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평 조씨의 ‘병자일기’ *
정축년(1637) 4월 5일
맑았다. 천계(조씨의 큰 아들로 13세에 죽었다.) 제사를 지내고 나니 슬픈 마음이 더욱 그지 없다.
정축년 10월 2-3일
맑았다. 별좌(둘째 아들로 별좌 벼슬을 했다. 후손을 남기지 않고 25세에 죽었다.)의 제사를 지내니 나의 설움이 끝이 없다. 어찌 다 이르겠는가? 제사를 지낼 사람도 없어서 남진사와 조창하가 참석했다. 선주(죽은 사람의 위패)를 보니 숨이 막히는 듯하고 아득하다. 세월이야 흘러가지만 어느 때에나 잊을 수 있을까? 어여쁘던 얼굴이 생생하며 그리움 일만 생각하면 마음이 쪼개지고 베이는 듯하다. 아, 꿈에나 보려므나. 조심하고 눈물을 흘리며 지내나 꿈에도 한번 또렷이 보이지 않으니 제 잘못이로다. 저인들 영혼이 있다면 늙은 어미를 생각하지 않으랴마는 이승과 저승이 달라서 그런가 생각하니 더욱 서럽구나. 벌써 다섯 해가 다 되어 가니, 흐르는 세월이 누구를 위하여 머물까.
무인년(1638) 4월 5일
맑았다. 천계의 제삿날이라 제사를 지내고 나니 새삼슬운 마음이 그지 없다. 내 자식들은 사람 일을 알만하면 죽었으니 더욱 서럽구나. 어려서 죽은 자식들은 생각도 아니한닥 하지만 두 아들은 열 세 해, 스물다섯 해 어미와 자식이 되어 살뜰히 사랑하며 살다가 죽었으니------, 알지 못 하겠구나. 내가 무슨 죄를 지어 이렇게 간장을 태우게 하는가. 어느 날 어느 때에나 마음이 누구러져 풀릴까? 내가 죽은 후에야 잊을까?
무인년 10월 3일
별좌의 제사를 지내니 벌써 죽은 지가 여섯 해다. 제 양자도 한 번 제사를 못 지내니, 저나 나나 무슨 죄로 자식이 없던가.
기묘년(1639) 4월 5일
맑았다. 천계의 제삿날이라 제사를 지내니 어찌 속절없이 일찍 죽어 이렇게 내속을 태우는가. 내 나이 벌써 예순 여섯이요. 우리 부부가 함께 산지 마흔 아홉 해라. 자식이라도 있으면 우리 일이 무던할텐데------. 늘 두렵고 무서워서 죽게 해달라고 마음 속으로 빈다. 영감(남이현. 병자호란 때 소현세자를 모시고 연경에 갔다가 일년 반 만에 돌아왔다.)은 오늘 주강(조선 시대에 임금을 모시고 하는 강의)하고 돌아 오셨다.
기묘년 10월 3일
맑았다. 별좌의 제사를 지내니 계유년(1633)의 일이 다시 생각나 슬픈 마음을 어찌 말로 다하랴. 어느 사이에 벌써 일곱 해나 되었는가? 젊은 사람의 신주 셋(아들과 며느리 둘)을 두고 제사를 지내게 되니 서러움을 어찌 다 말할 수 있으랴. 불쌍하다 내 아들, 아까울사 내 자식, 꿈에도 아니 보이니 나를 잊었는가? 다시 누구의 집의 자식이 되었는가. 어찌 한 번도 아니 보이는가? 살아서 서러운 마음을 매일 품고 지내나 늘 즐거운 사람같이 지내니 제 영혼이 나를 잊었는가? 나를 생각하기는 하는가? 더욱 서러워한다. 요사이에는 며느리와 함께 있으니 마음이 든든하고 죽은 자식인 듯 반갑다. 삼년상을 마치고 지식이나 낳으면 보려 하되, 내 기력이 날로 약해지니 어찌 이러고도 오래 살아 있으랴.
경진년(1640) 4월 5일
맑았다. 천계의 제삿날인데, 슬프고 서러운 생각이 어찌 내 마음속에서 떠난 적이 있으랴. 하루하루 세월 흘러가는대로 지낸다. 중소(양 손자) 내외가 내 자식에게도 잘 할 것이니. 이렇게 든든하게 여기고 하는 일없이 날을 보낸다.
85. 이주의 ‘닭이 울면 새벽인 줄 알고’
금골산은 진도읍에서 서쪽으로 20리 떨어져 있는데, 봉우리가 높고 사방이 모두 바위로 되어 있어 마치 연꽃처럼 보인다. 서북쪽은 바다에 닿아 있고, 서남쪽은 산줄기가 꿈틀거리듯 뻗어 있다. 남쪽으로 2리 쯤 가면 간재가 되고, 동쪽으로 2리 쯤 가면 용장산이 되며, 벽파도에 이르러 멈춘다.
산 둘레가 30리 쯤 되는데 산 아래에는 해원사라는 큰 절이 있다. 절에는 9층 석탑이 있고, 탑 서쪽에는 말라버린 우물이 있다.
산 위에는 세 개의 굴이 있다. 그종 가장 아래쪽에 있는 것이 ‘서굴’로 이 굴은 산 서쪽에 있으며 어느 때 만들어졌는지 알 수 없다. 최근에 일행이란 중이 향나무를 깎아 16나한상을 만들어 그 굴에 모셔 두었다. 굴 옆에 예닐곱 칸 되는 절이 있는데 중들은 이곳에 살고 있었다.
맨 위쪽에 있는 것은 ‘상굴’인데 산 동쪽에 있다. 이곳은 가파른 언덕과 낭떠러지가 몇 천 길이나 되는지 알 수 없어 원숭이처럼 재빠른 동물도 지나기 어려워 보인다. 그러나 동쪽으로는 더위잡아 오르려고 해도 아주 위험해 보였다.
가파른 언덕을 따라 돌멩이를 굴리며 한 걸음 한 걸음 조금씩 나아가 1리쯤 가면 돌로 된 봉우리가 우뚝 솟아있다. 봉우리까지 날아서 오를 수 없기에 돌로 열세 개의 계단을 만들어 놓았다. 내려다 보면 바닥이 보이지 않아 마음과 눈이 모두 아찔하여 현기증이 일어났다. 이렇게 계단을 올라가면 꼭대기에 이른다.
꼭대기에서 동쪽으로 돌아 서른 걸음쯤 내려가면 바위 위를 오목하게 파서 발을 붙이고 오르내리도록 만들어 둔 것이 열 두 개가 있다. 이것을 밟고 지나 열 걸음쯤 내려가면 상굴이 나온다. 상굴에서 북쪽에 있는 바위 쪽으로 대여섯 걸음 옮기면 마치 비탈진 바위가 허공에 걸려 있는 것 같다. 여기에서 동쪽을 향해 곧바로 여덟아홉 걸음 내려가면 동굴이다.
부엌으로 쓰던 동굴의 앞쪽은 비바람에 무너져 버렸다. 굴 북쪽에 있던 비스듬한 바위를 쪼아 미륵불을 만들었다. 옛날 군수였던 유호지라는 사람이 만들었다. 이를 두고 절에서는 이런 이야기가 전해 온다.
“옛날에는 산에 신비한 일이 많았다. 매년 산에서 신기한 빛이 뿜어져 나오기도 하고, 유행병이 돌거나 홍수와 가뭄이 들었을 때도 기도를 드리면 반드시 감응이 일어났다. 그런데 이 미륵불을 만들고 난 후부터 산이 빛을 뿜는 일이 없어졌다. 유호지가 감동과 같은 사람이 아니었다면 틀림없이 그는 귀신을 물리치는 사람이었을 것이다.”
이야기가 허무맹랑하지만 들어 둘 만 하다.
무오년(1498) 가을에 죄를 지어 이 섬에 귀양왔다. 그리고 그 해 겨울에 이 산에 세 개의 굴이 있다는 것을 알고 마음 속에 담아 두었다. 그로부터 4년이 지난 임술년 가을에 나라에서 왕세자를 책봉하는 경사가 있어 사면령을 내렸다. 하지만 무오년에 죄를 입은 벼슬아치들은 사면되지 못했다. 나는 탄식하면서 이렇게 중얼거렸다.
“사람이 세상에 나면 충효를 다 할 것을 다짐한다. 그런데 지금 나는 죄가 무거워 조정에서 버린 사람이 되었구나. 신하 노릇을 하고 싶지만 임금께 충성을 다 할 수도 없고, 자식노릇을 하고 싶지만 효를 다할 수도 없다. 형제, 친구, 처자식이 있지만 그들과 즐거움도 나눌 수가 없구나. 그러고 보니 나는 사람 축에도 끼지 못하는구니.”
이런 생각을 하니 나는 세상을 살아 갈 마음이 없어졌다.
하루는 아이에게 술 한 통을 들게하고 금골산 서쪽 굴로 갔다. 거기서 ‘언옹’과 ‘지순’이라는 중을 데리고 곧장 올라 상굴에 이르렀다. 불당과 부엌 두 칸으로 나뉘어졌다. 굴은 비워 둔 지 오래 되었고, 살고 있는 사람도 없어 낙여 문을 덮고, 먼지와 모래가 방에 가득했다. 게다가 산바람이 바다안개가 스면드니 음습하여 머무를 수가 없었다. 나는 먼저 먼지를 쓸어내고 벽과 창을 바르게 했다. 그러고 나서 나무를 베어 아궁이에 불을 지피고 문을 열어 바람이 통하게 하였다.
낮에는 밥 한 그릇을 먹고 아침저녁으로는 차 한 잔씩을 마셨다. 닭이 울면 새벽인 줄 알고 밀물과 썰물을 보고서 해를 짐작했다. 이렇듯 마음 가는데로 편한 생활을 했다. 그리고 부처의 공덕을 찬양하는 글을 다섯 편 지어 지순으로 하여금 밤마다 새벽 4시까지 외우게 했다. 누워서 그 소리를 들으니, 그것 또한 멋진 일이다
이렇게 보름이 지났다. 진도 군수 이세진이 술을 가지고 와서 위로하며 말했다.
“이곳은 너무 위험하니 빨리 내려가시도록 하시지요. 만약 증들과 함께 심심풀이라도 하시려면 서쪽 굴이 좋습니다.”
최탁경과 박이경은 “듣자니 그대가 위험한 상굴에 머물고 있다는데, 이것을 하늘의 명을 따르는 군자가 할 일이 아닙니다.” 라는 내용을 담은 편지를 보내기도 했다.
손여림은 서울에서 임금의 명을 받들고 백성들의 어려움을 살피러 왔다가 서울 친구 두 세 명의 뜻을 전하면서 나를 나루랐다. 나는 그의 말을 듣고 이렇게 대꾸했다.
“벗인 바른 길을 가도록 나무란다는 것이 헛말이 아니구니. 내가 어리석어 벼슬살이가 구절 양장보다 더 위험한 줄 모르고 쉬지 않고 가다가 내 수레를 망가뜨렸소. 자금 이 굴에 있으면서도 위험한 줄 알지 못하니 만약 잘못 되어 어버이께서 주신 몸을 상하게 한다면 이보다 더 한 불효가 어디 있겠습니까.”
나는 지순과 언옹 두 중에게 인사를 하고 산을 내려가려고 했다. 그들이 나를 배웅하기 위해 해원사 석탑 아래까지 따라와서 말했다.
“중은 구름처럼 이리저리 떠돌아 다니며 일정하게 머무르는 곳이 없습니다. 선비께서 머지 않아 나라의 은혜를 입고 떠날 것이니 다시 금골산에 오실 일이 있겠습니까? 부디 한 말씀만 써 주셔서 이 산을 명예롭게 해주십시오.”
그 말을 듣고 나는 이렇게 말했다.
“자네 말을 들어보니 글을 지어야 겠군. ‘동국여지승람’을 살펴보니 이 섬에서 이름 난 산 중에 금골산이 빠져 있고, 절에 대한 기록을 찾아보더라도 새 개의 굴이 빠져 있더군. 이는 그때 잘못 기록한 것인데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네. 이제 자네들 말대로 금골산에 대한 글을 써서 뒷날 이 글을 보는 사람들이 이 섬에 금골산이 있다는 것과 산속에 세 개의 굴이 있음을 알게 하리라. 자네들과 내가 이 굴에서 함께 머무는 것도 이제 먼 옛일이 도리 테지. ”
두 사람이 예 예 하고 답했다. 나는 상굴에 있으면서 지은 몇 편의 시를 함께 실어 ‘금곡록’이라 하고 서쪽 굴에 보관하게 했다.
이 산에 23일 동안 있었다.
- 금골산록 에소-
* 이주
무오사회 때 진도로 유배되었다. 진도에 유배생활을 하면서 금골산에 대한 글을 남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