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일 쯤 글을 올릴 수 없을 것 같아서,
어려운 내용을 한 꼭지 미리 올리겠습니다. 열심히 읽으시고 ,
머리에 녹이 끼어 있으면 벗겨 보십시오
가운데 의자는 실제의 의지입니다. 모두 의자인데, 어떻게 다를가요.
*나를 은유와 환유로 알아봅시다.
이번 글, 한 꼭지는, 앞의 글(153) ‘나를 알자’에서, ‘내 몸과 대화를 나누자’라고 한 말의 설명이 있어야 겠다 싶어서 글을 썼습니다. 내용이 어렵습니다. 그러나 이런 것을 알아두면, 우리의 지적 영역이 넓어집니다. 이런데서 지적 호기심이 발동하기도 합니다.
은유와 환유는 문학적 글쓰기에서 가장 기본이 되는 글쓰기 기법이다. 더구나 시 문학에서는 바탕 중의 바탕이다. 수필도 산문 중에서는 시 문학과는 촌수가 가까우므로 은유와 환유의 기법을 많이 사용하는 편이다. 은유 또는 환유적 문장은 고급스러워 보인다. 작가도 지석 수준이 높은 사람으로 보인다.
문학 이론에서 은유와 환유는 상당히 어렵다. 시를 쓰는 사람이 은유와 환유를 필수로 공부한다. 어렵더라도 기초 공부를 한다고 생각한다.
수필을 쓰는 사람은 조금만 어려운 문학 이론을 들고 나와도, ‘이이구 어려워요. 우리는 그런 어려운 이론까지 공부하려는 것이 아닙니다.’라고 한다. 그냥 수필이나 쓰려고 합니다. 라는 반응이다. 나는 수필쓰시는 분들의 이런 반응을 이상하게 생각한다. 왜 시를 공부하는 분은 어렵더라도 배우려고 하는데, 수필을 쓰시는 분은 우리는 이런 어려운 것까지는 필요없어요. 이론을 몰라도 글쓰기를 할 수 있어요, 하면서 공부를 하지 않으려고 할까. 그 말 속에는 자기 비하의 목소리가 들어있다는 생각이다. 시도 아닌 수필따위를 쓰면서------, 하는 스스로를 낮추는 생각이 들어있는 것이 아닐까.
일반인들이 문학교실을 기웃거리면서 시 공부를 할까, 수필 공부를 할까를 정할 때 수준이 낮아서 수필공부를 선택하고, 또 어떤 이는 수준이 높아서 시 공부를 선택하는 것이 아니다. 선택은 오로지 그 사람의 취향이다. 그런데 ‘수필이나 쓰면서’ 라는 지기 비하적 생각은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서양의 경우를 보면, 수필은 ‘에세이’라고 하여 거의 논문 수준의 글이다.
내가 수필쓰는 사람이라서인가. 자기비하적 말에 공연히 언잖아서 서문을 길게 썼다.
수필은 작가가 경험한 사실을 언어로 바꾸어서 보여주기를 하는 것이다. 눈 앞에 펼쳐진(또는 생각해낸) 실제의 현상을 수필이라는 형식의 언어로 바꾸는 순간에 현상은 언어 속으로 들어가버리고, 실제의 현상은 사라져버린다.
우리는 글을 읽으므로(독서행위) 현실을 만나기는 하지만 실제 그대로가 아니다. 작가가 언어로 표현한 사실만을 만난다. 독서를 하는 순간 독자는 현실을 보는 것이 아니라 작가가 글을 통하여 표현한 사실(사실은 작가의 이미지이다.)을 만난다. 작가가 글을 쓸 때는 현상을 보고, 자기의 마음에 맺혀지는 모습을 글로 표현한다. 마음에 맺혀지는 모습을 이미지(心象)라고 한다.
설명을 하자면, 수필 글은 작가가 채험한 사실을 사진처럼 그대로 옮겨오는 것이 아니고, 자기의 마음에 맺혀지는 것(이미지라고 한다-이 말은 우리가 어떤 사물을 보았을 때, 사물의 느낌으로 생각을 하게 된다, 생각이 나타나는 모습이라고 할까. 마음에 일어나는 모습이 이미지 이다.)만 옮겨온다. 이 글을 읽는 독자 또한 글을 읽고 자기의 마음에 맺혀지는 이미지만을 기억(보존)한다. 따라서 작가와 같은 것을 느끼고, 기억하는 것이 아니다. 즉 수필이라는 글로 쓰여지는 순간에 실제의 현상은 죽어버리고 글(언어는 상징체계라고 한다. 언어는 실제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고 상징으로 드러낸다고 한다.)이라는 상징이 대신한다. ‘꽃을 보고 꽃이라고 말(글)하는 순간에 실제의 꽃은 사라지고, 꽃의 이미지만 (글에) 남는다는 것이다.
지금부터는 수필의 기본 바탕이 되는 언어 공부를 해보겠습니다. 조금 어려워지겠습니다.
‘언어는 기호이다.’ 라고 한다.
‘의자’라고 소리를 내면(말) 들은 사람은 (글이라면 읽은 사람은) 의자를 머릿속에 떠올린다. 머릿속에 떠오르는 의자는 내가 반드 시 기억하고 있어야 한다. 내가 과거애 경험하였던(보았던) 의자만을 기억한다.(기억을 머릿속에 보존한다고 한다.) 보지 않았던(경험하지 않았던) 의자는 절대로, 절대로 떠오르지 않는다.
의자라는 말과, 말을 듣고 의자를 기억해 낼 때, 말과 기억(의자의 기억)을 조합하여 연결하는 것을 ‘기호형식’이라고 말한다. 즉 기호형식이란 기표(표시로서, 여기서는 의자라는 말이 되겠다.)와 기의(의자라는 말을 듣고, 실제의 의자를 기억할 때, 즉 내용이다. 실제의 의지는 의자라는 말의 의미(내용)이다)를 조합하여, 이를 ‘기호형식’이라고 하였다.
예를 더 들어보면, 신호등에서 파란불이 켜지면 사람들은 길을 건너 간다. 이때 파란믈은 기표이고, 파란불의 뜻은 ‘가시오’이다. ‘가시오’가 기의가 된다. 기표/기의 = 파란불/가시오의 뜻이 된다.) 이처럼 언어와 실제의 사물과 조합하는 기능을 ‘기호형식’이라고 하였다. 줄여서 그냥 ‘기호’라고 말한다,
(미술에 그림으로 그린 의자, 실제의 의자, 의자를 사전에서 설명한 내용을 그대로 가져와서
조합한 것을 사진으로 찍은 작품이 있다. 미술에서는 아주 중요한 작품으로 꼽는다)
(*** 이 작품에 의하면 세 개가 모두 의자를 나타내는 기호형식(기표)이지만, 같다고 할 수 있을까요. 아니면 틀린다고 해야 할까요. 머리가 녹 쓸었으면 녹을 벗겨 봅시다. 이 그림은 아주 중요한 그림입니다.)
셋 모두 의자를 나타내는 기호인데, 어떤 방법으로 나타내는 것일까요.
이제는 은유와 환유에 대해서 공부하기로 합시다.
우리가 은유와 환유를 공부하자는 이유는 인간의 내면을 나타내는 방법이 은유 그리고 환유와 유사해서 참고로 공부하려는 것입니다. 그러나 문학한다면서 ‘문’자만을 말하려 해도 은유와 환유는 알아야 합니다. 간략하나마 짚어보기로 하자.
문학적 글쓰기에서는 의미가 모호한 문장을 선호하는 경향이 있다.(흔히 낯설게 하기라고 한다.)(문법이 틀려서가 아니고)
앞에서 기호형식을 공부하면서 언어가 의미를 갖는 모든 형식을 ‘기호형식’이라 한다고 했다. 은유와 환유도 기호형식의 하나이다.
언어로 표현할 때 다른 것과 비교함으로 그 뜻을 드러내는 것이 비유법이다. 비유법은 직유법, 은유법, 환유법의 세 가지가 있다.
직유법은 말 그대로 직접 비유하는 형식이다 ‘~처럼’이라고 하는 것이 기본이다. ‘영희는 꽃처럼 예브다.’라고 할 때, 영희와 꽃을 직접 비유하였다.
은유법은 직유법에서 ‘~처럼’이란 말을 뻬버린 것이라고 이해하면 좋다. 영희는 꽃처럼 예쁘다에서 ‘~처럼을 뻬버리면 ’영희는 꽃이다.‘ 이다. 영희는 사람이고, 꽃은 식물인데 어떻게 영희가 꽃이란 말인가. 논리적으로는 설명이 안된다. 그러나 영희도 예쁘고, 꽃도 예쁘므로 예쁘다는 속성이 같다. 예쁘다는 속성이 비슷함으로 ’유사성‘에 의한다고 한다.
환유는 속성이 유사하기보다는 의미가 바로 인접해 있음으로 인접성에 의한다고 한다.. 일반적으로 우리가 알고 있는 상식으로 비유하는 것을 말한다. 모차르트는 작곡가라는 것을 우리는 상식적으로 안다. ’모자르트를 연주한다.‘라고 할 때, 모자르트가 작곡가임을 앎므로, 우리는 모차르트 곡을 연주한다는 것을 안다. 모차르트와 작곡은 속성이 아니고 인접해있다고 한다.
환유를 좀 더 설명하자면(은유와 헷갈리므로 환유를 알면 은유도 이해하기 쉽다.)
막걸리는 사발로 마시고 사이다나 콜라는 컵으로 마신다.(상식적으로 안다.) 일꾼이 땀을 훔치면서 ’한 사발 마셨다‘라고 하면 콜라가 아니고 막걸리를 마셨음을 안다.
다시 말하지만, 나를 알기 위한 공부를 하면서, 은유와 환유를 공부하는 이유는 우리가 나를 표현할 때도 은유와 환유의 방법으로 표현함으로, 나를 알기 위해서 공부하는 것이다.
이제는 이 글의 본래 의도대로 나 자신을 아는 방법을 찾아보자.
앞의 꼭지(152)에서 나를 알기 위해서는 내 몸과도 대화를 나누자고 하였디.
우리 몸이 행동하기까지의 과정을 보자.
나는 외부의 자극을 감각기관을 통하여 지각한다. 지각된 자극을 해소하기 위해서 행동(운동)한다, 이것은 정상적인 과정이다. 자극과 행동 사이의 기간에 나의 심리가 작동한다. 심리작동을 하여 자극이 행동으로 표현하는 방법이 은유와 환유의 과정을 거친 결과라고 하였다. 은유의 과정을 거치는 방법으로 표현한 경우가 많다. 은유는 유사성은 있으나 논리적으로 설명하기 어려운 점이 있다.(앞에서 공부했다.) 나의 행동도 바로 그런 과정을 거쳤다.
자극이 행동으로 나타나기까지의 중간 과정이 나를 나 이도록(나의 정체성) 하는 심리과정이다. 나의 인생사에서 중요한 여러 요소들이 심리과정에 작용한다.
앞 꼭지에서 사례로 든 젊은 목사님을 보자. 목사님의 행동은 지니치도록 도덕적이고, 종교적이다. 사회에서 권장하는 바른 행동을 하는 분이다. 목사님의 경우는 자기 스스로 자기를 정확히 보지 못하자, 원로 목사님이 저적해주셨다. 그러나 우리가 사는 세상에서는 남의 문제를 지적해주실 분이 얼마나 있을까. 우리 스스로 나를 찾아가야 한다. 그럴 때에 우리의 심리과정을 은유와 환유의 방법으로 찾아가보는 것이 도움이 될 것이다.
마지막으로 앞 꼭지의 글에서 말한, 내가 캡 모자를 쓰는 이유를 ‘기억흔적’이라는 글로 발표한 적이 있다. 나의 경우, 나의 아픈 기억을 내가 아니고는 도저히 알아낼 수 없을 것이다. 우리 인생사의 일들은 목사님의 사례보다는 나의 경험의 경우가 대부분일 것이다.
말하자면 자기와의 대화는 자기가 가장 적격자이다. 그리고 자기를 찾아갈 때 자기의 몸에서 시작하는 것이 제일 쉽고, 빠를 것이다. 그래서 나의 몸과도 대화를 하자고 했다.
우리를 행동하도록 하는 것은 마음이다. 마음이 먼저 움직여야 몸이 움직인다. 몸을 움직이게 하는 마음의 힘을 리비도 라고 한다.
이럴 경우, 우리는 나의 마음을 알기 위해서 몸의 행동을 관찰하는데서 출발하여 마음을 찾아가는 방법을 이용한다. 그렇게 함으로 마음의 힘, 정신의 힘(리비도라고 하는 것)을 찾을 수가 있다. 리비도를 알아내는 것이 나를 찾아가는 길이 된다
어렵지요. 이런 것을 이해하고 나면 나의 지적 수준이 한 단계 성숙해졌음을 느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