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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 수필강좌(일반)

한국미술100년 - 조선미술 전람회(선전)

작성자이동민|작성시간26.06.16|조회수30 목록 댓글 0

  조선미술전람회

 

 일제시대 조선총독부가 주관하여 1922~1944년 총23회에 걸쳐 개최한 종합 미술전람회. 약칭 ‘선전(鮮展)’, 혹은 ‘조미전(朝美展)’이라 한다. 일제는 3 • 1운동을 계기로 문화통치를 표방하는데, 이 과정에서 1921년 조선인 미술가 단체인 서화협회*가 전시회를 열자 이를 견제하고 조선 미술의 근본적 개조를 촉진하기 위해서 일본의 관전인 문부성전람회(文展)와 제국미술전람회(帝展)를 본떠 조선미술전람회를 개최하였다.

총독부 주최의 조선 미술 전람회(鮮展)는 1922년에 시작하여 1944까지 23회 지속하였다. 3.1운동 이후 문화정책의 일환으로 창설하였다는 말도 있고, 협전에 자극을 받아 창설하였다기도 한다. 어쨌거나 선전은 이후에 화가들의 등용문으로 자리를 확고히 하였다.

 

 1927년의 제6회전부터는 전원 일본인으로 교체되어 일본의 관전출신 작가들이 심사위원의 주류를 이루게 되었다. 심사위원으로 참여했던 작가의 취향을 본보려 했고, 참고 작품이라면서 일본 작가의 작품을 전시함으로 일본풍의 미술이 직, 간접으로 유도되는 양상을 나타나게 하였는데 특히 동양화부에서 그러한 현상이 심하였다.
 선전은 관전으로서의 문제점에 대한 비판이 일기도 하였지만 그 규모와 권위가 지속되었으며 일본의 군국주의화에 따라 점차 시국의 분위기를 반영하는 작품들이 늘어났다. 1932년 제도개편에 따라 조선의 향토미술을 장려한다는 취지아래 공예부가 신설되고부터는 향토색*을 드러내며 일본인의 이국취미에 부합하려는 경향들이 확산되어갔고, 이는 소재 및 내용상 뚜렷한 하나의 흐름을 형성하였다.

 협전이 단순한 년례 행사로 무기력하게 진행되는 반면에 선전은 날로 위세를 더해 갔다. 초기에는 동양화부, 서양화부, 書部의 3부로 시작하였으나 3회부터 사군자가 서부에, 4회부터는 공예가 서양화부에 편입하였다. 이후 11회전에는 서부가 폐지되고, 사군자는 동양화부로 옮겼다. 14회부터는 조각이 공예부에 편입하였다.

 미술작가가 많아지자 추천작가-심사참여추천작가-심사위원의 위계를 만들므로 작가에게 권위 의식을 심어 주었다.

 書部의 심사위원은 김돈희, 김규진, 이도영이었다, 김돈희는 전 회에 걸쳐서 심사를 함으로 문화권력자가 되었다. 전 기간을 두고 심사위원은 거의가 일본인이었다. 이로서 선전의 성격이 일본적 감성과 정감적 이국 취향으로 흘러갔다. 선전 초기에 참여한 화가들도 거의가 동경미술학교 출신으로서, 일본적인 정조에 젖어 있는 경향을 보여주었다. 심사위원도 동경미술학교 교수들이 많았다. 따라서 감미로운 주제와 평면적인 外光派적 그림이 주류를 이루었다. 나중에는 인상파적인 그림도 도입되었으나 큰 힘을 발휘하지는 못 하였다.

초기의 서양화가인 고희동과 나혜석은 주로 외광 묘사를 많이 하였다.

 이후 3회전부터 이종우, 손일봉이 참여 하였다. 특히 손일봉은 수채화로 입선을 많이 하였다. 고희동, 김관호, 김찬영이 화필을 꺾었고, 강신호, 이승만 등이 두각을 나타내었으나 강신호는 일찍 죽었고, 이승만은 순수 회화보다는 신문의 삽화로 방향을 돌렸다.

선전을 발판으로 성장한 화가는 이인성, 김인승, 심형구가 대표적이다. 초기의 나혜석, 강신호가 있고, 곧 이어 김종태가 두각을 나타냈다. 나혜석은 선전과 거리를 두었고, 강신호와 김종태는 요절하였다. 이인성, 김인승, 심형구는 선전의 중심 화가로 자리를 굳혔다.

조선 미전은 조선 화단에 권력 행사를 하면서 해방 된 이후까지 미친 영향이 막대하다. 추천제도니, 심사제도니 하면서 유력인사가 권력을 행사함으로 비난의 대상이 되는 여러 제도의 뿌리가 바로 선전이다.

 

제 1회 심사위원

제1부 동양화 -- 카와이 교쿠도우, 이도영, 서병오(뒤에 김규진 추가)

제2부 서양화(조소포함) -- 오카다 사부로우쓰케, 타카기 하이쓰이

제3부 서(書) -- 이완용, 박영효, 박기양, 김돈희, 정대유

 

 뒤이어 5월 11일에 김규진과 다카키 세이이찌를 추가로 임명하였다. 이 무렵에 심사위원을 정실에 의하여 임명하였다는 소문이 돌았다. 총독부 학무국장이 나서서 절대로 그런 일은 없다고 해명하였다. (동아일보. 1922. 5. 14 보도)

 

 심사위원의 구성과 뒷 말을 보면 미전은 왜정시대부터 권력과 야합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서양화의 심사는 일본 사람이 하였다. 더군다나 서예의 심사위원에 이완용,박영효, 박기양 등 친일파 대신 출신이 맡았는 것도 이채롭다. 김돈희도 총독부 관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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