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독서
▥ 사도 바오로의 콜로새서 말씀 2,6-15
형제 여러분,
6 여러분은 그리스도 예수님을 주님으로 받아들였으니 그분 안에서 살아가십시오.
7 가르침을 받은 대로, 그분 안에 뿌리를 내려 자신을 굳건히 세우고 믿음 안에 튼튼히 자리를 잡으십시오.
그리하여 감사하는 마음이 넘치게 하십시오.
8 아무도 사람을 속이는 헛된 철학으로 여러분을 사로잡지 못하게 조심하십시오.
그런 것은 사람들의 전통과 이 세상의 정령들을 따르는 것이지 그리스도를 따르는 것이 아닙니다.
9 온전히 충만한 신성이 육신의 형태로 그리스도 안에 머무르고 있습니다.
10 여러분도 그분 안에서 충만하게 되었습니다.
그분은 모든 권세와 권력들의 머리이십니다.
11 여러분은 또한 그분 안에서 육체를 벗어 버림으로써, 사람 손으로 이루어지지 않는 할례 곧 그리스도의 할례를 받았습니다.
12 여러분은 세례 때에 그리스도와 함께 묻혔고, 그리스도를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일으키신 하느님의 능력에 대한 믿음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그분과 함께 되살아났습니다.
13 여러분은 잘못을 저지르고 육의 할례를 받지 않아 죽었지만, 하느님께서는 여러분을 그분과 함께 다시 살리셨습니다.
그분께서는 우리의 모든 잘못을 용서해 주셨습니다.
14 우리에게 불리한 조항들을 담은 우리의 빚 문서를 지워 버리시고, 그것을 십자가에 못 박아 우리 가운데에서 없애 버리셨습니다.
15 권세와 권력들의 무장을 해제하여 그들을 공공연한 구경거리로 삼으시고, 그리스도를 통하여 그들을 이끌고 개선 행진을 하셨습니다.
복음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 6,12-19
12 그 무렵 예수님께서는 기도하시려고 산으로 나가시어, 밤을 새우며 하느님께 기도하셨다.
13 그리고 날이 새자 제자들을 부르시어 그들 가운데에서 열둘을 뽑으셨다.
그들을 사도라고도 부르셨는데,
14 그들은 베드로라고 이름을 지어 주신 시몬, 그의 동생 안드레아, 그리고 야고보, 요한, 필립보, 바르톨로메오,
15 마태오, 토마스,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 열혈당원이라고 불리는 시몬,
16 야고보의 아들 유다, 또 배신자가 된 유다 이스카리옷이다.
17 예수님께서 그들과 함께 산에서 내려가 평지에 서시니, 그분의 제자들이 많은 군중을 이루고, 온 유다와 예루살렘, 그리고 티로와 시돈의 해안 지방에서 온 백성이 큰 무리를 이루고 있었다.
18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도 듣고 질병도 고치려고 온 사람들이었다.
그리하여 더러운 영들에게 시달리는 이들도 낫게 되었다.
19 군중은 모두 예수님께 손을 대려고 애를 썼다.
그분에게서 힘이 나와 모든 사람을 고쳐 주었기 때문이다.
♠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님의 묵상글
<기초>
오늘 복음에서는 열두 사도를 뽑으신 장면을 이렇게 들려줍니다.
'예수님께서는 기도하시려고 산으로 나가시어, 밤을 새우며 하느님께 기도하셨다.
그리고 날이 새자 제자들을 부르시어 그들 가운데서 열둘을 뽑으셨다.'
(루카 6,12-13)
이는 마치 야훼 하느님께서 모세를 하느님의 현존을 드러내는 거룩한 곳, 시나이 산으로 불러올리는 장면을 연상케 합니다.
예수님께서도 제자들을 산으로 불러올리시어 그들 가운데서 열둘을 뽑으셨습니다.
그분께서 ‘먼저’ 부르시고 뽑으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중요한 것은 부르신 이, 뽑으신 이가 누구신가입니다.'
‘누가’ 부르시고 뽑았는지가 그들의 정체성과 사명을 결정짓기 때문입니다.
곧 ‘부른 이’가 누구인가에 따라 응답한 이의 삶이 바뀌기 때문입니다.
대통령의 부름을 받은 이는 대통령이 부여한 일을 하며 대통령의 영광을 입은 것이고, 하느님의 부름을 받은 이는 하느님의 일을 하며 하느님의 영광을 입을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나 자신이 누구에게 부르심 받았고 누구에게 뽑힌 이인지를 항상 기억하여야 할 일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사도를 뽑으시기에 앞서, 밤을 새워 기도하셨습니다.
이는 ‘아버지의 뜻’을 따르고자 하셨음을 말해줍니다.
그러니 밤 새워 기도하여 뽑은 이들은 능력 있고 자질이 뛰어난 이들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에 따라 뽑힌 이들이라 할 수 있습니다.
바로 우리들이 그런 사람들일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뽑힐만한 충분한 자격이나 조건들을 갖춘 거룩한 이들이었기 때문에 뽑힌 것이 아니라, ‘뽑혔기에 거룩해지게 된 이들’인 것입니다.
겉으로 보기에, 뽑힌 사도들은 이름 없는 무명인들이었고, 뽑힌 후에도 그다지 특별한 내력을 전해주지도 않습니다.
모름지기, '사도'란 그렇게 ‘이름 없이 주님의 뜻을 위해 살다가 가는 사람들’이라는 것을 말해주기나 하듯이 말입니다.
그러니 우리도 그러하리라 여기면 될 일일 것입니다.
사실 교회는 사도들의 기초 위에 세워진 건물이라 할 수 있습니다.
기둥이 건물을 지탱해주고 있다면, 그 기둥을 받치고 있는 것이 기초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기초는 잘 보이지 않고 드러나지가 않습니다.
그러기에, 대단히 겸손하지 않으면 튼튼한 기초가 될 수가 없고, 또한 공동체에 대한 사랑이 없으면 그 엄청난 무게를 감당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아마도 교회의 기초인 사도들은 잘 드러나지 않는 이들로 뽑혔나 봅니다.
마치 기초가 건물을 떠받들고 있으면서도 자신을 드러내지 않듯이, 그들은 타인을 떠받들면서도 자신을 드러내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기초가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도를 뽑으신 다음, 그들과 함께 산에서 내려와 군중들 속으로 들어가십니다.
그들과 함께 세상 안에서 아버지의 뜻을 실행해 나가십니다.
오늘 우리도 겸손한 자로, 예수님과 함께 세상 안에서 그분의 뜻을 실행해야 할 일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 · 샘 기도>
'제자들을 부르시어 그들 가운데에서 열둘을 뽑으셨다.'
(루카 6,13)
주님!
하고 싶은 바를 하는 것이 아니라 하라 하신 바를 행하고,
아는 것을 선포하는 것이 아니라 알려주신 바를 선포하는 겸손함을 주소서!
이름 없이도 사랑하고 드러나지 않아도 당신 뜻을 실행하며,
이 세상에 당신의 나라가 드러나게 하소서.
아멘.
- 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도회
♠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의 묵상글
<신화하고 육화하는>
오늘 복음은 제자들 가운데 열두 사도를 뽑으시고, 이제 사도들과 함께 복음 선포를 시작하시는 내용이지만, 산 위에서 기도하시고, 사도들을 뽑고, 사도들도 거기로 부르신 다음, 사도들과 산 위에서 내려와 평지에서 복음을 선포하시는 내용입니다.
그러니까 산 위의 행위와 산 아래 평지의 행위가 나뉘어 있는 것인데, 저는 이것을 신화神化의 행위와 육화肉化의 행위로 나누고 싶습니다.
그리고 이것을 바꿔서 얘기하면, 매우 세속적인 우리는 산 위로 올라가 주님처럼 기도함으로써 신화되고, 신화가 된 다음에는 더 이상 산 위에 머물지 말고 땅으로 내려와 사람들 가운데서 살아가야 합니다.
이것을 오늘 바오로 사도는 다른 언어로 표현하는데, 바로 육의 할례와 그리스도의 할례와 세례가 그것입니다.
그런데 할례란 무엇입니까?
표피를 떼어내는 것이지요.
그리고 세례란 무엇입니까?
깨끗이 씻어내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무엇을 떼어내고 무엇을 씻어내는 것입니까?
한 마디로 그것은 죄를 씻어버리는 것이지만, 죄를 씻어버리는 것을 조금 구체적으로 보면 옛날 말로 삼구三仇를 끊어버리는 것입니다.
삼구란 옛날 교리로 세 가지 원수를 말하는 것인데 세속, 육신, 마귀입니다.
먼저 세속을 끊어버려야 합니다.
그런데 이것은 속세를 떠나는 것이 아닙니다.
세속世俗과 속세俗世는 같은 두 글자, 세와 속으로 이루어졌고 두 글자를 뒤집어놓은 것의 차이가 있을 뿐이지만, 세속을 끊어버리는 것과 속세를 떠나는 것은 '출가出家하다'와 '가출家出하다'의 차이만큼 큰 차이가 있습니다.
아시다시피 가출하는 것과 속세를 떠나는 것은 부정적인 의미이고, 현실 도피적인 것인 데 비해, 출가하는 것과 세속을 끊어버리는 것은 세상을 떠나지 않고 세상의 승리자가 되는 겁니다.
세상의 패배자로서 염세적이고 비관적으로 세상을 떠나는 것이 아니라 세례로 하느님의 자녀가 됨으로써 세상의 승리자가 되는 것입니다.
육신을 끊어버리는 것은 우리가 잘 이해해야겠습니다.
옛날에는 육신을 도매금으로, 곧 그 자체로 죄악시하였지만, 지금은 그렇게 이해해서는 안 되고, 편하고 감각적인 만족을 구하는 육신, 하느님께로 가고 하느님과 일치하는 것을 방해하는 육신을 말하는 거지요.
그래서 프란치스코도 권고에서 육신을 통하여 우리가 죄를 짓기는 하지만 우리는 육신을 다스릴 수 있기에 우리는 육신을 가지고 하느님께 함께 가는 존재들이 되어야 한다고 얘기합니다.
세 번째로 우리는 마귀를 끊어버려야 합니다.
이렇게 얘기하면 요즘 세상에 마귀가 어디 있냐고 하는 분이 있을 텐데, 그렇게 생각한다면 우리가 세례 갱신 때 하듯이 마귀의 허례허식을 끊어버리는 것으로 이해해도 좋을 것입니다.
또는 우리가 성 프란치스코의 가르침대로 기도와 헌신의 영으로 육의 영을 몰아내고 주님의 영을 모시는 것으로 이해해도 좋을 것입니다.
- 작은형제회
♠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의 묵상글
<품이 커서 스승이다>
저는 가끔 저의 신상에 대해 생각합니다.
신부가 아니었다면 지금 무엇을 하고 있을까?
죄도 허물도 많고, 뛰어난 능력도 없고, 잘난 것이 없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께서 도구로 쓰고 계시다고 생각하면 참으로 부끄럽습니다.
감사하고 새 힘을 얻게 됩니다.
그분의 자비가 크시다는 것을 새삼 일깨웁니다.
나를 고집하지 않고 주님께 의탁할 수밖에 없는 존재임을 인정합니다.
주님께서는 산에 들어가 밤을 새우며 기도하시고(루카 6,12)나서 제자들을 선택하셨는데, 그 중에는 야고보와 요한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천둥의 아들이라고 부를 정도로 격정적인 성품을 지녔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은총에 의해 온화해질 것입니다.
겁이 많은 필리보와 바르톨로메오, 조용하고 성실한 사람입니다.
성격이 우울하고 회의적인 토마도 있습니다.
세리 마태오와 열혈당원 시몬이 섞여 있었습니다.
그들은 일제강점기의 독립군과 친일파로 비유할 수 있는 사이입니다.
그리고 후에 배반자가 된 유다 이스카리옷도 있었습니다.
사도들 중에도 배교자가 있었습니다.
뽑힌 이들 조차도 합당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기도하시고 뽑은 결과입니다.
저 같으면 그들은 쏙 빼놓았을 텐데 주님께서는 그들을 선택하여 부르시고 당신의 대리자로 지정하셨습니다.
정말이지 예수님의 품이 아니라면 도저히 그 자리에 함께 있지 못할 사람들입니다.
남들보다 많이 알아서 스승이 아니라 품이 커서 스승입니다.
꼴 보기 싫은 사람들을 옆에 두고 속 끓일 일을 생각해 보십시오.
밥맛 떨어지고 꿈에 나타날까 두렵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많은 허물과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부르셨습니다.
그 부르심을 받았다는 것이 자격입니다.
그리고 부족하지만 응답한다면 주님의 능력이 함께하는 것입니다.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주님의 자비가 없다면 어떻게 감히 저 같은 죄인이 주님의 일을 하겠습니까?
주님의 크신 자비가 저를 지탱하게 합니다.
오늘날 우리 사제들도 다양성을 가지고 공동체를 이룹니다.
예수님은 다양한 사제들을 일치시키는 끈입니다.
주님께서는 악 안에서도 선을 이끌어 내시는 분입니다.
예수님 주변에는 항상 사람들이 몰려들었습니다.
주님께는 모두를 껴안을 수 있는 큰 품과 온유함이 있었고,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능력의 힘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분은 언제나 아버지께서 가르쳐 주신 것만 말하고 아버지께서 기뻐하시는 일을 하셨습니다(요한 8,28-29).
거기에서 기적의 힘이 나왔습니다.
기적의 힘은 사람의 유능이 아니라 철저한 무능, 온전한 의탁에서 샘처럼 솟아나는 것입니다.
사막의 오아시스는 광고를 하지 않아도 온갖 살아있는 것들이 모여듭니다.
거기에 생명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로 사람들이 모여든 것도 같은 이치입니다.
주님께서는 일상 안에서 매 순간 우리를 부르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그분께서 기뻐하시는 일에 기꺼이 응답하시길 바랍니다.
응답은 곧 능력이라는 것을 생각하며 나의 부족함을 무릎 쓰고 답하시길 바랍니다.
그리하면 주님께서 몸소 다 채워주실 것입니다.
마태오 복음사가는 '예수께서 열두 제자를 불러 악령들을 제어하는 권능을 주시어 그것들을 쫓아내고 병자와 허약한 사람들을 모두 고쳐 주게 하셨다.' (마태 10,1)고 말씀하십니다.
마찬가지로 주님께서는 당신이 필요로 할 때 우리에게도 언제든지 당신의 능력을 주시고 우리를 도구 삼아 일하십니다.
그러므로 언제나 그분의 부르심에 기쁘게 응답할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미루지 않는 사랑을 희망하며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 청주교구 내덕동 주교좌 성당
♠ 전삼용 요셉 신부님의 묵상글
<사람 때문에 상처 받지 않는 법>
세상에서 가장 외로운 사람이 많은 나라가 어딜까요?
이것도 역시 한국이 1위를 하였습니다.
외롭다는 말은 관계를 두려워한다는 말입니다.
관계를 두려워한다는 말은 상처를 많이 받는다는 말입니다.
도대체 왜 우리는 관계에서 상처받아야 할까요?
정답부터 말씀드리면 ‘기대하기 때문’입니다.
나를 상처줄 수 있는 사람은 나도 사랑받기를 기대하는 사람입니다.
그러면 사람을 안 만나고 살면 되냐고요?
그럴 수는 없습니다.
사람을 안 만나면 뱀만 만나며 살아야 합니다.
뱀은 자아이고 악의 세력들입니다.
그렇게 사람이 외로워지는 것입니다.
우리는 상처받지 않고 만날 사람을 선택하는 게 중요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교회의 반석이 될 열두 사도를 뽑으십니다.
그런데 그 과정을 보면 아주 이상한 점이 눈에 띕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마음에 드는 사람, 똑똑하고 능력 있는 사람을 당신의 기준으로 뽑지 않으십니다.
대신 그분은 산으로 가시어 밤을 새워 하느님께 기도하셨습니다.
그리고 날이 새자 제자들을 불러 그 가운데에서 열둘을 뽑아 사도라고 이름 붙여 주십니다.
그리고 그 명단에는 우리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이름 하나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바로 ‘배신자가 된 유다’입니다.
전지전능하신 분께서 장차 당신을 팔아넘길 사람을 왜 뽑으셨을까요?
이것은 신학적으로 풀 수 없는 신비 중의 신비입니다.
그렇다면 한번 생각해 봅시다.
예수님은 밤새워 기도하고 골몰히 생각해서 유다를 뽑으셨을까요?
절대 아닙니다.
기도는 그런 게 아닙니다.
만약 그랬다면 예수님께서 유다에게 기대하셨을 것이고 그러면 유다가 배신하였을 때 상처 입으셨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누구에게도 상처 입지 않으십니다.
왜냐하면 기대하지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도대체 사람을 만나되 상처 입지 않는 비법은 무엇일까요?
바로 기도에 있습니다.
예수님의 기도는 ‘누구를 뽑을까?’ 하고 깊이 고민하신 시간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그 반대였을 것입니다.
‘아버지, 저는 아무 생각도 없습니다.
아버지께서 보내주시는 사람을 알아보게 해 주십시오.’
바로 이 마음으로 밤을 새워 기도하신 것입니다.
다른 제자들은 세례자 요한을 통해 왔거나, 형제의 인도로 왔으니 아버지께서 보내셨다는 증표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유다는 어땠을까요?
아마 예수님 마음에는 전혀 들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그를 뽑으신 이유는 단 하나, 밤샘 기도 중에 ‘이 사람 또한 아버지가 너에게 보낸다.’라는 확신을 얻으셨기 때문일 것입니다.
이렇게 사람을 뽑으면 후회가 없습니다.
나중에야 ‘아, 그래서 아버지가 그를 보내셨구나!’ 하고 깨닫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만약 우리가, 기도를 통해 나의 생각을 비우지 않고, 오직 나의 지식과 경험만으로 사람을 뽑는다면 어떻게 될까요?
결혼할 배우자를, 회사의 직원을, 그리고 우리 본당의 봉사자를 말입니다.
그 선택은 종종 후회와 실망으로 끝나게 됩니다.
자신의 뛰어난 안목과 생각만으로 사람을 뽑았다가 모든 것을 잃어버린 한 남자가 있습니다.
바로 애플의 창업자, 스티브 잡스입니다.
1983년, 젊은 스티브 잡스는 자신이 세운 애플을 더 큰 회사로 키우기 위해 전문 경영인이 필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당시 펩시콜라의 사장이었던 존 스컬리를 찾아갔습니다.
스컬리는 마케팅의 귀재였고, 잡스는 그를 영입하기 위해 모든 것을 걸었습니다.
그는 스컬리에게 역사에 남을 유명한 말로 그를 유혹했습니다.
“남은 인생을 설탕물이나 팔면서 보내시겠습니까, 아니면 저와 함께 세상을 바꾸시겠습니까?”
스컬리는 잡스의 열정과 비전에 감동하여 애플의 CEO가 되었습니다.
잡스는 자신의 선택에 만족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허니문은 길지 않았습니다.
현실적인 경영인 스컬리와 이상주의적인 예술가 잡스는 사사건건 부딪혔습니다.
잡스는 스컬리가 자신의 생각을 이해하지 못한다고 분노했고, 스컬리는 잡스가 회사를 망치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결국 1985년, 존 스컬리는 이사회를 소집하여, 스티브 잡스를 그가 세운 애플에서 쫓아내는 비극을 연출합니다.
잡스는 자신의 똑똑한 머리로 자신을 가장 비참하게 만들 사람을 바로 자기 손으로 뽑았던 것입니다.
스티브 잡스가 이 일로 얼마나 상처를 입었을까요?
그 이유 때문인지 그의 몸 안엔 암세포가 자라기 시작하였습니다.
반면, 나의 생각을 비우고 나보다 더 뛰어난 지혜에 의탁하여 사람을 뽑았을 때, 처음에는 이해할 수 없더라도 나중에는 더 큰 성공을 거두게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미국 남북전쟁 당시, 에이브러햄 링컨 대통령의 이야기입니다.
전쟁이 한창일 때, 북군의 총사령관 자리는 계속해서 패배의 늪에 빠져 있었습니다.
링컨은 새로운 사령관을 임명해야만 했습니다.
그의 눈에 들어온 인물은 율리시스 그랜트 장군이었습니다.
그러나 모든 참모가 그의 임명을 격렬하게 반대했습니다.
“각하, 그랜트는 안 됩니다!
그는 지독한 술주정뱅이입니다.
전투 중에도 술에 취해 있다는 소문이 파다합니다.”
실제로 그랜트는 알코올 중독 문제가 심각했고, 성격도 무뚝뚝했습니다.
링컨의 개인적인 생각으로도 그는 결코 마음에 드는 인물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링컨은 자신의 생각을 비웠습니다.
그리고 오직 한 가지 사실에만 집중했습니다.
‘이 사람은 계속해서 이기고 있다.’
링컨은 하느님을 믿는 사람이었습니다.
그 사실이 하느님께서 뽑으신 증거라고 여겼을 것입니다.
그는 반대하는 참모들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전해집니다.
“그랜트가 마시는 위스키 상표가 무엇인지 알려주시오.
내가 다른 장군들에게도 한 통씩 보내주겠소.”
링컨은 자신의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전쟁을 승리로 이끌어 줄 그를 총사령관으로 임명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그랜트는 남북전쟁을 북군의 승리로 이끌며 나라를 구한 영웅이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밤을 새워 기도하신 이유는, 하느님 아버지께서 지금 이 순간 당신의 구원 사업을 위해 누구를 보내주시는지를 알아듣기 위함이었습니다.
우리가 사람을 뽑을 때, 내 생각과 내 마음에만 의지하면 반드시 후회하게 됩니다.
나의 능력은 한계가 있고, 나의 이해력은 편협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내가 뽑아서 기대를 하기 때문에 상처도 받습니다.
그렇게 점점 두려워지고 고립되고 외로워지게 되는 것입니다.
러시아의 귀족이었던 하느님의 종 예카테리나 데 후에크 도허티(Catherine de Hueck Doherty, 1896-1985) 여사는 볼셰비키 혁명으로 모든 것을 잃고 캐나다로 망명했습니다.
그녀는 가난과 싸우며 살다가, 어느 날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습니다.
‘너의 모든 것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주고, 가장 작은 자의 모습으로 살아라.’
그녀는 자신의 생각을 버리고 그 말씀에 순종했습니다.
그녀는 캐나다의 시골 마을 컴버미어(Combermere)에 ‘마돈나 하우스’라는 작은 집을 짓고, 문을 열어두었습니다.
그녀는 사람을 ‘뽑지’ 않았습니다.
그저 문을 두드리는 모든 사람을 하느님께서 보내주신 손님으로 받아들였습니다.
알코올 중독자, 상처 입은 젊은이, 길 잃은 영혼들…
세상의 기준으로 보면 실패자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자신의 생각으로 그들을 판단하지 않았습니다.
그녀는 그들 안에서 고통받는 그리스도를 보았고, 그들을 끌어안았습니다.
그녀의 순종은 기적을 낳았습니다.
그녀가 우연처럼 받아들였던 그 상처 입은 사람들이 서로를 치유하고 위로하며, 오늘날 전 세계에 복음을 전하는 거대한 ‘마돈나 하우스’ 공동체를 이루게 된 것입니다.
제발 나를 믿지 맙시다.
나를 믿으면 주님을 믿지 않는 것이 됩니다.
주님께 신뢰를 두기 위해 선택의 상황 앞에서 기도합시다.
주님의 선택을 받아들이고 모든 책임을 주님께 지웁시다.
그분의 생각은 나의 생각보다 넓고 깊고 강력합니다.
- 수원교구 조원동 주교좌 성당
♠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의 묵상글
<과분하게도 별 도움 안되는 우리를 사도로 부르시는 주님>
과거 어려웠던 시절, 바자회를 자주 했습니다.
청소년 시설 운영비며 인건비를 직접 마련하다보니 늘 쪼달렸기에, 연중 치러지던 가장 중요한 행사는 기금 마련을 위한 축제나 바자회였습니다.
축제날이 다가오면 고양이 손이라도 필요할 정도로 정신없이 바빴습니다.
축제 전날이었습니다.
같이 살고 있던 초등학교 꼬맹이들이 하교하다가, 땀을 뻘뻘 흘리고 있는 저를 보고는, 자기들도 돕겠노라고 책가방을 집어던지고, 팔을 걷어붙였습니다.
그러나 사실 거의 도움이 안되었습니다.
오히려 방해가 될 때가 많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기들도 함께 돕겠다는 그 마음에 큰 감동을 받곤 했습니다.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전지전능하신 메시아 예수님이셨습니다.
아버지께서 당신에게 맡겨주신 인류 구원 사업, 당신 홀로 충분히 이행하실 수 있었습니다.
사실 인간의 도움이 조금도 필요없는 예수님이셨습니다.
오히려 방해가 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겸손하게도 당신의 인류 구원 사업을 수행하는 과정에서 부족하고 나약한 우리 인간들을 협조자로 부르셨습니다.
엄청나고 위대한 당신의 인류 구원 사업에 별 도움 안되는 우리를 동역자로 부르신 것입니다.
참으로 놀랍고 은혜로운 초대가 아닐 수 없습니다.
본격적인 공생활 시기로 접어드신 예수님께서는 열두 사도를 선택하심으로 당신의 사명이 지속되도록 확실한 조치를 취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열두명의 제자를 사도, 다시 말해서 당신의 사절로 부르셨습니다.
그 누군가의 사절은 곧 그 사람과 마찬가지라는 것이 유다 율법의 원칙이었습니다.
따라서 열두 사도는 예수님의 합법적이고도 직접적인 대리자라고 볼 수 있습니다.
루카 복음 사가에 따르면 열두 사도는 예수님을 추종하고, 그분과 함께 지내는 것을 넘어, ‘파견된 사람’(Apostolos)이었습니다.
사도들은 예수님의 지상 생애뿐 아니라, 그분의 죽음과 부활, 승천까지 목격한 증인으로서, 그분의 사명을 세상 끝까지 전해야 할 의무를 지닌 이들이었습니다.
신약 성경에 따르면 사도들은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직접 목격한 목격 증인이어야 하고, 동시에 예수님으로부터 직접 ‘예수 그리스도 사건’을 선포할 사명을 부여받은 사람이어야 했습니다.
이 시대 또 다른 사도인 우리들이 꼭 명심해야 할 진리가 한 가지 있습니다.
사도는 주인공이 아니라 조연입니다.
사도는 다름 아닌 ‘파견된 사람’ ‘보냄을 받은 사람’입니다.
사도들은 자신의 힘과 개인적 권위로 행동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으로부터 부여받은 임무에 따라 행동합니다.
그들은 왕이 아니라 사절입니다.
손이 아니라 연장입니다.
사도들이 받은 것은 아무리 작은 것이라 할지라도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니라 주님과 백성을 위한 것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겠습니다.
사도 직분을 수행하기에 앞서 사도라는 직분에 대한 겸손한 신원 의식을 저버리는 일이 없어야겠습니다.
“하늘의 오묘한 섭리를 보십시오.
그분은 지혜로운 사람들, 부유하고 지체 높은 사람들을 뽑지 않고 어부들과 세리들을 뽑으시어, 사람들이 인간의 지혜와 재물, 권력과 귀한 신분에 이끌려 믿음에 드는 일이 없도록 하셨습니다.
주님께서 이렇게 하신 것은 사도는 논쟁 실력이 아니라 진리로 세상을 이겨야 하기 때문입니다.”
(암부르시우스 교부)
오늘도 별 도움 안되는 우리들을 당신의 사도로 불러주신 주님의 은총에 깊은 감사와 찬미를 드리며, 과연 무엇으로, 어떤 방식으로 그분의 인류 구원 사업에 참여할 수 있겠는지 고민해보면 좋겠습니다.
- 살레시오회
♠ 송영진 모세 신부님의 묵상글
<모든 신앙인은 사도들과 함께 ‘예수님의 증인’입니다>
1)
예수님께서 승천하시기 전에 하신 말씀은 사도들을 뽑으신 이유와 목적을 잘 나타냅니다.
"성경에 기록된 대로, 그리스도는 고난을 겪고 사흘 만에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나야 한다.
그리고 예루살렘에서부터 시작하여, 죄의 용서를 위한 회개가 그의 이름으로 모든 민족들에게 선포되어야 한다.
너희는 이 일의 증인이다."
(루카 24,46-48)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하신 일들과 말씀들을 ‘증언’하는 일을 하라고 사도들을 뽑으셨습니다.
“너희는 이 일의 증인이다.”는 “너희는 이 일의 증인이 되어라.”, 또는 “너희는 이 일을 증언하여라.”입니다.
‘이 일’이라는 말은 예수님께서 하신 일들과 말씀들을 모두 가리키는데, 특히 중요한 것은 ‘수난, 죽음, 부활’입니다.
“죄의 용서를 위한 회개가 그의 이름으로 모든 민족들에게 선포되어야 한다.”는 “예수님을 믿고 회개하면 죄를 용서받는다고(구원을 받는다고) 모든 민족들에게 선포하여라.”입니다.
예수님께서 처음에 선포하신 복음은 “회개하여라.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였는데(마태 4,17), 사도들이 선포한 복음은, “예수님이 곧 메시아이시며, 예수님께서는 인류의 죄를 대신 속죄하기 위해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셨지만 부활하셨고, 예수님을 믿고 회개하면 하늘나라에 들어간다.”입니다.
복음이 바뀐 것이 아니라, 더욱 구체적으로 설명한 것입니다.
2)
사도들이 마티아를 사도로 선출할 때에도 사도는 ‘증인’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 강조되었습니다.
"주 예수님께서 우리와 함께 지내시는 동안 줄곧 우리와 동행한 이들 가운데에서, 곧 요한이 세례를 주던 때부터 시작하여 예수님께서 우리를 떠나 승천하신 날까지 그렇게 한 이들 가운데에서 한 사람이 우리와 함께 예수님 부활의 증인이 되어야 합니다."
(사도 1,21-22)
예수님 부활을 증언하려면 그 전에 먼저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을 증언하고 설명해야 하고, 그렇게 하려면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들과 일들을 모두 증언해야 합니다.
따라서 예수님 부활의 증인이라는 말은 부활만 증언하는 사람이라는 뜻이 아니라 예수님에 관한 모든 것을 증언하는 사람이라는 뜻이 됩니다.
3)
묵시록에서는 “열두 사도는 새 예루살렘(하느님 나라)의 열두 주춧돌”이라고 말합니다(묵시 21,14).
바오로 사도는 ‘교회는 하느님의 거처’이며 ‘사도들은 그 건물의 기초’ 라고 말합니다(에페 2,20-22).
모든 신앙인은 그리스도와 함께 한 몸을 이루는 공동체이기 때문에(1코린 12,27), 사도들이 하는 일은 곧 모든 신앙인들이 함께 해야 하는 일입니다.
직책과 직분의 차이가 있긴 하지만, 모든 신앙인은 각자 자신의 위치에서 예수님에 대한 신앙을 증언하는 증인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도들의 선포와 증언을 믿고 받아들여서 신앙인이 된 사람들은 다시 다른 사람들에게 복음을 선포하고 자신의 믿음을 증언하면서 사도들의 일을 이어받게 됩니다.
4)
복음을 선포하고 신앙을 증언하는 일은 ‘말로만’ 이루어지는 일이 아니라, ‘말’과 함께 ‘삶’으로도 이루어져야 하는 일입니다.
‘말’보다 ‘삶’이 더 중요합니다.
사실 우리가 사도들의 선포와 증언을 믿는 것은 바로 그들의 ‘삶’과 ‘죽음’ 때문입니다.
사도들의 삶과 죽음은 그 자체로 복음 선포가 되고, 신앙의 증언이 됩니다.
우리도 그렇게 ‘나의 삶’으로 예수님의 복음과 예수님에 대한 신앙이 사람을 살리는 ‘생명의 진리’ 라는 것을 증언해야 합니다.
만일에 자신이 믿는 것으로만 그치고, 다른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일을 하지 않고, 신앙을 증언하는 일을 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등불을 켜서 ‘함지 속에’ 감추는 것과 같습니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
산 위에 자리 잡은 고을은 감추어질 수 없다.
등불은 켜서 함지 속이 아니라 등경 위에 놓는다.
그렇게 하여 집 안에 있는 모든 사람을 비춘다.
이와 같이 너희의 빛이 사람들 앞을 비추어, 그들이 너희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를 찬양하게 하여라."
(마태 5,14-16)
자신의 신앙을 감추면, 마치 등불이 점점 희미해지다가 꺼지는 것처럼 신심이 점점 약해지다가 결국 신앙에서 멀어지게 됩니다.
그것은 어디서나 아주 쉽게 볼 수 있는 생생한 현실입니다.
- 전주교구 상지원
♠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의 묵상글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 뿌리내린 정주의 삶 - 기도, 일, 공부 - 명품종교, 명품신자, 명품인생>
“주님은 너그럽고 자비하시며,
분노에 더디시고 자애가 넘치시나이다.
주님은 모두에게 좋으시며,
그 자비 모든 조물 위에 내리시네.
(시편 145,8-9)
오늘 화답송 시편이 은혜롭습니다.
말 그대로 대혼돈의 시대입니다.
기후위기, 정치위기, 사회위기, 교육위기, 가정위기 등 모두가 연결되어 있는 총체적 복합적 위기의 시대입니다.
좀처럼 길이, 답이, 희망이, 방향이 보이지 않습니다.
국내 안팎 현실이 그러합니다.
매일 인터넷 뉴스를 통해 확인하는 사실입니다.
“어떻게 살아야 하나?”
저절로 나오는 절박한 물음입니다.
언젠가 열심한 분과 주고 받은 문답이 생각납니다.
“신부님은 좌파입니까 혹은 우파입니까?”
“저는 좌파도 우파도 아닌 예수님파로, 제 신원은 주님의 전사, 주님의 학인, 주님의 형제입니다.”
극단의 확신에 뿌리 내린 눈먼 무지의 이단적, 광적, 맹목적 위험천만한 영적 삶이 아니라,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 뿌리 내린, 기도와 일과 공부가 균형과 조화를 이룬 안정과 평화의 정주의 삶이 절실한 시대입니다.
요즘 일부 개신교 교회들이 날로 극우화되어 가는 심각한 위기의 현실은 바로 영성의 핵심인 균형과 조화를 잃었기 때문입니다.
민주주의가 요구하는 관용과 자제의 삶도 균형과 조화의 영성에서 나옵니다.
새삼 베네딕도회의 영성을 절실히 필요로 하는 작금의 현실 같습니다.
인공지능(AI) 시대가 절실히 필요로 하는 교회의 보편적 영성이요, 한마디로 기본에 충실한 균형과 조화의 온전한 영성이 베네딕도회 영성입니다.
바로 이에 모범이 오늘 복음의 예수님입니다.
기도해야 합니다.
기도가 답입니다.
살기 위해, 영혼의 살기 위해, 균형과 조화, 내적 안정과 평화의 삶을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아무리 강조해도 부족한 것이 기도요 기도에는 늘 초보자들인 우리들입니다.
기도하는 대로 살고 사는 대로 기도합니다.
나중에 남은 얼굴은 기도한 얼굴인가 기도하지 않은 얼굴인가 둘 중 하나입니다.
기도와 삶은 함께 갑니다.
기도없는 삶은 공허하고, 삶이 없는 기도는 맹목입니다.
기도에는 신비가가 되고 일에는 전문가가 되고 공부에는 학자가 되라는 말도 생각이 납니다.
오늘 옛 현자 다산의 말씀도 이와 일맥상통합니다.
“매일 스스로 마주할 수 있는 고독한 시간을 가지라.
인간에게는 자기만의 외딴곳이 필요하다.”
우선적인 순위가 기도요 삶의 위기나 중대한 일을 앞뒀을 때 어김없이, 지체없이 외딴곳을 찾았던 주님입니다.
마침내 개인의 복음 선포 활동에 한계를, 공동체의 필요를 느낀 예수님은 기도하시려고 산으로 나가시어, 밤을 새우며 기도하십니다.
하느님 아버지의 뜻을 찾으며 그분 안에 깊이 머물러 친교의 일치를 이뤘던 관상기도시간이었을 것입니다.
정말 21세기 대영성가 토마스 머튼의 말처럼 자발적 기도를 위한 고독은 사치품이 아닌 필수품이 된 세상입니다.
에수님은 밤샘기도 후 날이 새자 당신 제자들 가운데 열둘을 뽑아 당신의 하늘나라 복음 선포 활동을 함께 할 이들을 뽑으시니 바로 열두 사도들 공동체입니다.
참으로 다양한 면모들이요 예수님을 중심으로 한 사도들의 공동체임을 깨닫습니다.
이어 예수님은 사도들과 함께 산에서 내려와 당신의 말씀도 듣고 질병도 고치려 온 군중들과 직면하십니다.
군중은 모두 예수님께 손을 대려 애썼고 그분에게 힘이 나와 손을 댄 모든 사람이 치유됩니다.
그대로 기도의 힘, 믿음의 힘, 하느님의 힘을 가리킵니다.
새삼 예수님 일상의 중심에 자리잡고 있는, 기도의 일상화, 기도의 생활화를 이뤄준 외딴곳의 기도처였음을 깨닫습니다.
하루하루 날마다 ‘삶의 중심과 질서’를 잡아주는 우리 가톨릭교회의 공동전례기도입니다.
수도자들은 물론 가톨릭 교회 신자들에게 영적 주식과 같은 ‘찬미와 감사의 미사와 시편 성무일도’의 공동전례기도가 참으로 고맙고 감사하고 자랑스럽습니다.
가톨릭교회의 전례영성이야말로 명품종교, 명품신자, 명품인생을 만들어 주는 우리의 보편적 영성임을 깨닫습니다.
전례영성의 토착화, 생활화를 통해 바오로 사도가 콜로새 신자들에 말하는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지는 충만한 삶입니다.
바오로 사도의 말씀이 시공을 초월하여 오늘날 혼돈의 위기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도 용기백배 힘을 줍니다.
세상의 노예살이에서 벗어나 참된 자유를 누리게 하는 복음적 삶입니다.
“여러분은 그리스도 예수님을 주님으로 받아들였으니 그분 안에서 살아가십시오.
가르침을 받은 대로, 그분 안에 뿌리를 내려 자신을 굳건히 세우고 믿음 안에 튼튼히 자리를 잡으십시오.
그리하여 감사하는 마음이 넘치게 하십시오.
온전히 충만한 신성이 육신의 형태로 그리스도 안에 머무르고 있습니다.
여러분도 그분 안에서 충만하게 되었습니다.
그분은 모든 권세와 권력들의 머리이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여러분을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셨고 용서해 주셨습니다.”
그대로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해 체험하는 은총입니다.
날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늘 옛스러우면서도 늘 새로운(ever old, ever new)’, ‘균형과 조화’의 정통신앙, 정통영성에, 명품종교, 명품수도자, 명품신자, 명품인생을 만들어 줍니다.
자주 '예수님파' 제 신원을 확인하며 외워보는 좌우명 기도시입니다.
“하루하루 살았습니다.
하루하루 주님의 집인 수도원에서
예수님파
주님의 전사(戰士)로,
주님의 학인(學人)으로,
주님의 형제(兄弟)로 살았습니다.
끊임없이 이기적인 나와 싸우는 주님의 전사로
끊임없이 말씀을 배우고 실천하는 주님의 학인으로
끊임없이 수도가정에서 주님의 형제로 살았습니다.
하느님은 영원토록 영광과 찬미 받으소서."
서로 전우애를, 학우애를, 형제애를 발휘하여 함께 주님의 수도가정공동체를 이루어 살아가는 우리 수도자들입니다.
아멘.
- 성 베네딕도회 요셉 수도원
♠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의 묵상글
<‘꽃자리’>
지난 8월 22일, 교구 인사이동이 있었습니다.
저에게는 14번째 인사이동이 있었습니다.
그동안의 인사이동은 늘 규정과 절차에 따라 이루어졌습니다.
그 가운데 두 번은 교구장님의 특별한 면담이 있었습니다.
적성 성당으로 갈 때는 “성당이 작고 재정이 넉넉하지 않다”라고 하시며 “그래도 잘 지낼 수 있을 거야”라고 격려해 주셨고, 저는 실제로 그곳에서 참 따뜻하고 행복한 시간을 보냈습니다.
또 한 번은 미주가톨릭 평화신문으로 갈 때였습니다.
비자 문제로 사전에 알려 주셨고, 저는 본당 사목은 하지 않겠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 말씀을 기억하신 주교님께서 저를 평화신문으로 보내 주셨습니다.
그곳에서 저는 코로나 팬데믹이라는 거대한 파도 속에서도 새로운 사목의 길을 걸을 수 있었습니다.
돌이켜보면, 34년 동안 맡겨진 소임 하나하나가 저에겐 꽃자리였습니다.
제가 인사이동을 할 때마다 마음에 새기는 시가 하나 있습니다.
구상 시인의 ‘꽃자리’입니다.
“네가 시방 가시방석처럼 여기는 너의 앉은 그 자리가 바로 꽃자리니라”
우리는 종종 지금 내가 있는 자리가 불편하고 답답해서 가시방석이라 여깁니다.
하지만 그 자리가 꽃자리인지, 가시방석인지는 내 마음에 달려 있습니다.
불평과 불만이 마음을 지배하면 어디든 가시밭이 되고, 겸손과 감사가 마음을 채우면 그 자리는 곧 꽃밭이 됩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도 그렇습니다.
좋은 밭에 떨어진 씨앗만 열매를 맺는 것이 아닙니다.
겸손하고 온유한 마음을 가진 사람은 가시밭에서도, 돌밭에서도, 심지어 길가에서도 열매를 맺습니다.
왜냐하면 그 사람 안에는 이미 생명의 뿌리가 있기 때문입니다.
다니엘과 친구들은 불가마 속에서도 하느님을 찬미했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매를 맞고, 굶주리고, 감옥에 갇혀서도 복음을 전했습니다.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도 옥중에서 복음을 전하며 편지를 남겼습니다.
그분들의 자리는 감옥이었고, 불가마였고, 죽음 앞이었지만, 그곳이 바로 꽃자리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늘 열두 제자를 뽑으시기 전, 밤을 새워 기도하셨습니다.
기도 받으셔야 할 분이 스스로 기도하셨습니다.
발 씻김을 받으셔야 할 분이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셨습니다.
영광의 자리에 앉으셔야 할 분이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그렇게 주님의 기도와 섬김, 십자가는 결국 부활의 영광이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꿈을 이루시기 위해 열두 제자를 부르셨습니다.
우리가 그 제자들의 이름을 지금도 외우는 이유는, 그들이 복음을 전했고, 병자를 고쳤고, 마귀를 쫓아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꿈을 함께 꾸었고 그 꿈을 위해 살아갔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오늘 이렇게 말합니다.
“여러분은 그리스도 예수님을 주님으로 받아들였으니 그분 안에서 살아가십시오.
그분 안에 뿌리를 내려 자신을 굳건히 세우고, 믿음 안에 튼튼히 자리를 잡으십시오.
그리하여 감사하는 마음이 넘치게 하십시오.”
신앙은 뿌리를 내리는 일입니다.
표면이 아니라 깊이입니다.
바람이 분다고 쓰러지지 않고, 땅이 흔들린다고 뽑히지 않는 믿음이 되려면, 그리스도 안에 깊이 뿌리를 내려야 합니다.
우리가 오늘 살아가는 이 자리가 불편하고, 답답하고, 때로는 외로워 보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 자리가 주님께서 나에게 허락하신 꽃자리라는 것을 믿으면 좋겠습니다.
불평 대신 감사로, 원망 대신 기도로, 권리 대신 섬김으로 살아갈 때, 그 자리는 영원한 생명의 꽃자리로 피어날 것입니다.
예수님의 꿈을 함께 꾸는 우리는, 그리스도를 통해, 그리스도와 함께, 그리스도 안에서 그 꿈을 이루는 제자들입니다.
우리에게 맡겨진 삶의 자리, 신앙의 자리를 꽃자리로 바꾸어가는 복된 하루 되시길 기도드립니다.
- 미국 댈러스 성 김대건 안드레아 성당
♠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의 묵상글
<우리는 얼마나 주님의 말씀을 듣고 있을까요?>
역사상 가장 넓은 영토를 정복한 사람은 누구일까요?
나폴레옹 황제, 중앙아시아 티무르 제국의 티무르 왕, 아니면 알렉산드로스 대왕을 뽑으시는 분이 많을 것입니다.
그러나 압도적인 1위는 13세기 몽골의 칭기즈 칸입니다.
그의 영토는 중국 북부, 중앙아시아, 페르시아, 러시아 남부, 동유럽 일부까지 약 2,400㎢였다고 합니다.
이 칭기즈 칸은 자기의 가장 큰 무기를 ‘귀’라고 이야기했습니다.
“귀가 나를 가르쳤다.”라는 명언을 남길 정도로, 듣는 것을 중요하게 여긴 것이지요.
그는 다른 이의 말뿐 아니라, 자기 내면의 말까지도 듣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이렇게 잘 들었기에 단일 군주로 최대 규모의 영토를 정복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어리석음을 뜻하는 영어의 ‘stupid’의 여러 뜻 중 하나는 ‘듣지 않는다’라고 합니다.
듣지 않기에 어리석은 것입니다.
사실 우리가 들어야 할 소리가 참 많습니다.
세상의 소리, 진리의 소리, 자기 양심의 소리….
그런데 엉뚱한 것만을 들으려고 합니다.
자기 마음에 드는 말만 들으려고 하고, 자기를 반대되는 말을 들으려 하지 않습니다.
당연히 지혜로운 사람이 될 수 없습니다.
특히 주님의 소리를 들을 수 있어야 합니다.
특히 모든 계명의 핵심이라 말할 수 있는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소리를 들어야 합니다.
그러나 이 말을 나만 사랑하라는 것으로 왜곡해서 듣고 있는 것이 아닐까요?
그래서 자기가 원하는 소리를 하지 않는 사람을 향해 판단하고 단죄하는 것을 멈추지 않습니다.
주님께서도 들으셨습니다.
중요한 일을 앞두고는 하느님 아버지께 기도하시면서 들으셨고, 어렵고 힘들어하는 사람들의 소리를 들으셨습니다.
그래서 자주 따로 외딴곳에 가셔서 기도하셨고, 병으로 힘들어하고 더러운 영들에게 시달리는 사람들의 소리를 듣고 낫게 하셨던 것입니다.
이 점이 오늘 복음에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열두 사도를 뽑기 전에 기도하시려고 산으로 나가십니다.
잠깐 하느님께 안부 인사드렸던 것이 아닙니다.
밤을 새우며 하느님께 기도하십니다.
그만큼 중요한 일이 있을 때는 오랫동안 기도하시며 하느님의 소리를 들으셨던 것입니다.
또한 많은 군중이 몰려왔습니다.
복음은 그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질병도 고치려고 온 사람들이라고 설명합니다.
그렇습니다.
여기도 중요한 사실 하나가 나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는 것이 먼저라는 것입니다.
실제로 예수님의 말씀을 들은 사람만이 자기가 원하는 바를 얻을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얼마나 주님의 말씀을 듣고 있을까요?
주님께서도 그렇게 듣는 것을 중요하게 여기시고 기도하시는데, 우리는 들으려고 하지 않고 나만의 바람만을 이야기합니다.
주님께서 워낙 바쁘신 분이라 용건만 간단히 해야 할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주님의 말씀을 제대로 들을 수 있는 사람만이 주님의 뜻을 따라 살 수 있으며, 주님 안에서 기쁨의 삶을 살 수 있습니다.
- 인천가톨릭대학교 성김대건성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