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국 춘천의 유적지를 찾아서)
시집 발간을 위한 두 번째 탐방 계획
* 탐방일시: 2026.6.24.일(수요일)
- 09:30까지 춘천문화원 뒤 집결, 반장님 봉고차에 탑승
* 탐방 장소(코스):
1. 장절공 신숭겸(壯節公 申崇謙) 묘역
- 춘천시 서면 신숭겸로 272-21
2. 한백록 장군 묘역
- 춘천시 서면 금산리 산64
3. 우두산 충열탑
- 춘천시 우두동 산1
4. 소양2교 교차로 소양아트서클
* 중식(이비가 짬뽕 춘천점)
5. 춘천대첩 기념평화공원
6. 호반 자전거도로 도보 이동
7. 에티오피아 한국전참전기념관 및 기념비
* 평가회 겸 커피타임(이디오피아집)
* 문화원 이동 후 해산
첨부: 탐방지 관련 자료 2부
신장절공 묘역 申壯節公 墓域
<요약>
신장절공묘역은 강원도 춘천시 서면 방동리에 있는 고려 전기 무신 신숭겸의 묘이다. 공산전투에서 태조를 대신해 전사하자, 시신을 공이 거주하던 춘천에 안장하였다. 후백제군이 신숭겸의 머리를 잘라 돌아가자 왕건이 공의 두상을 만들게 하여 매장하였는데, 두상이 금으로 만들어졌다고 전해진다. 신숭겸의 충절과 절의, 자취를 살펴볼 수 있는 유적이다.
<건립경위>
고려 개국공신 신숭겸(申崇謙, ?~927)은 공산동수(公山桐藪, 현재 대구 팔공산 부근)에서 후백제군과 싸우다가 전사하였다. 태조(太祖, 877~?)는 그의 죽음을 슬퍼하여 장절(壯絶)이라는 시호를 내리고 지묘사(智妙寺)를 창건하여 명복을 빌었다.
세조 때 강원도 관찰사 손순효(孫舜孝)가 작성한 「장절공유사(壯絶公遺事)」에 공산전투(公山戰鬪)에서 태조 대신 싸우다가 전사한 신숭겸을 왕건으로 알고 후백제군이 머리를 잘라 돌아가자, 태조가 목수에게 두상(頭像)을 만들게 하여 장사 지내고 원찰(願刹)을 세웠다고 전한다.
전라도 곡성 출신으로 알려진 신숭겸의 묘가 춘천에 조성된 경위는 분명치 않은데, 당시 광해주(光海州, 현재 춘천)로 옮겨 살던 중 전사하여 그의 거주지에 안장되었던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신숭겸 묘는 봉분이 3개가 있는데, 장절공신도비(壯節公神道碑)의 비문에 의하면 두상을 금(金)으로 만들어 몸체와 합하여 안장하였기 때문에 도굴을 방지하기 위해 여러 개의 봉분을 조성했다고 하고 혹은 부인 묘라고도 한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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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장공 한백록(忠壯公 韓百祿) 묘역
충장공 한백록 묘역은 한백록 장군이 잠든 곳으로 강원특별자치도 문화유산자료로 지정되었다. 한백록 장군의 묘 앞에는 그의 사내종이었던 득충의 묘도 함께 자리 잡고 있다. 임진왜란 때 38세의 젊은 나이로 전사한 한백록 장군의 시신은 사내종이었던 득충이 수습했다. 득충은 홀로 한백록 장군의 시신을 지게에 지고 남해에서 춘천까지 걸어서 올라가 장사를 지냈다. 득충의 충정에 감탄한 한백록 장군의 후손들은 득층이 죽자 그의 묘를 한백록 장군 묘 앞에 만들었다.(다음 백과사전)
강원도 춘천시 서면 금산리에 위치한 충장공 한백록장군의 묘는 임진왜란 때 활약한 조선시대의 무신 한백록 장군의 묘입니다. 한백록장군은 1555년 춘천에 태어나 1580년 무과에 급제하여 진잠현감 지세포만호 부산진첨사를 역임하였으며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옥포해전에 참전하여 적선 30여척을 격파하여 옥포해전을 승리로 이끌었습니다. 이후 미조항 전투에서 일본군의 총탄에 맞아 전사하였습니다. 이후 1605년 선무원종공신 이등으로 책록되었고 1808년 병조판서로 추증된 후 1811년 충장공이라는 신호가 내렸습니다.
한백록장군의 묘는 조선시대의 전형적인 묘 형태로 입구 쪽에 신도비와 정문이 있고 묘 앞에 최근에 세운 비석과 상석 망주석이 있고왼쪽에 1657년에 세운 묘갈이 있습니다. 1657년에 세워진 묘갈은 두동강이 났던 것을 다시 붙여 세운 것입니다. 그리고 한백록장군의 묘역에서 서쪽으로 약 1.5킬로미터 떨어진 지점에 한백록장군을 기리는 사당이 세워져 있습니다. 한백록장군의 묘는 강원도문화재자료 제 131호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출처] 임진왜란 때 활약한 한백록장군의 묘- 춘천 한백록묘역 및 정문|작성자 seadjk
[춘천 문화유산 얼마나 알까?] 충렬탑(忠烈塔)
기념탑(비)은 국가나 지방정부에서 특정한 사건이나 장소, 일자를 기념하기 위해 세운 건축물 중의 하나다. 춘천 우두산에는 한국전쟁 당시 강원도에서 전사한 장병과 순직 경찰, 민간인의 영령을 위로하기 위해 충렬탑이 세워져 있다. 6월 6일 현충일이면 강원도지사, 춘천시장을 비롯한 각급 기관장, 사회단체장, 도민 등이 참석하여 매년 추념식이 열리고, 지역의 중요한 행사가 있을 때는 고유(告由: 어떠한 일이 생겼을 때 그 사유를 고하는 의식)의 출발지점이 되기도 한다. 그뿐만 아니라 90년대까지는 춘천지역 학교의 단골 소풍지이기도 하여 많은 이들에게 학창시절의 아련한 추억까지 간직하고 있는 공간이다.
한국전쟁 전사자 추념비는 대개 1950년대 지방행정 책임자나 군부대에 의해 충렬탑, 충혼탑(비) 등의 이름으로 건립된다. 충렬탑도 이와 궤를 같이하는데 건립과정을 살펴보면 1955년 최헌길 강원도지사, 송요찬 제3군단장, 최홍희 제29사단장 등이 탑 건립추진위원회를 구성, 동년 1월 16일 기공식을 열고 7월 26일 탑을 완공해 제막식을 거행했다, 제막식은 7월 26일 10시 30분에 이승만 대통령, 이종림 교통부 장관, 이형근 연합참모부 총장 등 고위 인사와 유가족 등이 참석한 가운데 성대하게 열렸다. 이승만 대통령은 치사에서 “강원도민은 이 영광스러운 자리를 영원히 보존하고 유지해야 하며, 나라를 영광스럽게 하기 위해서 산 사람들이 목숨을 내놓고 이것을 보호할 책임”이 있음을 강조했다.
(왼쪽) 현재 충렬탑(출처=현충시설정보서비스), (오른쪽)1955년 충렬탑 제막식(출처=국가기록원)
충렬탑은 건평 68㎡ 부지에 기단 높이 12m, 탑 높이 12.8m 규모의 3면으로 설계되었는데 제작 책임을 맡은 최홍희 장군의 회고에 의하면 세 갓은 삼천리 금수강산, 삼각 동체는 삼천만 민족을 상징했다고 한다. 충렬탑 상단에 있는 군인상은 조각가 박칠성(朴七星,1928~2018)이 담당했는데 그는 평양미술전문학교를 나온 피난민 작가다. 미군 군수사령부 화가로 종전하면서 속초의 수복기념탑(1954, 일명 모자상), 대전 충혼탑(1956) 등을 제작하였다. 탑 정면부에 ‘忠烈塔’ 글씨는 원래 오석에 음각으로 새겨져 있던 것인데 말끔하게 갈려 없어지고 그 자리에 동판 부조 형태로 돌출한 글씨가 자리 잡았다. 이유인즉슨 1955년 건립 당시에는 최홍희 사단장이 친필로 쓰고 새겼다고 한다. 그는 태권도 명칭을 창안한 인물로 국제태권도연맹(ITF) 총재였는데 박정희 정권과 불화로 1972년 캐나다로 망명하여 시민권자가 되고, 1980년 북한에 태권도를 전파하게 되면서 친북인사가 된다. 이후 정부는 남한에서의 최홍희 관련 흔적을 지우는데 그 대상 중 하나가 충렬탑이 되면서 글씨가 바뀌게 된 것이다.
한국전쟁으로 520만 명의 인명 손실과 한반도의 사회·경제적 기반은 철저히 파괴되었다. 충렬탑은 국가를 위해 희생한 사람들을 기억하기 위한 공간이기도 하지만 비극을 반복해서는 안 된다는 선열들의 충고가 담긴 상징이기도 할 것이다.
춘천학연구소(262-51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