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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 수필강좌(일반)

해외수필 - 다이아나 에셀의 '인생은 제대로 살아야 할 것'

작성자이동민|작성시간26.06.14|조회수46 목록 댓글 0

  다이아너 애실의 ‘인생은 제대로 살아볼만한 것’

     (이 글은 그의 나이 90세 때 쓴 회고록에 있습니다.)

 

 늙어가는 것에 관한 책을 꼭 우는소리로 끝내야 하는 것은 아니지만 당당하게 끝낼 수 없는 노릇이다. 배워야 할 교훈도, 새로이 발견할 사실도, 제시할 해결책도 없다. 나를 보면 그저 몇 가지 두서없는 생각만 떠오르는 것이다. 그런 생각 중의 하나는, 여기까지 와 되돌아보니 인간의 삶이란 우주적 견지에서 보면 눈 한 번 깜박이는 것보다 짧아도 그 자체로 보면 놀랍도록 넉넉해 서로 대립되는 많은 것을 담을 수 있다. 한 사람의 인생에는 고요함과 소란스러움, 비탄과 행복, 냉담함과 뜨스함, 거미쥠과 배품이 모두 담길 수 있다. 또한 좀 더 특정하게는 자신의 인생을 완전히 실패작이라 생각하면서도 동시에 우쭐대는 것으로 보일 만큼 성공했다는 강박적 확신을 가질 수 있다.

 물론 불운이란 더 좋은 것에서 나쁜 것으로 옮겨가 거기서 멈춰 개인과 행복이 파괴되어 버리는 걸 의미할 수도 있다. 하지만 대다수 인생은 행운이든 불운이든 양 극단으로 치우짐이기보다는 부침의 문제인 것 같다. 대개는 시작점에서 그다지 멀지 않는 곳에서 멈추는 듯하다. 마치 그 시작점이 기준점이라서 늘 자기로 되돌아 가는 것처럼, 알리스의 인생도 대체로 훨씬 극과 극을 오가는 호를 그리긴 했어도 이런 패턴을 따랐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는 이유는 다른 사람들이 그렇게 산 걸 봤고 내 안생 역시 지금까지 그래 왔기 때문이다.

 

 얼마 전에 친구 하나가 나에게 자만에 빠진 사람처럼 말하지 않도록 조심하라고 했다. 그러면서 친절하게도 ‘당신은 그렇지 않으니까’라고 덧붙였다. 나는 그가 틀렸다고 생각한다. 나는 자만에 빠져 있었으니까 처음부터 자만에 빠져 있었기 때문이다.(우쭐대는 정도는 아니었어도) 우리 가족이 성인(聖人)들은 못돼도 제일 좋은 사람들이라는 가족의 믿음에 안락하게 감싸인 채 행복한 어린 시절을 보냈으니 말이다. 이런 마음은 영국 중상류층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것으로, 영국인들이 지닌 자부심으로 확인된다. 내 기억에 그런 만족적 자부심은 어릴 적 처음으로 세계지도를 접하면서 생겨났다. 분홍생그로 칠한 이 모든 땅이 우리거네! 에를 들어 프랑스 같은 나라에 태어나지 않은 게 얼마나 다행이야., 불품없게 기운 듯한 저 작은 연보라색 조각들을 봐.

 물론 이런 민족적 자부심이 미쳐 날뛰어도 좋다는 허가권은 아니었다. 이런 자부심을 가진 집단들이 모두 그렇듯 우리 영국인들도 최고가 되기 위해 가져야 하는 나름의 규정들이 있었다. 말이나 복장과 관련된 그 모든 사소하고 시시콜콜한 규정들 말고도 좀 더 심오한 규정 세 가지가 있었다. ‘겁쟁이가 되면 안 된다.’ ‘거짓말 하면 안 된다.’ 그리고 무엇보다 ‘허영 부리고 자만해선 안 된다.’ 내가 ‘무엇보다’라고 한 건 이것이 어린아이들이 막돼먹게 굴지 않도록 방지하는 규정이었기 때문이다. 아기 장 천정에 ‘너는 해변에 있은 유일한 조약돌이 아니다.’라고 새겨져 있었던 건지, 내가 아는 몇 사람은 다들 내게 소중한 이들인데 여전히 그 말을 가슴 깊이 새기고 있어서 일인칭으로 자기 인생을 쓴 책을 아무래도 봐주기 힘들어 한다.

 

 나는 우리 민족적 자부심이란 게 말도 안 되는 것임을 금세 깨달아 다시는 그런 감정에 빠져 들지 않았다고 말할 수 있지만, 그것이 야기하는 분위기는 또 다른 문제다. 그건 터무니 없는 생각, 못된 생각에서 나왔지만 자신감을 불어넣어준다. 그런데 나는 그런 느낌을 박탈당했다. (거절당해서였다. 계급적 우월감과 제국주의를 간과해서 아니라 그래도 그런 생각이 민족적 자부심을 상당 부분 수정하긴 했지만) 자신감을 박살내어 버리는 그 박탈감은 원인이 무엇이든 간에 한 사람을 끔직이도 차갑게 만든다. 하지만 이제 자만이라면 그렇더라도 어쩔 수 없는데 - 봐주기가 역겨울지는 몰라도, 그동안 살아오며 그 반대으 상태에 있는 것보다 훨씬 위안이 된다는 사실을 배웠다. 게다가 우리 같은 노인들에게 위안이 필요하다. 아무래도 노년이 인생의 내리막길이라는 사실을 부정할 수는 없다. 좋은 조건에서, 적어도 기대했던 것보다는 덜 나쁜 상태 상태에서 노년에 접어들었고 유난히 운이 좋다면 당연히 논년을 최대한 즐기겠지만 나는 ‘늘 내 둥 뒤에서 날개 달린 시간의 마차가 서둘러 다가오는 소리를 듣는다. 그러면 정말이지 말 그대로 정신이 번쩍 든다. 그리고 나 자신보다 훨씬 더 큰 문제들을 끊임없이 떠올리게 된다.

 예를 들어 우리 같은 늙은이들은 대부분 이런 식의 생각을 한다. ‘아이고, 살아서 그 꼴을 안 볼테니 다행이다.’ 하지만 아무리 지구온난화 문제를 생각하지 않으려 해도 그건 엄연한 현실이고 내가 크게 겪어야 할 일이 아니라고, 혹은 아이가 없으니 내 자식이 겪을 염려가 없다고 하여 문제가 사라지는 건 아니다. 내가 그 사실을 위로 삼으려 하면 다른 이들의 자식들이 떠오른다. 본인이 그 일을 겪지 않아도 된다는 걸 알면 마음이 약간 놓이겠지만 그렇다고 기쁠 것까지는 없다.

 그런데 인생이 다양한 것을 담을 수 있을 만큼 넉넉하고, 그래서 언뜻 보면 인생이 참 굉장해보이다가 좀 있으면 바로 그 반대의 생각이, 그저 인간의 기준으로 봐도 인생이란 참 보잘 것 없다는 생각이 든다 . 그런 견지에서 보면 개인의 삶이란 막믹하리만치 하찮다. 내가 여지껏 하고 있는 일, 생각한 것, 그리고 내가 이렇네, 저렇네 하면서 쓰고 있는 이 일 역시 그렇지 않을까? 나를 못마땅하게 여기는 이들과 마찬가지로 나 역시 이런 질문을 한다. 비록 해명할 수 있음리라는 본능적인 기대는 어쩌지 못해도.

 어쨌거나 남자든 여자든 모두 개인, 모든 ‘자아’는 아무리 사소하다 해도 생명이 표현되는 대상이며, 세계에 뭔가를 남기게 된다. 대다수 인간은 다른 인간에게 자신의 유전자를 남기고 자신들이 만든 다른 것들을 남긴다. 그리고 모든 인간은 자신들이 해온 것들을 남긴다. 가르치거나 고문한 것, 건설하거나 파괴한 것, 정원을 일구기나 나무를 벤 것, 그리하여 우리의 모든 환경, 도시와 농장과 사막 등 모든 것이 유익하거나 해로운 우리의 흔적들, 우리 이전의 수많은 인간들이 남기고 떠났고, 거기에 우리 자신이 모래사장에 모래알을 더하듯 덧붙이고 있는 그런 흔적들로 만들어진다. 그러므로 종교인들이 무신론자들을 두구 추정하듯 우리 존재가 무의미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어리석다. 그러나 우리는 이 세상에 거의 보이지는 않아도 실제적인 뭔가를 , 유익하든 해롭든 간에 남긴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인생을 제대로 살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그러므로 한 사람의 인생은 검토할만한 가치가 있을 만큼 흥미로운 것이다. 그리고 나 자신의 인생이 내가 진짜로 아는 유일한 인생이므로 (이와 똑같은 걱정에 부딪힐 때 진 리스가 늘 말했듯이) 그 인생을 검토해야 한다면 검토자의 불가피한 한계 내에ㅓ 되도록 솔직하게 검토해야 한다. 그게 아니라면 그런 일은 무의미하다. 솔직하지 못한 책은 이런저런 유명 인사들의 수많은 자서전처럼 읽기에도 몹시 지루하다.

 

 죽어서 사라지는 것은 인생의 가치가 아니라 자아가 남긴 낡은 그릇이요 자의식이다. 그것이 무(無)로 사라지는 것이다. 다른 모든 이들의 의식과 더불어 지켜보는 이에게는 너무나 당혹스러운 일이다. 무의식 상태로 죽지 않는 한 이제 곧 죽을 사람은 여전히 완벽하게 살아있고 또 완벽하게 자기 자신이기 때문이다. 내 어머니의 임종을 지킬 때 돌아가실리 없이, 아직은 온전히 여기 있으니까라고 생각했던 게 기억난다.(어머니의 마지막 말이 되어버린 그 멋진 말 ‘정말 멋졌단다.’는 어머니가 무슨 얘기를 하다가 남긴 말이지 유언으로 남긴 게 아니다.) 존재와 비존재의 차이는 너무나 갑작스럽고 현격해서 그 일이 과거, 현재, 그리고 미래의 살아 있는 모든 존재에게 일어나는 일이라 해도 여전히 충격적이다.((삶에서 가장 흔한 말인 죽음을 두고 소설가 헨리 제임스는‘독특하다.’고 표현했는데, 그가 무슨 생각으로 그렇게 말하였는지 나로서는 짐작조차 못한다. 가련한 노인이 숨이 넘어가며 한 소리이니 따질 일은 아니지만)

 이미 사람들은 ‘마지막 말’이라는 말을 좋아 할 것이다. 죽음의 충격을 완화해 주니까 죽어가는 과정의 물리적 본성을 감안하면 간결하고 함축적인 그런 말들은 대부분 그 진정성을 의심하는 것이 마땅하다. 그래도 우리는 기억에 남을 만하게 인생을 끝맺고 싶어 한다. 그래서 나도 가끔은 내가 무신론자인 것이 유감스럽다. 죽을 때 ‘신은 날 용서해 주시겠지. 그게 그분의 일이니 ’라는 말을 인용할 수 없을 테니까. 늘 나를 웃게 만들지만 놀랍도록 현명한 그 말을 내가 인용한다면 공정치 못할 것이다.

지금으로서 죽을 때 내가 남기고 싶은 말은 이것이다.

“좋아. 몰라도 괜찮아.”

 그리고 이런 말을 하면 어리석어 보일지 몰라도 그 말을 해야 할 때가 그리 빨리 오지 않기를 아직도 희망한다는 고백을 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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