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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봄비에 젖어서 길을 걸으며 나혼자 쓸쓸히 빗방울 소리에 마음을 달래도 외로운 가슴을 달랠 길 없네 한없이 적시는 내 눈위에는 빗방울 떨어져 눈물이 되었나 한없이 흐르네 봄비 나를 울려주는 봄비 언제까지 내리려나 마음마져 울려주네 봄비 외로운 가슴을 달랠 길 없네 한없이 적시는 내 눈위에는 빗방울 떨어져 눈물이 되었나 한없이 흐르네 강한 쏘울 풍의 호소력 짙은 박인수의 목소리가 인상적인 노래이다. 신중현이 덩키스 그룹을 해체하고 퀘션스 그룹을 결성하였는데, 그 퀘션스의 음반에 수록되었다. 그리고 이 노래는 이 보다 먼저 덩키스의 싸이키 델릭을 표방한 연주로 부산 출신의 가수 이정화씨에 의해 먼저 취입되었다. 70년 5월 유니버샬 레코드제작- KLH 15 신중현이 이끄는 사이키델릭 밴드퀘션스(밴드 반주 + 객원 가수의 노래를 모태로 하는 일종의 프로젝트 밴드)의 앨범 "여보세요/그대는 바보(신중현 작편곡집)"에서 공식 데뷔한다. 이앨범에서 그는 "여보세요", "기다리겠오", "봄비" 등 세곡을 불렀는데 특히 "봄비"에서의 그의 목소리는 파워 넘치는 거칠고 투박한 질감의 맛깔스러운 보이스를 보여주면서 한국에서 '소울 가수'라 불리는 한 공식에 가장 잘 부합하는 보컬리스트가 된다. 이시기가 가수 박인수가 태어나 처음으로 사람들에게 주목받고 사랑도 받은 시기였다. 그는태생적으로 슬픔의 영혼을 갖고 태어났다. 한국전쟁 때 고아가 된 그는 어린 시절 미국에 입양된 후 귀국했으나 한국과 미국 어디에도 정을 붙일 곳이 없었다. 그는 두차례의 결혼 실패,95년 후배 연예인들과 대마초로 구속되었으며 현재 저혈당 등으로 투병하는 등 불행한 삶의연속이었다.
흑인보다 더 한 흑인의 영혼을 지닌 가수 박인수! "인생은 참으로 미쳐버리게 허무한 것이구나......" * 올해 62세의 박인수씨는 현재 경기 고양시에 있는 노인요양시설 ‘행복의 집’에서 치매 증세에 시달리며 힘들게 살고 있다는 소식이다. 한국 가요 사상 가장 소울훌한 목소리와 창법을 가진 가수, 박인수. 신중현씨의 곡 "봄비"를 완벽한 소울 창법으로 불러 우리를 매료시킨 가수. 박인수. 큰 키에 독특한 남성다운 마스크를 가진 가수, 박인수. 내 사단 최초의 남자 가수 박인수가 절창하던 그 모습을 영영 잊지 못 한다. 두 손으로 뭔가 쥐어 짜 올리는 듯한 특유의 무대 매너, 거기에 완벽한 흑인 영어 발음 등 박인수는 그야말로 한국화된 흑인이었다. 그와 맞닥뜨린 곳은 미 8군 군인들을 상대로 하는 이태원 입구의 클럽 ‘NX-1’이었다. 뭐 하는 사람이냐고 물었다. “소울(soul) 음악을 부르는 사람”이라는 답이 금방 돌아 오는데, 자신감이 느껴졌다. 템프테이션즈의 ‘My Girl’과 오티스 레딩의 ‘Dock Of The Bay’ 같은 곡은, 한 번 불렀다 하면 그야말로 흑인이 울고 갈 정도였다. 거기에다 플래터스, 샘 쿡, 레이 찰스 등 흑인 가수의 노래라면 못 하는 게 없었다. 바로 그날 저녁 무대에 세웠다. 그런데 그 클럽은 원래가 백인 클럽이어서 흑인들은 정 원한다면 문간에 서서 음악을 들을 수 밖에 없었다. 흑인 한 명이 문간에 붙어 음악을 훔쳐 듣고 있는 게 보였다. 그런데 그 자가 노래를 듣다 말고 갑자기 밖으로 뛰어 나가는 것 아닌가. 온통 새까맣게 보였다.
그의 말을 듣고 우르르 몰려 온 흑인 친구들은 박인수의 ‘모션’ 하나 하나에 박수를 치고 난리였다. 게다가 박인수가 흑인 특유의 은어(slang)를 몇 마디 구사하자 그들의 흥분은 극에 달했다. 그러나 거기는 백인 클럽. 노래를 끝내자 마자 지배인이 오더니 당장 나가달라는 것이었다. 나는 그 때 미국의 위선을 절감했다. 나는 박인수를 연세대 앞의 내 사무실 ‘언더 그라운드 파라다이스’로 데려갔다. ‘봄비’만 갖고 1주일 내내 연습시킨 뒤, ‘ 펄’과 김추자의 히트곡을 섞어 음반을 한 장 냈다. 뒤이어 시민회관에서 가진 무대는 그야말로 열광의 도가니였다. ‘봄비’ 후렴 부분에서 무릎을 꿇고 땅을 치며 뽑아 올린 절창에 공연장이 떠나갔다. 국내 최초의 소울 무대였다.
아마 어릴 적 기지촌에서 자라 그 곳 무대에서 봐 둔 듯 했다. 지금도 사람들에게는 박인수 하면 ‘봄비’다. 미 8군이 철수하고 난 뒤에도 박인수를 주변에 있던 비공식 무대에 데리고 나갔다. 생계를 위해 어쩔 수 없이 가졌던 6개월간의 무대였는데, 흑인들은 그의 언행 하나 하나에 죽고 살았다. 요즘 흑인들이 여대생들한테 인기가 있다던데, 당시 ‘흑인보다 더 한 흑인의 영혼’을 지닌 박인수에게 쏟아졌던 열광은 아마 지금보다 더 했을 거라 믿는다. 어떤 일도 서슴지 않는 여자들을 실제로 보고 많이 놀랐다. ‘브레이크가 없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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