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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 미사 성경 묵상

2025년 10월 22일 연중 제29주간 수요일

작성자이정식 베드로|작성시간25.10.22|조회수24 목록 댓글 0

제1독서

사도 바오로의 로마서 말씀 6,12-18

 

형제 여러분,

12 죄가 여러분의 죽을 몸을 지배하여 여러분이 그 욕망에 순종하는 일이 없도록 하십시오.
13 그리고 여러분의 지체를 불의의 도구로 죄에 넘기지 마십시오.
오히려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살아난 사람으로서 자신을 하느님께 바치고, 자기 지체를 의로움의 도구로 하느님께 바치십시오.
14 죄가 여러분 위에 군림할 수는 없습니다.
여러분은 율법 아래 있지 않고 은총 아래 있습니다.
15 그렇다면 우리가 무엇이라고 말해야 합니까?
우리가 율법 아래 있지 않고 은총 아래 있으니 죄를 지어도 좋습니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16 여러분이 어떤 사람에게 자신을 종으로 넘겨 순종하면 여러분이 순종하는 그 사람의 종이라는 사실을 모릅니까?
여러분은 죽음으로 이끄는 죄의 종이 되거나 의로움으로 이끄는 순종의 종이 되거나 하는 것입니다.
17 그러나 하느님께 감사하게도, 여러분이 전에는 죄의 종이었지만, 이제는 여러분이 전해 받은 표준 가르침에 마음으로부터 순종하게 되었습니다.
18 여러분은 죄에서 해방되어 의로움의 종이 되었습니다.

 

 

복음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 12,39-48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39 “이것을 명심하여라.

도둑이 몇 시에 올지 집주인이 알면, 자기 집을 뚫고 들어오도록 내버려두지 않을 것이다.
40 너희도 준비하고 있어라.
너희가 생각하지도 않은 때에 사람의 아들이 올 것이다.”
41 베드로가, “주님, 이 비유를 저희에게 말씀하시는 것입니까? 아니면 다른 모든 사람에게도 말씀하시는 것입니까?” 하고 물었다.
42 그러자 주님께서 이르셨다.

“주인이 자기 집 종들을 맡겨 제때에 정해진 양식을 내주게 할 충실하고 슬기로운 집사는 어떻게 하는 사람이겠느냐?
43 행복하여라, 주인이 돌아와서 볼 때에 그렇게 일하고 있는 종!
44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주인은 자기의 모든 재산을 그에게 맡길 것이다.
45 그러나 만일 그 종이 마음속으로 ‘주인이 늦게 오는구나.’ 하고 생각하며, 하인들과 하녀들을 때리고 또 먹고 마시며 술에 취하기 시작하면,
46 예상하지 못한 날, 짐작하지 못한 시간에 그 종의 주인이 와서, 그를 처단하여 불충실한 자들과 같은 운명을 겪게 할 것이다.
47 주인의 뜻을 알고도 아무런 준비를 하지 않았거나 주인의 뜻대로 하지 않은 그 종은 매를 많이 맞을 것이다.
48 그러나 주인의 뜻을 모르고서 매 맞을 짓을 한 종은 적게 맞을 것이다.
많이 주신 사람에게는 많이 요구하시고,.많이 맡기신 사람에게는 그만큼 더 청구하신다.”

 

 

 

 

 

 

 

♠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님의 묵상글

 

<주인의 뜻에 따라 사는 지혜>

 

어제 복음에 이어, 오늘 복음도 종말에 관한 비유인 '집주인과 도적의 비유'와 '청지기의 비유'를 들려줍니다.

 

앞의 것은 어제 복음과 함께 “행복하여라, 주인이 와서 볼 때 깨어있는 종들”(루카 12,37)이라는 ‘깨어있는 종들’에 대한 행복 선언이라면, 뒤의 것은 “행복하여라, 주인이 돌아와서 볼 때에 그렇게 일하고 있는 종”(루카 12,43)이라는 ‘깨어 일하고 있는 종들’에 대한 행복 선언입니다. 

이는 ‘깨어있는 자’는 곧 ‘깨어 일하는 자’임을 말해줍니다. 

그리고 일하는 자, 곧 ‘청지기’(집사)가 가져야 할 태도와 방식을 가르쳐주십니다. 

우선 비유에서, '청지기'는 주인을 대신하여 ‘종들’과 ‘양식’과 ‘재물’을 돌보는 직무를 맡은 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물으십니다. 

“주인이 자기 집 종들을 맡겨 제때에 정해진 양식을 내주게 할 충실하고 슬기로운 집사는 어떻게 하는 사람이겠느냐?”

(루카 12,42)

이는 제자들에게 ‘주인의 종들이 맡겨졌고’, 동시에 ‘그들에게 제때에 정해진 양식을 내주고 돌보는 일’이 맡겨졌음을 밝혀줍니다.

 

그러니 ‘맡겨진 종은 나의 종이 아니라 그분의 종’이며, ‘마구 부려 먹으라고 맡겨진 것이 아니라 그들에게 양식을 내주라고 맡겨졌다’는 ‘사실 인식’을 정확히 알아야 할 일입니다. 

그래서 지금 예수님께서는 바로 이 일을 맡을 수 있는 '충실하고 슬기로운 집사'를 찾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충실함’은 하느님의 본성이기도 합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 백성과 계약을 맺으시며 그 약속에 ‘신실하심’(헤세드)과 ‘한결같은 사랑’을 드러내셨습니다.

곧 당신 종들을 끝까지 챙기시는 ‘충실하심’을 드러내셨습니다.

 

바로 ‘당신의 이 마음’을 ‘청지기가 지녀야 될 태도’로 제시하고 계십니다. 

그리고 ‘슬기로움’이란 맡겨진 이들을 다루는 기술이나 요령에 있는 것이 아니라, '주인의 뜻에 따라 제때에 정해진 양식을 내어주는'(루카 12,42 참조) 일입니다.

 

그러니 그것은 ‘주님을 알고, 주님의 뜻을 아는 일과 그를 수행하는 슬기로움’입니다.

이는 '주인의 뜻을 아는 지혜'를 넘어, '주인의 뜻에 따라 사는 지혜'를 의미합니다. 

<시편> 작가는 말합니다.

“지혜의 근원은 주님을 경외함이니, 그것들을 행하는 이들은 빼어난 슬기를 얻으리라.”

(시편 111.10)

그러니 ‘지혜를 아는 사람이 아니라 사는 사람’, 곧 주인의 뜻을 알고 그것을 충실하게 실천하는 사람이 ‘슬기로운’ 사람이요, '깨어있는' 사람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오늘 복음의 마지막 구절을 명심해야 할 일입니다. 

“주인의 뜻을 알고도 아무런 준비를 하지 않았거나, 주인의 뜻대로 하지 않은 그 종은 매를 많이 맞을 것이다. 

~ 많이 주신 사람에게는 많이 요구하시고, 많이 맡기신 사람에게는 그만큼 더 청구하신다.

(루카 12,47-48)

 

<오늘의 말 · 샘 기도>

 

“충실하고 슬기로운 집사는 어떻게 하는 사람이겠느냐?”

(루카 12,42)

 

주님!

먼저 당신이 주님이심을 깨닫게 하시고, 주님이신 당신의 뜻을 아는 지혜와 당신의 뜻에 따라 사는 지혜를 주소서.

제가 당신께 속해 있는 까닭입니다.

충실하고 슬기로운 관리인이 되게 하소서!

먼저 부여받은 일, 맡겨진 일을 하게 하소서.

당신의 나라와 의로움을 찾는 일에 헌신하게 하소서.

아멘.

 

- 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도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의 묵상글

 

<악용하지 말아야 할 것들>
  
“주인이 자기 집 종들을 맡겨 제때 정해진 양식을 내주게 할 충실하고 슬기로운 집사는 어떻게 하는 사람이겠느냐?

행복하여라, 주인이 돌아와서 볼 때 그렇게 일하고 있는 종!”

(루카 12,42-43)

우리는 어제에 이어 오늘도 행복한 종의 비유를 복음에서 듣습니다.

 

그런데 어제는 주인을 깨어 기다리는 종의 행복 얘기를 들었다면, 오늘은 주인이 없을 때도 맡겨진 일을 충실히 하는 종의 행복 얘기를 듣습니다.

그러니까 '마르타와 마리아', '일과 사랑', 'Doing과 Being'에서 어제는 주님 사랑 안에 머문 마리아의 행복
얘기라면, 오늘은 주님 사랑 까닭에 주님 일을 충실히 하는 마르타의 행복 얘기입니다.

그런데 오늘 종의 비유 얘기에서는 종의 불행 얘기도 합니다.


주님의 일을 충실히 하는 지혜로운 종은 행복하지만 그렇지 않은 어리석은 종은 불행하다는 가르침입니다.

 

그런데 왜 이런 불상사가 일어났습니까?
그것은 집사가 아닌 단순한 종이었으면 이런 불상사가 일어나지 않았을 겁니다.

 

어제의 종은 주인과 종 사이에 아무도 없고 아무 일도 없어서 그저 주인님만을 위해서 잘 깨어 기다리면 되었습니다.

그런데 오늘의 종은 단순한 종이 아니라 집사 신분의 종이고, 주인님과 자기 사이에 다른 종들이 있으며 맡겨진 일이 있습니다.

주인님께는 자기도 종이지만 종들에게는 지배인(manager)입니다.


그런데 주인님의 종이기에 맡겨진 일을 정해진 대로 하면 되는데 차츰 지배인이라는 위치를 이용하여 종들을 지배하고 억압합니다.

주인님의 집사(Steward)요 지배인이 주인님 자리를 차지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느님께서 당신 대신 사랑을 베풀라고 자녀를 맡겼는데 집사에 불과한 아비 어미가 자녀를 학대하는 것과 같습니다.

이것은 하느님께서 당신 대신 사랑을 행하라고 형제들을 맡겼는데 집사에 불과한 본당 신부와 수도회 장상들이 제 맘대로 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집사라는 지위를 선용하지 않고 악용하고 있지는 않은지 집사직의 나를 돌아보고 마음가짐을 다시 한번 새롭게 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악용하지 말고 선용해야 할 것은 집사라는 지위뿐이 아닙니다.


우리의 은총 지위도 악용하지 말아야 하고 선용해야 합니다.

오늘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은총 아래 있으니 죄를 지어도 좋습니까?”

(로마 6,15ㄴ)

 

“죄가 여러분의 죽을 몸을 지배하여 여러분이 그 욕망에 순종하는 일이 없도록 하십시오.”

(로마 6,12)

어제 죄가 많은 곳에 은총도 풍부하다고 했는데, 우리가 아무리 죄를 지어도 하느님 은총은 풍부할 것이라고 은총을 악용하지 말라고 경고하는 동시에 선용하라고 권고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회개한 죄인에게는 하느님의 은총이 풍부하지만 은총을 악용하는 죄인에게도 은총이 풍부하지는 않습니다.

얼마간 참아주시기는 해도 마냥 참아주시지는 않으십니다.

 

천지불인(天地不仁)이라는 노자 도덕경의 말을 마음에 새겨야겠습니다.

 

- 작은형제회

 

 

 

 

 

 

 

♠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의 묵상글

 

<많이 맡기신 사람에게는 그만큼 더 청구하신다>

 

어렵게 집안을 꾸려가던 가난한 가장이 아이들 걱정을 했습니다.

 

"신발이 다 떨어졌다고 새 운동화를 사 달라고 난리인데 새 운동화를 장만할 돈이 부족하니…

그래도 사주기는 사줘야 할 텐데 걱정입니다."

 

이 말을 듣던 한 여인이 눈물을 흘리며 말했습니다.

 

"당신은 아이들 신발 때문에 걱정하셨지요?

저에게는 어린 딸이 하나 있는데 그 아이는 태어난 후 아직 한 번도 걸음을 옮긴 적이 없지요.

몸이 아파서…

만약 우리 아이가 신발을 신고 걸어 다녀 한 켤레만이라도 닳아 못 신게 된다면, 우리에게는 그보다 더 큰 행복은 없을 것입니다."

 

가난한 가장은 자신이 얼마나 행복한 고민을 하고 있는지 깨달았습니다.

 

아이들의 떨어진 운동화를 보았습니다.

고민 덩어리였던 그 신발들이 그렇게 사랑스러워 보일 수가 없었습니다.

 

“많이 주신 사람에게는 많이 요구하시고, 많이 맡기신 사람에게는 그만큼 더 청구하신다.” (루카 2,48) 고 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과 동고동락했으니, 그에 걸맞은 책임이 요구된다는 말씀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몽땅 차지했으니 더 많은 것이 요구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잘못을 범하게 되면 그 벌은 더욱 엄할 것입니다.

 

그야말로 '매를 맞아도 많이 맞을 것입니다.'(루카12,47). 

아는 만큼 실천이 따라야 합니다.

 

우리도 다르지 않습니다.

하느님의 자녀가 되었고, 그분의 자비를 더 많이 입었으니 당연히 그에 상응하는 삶이 따라야만 합니다.

 

교회 안에서 성직자는 성사 집행과 복음 선포의 사명에 충실해야 하고, 수도자는 봉헌의 삶을 더 열정적으로 살며, 평신도는 하느님의 자녀다운 직분과 소명을 다해야 합니다.

 

그렇게 하지 않을 때 그런 직분이 없는 사람보다 더 많은 책임을 감당해야 합니다.

 

직분은 그가 누릴 수 있는 영광이나 권리이기보다는 책임입니다.

 

저는 한 기관의 책임자였습니다.

 

사람들은 저를 ‘갑’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실상 저는 철저히 ‘을’이었습니다.

 

저만 그렇게 생각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매 맞을 것을 걱정하지는 마십시오.

늘 깨어 준비하면 오히려 그 책임을 통해 모든 재산을 관리할 기회를 얻게 되기 때문입니다(루카 12,44).

 

우리는 살아가면서 이러저러한 근심과 걱정을 안고 살아갑니다.

그러나 그것은 행복한 고민입니다.

 

지금 나에게 주어진 것에 만족하고 충실하면 우리의 미래는 보장된 것이고 기대되는 순간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뜻을 제대로 사는 만큼 주님을 만나는 기쁨이 클 것입니다.

 

사실 세상 모든 것이 하느님 것이니 받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

주 하느님께서 마련해 놓으신 것을, 이 세상에 사는 동안 이런저런 모양으로 잠시 관리하다가 하느님께로 돌아가는 것이고, 그러기 때문에 내 마음대로 하는 것이 아니라 주인의 뜻대로 사용해야 합니다.

 

그리고 마침내 그 모든 것을 되돌려 드려야 합니다.

 

그러나 그 일은 먼 훗날이 아니라 지금 여기에서 이미 시작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사람의 아들은 생각지도 않은 때에 오실 것이기 때문입니다(루카12,40).

 

하느니의 자녀로 뽑힌 우리는 많이 받았으니 많은 것을 돌려드려야 합니다.

혹 이미 많이 받았는데 받지 않았다고 생각하고 있다면 그것은 매를 많이 맞을 일입니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 청주교구 내덕동 주교좌 성당

 

 

 

 

 

 

 

♠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의 묵상글

 

<내가 조금씩 소멸되고 소진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저희 살레시오회 창립자 돈보스코께서는 1888년 1월 31일, 73세의 나이로 선종하셨습니다.

 

그는 젊은 시절부터 건강 상태가 좋지 않았습니다.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난 제자들의 생계와 교육에 대한 부담으로 인해 그의 몸은 만신창이가 되었습니다.

 

돈보스코가 한 평생 지고 갔던 십자가는 참으로 다양했고, 그 무게가 보통이 아니었습니다.

 

두 살 때 아버지와 사별하는 큰 십자가를 짊어졌습니다.

그로 인한 극도의 가난, 성소 여정의 난관들...

 

뿐만 아닙니다.

사제가 되고 난 후 그가 의욕적으로 펼쳐나가기 시작한 가난한 청소년들을 위한 사업은 큰 걸림돌을 만나게 됩니다.

시 당국자들뿐만 아니라 교육부 장관, 심지어 주교님과 동료 사제들조차 돈보스코를 이해하지 못하고 그를 ‘미친 사람’ 취급했습니다.

 

그뿐이 아니었습니다.

돈보스코는 수백 명의 가난한 청소년들이 기숙했던 오라토리오 내일 아침 아이들이 먹을 빵을 걱정해야 했습니다.

 

사도 바오로처럼 달릴 곳을 다 달린 노인 돈보스코는 만년에 이르러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드디어 하느님께서 제게 맡겨주신 과업이 모두 이루어졌습니다.

그동안 얼마나 많은 어려움을 겪어야 했던가요?

십자가의 무게가 얼마나 무거웠던가요?

그 길을 다시 걸어야 한다면 솔직히 제가 그것을 받아들일 용기가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돈보스코가 항상 쉴새없이 뛰어다니다 보니, 강철 체력이었다고 생각했었는데, 사실 알고 보니 돈보스코는 ‘종합병원’이었습니다.

 

그는 젊은 사제 시절부터 주기적으로 각혈했습니다.

서품 2년 차부터 눈병을 앓기 시작해서 결국 나중에 오른쪽 눈이 실명되었습니다.

서품 5년 차부터 심한 다리 부종으로 인해 걷기가 힘들었습니다.

 

그 외에도 심한 두통과 치통에 시달렸고, 얼마나 스트레스가 많았으면 불면증, 만성 소화불량, 가슴 통증을 앓았습니다.

종창과 포진으로 고생했으며, 생애 마지막 15년간 주기적인 발열로 힘겨워했습니다.

 

한 프랑스 의사의 증언에 따르면 돈보스코의 몸은 ‘수선 불가능한 코트’와 같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돈보스코는 불평 한 마디 없었습니다.

건강한 사람처럼 열심히 자신에게 맡겨진 업무를 수행했습니다.

 

하루 서너 시간씩 빠짐없이 고백성사를 집전했으며, 수시로 장거리 사목 방문을 다녔습니다.

매일 밤늦도록 교회와 수도회를 위한 집필 작업에 매진했습니다.

 

그러나 단 한 번도 자신의 병세에 대해 의사나 주변 사람들에게 말하지 않았습니다.

 

말년에 도달한 돈보스코에게 또 하나의 과제가 주어집니다.

 

절친이셨던 비오 9세 교황님의 당부로 그는 로마 떼르미니 역 옆에 예수 성심 대성당을 건축하게 됩니다.

 

경제가 바닥이던 시절, 기금 마련이라든지 공사 진척을 위한 장거리 여행 등으로 그의 수명이 단축될 정도였습니다,.

결국 돈보스코는 자신이 지니고 있었던 모든 에너지, 삶 전체를 주님과 교회와 수도회를 위해 쏟아부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깨어있으라고 신신당부하고 계십니다.

 

우리는 사목자로서의 깨어있음이 무엇인지 고민해봐야 할 것입니다.

 

답은 너무나 쉬운 것 같습니다.

돈보스코처럼 몸사리지 않고 양들 사이로 뛰어드는 것입니다.

 

그들 한가운데 현존하는 것입니다.

그들에게 내 목숨을 나누어주는 것입니다.

 

그런 과정에서 내가 조금씩 소멸되고 소진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입니다.

 

- 살레시오회

 

 

 

 

 

 

 

 송영진 모세 신부님의 묵상글

 

<그 날이 언제인지 알려 주지 않으시는 것도 은총입니다>

 1)

“도둑이 몇 시에 올지 집주인이 알면”뜻으로는 “도둑이 몇 시에 올지는 몰라도 오는 것이 확실하다는 것을 집주인이 알고 있으면”입니다.

 

이 말씀은 “종말과 재림의 날이 언제인지 말할 수는 없지만, 그 날은 반드시 온다.” 라는 가르침입니다.

 

“너희도 준비하고 있어라. 너희가 생각하지도 않은 때에 사람의 아들이 올 것이다.”는 “너희는 ‘지금’ 준비하고 있어라. 너희 마음대로 종말과 재림의 날을 계산하지 마라. 그 날은 인간이 미리 계산할 수 없다.” 라는 가르침입니다.

 

주님께서 사람들을 골탕 먹이려고 일부러 ‘예고 없이 갑자기’ 오시는 것은 아닙니다.

 

지금의 말씀 자체가 종말과 재림을 예고하시는 말씀이고, 사람들이 아무 준비 없이 갑자기 당하는 것을 예방하기 위한 배려입니다.

2)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설명합니다.

 

"형제 여러분,

그 시간과 그 때에 관해서는 여러분에게 더 쓸 필요가 없습니다.

주님의 날이 마치 밤도둑처럼 온다는 것을 여러분 자신도 잘 알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평화롭다, 안전하다.’ 할 때, 아기를 밴 여자에게 진통이 오는 것처럼 갑자기 그들에게 파멸이 닥치는데, 아무도 그것을 피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나 형제 여러분,

여러분은 어둠 속에 있지 않으므로, 그날이 여러분을 도둑처럼 덮치지는 않을 것입니다.

여러분은 모두 빛의 자녀이며 낮의 자녀입니다.

우리는 밤이나 어둠에 속한 사람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는 다른 사람들처럼 잠들지 말고, 맑은 정신으로 깨어 있도록 합시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진노의 심판을 받도록 정하신 것이 아니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구원을 차지하도록 정하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가 살아 있든지 죽어 있든지 당신과 함께 살게 하시려고, 우리를 위하여 돌아가셨습니다."

(1테살 5,1-6.9-10)

 

아무런 대비도 하지 않고 태평스럽게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만, 즉 영혼 구원에 대해서는 관심도 없이, 신앙생활도 하지 않고, 세속 생활에만 몰두하고 있는 사람들에게만, 종말은 갑자기 닥치는 재난이 될 것입니다.

 

충실하게 신앙생활을 하면서 잘 대비하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종말은 갑작스러운 재난이 아니라 자연스러운 일이 될 것이고, 그 날은 모든 희망이 이루어지는 기쁜 날이 될 것입니다.

3)

하느님의 뜻은 심판이 아니라 구원이기 때문에 종말과 재림의 날을 미리 알려 주지 않으시는 것도 사람들의 구원에 직접적으로 관련된 일일 것입니다.

 

신앙생활과 회개는 평소에, 진심으로, 또 스스로 마음이 우러나와서 해야 하는 일입니다.

 

심판의 날이 언제인지 알아서 억지로 하게 되면 거짓 신앙생활과 거짓 회개가 됩니다.

 

그런 점을 생각하면, 그 날이 언제인지 알고 있는 것보다 모르고 있으면서 대비하는 것이 훨씬 더 유익합니다.

 

만일에 그 날을 미리 알려 주면, 잘 준비하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많은 사람들이 오히려 더 신앙생활을 게을리 할 것입니다.

 

또 그 날이 다가올수록 공포심에 사로잡혀서, 회개는 하지 않고, 하느님 탓만 하고 하느님을 원망하기만 하는 사람들이 많을 것입니다.

 

4)

“많이 주신 사람에게는 많이 요구하시고, 많이 맡기신 사람에게는 그만큼 더 청구하신다.” 라는 말씀은 성직자라면 성직자답게 살아야 하고 신앙인이라면 신앙인답게 살아야 한다는 가르침입니다.

 

표현만 보면, 하느님을 ‘채권자’로 생각하기가 쉬운데,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는 빚이 아니고, 하느님과 우리의 관계는 채권자와 채무자의 관계가 아닙니다.

 

하느님은 우리가 사랑하는 우리의 아버지이신 분이고, 우리는 하느님께서 사랑하시는 자녀들입니다.

 

하느님의 은혜에 감사드리면서, 기쁨으로 신앙생활을 하고, 그리고 하느님께 기쁨을 드리기 위해서 노력하는 것, 바로 그것이 신앙인답게 사는 것입니다.

 

하느님은 결과가 아니라 우리의 노력을 보시는 분입니다.

 

우리가 무슨 대단한 업적이나 성과를 만들어내지 못했더라도, 당신이 보시기에 합당하게 살았다면 그것만으로도 크게 기뻐하시는 분입니다.

 

- 전주교구 상지원

 

 

 

 

 

 

♠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의 묵상글

 

<깨어 있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얼마 전 반 모임에서 ‘휴가’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습니다. 

 

제가 10월 13일에 출발해서 11월 7일에 돌아온다고 하니, 한 형제님이 그날 딸이 한국으로 간다고 말씀하시더군요. 

그 딸은 태권도 선수로 한국의 전국 체전에 참가한다고 했습니다. 

가는 길이 같아 동행하게 되었습니다. 

 

또 다른 자매님은 11월 7일에 어머니가 달라스로 오신다고 하였습니다. 

좌석을 확인해 보니 제 자리와 가까웠습니다. 

 

따님이 이야기하기를 “손에 묵주 들고 기도하는 분이 저희 어머니입니다.”라고 했습니다. 

저는 “저는 사제복을 입고 있을 겁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14시간 넘는 긴 여정이지만, 하느님께서는 가는 길과 오는 길에 동행할 수 있는 분들을 보내주셨습니다.

그래서 지루하지 않고 은총의 시간이 되었습니다.

 

저는 언제부턴가 장거리 비행이 힘들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강론을 준비하는 시간이 되었습니다. 

 

성경 말씀을 읽고 묵상하면서 정리하다 보면, 같은 시간이지만 무료한 시간이 아니라 은혜로운 시간이 됩니다. 

우리가 어떻게 시간을 쓰느냐에 따라 지루한 시간이 될 수도 있고, 은총의 시간이 될 수도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어제에 이어 다시 한번 '깨어 준비하는 종'의 이야기를 하십니다. 

 

그런데 그 깨어 있음은 단순히 일을 미리 하는 것, 효율적으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만원 버스를 피하려고 일찍 걷는 것도, 학교나 직장에서 과제를 남보다 빨리 끝내는 것도, 세상에서는 칭찬받을 수 있지만, 주님이 말씀하시는 ‘깨어 있음’과는 거리가 있습니다.

 

깨어 있다는 것은 성과와 능률이 아니라, 가치와 의미를 바라보는 삶입니다. 

 

도시 빈민 사목을 오래 해 온 제 친구 신부님이 있습니다.

 

신부님은 큰 성과를 내는 사목을 하지는 않았습니다.

하지만 어려운 이들과 밤새도록 이야기를 나누고, 추운 겨울 광장에서 고통받는 이들과 함께 미사를 봉헌하며, 뜨거운 여름에도 복직을 호소하는 이들과 함께 걸었습니다. 

몸은 예전 같지 않아도 눈빛은 여전히 맑고, 가슴은 뜨겁습니다.

 

이런 모습이야말로 깨어 있는 종의 모습일 것입니다.

 

오늘 독서를 읽으면서 문득 한용운 시인의 시 〈복종〉이 떠올랐습니다.

 

“남들은 자유를 사랑한다지마는 나는 복종을 좋아하여요.

자유를 모르는 것은 아니지만 당신에게는 복종만 하고 싶어요.

복종하고 싶은데 복종하는 것은 아름다운 자유보다도 달콤합니다.

그것이 나의 행복입니다. 

그러나 당신이 나더러 다른 사람을 복종하라면 그것만은 복종할 수 없습니다. 

다른 사람을 복종하려면 당신에게 복종할 수 없는 까닭입니다.” 

 

이 시의 주어를 ‘하느님’으로 바꾸어 읽어보면 신앙인의 고백이 됩니다. 

 

우리는 자유를 아는 사람들이지만, 그 자유를 하느님께 기꺼이 내어드릴 때 참된 자유가 됩니다. 

 

억지로 굴복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으로 드리는 복종이기에, 그것은 더 달콤한 자유입니다.

 

순교성인들은 행동으로 깨어 있었습니다. 

기도로 깨어 있었습니다. 

 

그래서 박해의 순간에도 담대할 수 있었고, 주어진 십자가를 충실히 질 수 있었습니다. 

 

하느님은 그분들에게 천상의 영광을 허락하셨습니다. 

 

고인이 되신 저의 부모님 역시 늘 감사하며, 기도하며, 기쁘게 사셨습니다. 

신앙의 모범이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부모님께서 지금 천상에서 빛나는 별이 되셨으리라 믿습니다. 

 

우리도 그분들처럼 깨어 믿음을 지키며 살아가야 합니다. 

 

깨어 있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우리의 마음에 들어오시는 그리스도를 삶으로 표현하는 것입니다. 

 

각 시대와 문화가 저마다의 방식으로 그리스도를 표현했듯이, 오늘 우리는 우리의 삶에서 그분을 드러내야 합니다.

 

등불을 들고 예수님을 맞이하는 것이 곧 우리의 삶 자체가 되어야 합니다.

 

라틴어 격언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Hodie mihi, cras tibi”(오늘은 나, 내일은 너)

 

우리가 언제 주님 품에 갈지 모르니 늘 깨어 준비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성과보다 의미를, 능률보다 가치를 바라보는 사람, 그래서 주님 앞에 언제든 담대하게 설 수 있는 사람이 깨어 있는 종입니다. 

 

오늘 하루, 우리도 등불을 밝히며 예수님을 맞이하는 종이 되면 좋겠습니다.

 

- 미국 댈러스 성 김대건 안드레아 성당

 

 

 

 

 

 

 

♠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의 묵상글

 

<책임이 있는 지도자 역할>

 

바쁜 일정으로 정신없이 살 때는 조금 게을러지고 싶다는 마음이 듭니다.

 

그런데 영국 작가 도로시 세이어스의 게으름에 대한 흥미로운 글을 읽었습니다.

 

그녀가 게으른 사람들을 관찰한 결과, 그들이 항상 ‘이게 나한테 어떤 이득이 될까?’만 생각하면서 손익을 따진다는 것입니다.

손익 계산하면서 게을러진다고 말합니다.

 

결국 게으름이란 아무것도 하지 않은 상태가 아니라 삶의 방향과 의미를 잃어버린 상태라는 것입니다.

공감이 가는 말이었습니다.

 

그래서 게으름은 건전한 의욕과 열정을 훔치는 도둑이라고 말하는가 봅니다.

이기적인 욕구에만 관심을 두는 삶인 것입니다.

 

세상일은 손익 계산에 의해서만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또 나 중심의 삶도 절대 아닙니다.

성급하게 살라는 것이 아닙니다.

 

마음의 여유를 가지면서도 함께 사는 데에 지향점을 둔다면 그것이 성실한 것이며, 더 큰 기쁨의 삶을 살 수 있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강조하신 사랑의 삶은 충분히 게으름의 악에서 벗어나게 합니다.

사랑은 손익계산을 따지는 이기적인 감정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분명 행복을 갖게 됩니다.

 

이 세상 안에서 힘들다고 그래서 남들처럼 살겠다면서 계산적으로 살면, 게으른 삶, 결국 그냥 사는 것에 불과하게 됩니다.

 

과연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어제 복음에서 ‘깨어 기다리는 자세’를 말씀하셨다면, 오늘 복음의 부분은 그 기다리는 시간 동안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말씀해 주십니다.

 

특별히 집사, 다른 종들을 돌보는 책임이 있는 지도자 역할을 이야기하십니다.

 

이 집사는 ‘제 때에 정해진 양식을 내주는’(루카 12,42) 임무를 따라야 합니다.

 

단순히 물질적 양식을 넘어, 공동체에 필요한 영적 양식을 내주는 역할입니다.

이 임무를 성실하게 수행하는 사람에게 “행복하여라. 주인은 자기의 모든 재산을 그에게 맡길 것이다.”(루카 12,44)라고 말씀하십니다.

 

제 때에 정해진 양식을 내주는 임무를 우리 모두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남들처럼만 살면 그만이라면서 게으른 삶을 살면 그 임무를 저버리는 것이 됩니다.

또 ‘주인이 늦게 오는구나’(루카 12,45)라면서 안일한 생각을 하는 사람은 예상하지 못한 날, 짐작하지 못한 시간에 불충실한 자들과 같은 운명을 겪게 된다고 하십니다.

 

주님으로부터 이 세상에 창조된 우리는 책임감을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특히 사랑을 다른 이에게 실천하면서 그들을 돌보는 책임이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냥 단순히 사는 것으로 충분한 것이 아니라, 어떻게 사는가가 중요합니다.

 

인천가톨릭대학교 성김대건성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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