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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건의 생애와 평가 !!!

작성자콩깍지|작성시간14.11.24|조회수74 목록 댓글 0

 


王建

 


자; 약천(若天) 시호; 신성(神聖)

생애와 업적


궁예가 한반도 중부 지방을 평정하며 철원에 도읍을 정하자,송악을 지배하던 호족 용건은 자진하여 궁예에게 폼을 맡겼다.그 대가로 자신은 철원 그리고 당시 스무 살이던 아들은 금성의 태수가 되었다. 용건의 아들이 바로 왕건이다.

궁예가 이들 부자를 자신의1세력권 안에서 매우 중요한 두 지역에 각각 태수로 임명할 정도로 이들은 당시 송악 일대에서 매우 유력한 호족 출신이었다.

 

이는 해상무역으로 얻은 상당한 경제력이 뒷받침되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이후 왕건은 궁예의 영토 확장에 지대한 공을 세운다.

육지에서의 활약도 뛰어났지만 해상 세력 출신답게 특히 해전에서 뛰어난 성과를 거두었다.

900년에는 광주(경기도).충주 • 청주 및 당성 • 괴양- 등의 군현을 평정하고, 그 공으로 아찬(阿湌) 자리에 올랐다.

 

또한 903년에는 함데를 이끌고 서해를 거쳐 후백제군의 금성군을 함락시키고 부근 10여 개 군현을 빼앗아 나주를 설치했다.

이와 같은 전공을 인정받아 알찬(閼粲)으로 승진했다가 913년에는 파진찬(波珍湌)에 올라 시중(侍中)이 되었다.

강력한 중앙집권체제를 꿈꾸던 궁예가 호족들을 탄압하면서 왕건도 위기를 맞는다.

 

가까스로 위기를 모면한 왕건이 이때부터 자신의 앞날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지 않았을까.

918년 6월,홍유 • 배현경 • 신숭겸 • 복지겸 등이 유암산 밑에 있던 왕건의 처소에 모였다.

 

이들은 “동산에 새로 익은 참외가 있을 것이니 좀 따다 달라”며 유씨 부인을 따돌리려 했으나, 눈치 빠른 유씨 부인은 바깥으로 나가는 척하고는 몰래 장막 안에 들어와 얘기를 엿들었다.

이들은 왕건을 설득했다.


‘지금 임금 밑에서는 백성들이 도탄에 빠져 도저히 살아갈 수가 없습니다.

 

예로부터 혼미한 임금을 폐하고 명철한 임금을 세우는 것은 천하의 대의입니다. 공께서는 은나라 탕왕과 주나라 무왕을 따르십시오"

그러나 왕건은 완강히 거절했다. “나는 감히 다른 마음을 품을 수 없소.

"정치가 어지럽고 나라가 위태로워 백성들 모두가 임금을 원수처럼 미워하고 있습니다. 지금 덕망이 공과 같은 사람이 없지 않습니까?"

네 명의 장수들이 간곡하게 권했지만,왕건은 왕에 대한 충성을 기하며 뜻을 굽히지 않았다. 그러자 장막 안에서 초조하게 엿듣고 있던 유씨 부인이 나와 손수 갑옷을 입혀주며 출정을 독촉했다.

여러 장수들이 왕건을 에워싸고 문으로 나가면서 외쳤다.

“왕공께서 벌써 의로운 깃발을 들었다.


그러자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사람들이 앞뒤로 달려와 왕건의 대열에 참여했다.

 먼저 궁문 밖에서 북을 치면서 기다리는 자도 1만여 명이나 되었다고 전한다.

왕건이 궁예를 몰아내고 왕위에 오르는 과정을 담고 있는《고려사》의 이 이야기는 왕건이 주위 사람들의 집요한 설득에 어쩔 수 없이 나섰다고 변명한다.

 

그러나 이미 1만여 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궁문밖에 모여 있었다는 부분,

 

또한 왕창근이라는 중국 상인이 시장에서 산 거울에‘궁예가 몰락하고 왕건이 왕이 된다’는 요지의 글이 새겨져 있었다는 기록 등은

 

오히려 궁예를 몰아낸 것이 치밀한 계획 아래 추진된 쿠데타였다는 인상을 짙게 드리운다.

 

왕건 파의 주도 면밀한 계획에 의한 왕위 찬탈이었을 가능성이 농후하나,이후 역사가들은 왕건에게 겸양의 옷마저 입혀주었다.

왕건은 918년 6월 철원의 포정전에서 즉위하여 국호를 다시 고려(高麗)로 바꾸고 연호를 천수(天授)라 했다.

 

왕위에 오르기는 했으나 풀어야 할 숙제가 많았다. 우선 즉위 초 궁예를 추종하는 세력들의 반란이 끊이지 않았고,심지어 견훤에게 투항하는 세력들도 적지 않았다. 또한 밖으로는 점점 강대해지고 있는 견훤과도 맞서야 했다.

우선 왕건은 자신의 근거지인 송악으로 도읍을 옮긴 뒤 호족 세력들의 지지를 확보하기 위해 적극적인 대책을 세워나갔다.

 

각 지방의 유력한 호족들의 딸과 정략적으로 혼인했으며,각지방의 호족과 그 자제들을 우대하는 정책을 펴나갔다.

최대의 적은 후백제의 견훤이었다.

고려는 당시 전성기를 누리던 후백제와의 군사적 대결에서 대체적으로 열세를 면치 못하고 있었다.한편 신라에 대해서는 친화정책을 썼다. 이미 그다지 위협적인 존재가 되지 못했던 신라가 스스로 귀부하기를 유도하던 중

신라의 친 고려정책에 불만을 품은 견훤이 경주로 진격하여 친고려 주의자인 경애왕을 살해하고 경순왕을 세우는 사건이 발생했다.

 

왕건은 직접 기병 5,000 을 거느리고 대구 공산에서 백제군과 맞섰으나 백제군에 포위되었다가 신숭겸의 희생으로 겨우 목숨을 건질 만큼 크게 패했다.

그러다 930년 고창 지방에서 고려의 유금필이 견훤의 주력부대를 대파함으로써 비로소 군사적 우위를 차지하게 된다.

 

이후 935년 후백제의 왕실 내분으로 축출된 견훤이 귀부하고,그 해 10월 신라왕마저 귀순한 뒤 936년 마침내 후백제를 쳐서 후삼국통일을 이루었다.

 

우리 민족이 자주적으로 이룬,진정한 의미에서 최초의 통일국가를 탄생시킨 것이다.

통일 후 왕건에게는 지방 호족 세력들을 결집시켜 정치적 안정을 확립해야 하는 일과

 

고구려의 계승자임을 천명한 고려의 왕으로써 고구려의 옛 땅을 회복하는 일이 가장 큰 과제로 남았다.

통일을 이루긴 했지만 고려는 여전히 호족연합체적 성격이 짙었다.

 

왕건은 이들과의 유대를 위해 건국 초기부터 혼인정책을 펴 왕건의 부인은 공식적으로 알려진 것만 해도 총 29명이나 된다.

 

이러한 무차별적인 혼인정책은 확고한 지배체제를 갖추지 못했던 왕건에게 호족들의 힘을 집중시키기 위한 방편으로 유용하기는 했으나 왕건 사후 왕위계승을 둘러싼 권력투쟁을 초래했다.

 

4대 광종이 즉위할 때에도 관리들의 태반이 살육되는 등 고려 왕조 창업기 내내 왕위계승을 둘러싼 피비린내 나는 권력투쟁을 불러왔다.

한편 왕건은 호족들과의 화합을 도모하기 위해 호족들에게 왕씨 성을 내려 가족 관계를 형성하기도 했다.

이러한 화합 책과 함께 왕건은 말년까지 강력하게 북진정책을 추진하며 고구려 국토회복운동을 벌였다.그 결과 만주를 회복하지는 못했지만 서쪽으로는 청천강, 동쪽으로는 영흥 이북까지 여진족을 몰아내는 성과를 거두었다. 또한 발해의 유민들을 적극 유치하고,발해를 멸망시킨 거란과는 적대 관계를 유지했다.

병석에 눕게 된 왕건은 훈요 10조를 전해 그의 후계자들이 귀감으로 삼도록 했다.

 

훈요 10조는 왕이 지켜야 할 도리를 적은 것으로 왕건의 정치이념과 사상을 엿볼 수 있는 귀한 자료이다.

시호는 신성이며,능은 현릉으로 제1비 신혜왕후 유씨와 함께 묻혀있다.


평 가


《고려사》는 왕건에 대해 이렇게 평했다.“왕은 포부가 크고 원대 하였으며 국사를 공정하게 처리하고 상별을 공평히 하며 절약을 숭상하고 현명한 신하들을 등용하며 유교를 중히 여겼다”

 

이 책은 왕건을 출생부터 남다른 위대한 인물로 그리고 있을 뿐 아니라 왕건의 권위를 높이기 위해 그의 조상을 신라의 성골 장군과 당나라 황제로 연결시킨다.

물론 그가 통일이라는 대업을 이룬 위대한 인물인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그러나 사료에 전하는 것처럼 그렇게 완벽한 위인이었는가 하는 부분에 대해서는 현재 많은 학자들이 의심의 눈길을 보내고 있다.

왕건의 조상에 대한 기록,

왕건이 과연 농민이나 귀족 모두로부터 존경 받았던 성인이었느냐는 부분,

왕건이 시종일관 신라에 대해 우호적이었나 하는 부분,

왕건의 왕위 찬탈이 과연 정당했느냐는 부분 등에 대해서는 논란의 여지가 있다.

“현재를 지배하는 자가 과거를 지배할 수 있다”는 말에 가장 부합하는 인물이 바로 왕건일 것이다.

 

고려시대에 집필된《삼국사기》,《삼국유사》, 그리고 이들의 영향을 받은 《고려사》는 자신들의 태조 를 주인공으로 하여 후삼국시대의 역사를 서술했다.

 

왕건은 미화되고,그 미화를 위해 견훤과 특히 궁예는 철저히 악역으로 몰아간 듯한 느낌을 지울 수 없다.

 

그러한 기록들 속에서 진실을 찾고 균형을 잡으려는 노력들이 시작된 것은 그리 오래지 않다.


훈요 10조


왕건이 943년(태조 26) 세상을 떠나기 직전,

총애한 신하 박술희에게 전하여 후세의 귀감으로 삼도록 한 유훈이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 불교의 힘으로 나라를 세웠으므로 사찰을 세우고 주지를 파견하여

  불도를 닦도록 할 것.


- 도선의 풍수사상에 따라 사찰을 세우고,함부로 짓지 말 것.


- 왕위는 맏아들이 잇는 것을 원칙으로 하되,

  맏아들이 어질지 못하면 그 다음 아들에게 전해주고,

 그 아들도 어질지 못하면 형제 중에서 여러 사람의 추대를 받은 자에게 전해줄 것.


- 우리나라와 중국은 지역과 사람의 인성이 다르므로

  중국 문화를 반드시 따를 필요가 없으며,

  거란은 짐승과 같은 나라이므로 그들의 의관제도는 따르지 말 것.


- 서경을 중요시 할 것.


- 연등회와 팔관회를 성실하게 열 것


- 차령산맥 이남과 공주 강 밖의 사람들은 쓰지 말 것.


- 관리들의 녹봉을 함부로 가감하지 말고,농민들의 부담을 가볍게 할 것


- 왕의 근심이 없을 때에는 경계하고,옛 일을 거울삼아 오늘을 경계할 것.



한편 이 훈요 10조가 조작된 것이라는 주장도 있는데,

특히 문제가 되는 부분은 ‘차령산맥 이남과 공주 강 밖의 사람들은 쓰지 말라’는 내용이다.

왕건이 정말 이런 말을 남겼는지,아니면 조작된 것인지는 아직 분명치 않다.

作成者 黃圭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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