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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 수필강좌(일반)

수문회원 수필 - 채영순의 '그 남자'

작성자이동민|작성시간26.06.12|조회수40 목록 댓글 0
               그 남자
                         채영순


“그 남자라…….”
 의혹의 눈초리를 보낼지도 모른다. 미심쩍게 여길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다고 이 야릇한 감정을 말로 설명하기는 어렵다. (



 오늘도 그렇다. 코 치료는 4주가 기본이라는 의사의 권유가 없었으면 삼복더위에 얼굴을 익혀 가며 왕복 1시간 거리를 걷지 않았을 것이다. 그랬다면 응당 예상치 못한 곳에서 이 남자와 마주치는 일 또한 없었을 것이다. 


 집과 병원 사이의 중간 지점에 큰 사거리가 있다. 후끈 달아오르는 열기를 참으며 신호가 바뀌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순간 무엇에 홀린 듯 뒤를 돌아보게 되었다. 거기에 이 남자가 유령처럼 서 있었다. 졸지에 눈도장을 찍게 된 남자는 물론 흠칫 놀라기는 나도 마찬가지였다. 거울 속에 비친 얼굴이 어머니와 점점 닮은꼴이 되어 가는 사실에 소스라치듯 말이다. 


 일 없는 사람으로 둘째가라고 하면 서러워해야 할 나지만 이 남자도 나 못지않아 보인다. 일부러 내 꽁무니를 따라다니지 않은 다음에야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마주치기가 쉬운 일인가. 그것도 보통의 남자들이 한창 바쁠 시각에 말이다. 집 주변이라면 모를까. 숫제 병원 길까지 동행한 셈이니 더 이상 미적거릴 일은 아닌 듯싶다. 


 이 남자와의 첫 대면은 지난해 겨울 단지 내 헬스장에서였다. 러닝머신 차례를 기다리며 홀을 한 바퀴 둘러보고 있었다. 그때 역기를 들어올리고 있는 남자의 축축한 셔츠가 눈에 들어왔다. 나도 모르게 근육질 몸매를 힐끔 훔쳐보게 되었다. 잠시 후 이 남자가 내가 서 있는 쪽으로 다가오더니 별일 아닌 일에 이러쿵저러쿵 참견을 하였다. '관심 있는 여자에게는 일부러 짓궂게 군다고 했겠다.' 속으로 호박씨를 까며 수굿하게 있었으면 좋았을 것을. "선은 이렇고 후는 이런데 시방 무슨 소리를 하는 것이냐?"라며 대거리를 하고 말았다. 


 사람들과 부대끼는 것을 피해 헬스장을 그만 두고 다 늦은 저녁에 운동장을 돌았다. 탁 트인 시야에 가슴까지 후련해서 숨을 깊이 들이쉬었다. 운동화끈을 질끈 졸라매고 흙 위를 자분자분 걷고 있는데 저만치서 예의 이 남자가 나를 따라오고 있었다. 이마를 반쯤 가린 머리카락이 산뜻해 보였다. '내 뒷조사만 하고 다니나, 어떻게 여기까지 쫓아왔지?' 괜스레 발걸음을 빨리 하였다. 


 집을 조금 벗어난 곳에 사람들의 발길이 잦지 않은 산책로가 있다. 숲이 우거져 있어 청량한 바람이 인다. 보다 안전한 나만의 공간이 되어 줄 것으로 믿어 의심치 않았다. ‘산다는 건 무엇일까?’ 모처럼 사색에 잠겨 걷고 있는데 맞은편에서 이 남자가 허우적허우적 다가오고 있었다. 심오한 철학이고 뭐고 하도 놀라서 그만 발을 헛디디고 말았다. 도대체 내 스케줄을 낱낱이 꿰고 있지 않다면야 벌건 대낮에 그것도 호젓한 장소에서 맞닥뜨린다는 게 가당키나 한 일인가.


 멍한 눈으로 혼자 중얼거릴 때에는 자기만의 세계에 몰입해 있는 것 같고, 다른 사람들과 스스럼없이 이야기를 나눌 때에는 온전해 보이기도 했다. 아침에 출근하여 저녁에 퇴근하는 일반적인 남자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밤에 일을 하러 가는 것 같지는 않았다. 이것이 나만의 공상이거나, 숨통을 조여 오는 더위 때문에 일어난 일시적인 착각이라면 얼마나 남세스러운 일인가. 요는 이 남자가 내 뒤꽁무니를 따라다닌다는 것이고, 그 사실에 내가 민감하게 반응한다는 것이다. 
  
 나는 땅바닥을 보거나 먼 산을 쳐다보며 걷는 편이다. 옷깃을 스치는 사람조차 곧잘 놓친다. 그런데 이 남자와는 장소를 불문하고 수시로 눈도장을 찍으니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멀쩡한 허우대에 흰 운동화, 검은 뿔테 안경, 추레한 티이 셔츠, 추리닝 바지 차림이다. 꾀죄죄한 내 옷차림과 피장파장인 셈이니 잘만 살피면 나도 알지 못하는 나의 실체에 한 발짝 다가서게 될지도 모른다. 대체 이 남자와 나의 아득한 연이 어디에서 어디까지 잇닿아 있기에, 아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모르는 것도 아닌 기이한 오늘을 있게 하였는가 말이다. 



 빡빡한 스케줄을 소화하는 사람들 못지않게 그날이 그날인 사람들에게도 나름대로의 생활 리듬이 있다. 여태 행동반경이 비슷한 데서 오는 우연 내지 우연을 가장한 수작이었는지 모르지만 나와 동선이 거의 일치한다는 전제 하에 머리를 굴려 보면 대충 이런 결론이 나온다. 경제력 상실로 위상이 오그라들어 가정 내에서 설 자리가 없거나, 잃어버린 건강을 되찾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중이거나 뭐 그런 거 말이다. 그러나 이것저것 대입해 봐도 이 남자의 얼굴이 너무 태평해 보인다. (10)


눈만 뜨면 부딪히고 만나는 게 사람이다. 그 사람들이 매양 낯설다. 경계의 눈초리로 서로 훑어보기도 하고, 안면이 있어도 모르는 체하기 일쑤다. 바로 옆집 처녀와 나는 길에서 마주치면 빤히 쳐다보기만 한다. 두 집 건너 아들은 아예 고개를 숙이고 외면한다. 몇 번 말을 건네 보기도 하였지만 그도 열적어서 그만 두었다. 화려함과 삭막함이 공존하는 도회에서는 사람이 그 공간을 채우는 장치이거나 구색을 갖추기 위해 가져다 놓은 진열품 같을 때가 있다. 


 내 머릿속이 복잡하게 돌아가는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신호등에 초록불이 들어오자 남자가 나를 앞질러 걷는다. 사람의 뒷모습은 거짓말을 못한다던가. 젖은 셔츠는 외딴섬처럼 고립되어 가는 풀죽은 아버지들의 초상인 듯. 비어져 나온 군살은 일에 파묻혀 젊음을 다 보내 버린 가장들의 허망한 현실인 듯, 흐트러진 머리칼은 벼랑 같은 일터에서 어디론가 사정없이 내동댕이쳐진 중년 남성들의 쓸쓸한 뒷모습인 듯하다. 


 나만의 은밀한 상상을 계속 해야 할지 그만두어야 할지 잠시 고민에 빠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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