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이 머문 자리
김경선
산책길에서 바람을 만났다. 부드럽게 볼을 만지며 지나가는 바람이 “지나온 길을 잘 걸어왔느냐?”고 묻는 듯해 잠시 걸음을 멈추었다.
막내로 태어난 나는 어리광 부릴 처지가 아니었다. 심장병을 앓던 어머니는 일 년에 한두 번 구급차에 실려 병원에 가야 했다. 맏언니는 내가 열한 살 때 결혼하여 집을 떠났고, 오빠 둘은 객지에 나가 있었다. 어찌하랴. 어린 내가 집안일과 어머니 간병을 해야 했다.
어느 날이었다. 아버지가 어머니의 보신용으로 큰 장닭을 한 마리 사 오셨다. 툇마루 다리에 닭을 묶어 두고 아버지는 출근했다. 철이 일찍 들었던 나는, 어머니를 위해서 닭을 잡으려고 마음먹었다. 우물가 빨랫돌에 닭을 뉘었으나, 어린아이가 감당하기에는 버거웠다. 어쨌든 어머니가 일어나게 하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묘안이 떠올랐다. 닭 모가지를 밖으로 나오게 하고 몸통에 대야를 엎은 뒤 그 위에 올라탔다. 닭이 조용할 때까지 기다렸다가 오른손에 쥔 부엌칼로 목을 쳤다. 세상에나! 닭은 있는 힘을 다해 푸드덕거리며 달아났다. 나는 뒤로 벌렁 나자빠졌다. 모가지 없는 닭이 피를 흘리며 온 마당을 휘저었다. 그렇지만 무섭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오직 어머니를 위해 한 일이었다. 한참 돌아다니던 닭이 고꾸라졌다. 펄펄 끓는 물로 털을 뽑아 솥에 넣었다. 어머니는 막내딸이 생애 처음 요리한 닭곰탕을 눈물겨워하셨다.
어머니의 병간호에 애를 썼음에도 불구하고 거센 바람이 내 주의를 맴돌았다. 중학교 졸업하던 해였다. 비록 병약했지만, 어머니의 존재는 나에게 엄청난 뒷배였다. 뜻대로 되지 않거나, 어려움이 닥칠 때면 모든 것을 해결해 주는 어머니였다. 내 표정만 봐도 어머니는 나를 달래주고 안아주셨다. 그런 어머니가 계시지 않는 나의 십 대는 서러움과 원망이 뒤섞인 세월 속에 보냈다.
나는 새로운 바람 속으로 내쳐졌다. 칠순을 넘긴 홀아버지는 혼기 찬 막내딸의 앞날이 걱정스러웠다. 동네 약국을 운영하는 분이, 뜨거운 사막에 던져도 살아서 나올 사람이라고 아버지한테 한 총각을 소개했다. 그 말에 아버지는 안도의 숨을 내쉬셨다. 남편은 제약회사에 다니는 성실한 사람이었다. 다섯 형제의 둘째였지만 부모님을 모시고 동생들의 학비까지 감당하고 있었다.
엄격히 말하면 나는 들어온 식구가 아니던가. 그렇지만, 남편과 함께 삶의 무게를 짊어질 수밖에 없었다. 결혼이란 고요한 안식처인 줄 알았는데, 그것은 또 다른 폭풍이었다. 설상가상으로 남편의 회사가 부도나면서 시동생들의 학비와 결혼 준비, 생활비까지 내 손으로 책임져야 하는 날들이 이어졌다. 그때의 바람은 세차고 매서웠지만, 피할 수 없다는 것을 알기에 순응할 수밖에 없었다.
바람은 늘 내 앞에 머물며 길을 가로막았다. 이십 대부터 시작된 직장 생활은 여성 차별이라는 고루한 인습으로 상처를 주었다. 당시 여자는 남자보다 승진이 늦었다. 인사이동으로 여직원이 배치되면 탐탁지 않은 분위기였다. 나 역시 그 틀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같은 과에서 계로 이동이 되었다. 배치된 부서의 책임자는 과장의 지시가 있었음에도 내가 여자라는 이유로 자리에 앉으라는 말조차 하지 않았다. 출근했지만, 사흘을 휴게실로 돌아다녀야 했다.
남존여비 그림자가 짙은 때였다. 불만도 많았지만, 시대에 적응하기 위해 노력했다. 남직원이 한몫을 하면 여직원은 다섯 몫을 해야 한다는 각오로 버티었다. 못다 한 일은 밤샘해서라도 해냈다. 이 또한 내가 겪어내야 할 바람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 시대적 바람을 극복하려고 대학원 공부를 하고 박사 학위까지 받았다.
힘든 삶이 조금 잦아들 만하면 어김없이 다음 바람이 불어왔다. 중년을 지나면서도 쉽 없이 바람에 흔들렸다. 남편을 연기 속으로 보내야 하는 묵직한 바람을 견뎌냈고, 직장의 문을 나설 때 느꼈던 허허로운 바람을 안아야 했다. 아들과 딸이 저들의 세상을 향해 떠나던 날, 옆구리 사이로 스며들던 쓸쓸한 바람. 인생의 계절이 바뀔 때마다, 바람은 언제나 나를 못살게 굴었다. 처음엔 바람이 야속했다. 하지만 세월이 흐르고 나서야 알았다. 그 바람이 나를 단단하게 만들었다는 것을.
살다 보니 바람이 멈추는 날도 있었다. 아이러니 하게도 바람이 불지 않는 세상은 시시했다. 바람은 살아 있음의 증거였고, 그 흔적들은 내가 걸어온 길이었다. 사랑하고, 미워하고, 잃고, 또다시 시작하는 모든 일들이 내 삶을 스쳐 지나갔다.
이제는 북풍한설이 몰아쳐도 이겨낼 자신이 있다. 차갑든, 따뜻하든 다 내 몫이 아니던가. 하여, 바람이 머문 자리가 내 인생이다.
연단조양에서 만난 단풍
김경선
울긋불긋 가을 풍경이 차창으로 밀고 들어왔다. 강물을 내려다보는 청명한 하늘색이 곱다. 일 년 만에 친구들을 만나려고 떠난 여행이라 마음이 설렜다.
이십여 년 전이다. 전국의 6급 여성 공무원들이 ‘여성지도자양성과정’ 연수를 받기 위해 지방행정연수원에 모였다. 흉허물 없이 서로 부대끼며 언니, 동생 혹은 친구로 삼 개월을 합숙하면서 지냈다. 우리는 연수를 마치고 헤어지기가 아쉬워 모임을 만들었다. 그때의 친구들이 퇴직하고 지금까지 매년 일박이일로 전국을 돌며 만나고 있다.
그간 세상을 달리한 사람, 지역적으로 만나기 힘든 사람을 제외하면 40여 명에서 이십오 명 정도가 남았다. 올해는 단양에서 삼십여 년을 근무한 토박이 친구의 초청이다. 전국 곳곳에서 하나, 둘 모여 폴짝폴짝 뛰며 얼싸안고 반갑게 인사를 했다. 그간 안부를 묻는 표정은 세상 어디에도 없는 행복한 모습이다. 우리는 서로의 존재를 확인하며, 재회의 기쁨을 누렸다. 나이 든다는 것은 기억이 많다는 뜻이고, 기억 속에 친구가 있다는 것은 축복이다.
단양에 가끔 갔지만 지명에 대해서는 아는 바가 없었다. 그 유래가 '연단조양(鍊丹調陽)'이라는 뜻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을 이번에 처음 알았다. ‘연단’은 신선이 먹는 환약, ‘조양’은 따스한 빛을 고루 비춘다는 뜻이라고 했다. 신선이 머물고 싶은 고장. 그 이름에 걸맞게 관광특구로, 대한민국 국가지질공원으로 지정되었다. 단양은 천혜의 자연 경관을 자랑하지만, 그래도 으뜸은 단풍이 아름다운 가을이다. 단양강, 도담삼봉, 고수동굴, 사인암, 구봉팔문 등 곳곳에 화폭을 펼쳐놓았다.
여러 관광지를 품고 있는 단양은 대중교통을 이용하기에 쉬운 곳이 아니다. 두세 번 갈아타고 오다 보니 아침을 거른 친구들이 있었다. 밥심이 있어야 즐거움도 함께하리라. 지역에서 맛집으로 소문난 마늘 한정식당으로 친구가 안내했다. 마늘 떡갈비, 마늘 육회, 마늘장아찌, 마늘 수육, 마늘 샐러드, 마늘 솥밥까지 스무 가지가 넘는 반찬이 대부분 마늘로 만들어졌다.
마늘이 단양의 특산물이라고 했다. 여태껏 의성 마늘만 머릿속에 있던 나에게 단양 마늘은 신선했다. 석회암지대라는 지리적 특성과 밤낮 간 일교차가 커서 마늘재배에 유리한 조건이라고 했다. 알싸한 매운맛과 향이 독특했다. 시장기도 메뉴에 들어간 모양이다. 갖가지 식재료와 마늘의 조화로운 음식 맛에 수저를 멈출 틈이 없었다.
식사를 마치고, 단양강 잔도를 걸었다. 읍내 중앙을 가로지르는 남한강을 이곳에서는 단양강이라 부른다. 초입에 ‘느림보강물길’이라고 이름이 적혀있다. 누가 명명했는지 예쁘게도 지었다. 유유히 흐르는 강물이 느림보 같았다. 걸음을 멈추고 강물을 들여다보았다. 물고기도 환경에 적응한 듯, 천천히 꼬리를 움직이는 모습이 평화로워 보였다. 바쁘게 걸을 이유도, 먼저 가야 할 이유도 없다. 누군가 앞서가면 멈추어 기다려주고, 또 함께 걸었다. 물고기는 물살을 가르며 나아가지도, 조급해하지도 않았다. 그저 자신이 머무는 자리에서 조금씩 움직이는 것을 당연히 여기는 것 같았다. 자연에 동화된 우리도 느림의 미학을 실천하면서 천천히 걸었다.
팔을 벌려 강너머 산을 안아보았다. 강과 어우러진 풍경이 내 품 안에 들어왔다. 데크 길이 끝나고, 동글동글 구멍 뚫린 철판 길이 이어졌다. 암벽에 철골을 이어 아슬아슬한 비계를 만들어 놓았다. 철판 아래 강물이 그대로 드러나 보였다. 발바닥에서 머리끝까지 짜릿짜릿했다. 난간을 잡고 조심조심 걸으면서도 깔깔대는 친구들의 웃음소리가 저만치 멀리 있는 산도 웃게 했다.
이곳저곳 많은 곳을 보여주고 싶은 친구의 열정이 하늘을 찔렀다. 곳곳의 명소와 기암괴석에서 흘러내리는 풍경은 세계 어느 화가도 그릴 수 없는 명작이었다. 단풍으로 붉게 물든 것은 단양만이 아니었다. 오래도록 우정을 지켜온 친구들의 모습도 가을에 접어들었다. 익어간다고 할까. 초로의 여인들이 아름답게 보이는 것은 단양지기의 진심 어린 초대도 한몫했다. 우리는 단풍처럼 익어가고 있다. 익어간다는 것은 완성을 향한 걸음이 아닐까.
일박이일의 일정은 미꾸라지처럼 빠져나갔다. 더 많은 이야기를 나누고, 우정을 쌓기엔 짧은 시간이 야속했지만, 생각은 오히려 달라졌다. 신선이 먹었다는 환약, 마늘 특산지의 퓨전요리를 먹고 비타민D가 풍부한 가을 햇빛을 즐겼으니, 무엇이 아쉬우랴. ‘느림보강물길’에서 연단조양을 즐겼더니 행복지수가 하늘을 치솟았다.
단풍이 된 나를 강물에 띄운다. 흐르고 흘러 어디쯤 멈출까. 한 해 두 해, 멈춤이 있는 시간까지 오래도록 소중한 추억을 쌓으리라. 내년에는 경기도 여주에서 만나자고 하네. 빨간 단풍, 노란 단풍, 빛바랜 단풍의 축제는 계속되리라.
댓글
댓글 리스트-
작성자김재화(44기) 작성시간 26.06.11 실장님 신인상 수상 축하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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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이미영 (44기) 작성시간 26.06.11 태풍이 불어도 끄떡없을 삶을
살아내셨군요
맞아본 사람만 아는
행복한 봄바람이 살랑거리며
친구로 곁에 있을겁니다.
감동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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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윤일선(44기) 작성시간 26.06.11 감명 깊은 느낌입니다~ 처음 뵈올때도 거침없는 당당한 포용의 모습이었습니다
하면 된다는 말씀과 멘토 선생님을 귀찮게 하라는 말씀이 기억에 남습니다 -
작성자정홍표( 44기 ) 작성시간 26.06.11 우리모두
이제 흐르는 바람속 단풍입니다
함께 아름답게 흘러 갈 수 있기를
기원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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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김유아(44기) 작성시간 26.06.12 바람이 지난 그 자리에 우뚝 서 계신 경선 선생님의 지금의 모습에 박수를 보내드립니다. 그리고 신인상 수상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