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작법 ☞ ]감동이 없는 시 /이상옥

작성자흐르는 물|작성시간06.08.03|조회수90 목록 댓글 0
감동이 없는 시 /이상옥


현대시가 점점 독자들에게 외면 받고 있는 것은 그냥 방치해둘 일이 아닌 것 같다.
무릇 현대시가 전위성을 추구하면서 독자들에게 더욱 외면 받는 쪽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독자들을 정말 감동하게 만드는 시가 좋은 시가 아니겠는가.
물론, 그 감동이라는 것이 예술성에 기인해야 할 것임은 두말할 여지가 없다.
그렇다면 오늘날 수많은 시들이 씌어지고 있지만
좋은 시는 그만큼 희귀하다는 것이 아니겠는가.

지금까지 수십년 동안 시를 읽어왔지만 내 인생을 뒤바꿔 놓을 만한 시를 만난 적이 있었는가?
생과 사의 기로에서 방향을 뒤바꿔 놓을 만한 시를 만난 적이 있었는가?
이런 질문을 던져 놓고 그 앞에서 그렇다고 대답할 수 있는 독자는
100에 하나도 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가장 큰 원인 중의 하나는 발표되고 있는 많은 시들 가운데 세계와 인생에 대한
시인들의 충격적인 인식이나 깨달음이 없기 때문일 아닌가 생각한다.
시를 전달수단의 하나라고 할 대 시가 전달하고자 하는 것은
시인들의 세계에 대한 인식과 깨달음일 것이다.
그 인식과 깨달음이 없거나 충격적이지 못할 때
시가 독자들에게 감동을 줄 수 없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시에서 인식의 문제는 내용과 관련된 문제만은 아니다.
시에서 인식이란 철학적 인식이나 사회학적 인식 등과 다른 시적인 인식을 말하는데
그것은 즉각적으로 시의 구조(형식)를 결정하는 것이기도 한 것이다.
이를테면 시인이 세계를 비유적으로 인식할 때 시는 비유적 구조를 띠게 되고
시인이 세계를 역설적으로 인식할 때 시는 역설적 구조를 띠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시적 인식은 바로 시냐 아니냐를 결정하는 것이기도 하고
작자들에게 감동을 줄 수 있느냐 아니냐도 거기서 나오는 것이다.
(유재천, 시적 인식의 힘, <<경남문학>> 2003. 봄호)

시인이 세계에 대해서 충격적 인식이나 깨달음이 없이 쓴 시는 결과적으로
독자들을 감동하게 만들지도 못한다는 명제는 당연지사가 아니겠는가.
어찌 시인자신도 감동하지 못하고 독자들의 감동을 바라겠는가.
최근 들어 나는 현대시가 보이는 전위성에 대해서 일면 수긍하기도 하지만,
젊은 시인들이 전위일변도로 치닫는 현실에 대해서 마뜩찮은 생각이 든다.
오늘의 디지털기술의 발달로
예전의 상상력을 뛰어넘는 환상까지도 영상화해내는 모습을 보면서
우리 시의 상상력도 변모할지 않을 수 없음을 인정하는 바이다.
그래서 시적 판타지가 얼마든지 가능한 시대라고 공감한다.

안개로 짜여진 하얀 망사를 걸치고 마네킹이 모퉁이를 돌아간다 타닥타닥 보도블록에 무릎뼈가 닿을 때마다 두 귀가 바닥으로 흘러내렸다 지나가던 사람들이 분홍색 살점을 떼어 마네킹의 무릎뼈에 붙여 주었다 마네킹은 목을 꺽지도 않고 또다른 모퉁이를 돌아간다 공원을 가로지를 때 나무 그늘에 쪼그리고 있던 앉은뱅이 소년이 튀어나왔다 소년을 따라 물고기를 닮은 계집아이가 돌멩이를 던지며 튀어나온다 다기 보니 계집아이는 가슴살을 뜯어 소년에게 던지고 있다……<하략>
이민하, <환상수족>, <<시와사상>> 2003년 봄호

이 시는 환상의 이미지가 드러난다.
상력이 도를 넘어 환각상태에 접어들고 있다.
이 시는 나름대로의 시적 의도가 분명히 있다.
이런 유의 시는 독자에게 인식의 충격은 줄 수 있을지 몰라도
독자가 애송하는 시가 될 수 없을 터이다.
어쩌면 이 시는 환각이라는 초월세계를 의탁하여 무분별하게 시적 자유를 남용한 것은 아닐까.
그런데도 이런 유의 작품에 대하여 잘 알 수 없는 논리로 부추기고 있는 것이
오늘의 평단의 현실이기도 하다. 과연 이것이 바람직한가.
나는 이런 유의 젊은 시인들의 시를 읽는 것이 이제는 식상한 느낌이 든다.
그것은 내가 나이를 먹었다는 뜻일까. 차라리 같은 지면에 수록된,
조금 코드가 단순하여 시적 충격 주지 못하지만 따스하게 느껴져서 좋다.

내 외로운 시선 가로지르며

감잎 하나
툭! 지자
하늘은 어느새
파란 불이 들어온다.

동구 밖 쪽 처마 끝에선 또
시래기 다발이 흔들리고
그 밑 마당 어귀에
동네 아주머니들 모여 김장을 한다
시뻘건 배추 잎을 쭉 찢어 서로 건네며

아, 오늘밤
저 하늘가에 저녁연기 뜨면
어느 집에서
시래기 국을 가마솥에다 끊일 것이다.
김영남, <입동(立冬)>

이민하의 시가 전위적이라면 김영남의 시는 보수적이라고 해야 할까.
무슨 소리인지 잘 알 수 없는 전자보다는 내용이 좀 진부하게 보일지라도
후자가 독자에게는 훨씬 가슴에 와닿지 않겠는가.
그러나 둘 다 아쉬움이 남는다.
전자는 너무 현실을 벗어난 환상성 탓에 독자의 공감을 얻지 못하고,
후자는 공감하게 되지만 너무 전통적인 포즈가 또한 식상한 감을 준다.
후자의 경우에도 세계에 대한 인식이 너무 안일했던 것 같다.

티브이 수상기가 한 대 길거리에 버려졌다.
길거리에 나온 지 두 달째다.
나는 두 달째 티브이 수상기 옆을 지나쳤다.
티브이 수상기가 걸거리에 나온 첫날부터
내 속에서도 티브이 수상기 한 대 버려졌다.
그래도 나는 집으로 돌아와서 티브이를 보며
밥을 먹고 티브이를 보며 사랑을 나눈다.

길모퉁이를 돌아섰다.
나는 티브이 수상기에 가까이 다가갔다.
마침내 지나졌다.
벌써 두 달째다.

나는 죽은 티브이 수상기를 지나 집으로 돌라와서
산 티브이 수상기를 멍청하게 시청하며
밥을 먹고 사랑을 흉내낸다.
내 속에는 죽은 티브이 수상기가 한 대 있고
내 밖에는 산 티브이 수상기가 한 대 있다.
나는 내 밖의 티브이 수상기를 내 속으로 버린다.
-김승강, <티브이 수상기>, <<문학판>> 2003년 봄호 신인상 당선작

이 시는 이민하의 시와 같은 환상성을 보이지는 않으나 시적 상상력이 활달하다.
그것은 마지막 행의 "나는 내 밖의 티브이 수상기를 내 속으로 버린다"라는 표현이 그것이다.
티브이는 주지하다시피 오늘의 문명의 상징코드이고 또한 후기 자본주의 삶을 반영한다.
화자는 티브이에 비친 삶을 자신도 흉내내고 있지 않은가.
그 티브이 한 대가 길거리에 버려져 있고, 그 티브이가 환기하는 오늘의 문화,
삶의 방식에 대해 끊임없이 사유하고 있는 것이다.
이 시에서 제시된 티브이의 상징성은 다양하게 변주되며 독자는 화자의 인식에 동참하며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든다.

이민하의 시의 지나친 일탈성과 김영남의 전통적 온건성에 비하여,
비록 신인의 시로서 조금 거친 듯하지만 티브이가 환기하는 존재의 사유방식이 범상치 않다.
오늘의 젊은 시인들이 전위성에 경도되어 이민하의 경우처럼
독자의 가슴에 와닿지 않는 시편들을 양산하는 것은 재고되어야 할 것이다.
시가 건조하더라도 최소한 오늘의 삶과 시적 코드가 연결망은 구축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김승강의 시는 거칠지만 오늘의 삶의 대한 성찰을 내포하고 있지 않은가.
오늘의 삶을 반영하지 못하고 극단적 환각상태에 빠져드는 것은 정직하지 못한
시적 태도로서 언어유희에 불과한 것인지도 모른다.

이런 관점에서 <<시경>> 2003년 봄호에서 [신경림]원로시인이
현 시단에 대해 “자기도 모르고 남도 모르는 애매모호한 시들이 횡행하고,
독자들이나 시를 공부하려는 사람들은 그런 것이 좋은 시라고 생각하게 된다”고
지적한 것은 정확한 진단이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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