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제공의 ‘하늘인가 하고 보면 바다였네’*
미수 허목 선생이 나이 여든 세 살에 관악산 연주대에 올랐다, 발걸음이 마치 나는 것 같아 사람들이 신선처럼 우러러 보았다고 한다. 관악산은 경기의 신령스런 산으로 일찍이 선현들이 노닐던 곳이다. 나도 그 산에 올라 마음과 눈을 굳건히 다지고 선현들을 우러르고 싶었으나 일에 얽메여 틈을 내지 못하고 있었다.
병오년(1786) 봄에 나는 노량 강가에서 지내고 있었는데 거기서는 푸른 관악산이 한눈에 들어왔다. 그러나 산에 가보고 싶은 욕심만 컸을 뿐 뜻을 이루지 못했다.
4월 13일, 마침내 나는 이웃에 사는 이숙현 공과 말을 타고 종 네 댓 명을 데리고 관악산으로 나섰다. 10리 쯤 가서 자하동에 이르러 정자 위에 올라서 쉬었는데 정자는 신씨의 농막이었다.
시냇물이 흘러내렸으나 나무 그늘이 온 골짜기를 덮고 있어 어디서부터 흘러오는지 그 근원을 알 수 없었다. 시냇물은 정자 아래 이르러 바위를 만나 튀어 오르면서 고운 물방울을 이루었다. 그러다 깊이 고이면 푸른 웅덩이를 이루다가 흘러내렸는데, 골짜기 사이를 흘러가는 것이 마치 비단을 펼쳐 놓은 것 같았다. 언덕 위에는 철쭉 꽃이 흐드러지게 피어 은은한 향기가 바람을 타고 시냇물을 건너왔다. 이렇게 산에도 들어가기 전에 마음이 맑고 깨끗해져 흥취가 일었다.
정자에서 또 10리를 더 가니 거기서부터 길이 가팔라서 말을 탈 수가 없었다. 그래서 타고 왔던 말과 말구종을 집으로 돌려 보냈다.
지팡이를 짚고 천촌하 걸으면서 칡덩굴을 헤치고 골짜기를 지났다. 그러다가 앞서 가던 길잡이기 길을 잘못 들어 절로 가는 길을 잃어버리게 되었다. 어디가 동쪽인지 어디가 서쪽인지 분간할 수도 없는데, 날은 벌써 저물려고 했다. 길에는 오가는 나뭇꾼도 없어 물어 볼 수가 없기에 모두 어찌할 바를 몰랐다.
그때 이숙현 공이 나는 듯한 걸음으로 높은 봉우리에 올라가 좌우를 살피는 것이었다. 그러다가 잠깐 사이에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모두들 그가 돌아오기를 기다리면서 나무라는 말만 한마디씩 할 뿐이었다. 그때 갑자기 장삼을 입은 중 네댓 명이 이곳으로 내려오고 있었다. 따르던 사람들이 모두 중이 온다고 환호성을 질렀다. 아마 이숙현 공이 절을 찾아서 중들에게 우리가 있는 곳을 일러 준 모양이었다.
중을 따라 5리 쯤 가자 ‘불성암’이라는 절이 나타났다. 절은 삼면이 봉우리로 둘러싸였는데 절 앞쪽이 탁 트여 시원해 보였다. 방문을 열면 누우나 앉으나 천리 밖을 내다 볼 수 있을 정도였다.
이튿날 아침, 날이 새기도 전에 아침밥을 먹고 연주대에 오르기로 했다. 건장한 중 몇 명과 함께 가는데 그들이 이렇게 말했다.
“연주대는 여기서 십리가 넘습니다. 길이 가팔라서 나무꾼이나 증들도 오르기가 쉽지 않습니다. 나리의 기운으로 오르지 못할까 걱정이 됩니다.”
나는 이렇게 대꾸했다.
“모든 일이 마음먹기에 달렸다네. 마음이 장수라면 기력은 졸병이야, 장수가 가는데 졸병이 어찌 안 가겠는가?
그러고 나서는 절 뒤에 있는 봉우리를 넘었다. 길은 끊어질 듯 간신히 이어졌고, 그 아래 낭떠러지는 천 길이나 되는 것 같았다. 몸을 돌려 벼랑에 붙여서 나무뿌리를 번갈아 잡고 조금씩 걸음을 내디뎠다. 현기증이 날 것만 같아 감히 아래로 내려다보지 못했다. 또 큰 바위가 길을 막으면 앞으로 갈 수가 없어서 음푹한 곳을 골라 그곳에 엉덩이를 붙이고 두 손으로 바위를 붙잡고 더듬거리며 내려갔다. 바지가 걸려 찢어져도 돌볼 틈이 없었다.
이렇게 하기를 몇 차례, 드디어 연주대 아래에 이르니 벌써 한 낮이었다. 연주대를 올려다 보니 우리보다 먼저 놀러 온 사람들이 수만이었다. 낭떠러지에서 몸을 구부려 아래로 내려다보는데, 흔들거려서 떨어질 것만 같았다. 올려다 보니 머리털이 쭈뼛해져서 똑바로 볼 수가 없었다. 그래서 하인들을 시켜서 내려보지 말라고 소리를 지르게 했다.
나는 있는 힘을 다하여 엉금엉금 기어서 마침내 꼭대기에 올랐다. 꼭대기에는 널찍한 돌이 있었는데 수십 명이 앉을 만 했다. 그 바위를 ‘차일암’이라고 했다. 옛날 양녕대군이 왕위를 피해 관악산에 머물고 있을 때 이 바위에 올라 대궐을 바라보곤 했다고 한다. 그러나 날이 너무 무더워서 오래 머무를 수가 없어서 이 바위 위에 장막을 치고 앉아 있었다고 한다. 바위 귀퉁이에 오목하게 파인 구멍 넷은 아마 이런 까닭에서다.
연주대는 구름과 하늘 사이에 우뚝 솟아 있어 돌아보니 온 세상이 내 발 아래 있었다. 또 사방을 둘러보니 뭇 봉우리들이 보잘 것 없어 연주대와 견줄 만한 것이 없었다. 다만 서쪽은 끝없이 넓고 아득해서 마치 하늘과 바다가 서로 닿은 듯했다. 하늘인가 하고 보면 바다이고, 바다인가 하여 보면 하늘이었으니 누가 하늘과 바다를 분별하겠는가?
오른쪽으로는 한양의 성과 궁궐이 밥상처럼 뚜렷하게 보였다. 소나무와 잣나무 숲이 빙 둘러 있는 곳은 아마도 경복궁의 옛터일 것이다. 양녕대군이 여기에서 서성거리며 궁궐을 바라보던 마음을 오랜 세월이 지났지만 상상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나는 바위에 기대어 ‘시경’에 나오는 노래 한 구절을 읊었다.
산에는 개암나무 습지에는 감초
어느 누구를 그리는가. 서쪽의 고운 임이라네.
저 고운 임은 서쪽 사람이라네.
그러자 이숙현 공이 말했다.
“그 노래에는 임금을 그리워하는 뜻이 담겨 있군요. 예나 지금이나 그 마음이 어지 다르겠습니까?”
내가 덧붙여 말했다.
“임금을 그리워하고 극진히 여기는 마음은 사람으로서 마땅히 지켜야 할 도리입니다. 그것은 예나 지금이나 다를 것이 없지요. 내 나이가 이제 예순 일곱이니 미수 선생이 산에 올랐을 때에 비하면 열여섯 살이나 모자랍니다. 그런데 미수 선생의 걸음은 나는 듯했다 하지만, 나는 힘에 부치고 숨이 차서 갖은 애를 썼답니다. 학문의 성취가 옛사람과 다른 것은 이상할 것이 없습니다만 기운이 이렇게 다른 것은 어찌 된 일입니까? 제가 하늘의 도움으로 여든 세 살까지 가마를 타고서 이곳 연주대에 다시 올라 엣사람의 발자취를 따를 것입니다. 그대는 이 말을 기억해 두시구려.”
그러자 이숙현이 말했다.
“그때는 저도 따라 와야지요.”
이숙현 공의 나이는 예순다섯이다. 둘은 크게 웃고는 이야기를 마쳤다. 이날 불성암에 돌아와서 늦잠을 자고 이튿날 노량의 집으로 돌아왔다.
-유관악산기 遊 冠岳山記-
*채제공은 남인 정치가로서 정조 때 영의정을 지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