 말씀하셨습니다.

 

사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아들이셨지만 비천한 인간의 모습으로 오셨고, 더군다나 스스로 자신을 낮추셔서 죽기까지 순명함으로써 우리에게 멍에와 짐을 지는 법을 가르쳐주셨습니다.

 

결국 그분의 멍에와 짐은 아버지 하느님의 영광과 당신 백성을 사랑하기 때문에 스스로 짊어진 것입니다.

 

따라서 육적으로는 고달프고 힘드셨겠지만 사랑의 극진한 표현이었기에 아버지 하느님과의 일치를 이루셨고 내적인 기쁨으로 충만하셨습니다.

 

주 하느님께 온전히 의탁하고 내가 해야 할 일을 충실히 감당하면 짐과 멍에는 가볍고 편하게 됩니다.

율법학자들은 율법의 규정이라는 괴로운 멍에를 백성들에게 짊어지게 하고 내용보다는 형식에 매여 백성을 힘들게 하였지만, 예수님께서는 그 율법의 의미와 내용을 자발적으로 지키고 또 가르침으로써 편한 멍에와 짐이 되게 하셨습니다.

 

유다교에는 계명이 상당히 많았는데 248조항이 명령이고 365개 조항은 금령으로 613개 조항의 계명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이 잡다한 조항의 계명을 하느님 사랑과 이웃사랑의 계명으로 요약하였고, 그 두 계명을 불가분의 관계로 결합시키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요구하는 것이 더 힘든 요구로 받아들일 수 있을지언정 그 멍에는 인간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핵심은 사랑이었습니다.

 

그래서 요한 사도는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은 바로 그분의 계명을 지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분의 계명은 힘겹지 않습니다. 하느님에게서 태어난 사람은 모두 세상을 이기기 때문입니다.” (요한 5,4)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자발적으로 일상을 봉헌하고 끊임없이 사랑을 실천하는 사람은 주님께서 주시는 내적인 기쁨과 행복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우리의 약점과 한계, 죄스럽고 못난 모습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받아주시는 주님의 사랑을 기억한다면, 우리의 신앙은 결코 무거운 짐이나 멍에가 될 수 없습니다.

 

오히려 우리의 멍에는 주님과의 깊은 만남 안에서 오는 위로와 평화의 원천입니다.

기쁨을 위한 희생과 봉헌의 기초입니다.

 

혹 힘들고 지칠 때 주님께서 주시는 멍에와 짐을 귀찮아하는 것은 아닌지 살펴야 하겠습니다. 

 

“정녕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 하신 주님을 꼭 붙잡기 바랍니다.

 

미루지 않는 사랑을 희망하며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 청주교구 내덕동 주교좌 성당

 

 

 

 

 

 

 

♠ 전삼용 요셉 신부님의 묵상글

 

<그리스도를 입는다는 것의 의미>
 

만일 우리 평생에 하느님께 단 한 가지만 청할 수 있다면, 무엇을 청하시겠습니까?

 

아마 많은 분들이 건강이나 재물, 또는 자녀의 성공이나 가정의 평화를 떠올리실 겁니다.

모두 소중하고 귀한 것들입니다.

 

하지만 오늘 저는, 만약 제게 그런 기회가 주어진다면 주저 없이 “예수님의 마음, 곧 온유하고 겸손한 마음을 주십시오.” 하고 청하겠다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왜냐하면 사람은 몸으로 사는 것도, 머리로 사는 것도 아니라 궁극적으로는 마음으로 살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분명히 말합니다.

 

“무엇보다도 네 마음을 지켜라. 거기에서 생명의 샘이 흘러나온다.” (잠언 4,23) 하셨고, 예수님께서도 “마음에서 나쁜 생각, 살인, 간음, 불륜, 도둑질, 거짓 증언, 중상이 나온다.” (마태 15,19) 하시며 모든 것의 근원이 마음임을 분명히 하셨습니다.

우리 삶의 모든 순간, 모든 관계의 질은 바로 이 마음에 달려 있습니다.

마치 컴퓨터의 성능이 중앙 처리 장치(CPU)에 달려 있듯, 우리 인생의 방향과 평화는 마음이라는 ‘영혼의 운영체제’에 의해 결정됩니다.

이와 관련하여 늘 마음에 평화가 없던 한 부자의 이야기가 생각납니다.

 

그는 자신의 평화가 깨지는 이유가 시끄러운 주변 환경 때문이라고 믿었습니다.

 

새벽마다 우는 수탉 소리에 잠을 설친다며 수탉을 없앴습니다.

그러자 이번엔 아이들 떠드는 소리가 거슬려 높은 담을 쌓았습니다.

다음엔 삐걱거리는 집이 문제라며 집을 허물고 완벽한 방음 저택을 지었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마음은 불편했습니다.

결국 그는 모든 소음과 사람을 피해 외딴섬으로 들어갔습니다.

 

그곳은 완벽하게 고요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거기서도 잠 못 이루고 괴로워했습니다.

이번에는 요동치는 자신의 심장 소리와 머릿속에서 윙윙대는 원망과 불안의 소리가 그를 미치게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평생 평화를 깨는 외부의 것들만 고치려 애쓰다, 정작 평화의 원천인 자기 마음을 돌보지 못해 단 한 순간의 평화도 누리지 못하고 죽음을 맞이했다고 합니다.

이 이야기는 우리에게 중요한 사실을 일깨워 줍니다.

 

우리는 평화가 깨지는 이유를 끊임없이 외부에서 찾습니다.

내 배우자가, 자녀가, 직장 상사가 바뀌면 평화로울 것이라 믿습니다.

 

하지만 우리 본래의 마음, 그 상처받고 뒤틀린 마음을 그대로 둔 채 살아가면 어떻게 됩니까?

 

사소한 일에 화가 치밀고, 다른 사람과 나를 비교하며 교만해지거나 비참해집니다.

짜증과 불평이 관계를 망가뜨리고, 결국 우리 마음의 평화, 곧 안식을 산산조각 냅니다.

 

안식은 휴양지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온유하고 겸손한 마음의 상태에서 오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바로 이 마음의 문제를 해결해 주시겠다며 우리를 초대하십니다.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

(마태 11,28) 

 

이 얼마나 달콤한 약속입니까?

 

그런데 그 안식을 주시는 방법이 독특합니다.

 

그분은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안식을 얻을 것이다.” (마태 11,29) 하고 말씀하십니다.

 

안식의 조건은 다름 아닌 ‘예수님의 마음’을 갖는 것입니다.

이 말씀 안에는 인간적 노력의 정점을 넘어서는 ‘거룩한 교환’의 신비가 숨어있습니다.

 

에제키엘 예언자를 통해 약속하신 것처럼, 우리의 “돌 심장을 없애고 살 심장”을 넣어주시겠다는 (에제 36,26 참조) 약속의 성취입니다.

 

우리 힘만으로는 결코 온유하고 겸손해질 수 없기에, 주님께서 당신의 마음을 우리에게 이식해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그 마음을 그냥 주시는 데서 그치지 않고, “나에게 배우라”고 하십니다.

연습이 필요하다는 뜻입니다.

 

심장 이식을 받았다고 해서 바로 건강한 생활 습관을 갖게 되는 것이 아니듯, 그리스도의 마음을 선물로 받았다고 해서 저절로 온유한 사람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 마음을 나의 것으로 익히는 ‘훈련’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자동차 운전을 생각해 보면 쉽습니다.

 

운전면허를 땄다고 해서 바로 능숙한 운전자가 됩니까?

아닙니다.

좁은 골목길도 지나 보고, 빗길과 눈길도 달려보며 차와 한 몸이 되는 연습을 해야 합니다.

 

온유함의 성인으로 알려진 프란치스코 살레시오 성인도 본래 대단한 다혈질이었다고 합니다.

 

그는 20년이 넘는 세월 동안 매일 의식적으로 자신의 분노를 다스리고 온유함을 ‘연습’하여 마침내 ‘온유함’이 그의 제2의 본성이 되게 하였습니다.

우리 삶의 모든 순간이 바로 이 ‘배움’과 ‘연습’의 기회입니다.

 

누군가 나를 오해할 때, 내 뜻대로 일이 풀리지 않을 때, 몸이 고되고 피곤할 때, 바로 그 순간이 그리스도의 마음을 연습할 최적의 시간입니다.

 

‘예수님이라면 지금 어떻게 하셨을까?’ 질문하며 그분의 온유함을, 그분의 겸손함을 흉내 내보는 것입니다.

최근 유튜브에서 ‘랄랄’이라는 크리에이터가 연기하는 ‘이명화’ 캐릭터가 큰 인기를 끌었습니다.

 

이제 갓 30이 넘은 젊은 엄마인 그가 50대 중년 여성 캐릭터를 그토록 실감 나게 소화하는 비결은, 어려서부터 남을 흉내 내며 관찰하고 연습하는 것을 즐겼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는 단순히 50대 아주머니를 연기하는 것을 넘어, 오랜 관찰과 연습을 통해 그 말투와 표정, 삶의 태도까지 자신의 것으로 ‘체화’(體化)했습니다.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멍에를 멘다는 것은 ‘주 예수 그리스도를 입는 것’(로마 13,14)과 같습니다.

 

성체를 모실 때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마음을 이식받았다고 믿고, 매일의 삶 속에서 그분의 마음이 나의 말과 행동으로 표현되도록 의식적으로 연습해야 합니다.

처음에는 어색하고 힘들지라도, 계속하다 보면 어느새 그분의 마음이 정말 나의 마음이 되어 있음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겉모습만 흉내 내는 ‘연기’가 아니라,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시는 것” (갈라 2,20)이라는 바오로 사도의 고백처럼, 존재 자체가 변화하는 ‘체화’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지금 우리의 마음은 누구의 마음을 비추고 있습니까?

혹시 여전히 상처받은 ‘나’라는 캐릭터의 슬픈 독백을 반복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사람의 마음이 온유와 겸손으로 바뀌지 않으면 어떤 좋은 환경에 가더라도 참된 안식은 있을 수 없습니다.

오늘 미사 중에, 그리고 이번 한 주간, 하느님께 단 한 가지만을 청해봅시다.

“주님, 저의 굳은 마음을 뽑아내시고, 당신의 온유하고 겸손한 마음을 제게 넣어 주십시오.” 

 

그리고 세상 속에서 그 마음으로 살아보는 연습을 시작합시다.

 

운전대를 잡듯, 배우가 역할에 몰입하듯, 우리 삶의 모든 순간에 ‘그리스도의 마음’을 장착하고 살아갑시다.

그럴 때 주님께서 약속하신 참된 안식이, 하늘의 평화가 우리 삶 한가운데에 강물처럼 흘러넘치게 될 것입니다.

 

- 수원교구 조원동 주교좌 성당

 

 

 

 

 

 

 

♠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의 묵상글

 

<무거운 짐을 지고 있지만 얼굴을 기쁨으로 충만한 미소로 가득합니다>

 

이스라엘의 가난하고 고통받던 민중들 어깨 위에 지워졌던 무거운 짐에 대해서 묵상해봅니다.

 

그 짐은 근현대사 안에서 우리 나라 백성들이 짊어졌던 짐과 너무나도 흡사해서 깜짝 놀랄 지경입니다.

 

불편한 이웃들의 끊임없는 침략과 그로 인한 수모와 피폐한 삶은 고스란히 백성들이 짊어져야 할 무거운 짐이었습니다.

 

백성들의 안위는 손톱만큼도 없고 자신의 정치적 야심을 펼쳐나갔던 정신 나간 반민족, 친일, 독재자들의 횡포 역시 무거운 짐이었습니다.

 

독재자들은 자신의 정치적 세력을 연장시키기 위해 개헌이니, 유신이니, 계엄이니, 뭐니 하며 끊임없이 악법을 양산했고, 백성들에게 그릇된 이념과 역사관과 이념을 주입시키며 선동하고 세뇌시켜 백성들 사이에 건널 수 없는 강을 만들어놓았는데, 이 역시 너무나 무거운 짐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 역시 악법으로 전락하고 만 율법의 희생양이었습니다.

 

율법학자들은 마치 농부가 가축에게 짐을 지우듯이 율법의 철저한 준수라는 힘들고 괴로운 멍에를 백성들의 어깨에 올려놓았습니다.

 

결국 율법학자들은 구원과 생명을 위해 주어졌던 율법을 수백가지의 이해 못할 세칙으로 만들어 그 어떤 힘센 장수도 짊어질 수 없는 짐이 되게 하였습니다.

 

이 세상 그 누구도 준수할 수 없는 규정들은 결국 율법학자 자신들도 견딜수 없는 짐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해방자로 이 땅에 오신 예수님께서는 멍에이긴 한데 부담스럽지 않고 편한 멍에를 들고 오셨습니다.

 

물론 예수님께서도 산상수훈 말씀처럼 훨씬 철저하게 율법을 가르치시고, 힘든 요구를 하셨지만, 그 멍에는 바로 우리 인간의 구원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 멍에는 율법학자들의 멍에처럼 인간을 괴롭히거나 힘들게 하지 않습니다.

 

하느님의 계명은 절대 무거운 짐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이 계명은 단 두가지만을 요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즉 헌신과 사랑입니다.

 

우리의 신앙은 결코 무거운 짐이나 쓰라린 멍에가 되어서는 안됩니다.

만일 무거운 짐이 된다면 그 신앙은 참된 신앙이 아닙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계명을 지키려고 노력한다면 예수님의 멍에는 분명 위로와 기쁨의 멍에가 될 것입니다.

 

무거운 짐을 지고 있지만 얼굴을 기쁨으로 충만한 미소로 가득할 것입니다.

 

- 살레시오회

 

 

 

 

 

 

 

 송영진 모세 신부님의 묵상글

 

<신앙생활은 멍에도 아니고 의무도 아니고, ‘기쁨’입니다>

1)

이 말씀에서, ‘내 멍에’ 라는 말과 ‘내 짐’이라는 말은 예수님의 복음과 가르침들과 계명들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예수님께서 당신의 복음과 가르침들과 계명들을 ‘멍에’와 ‘짐’으로 표현한 것은 진짜로 멍에와 짐이라는 뜻이 아니라, ‘반어법적 표현’을 사용하신 것입니다.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 라는 말씀은 “나의 가르침들은 멍에가 아니라 ‘편안함’이고, 짐이 아니라 ‘가벼움’이다.” 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은 우리의 온갖 멍에들과 짐을 벗겨내고 우리에게 참된 평화와 안식을 주는 열쇠입니다.

 

만일에 ‘멍에’ 라는 표현만 보면서 이 말이 반어법적 표현이라는 것을 생각하지 못한다면, 그래서 예수님의 복음과 가르침들과 계명들이 멍에와 짐이라는 생각만 한다면, 그것은 크게 오해하는 것이고, 죄를 짓는 것입니다.

 

아무리 편안해도 멍에는 멍에일 뿐이고, 아무리 가벼워도 짐은 짐일 뿐입니다.

 

예수님은 모든 멍에와 짐을 ‘완전히’ 제거해서 우리에게 ‘참 해방’과 ‘참 자유’를 주시는 분입니다.

 

그래서 신앙생활은 예수님께서 주시는 평화와 안식을 받아서 누리는 ‘기쁨의 생활’입니다.

만일에 기쁨은 조금도 없이 무거운 짐을 지는 것처럼 신앙생활을 한다면, 그 생활은 그냥 강제노동일 뿐입니다.

2)

신앙인들 가운데에는, 자신의 ‘십자가’를 ‘멍에’로 생각하는 경우가 있는데, 신앙인에게 십자가는 멍에가 아니라 은총입니다.

믿는 이들에게 구원과 생명을 주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에 따라서 좀 더 크고 무거운 십자가를 지는 경우가 있긴 하지만, 그래도 십자가는 멍에가 아니라 은총입니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마태 16,24) 라는 말씀은 ‘십자가는 영원한 생명을 얻는 과정’이라는 것을 나타냅니다.

 

신앙인들에게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르는 일은 운동선수가 금메달을 따기 위해서 훈련을 하는 것과 같고, 학생들이 합격하기 위해서 시험공부를 하는 것과 같습니다.

 

훈련이 힘들다고 피해버리면 금메달을 포기하는 것이고, 시험공부가 힘들다고 안 하면 합격을 포기하는 것입니다.

 

십자가를 지고 가는 일은 죄에 대한 벌이나 보속이 아니라 예수님의 십자가에 동참하는 일이고, 누구에게나 구원과 생명을 향해서 나아가는 과정, 즉 단련과 정화 과정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우리를 위한 것이었습니다.

나의 십자가는 나를 위한 것입니다.

3)

판공 때가 되면 고해성사 보는 것을 부담스러워하는 이들이 있고, 고해성사를 멍에로 생각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고해성사는 멍에가 아니라 은총입니다.

신앙인들만이 특별히 누릴 수 있는 특권입니다.

 

고해성사가 은총이라는 생각을 못하고 멍에라는 생각에만 사로잡혀 있다면, 회개도 멍에가 되어버립니다.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회개 없이는 구원도 없습니다. 

 

일상적인 신심생활, 전례 참여, 기도, 봉사활동 등도 모두 멍에가 아니라 은총입니다.

의무적으로, 또 억지로 하는 신앙생활은 신앙생활이 아니라 ‘아무것도 아닌 일’입니다.

4)

28절의 ‘고생’과 ‘짐’은 좁은 뜻으로는 유대교의 율법주의를 가리키고, 넓은 뜻으로는 인생살이의 고달픔을 포함해서 인간을 괴롭히는 온갖 억압을 가리킵니다.

 

좁은 뜻이든지 넓은 뜻이든지 간에, 예수님은 우리의 피난처이고 안식처이신 분입니다.

 

"아무것도 걱정하지 마십시오.

어떠한 경우에든 감사하는 마음으로 기도하고 간구하며 여러분의 소원을 하느님께 아뢰십시오.

그러면 사람의 모든 이해를 뛰어넘는 하느님의 평화가 여러분의 마음과 생각을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지켜 줄 것입니다."

(필리 4,6-7)

5)

예수님께서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을 꾸짖으신 말씀 가운데 다음 말씀이 있습니다.

 

"그들은 무겁고 힘겨운 짐을 묶어 다른 사람들 어깨에 올려놓고, 자기들은 그것을 나르는 일에 손가락 하나 까딱하려고 하지 않는다."

(마태 23,4)

 

종교 자체가 멍에가 될 수 있다는 것은 유대교만의 문제가 아니고, 오늘날의 그리스도교도 반성해야 할 일입니다.

 

종교와 신앙은 의무가 아니라 ‘기쁨’입니다.

‘기쁨’이 되어야 합니다.

 

종교와 신앙이 멍에로 변질되는 것은 일차적으로 종교 지도자들의 탓입니다.

 

법과 제도로 사람들을 묶어놓고, 사람들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것을 보면서 자기들이 교회 운영을 잘하고 있다고 자만하는 지도자들도 있고, 그렇게 하는 것이 공동체 정신이라고 착각하는 지도자들도 있습니다.

 

어떻든 종교 지도자들이 ‘참 목자’이신 예수님을 따르지 않고 군대 지휘관 같은 모습으로 직무 수행을 하는 것은 종교를 멍에와 짐으로 변질시키는 죄입니다.

 

교회는 누구에게나, 즉 세상 사람들 모두에게 안식처가 되어 주어야 합니다.

 

만일에 교회가 누군가에게 멍에가 되고 짐이 되고 부담이 된다면, 그것은 교회를 세우신 예수님의 뜻을 거스르는 죄를 짓는 것입니다.

그 죄는 예수님께서 하시는 일을 방해하는 큰 죄입니다.

 

- 전주교구 상지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의 묵상글

 

<주님은 영원한 안식처이다 - 온유와 겸손의 배움과 습관화, 무지의 병의 치유>

 

“주여,

 당신은 대대로

 저희의 안식처가 되시었나이다.

 산들이 생기기 전에,

 땅이며 누리가 나기도 훨씬 전에 

 영원에서 영원까지 당신은 하느님이십니다.”

(시편 90,1-2)

 

참 많은 사람들이 무지의 어리석음으로, 탐욕으로 인해 자초한 불필요한 무거운 짐을 지고, 축제인생이 아닌 고해인생을 살아갑니다.

 

사랑의 기도로 날로 지혜롭고 겸손해져 거품이나 환상이 걷힌 본질적 깊이의 삶을 살 때 비로소 짐은 날로 가벼워져 자유롭고 홀가분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맑은 존재의 기쁨을 살 수 있습니다. 

 

이래서 날마다 영원 안식처인 주님의 초대에 응답해야 합니다.

바로 오늘 복음에서 우리의 영원한 안식처인 주님께서 우리를 초대하십니다.

 

이에 앞서 한가지 물음을 던집니다.

제가 예전 자주 피정자들에게 던졌던 물음입니다. 

 

“삶은 선물입니까? 짐입니까?

남편은, 아내는, 자녀는, 이웃 형제자매는, 나는, 선물입니까? 짐입니까?”

 

웃기만 할 뿐 선뜻 대답을 못합니다.

둘 다이기 때문입니다.

선물도 되고 짐도 되기 때문입니다.

 

이상적으로는 선물이지만 현실적으로는 짐인 경우도 많습니다.

 

그러나 결론은 명확합니다.

기도와 사랑이 있을 때는 선물이지만, 기도와 사랑이 사라지면 무거운 짐이 되어 버린다는 것입니다. 

 

참으로 주님 안에서 믿고 사랑하는 기도의 사람에게 주변 모두가 하느님의 선물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주님의 초대가 고맙기 한이 없습니다.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안식을 주겠다.”

 

시공을, 종파를, 국적, 인종, 문화 모두를 초월하여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지고  고해인생을 살아가는 모든 이들에게 보내는 주님의 초대장입니다.

 

주님이 아니고는 누가 그 품에 다 안을 수 있겠는지요?

이래서 주님이 계신 교회를, 주님의 집인 여기 수도원을 주님의 평화가 목말라 끊임없이 찾는 사람들입니다. 

 

성인들의 특징은 평생 계속된 고통과 시련에 휴식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죽어야 고통도 끝나고 영원한 휴식입니다.

 

그러나 성인들은 그 고통의 시련의 와중에도 깊은 내적 평화와 기쁨이 있었고, 끊임없는 찬미와 감사가 있었고, 그리하여 선물같은 인생을 살았으니 바로 영원한 안식처인 주님 안에 살았기 때문입니다. 

 

바로 그 빛나는 모범이 오늘 탈출기의 모세입니다.

 

오늘 모세와 하느님의 대화를 보세요.

얼마나 진지하고 친밀한 관계인지요!

 

정말 모세는 주님과 늘 함께 살았던 기도의 사람이었습니다.

 

주님은 모세에게 “나다(I AM)”인 주님의 이름을 밝혀주었고, 이어 조상들의 하느님, 곧 아브라함의 하느님, 이사악의 하느님, 야곱의 하느님이요 오늘 지금 우리의 하느님이신 바로 역사의 하느님이심을 가르쳐 줍니다,

 

또 이어 소명에 관한 지침을 주시고 마침내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인도해주실 것을 약속하십니다. 

 

그러나 주님은 계명을 존중하고 철저히 지켜야 하는 순종의 삶을 누누이 강조하심으로 값싼 공짜 은총은 없다는 것을 분명히 하였습니다.

이는 모두에 적용되는 진리입니다.

 

값싼 공짜 평화도, 값싼 공짜 사랑도, 값싼 공짜 민주주의도 없습니다.

 

지성이면 감천입니다.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습니다.

 

이래서 100% 하느님 손에 달린 듯이 기도하고, 100% 내 손에 달린 듯이 분투의 노력을, 진인사대천명의 노력을 다하자는 것입니다.

 

우리를 늘 초대하시는 주님을 통해 “나다(I AM)”인 주님의 모습이 명확히 드러납니다.

 

“나는 너희를 위해 있다(I AM for you)”, “나는 너희와 함께 있다(I AM with you)” 우리를 향해 활짝 열려있는 존재 자체이신 분으로 계시됩니다.

 

그러나 주님 안에서도 역시 값싼 공짜 은총은 없으니 부단한 배움과 훈련, 습관을 필요로 합니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I AM meek and humble of heart)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그러면 너희가 안식을 얻을 것이다.”

 

불필요한 무거운 짐을 내려놓고 주님의 멍에를 메고 예수님 성심의 온유와 겸손을 배우라는 것입니다.

 

영원한 안식처이자 정주처요 피난처인 주님 안에서 평생 주님의 멍에를 메고 온유와 겸손을 배워야 비로소 안식의 선물이라는 것입니다.

 

결코 값싼 공짜 안식이 아니라 내 탐욕의 짐을 내려놓고 주님을 따라 주님의 멍에를 메고 온유와 겸손의 치열한 훈련과 배움을 통한 열매가 안식의 평화입니다. 

 

“정녕,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

(My yoke is easy, and my burden light)

 

성인들이 끊임없는 고통과 시련중에도 낙천적이고 긍정적이고 유쾌할 수 있었던 자유와 평화, 기쁨과 행복의 비결도 바로 여기 있음을 봅니다.

 

불편한 내 멍에와 무거운 내 짐은, 주님의 겸손과 온유를 배워가면서 주님과의 일치가 깊어감으로, 주님의 편한 멍에로 주님의 가벼운 짐으로 변하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삶은 덧없이 늙어가는 노화의 여정이 아니라 날로 익어가는 성화의 여정이 되고, 덧없이 사라져가는 허무의 여정이 아니라 날로 채워지는 텅빈 충만의 여정이 되며, 또 쓸데 없는 것들로 채워가는 여정이 아니라 날로 버리고 비워가는 비움의 여정, 자유의 여정이 됨을 실감합니다.

 

또 날로 홀가분하고 고즈넉한 선물 인생을, 고해인생이 아닌 축제인생을 누릴 것입니다.

 

우리 인생은 주님의 멍에를 메고 주님의 온유와 겸손을 배워가는 배움터이자 학교요, 우리는 졸업이 없는 평생학인으로 주님의 온유와 겸손을 배우게 됩니다.

 

구체적으로 미사는 주님의 온유와 겸손을 배워감으로 무지의 병을 치유하는 치유의 학교입니다.

 

고맙게도 날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평생학인인 우리 모두에게 참 좋은 위로와 격려가 되고, 지칠줄 모르는 열정으로 주님의 온유와 겸손을 배우게 하며, 고해인생이 아닌 축제인생을 살게 합니다.

 

아멘.

 

- 성 베네딕도회 요셉 수도원

 

 

 

 

 

 

 

♠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의 묵상글

 

<주님께서 약속하신 참된 안식과 영원한 생명>

 

서울 대교구 사제 모임이 있었습니다.

콜롬비아, 알래스카, 시카고, 포트워스, 워싱턴 DC, 델라웨어, 달라스 등 미국 각지에서 사목 중인 사제들이 한자리에 모였습니다.

 

시편의 말씀이 떠오르는 순간이었습니다.

“좋기도 좋을시고, 아기자기한지고, 형제들이 오순도순 함께 모여 사는 것!”

그 자체가 은총이었습니다. 

 

모임 중 한 신부님이 이렇게 말씀하였습니다.

 

나는 왜 한국을 떠나 교포 사목을 하고 있을까 문득 돌아보게 되었습니다. 

그때 들려온 주님의 음성 같았습니다.

‘요셉아,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 그렇다면 내 양들을 잘 돌보아라.’” 

 

사제는 명예를 좇는 이가 아니라, 맡겨진 양 떼를 향한 사랑으로 존재하는 사람입니다. 

 

교회의 권위는 민주적 표결에서 나오지 않습니다. 

하느님으로부터 위임된 것이기에, 그 힘은 세속적인 기준으로 이해되지 않습니다. 

 

주교님의 말씀이 가슴에 깊이 남았습니다.

“작은 일에 너무 기뻐하지도 말고, 너무 슬퍼하지도 마십시오. 

하느님께 의탁하며 기쁘고 건강하게 지내십시오.” 

 

신부님들은 내년 콜롬비아 보고타에서의 모임을 기약하며 각자 삶의 자리로 돌아갔습니다. 

신부님들 모두 건강하게 지내기를 기도하였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여러분은 모두 나에게 오십시오.

내가 여러분에게 안식을 주겠습니다.” 

 

이 구절은 단지 피곤한 사람에게 휴식을 약속하신 말씀이 아닙니다. 

삶의 의미를 잃고, 고통과 혼란 속에 지친 이들에게 영혼의 쉼을 주겠다는 초대입니다. 

 

현대 사회는 빠르게 변합니다. 

우리는 결과와 경쟁에 쫓기며 살아갑니다. 

속도를 중시하고, 효율을 우선하며, 사람보다 시스템을 먼저 보는 세상입니다. 

 

그 안에서 인간은 쉽게 도구화되고, 관계는 파편화됩니다. 

사람들은 점점 말이 거칠어지고, 위로와 공감의 언어는 줄어듭니다.

 

“진정한 치유는 기술이 아니라 관계에서 시작된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병든 자를 고치실 때, 단지 기적을 행하신 것이 아닙니다. 

그들의 이름을 불러주시고, 손을 잡아 주셨으며, 마음을 만져 주셨습니다. 

 

사랑이 동반된 손길이었고, 존엄을 회복시켜 주는 만남이었습니다.

 

오늘 우리는 우리의 손을 다시 바라봅니다. 

 

손은 기도하는 도구이기도 하고, 치유하는 도구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같은 손으로 상처를 주기도 하고, 죄를 짓기도 합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이 ‘손’은 창조의 도구입니다. 

이 손으로 고통받는 이의 짐을 들어 줄 수도 있고, 격려의 편지를 쓸 수도 있으며, 축복의 손이 될 수도 있습니다. 

 

오늘 독서에서 하느님께서는 이집트에서 고난받는 이스라엘 백성을 향해 말씀하십니다. 

“나는 너희를 고난에서 끌어내어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데려가겠다.” 

 

하느님의 구원은 추상적인 위로가 아니라, 구체적인 ‘이동’을 포함한 희망의 약속입니다. 

 

절망의 땅에서 해방되어 희망의 땅으로 나아가는 것, 그것이 신앙의 여정입니다. 

 

예수님께서 가신 길을 따르기가 쉽지는 않습니다. 

 

그것은 권력의 길도, 명예의 길도 아닙니다. 

사랑의 길, 희생의 길, 나눔의 길입니다. 

 

그러나 그 길 끝에는 참된 안식이 있습니다.

 

세상의 무거운 짐을 내려놓고, 예수님께서 주시는 멍에를 기쁘게 받으면 좋겠습니다. 

 

그 멍에는 억압이 아니라 해방이며, 부담이 아니라 기쁨입니다. 

우리는 그 멍에를 통해 예수님과 함께 걷게 됩니다.

 

고운 말을 하면 사랑의 꽃이 피고, 나쁜 말을 하면 원망의 꽃이 핍니다. 

 

입으로는 위로의 말을 자주 나누면 좋겠습니다. 

손으로는 치유와 축복의 일을 자주 실천하면 좋겠습니다. 

발로는 복음의 길을, 예수님께서 가신 그 길을 함께 걸어가면 좋겠습니다. 

 

그 길 끝에, 주님께서 약속하신 참된 안식과 영원한 생명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그러면 너희가 안식을 얻을 것이다. 

정녕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

 

- 미국 댈러스 성 김대건 안드레아 성당

 

 

 

 

 

 

 

♠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의 묵상글

 

<내 멍에와 짐을 없애달라고 하는 사람은 사랑을 계속 의심할 뿐>

 

어느 신부님께서 장례미사 강론 중에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돌아가셨습니다.”

 

그러자 한 번도 성당에 와 본 적이 없는 사람이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에이~~ 설마요.”

 

주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은 세속적인 사랑만을 생각하기에, 주님의 사랑을, 즉 우리를 위해 죽기까지 하시는 그 사랑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신앙인은 이를 믿는다고 하면서 입으로만 외치는 경우가 많습니다.

 

주님의 사랑을 가슴 깊이 느끼는 사람이 어떻게 세상 사람들처럼 살려고 하겠습니까?

 

똑같이 미워하고, 똑같이 판단하고, 똑같이 욕심과 이기심을 내세우기만 한다면, 주님의 사랑을 제대로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사랑을 받은 사람은 사랑을 나누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온유하고 겸손한 마음으로 받아들이고, 좋은 모범으로 하느님 나라를 세상에 알리기 위해 살 수밖에 없습니다.

 

이를 통해 내 안에 계신 예수님을 체험할 수 있게 됩니다.

 

“에이~~ 설마요.”라는 마음을 지울 수 있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주님께서 진짜로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것을 삶 안에서 체험할 수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마태 11,28) 고 말씀하십니다.

 

고생하며 무거운 짐은 육체적으로 느끼는 고통과 시련뿐만 아니라, 정신적으로 느끼는 죄책감, 사회적 억압, 그리고 영혼의 고독까지 포함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모두 당신에게 오라고 하십니다.

부르시는 대상이 한정되지 않습니다.

아무런 조건이 없는 보편적인 초대입니다.

 

이렇게 우리를 초대하십니다.

그 초대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한 당신의 사랑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 사랑을 받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배우라고 하시지요.

우리 역시 이 세상 안에서 사랑을 나눌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당신의 멍에는 편하고, 당신의 짐은 가볍다고 하십니다.

 

당신을 따르는 것에 멍에나 짐이 없다는 것이 아닙니다.

적절하고 알맞다는 의미로, 그 이유는 사랑이신 주님께서 함께 메어주시기 때문에 우리가 감당할 수 있다는 의미입니다.

 

이 사랑을 의심해서는 안 됩니다.

내 멍에와 짐을 없애달라고 하는 사람은 사랑을 계속 의심할 뿐입니다.

 

그리고 주님의 사랑을 “에이~~ 설마요.”라면서 불가능한 것처럼 말할 것입니다.

 

하지만 주님 사랑을 굳게 믿고 주님과 함께하는 사람은 멍에나 짐의 무게에 상관없습니다.

주님 안에서 어떤 상황에서도 편안한 안식을 얻기 때문입니다.

 

이제는 우리 역시 주님의 사랑을 본받아 이웃에게 사랑을 나눌 수 있어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우리 모두 빠짐없이 하느님 안에서의 안식을 누리면서 행복하기를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인천가톨릭대학교 성김대건성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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