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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 있는 사람 아브라함 창 12:1-9, 성령강림후 2주, 2026년 6월 10일

작성자Arum|작성시간26.06.09|조회수0 목록 댓글 0

복 있는 사람 아브라함

창 12:1-9, 성령강림후 2주, 2026년 6월 10일

 

 

“떠나라!”

아브라함은 아브람으로 불리기도 했습니다. 그의 아내는 사래로 불렸던 사라입니다. 고향은 메소포타미아 문명의 발생지인 갈대아 우르입니다. 아브라함의 아버지는 데라입니다. 데라는 아브라함을 비롯한 세 아들을 두었습니다. 막내 아들 하란이 먼저 죽었습니다. 참척의 슬픔 때문인지는 확실하지 않으나 데라는 큰아들 아브라함 부부와 죽은 하란의 아들, 그러니까 손자인 롯을 데리고 갈대아 우르를 떠나 유프라테스강을 거슬러 올라가서 하란으로 이주했습니다. 이 지명은 공교롭게도 먼저 죽은 셋째 아들의 이름과 같습니다. 둘째 아들 가족은 함께 오지 않았습니다. 말할 수 없는 사연이 있었을 겁니다. 하란이라는 지명은 아브라함 족장 서사에서 중요한 지역으로 거듭 소환됩니다. 데라는 하란에서 205세 때 죽었습니다.

오늘 설교 본문인 창 12장부터 창세기 기자는 아브람에게 초점을 맞춥니다.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아브람은 어떤 방식으로 이런 명령을 들은 걸까요? 이 명령을 듣자마자 곧 실행에 옮겼을까요? 본문은 저간의 상황을 일일이 묘사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문학적이고 신학적인 상상력으로 그걸 유추할 뿐입니다. 앞에서 짚은 대로 아브람은 이미 오래전에 아버지 데라와 함께 고향 갈대아 우르를 떠난 경험이 있었습니다. 하란에 자리를 잡고 일가를 이루었습니다. 상당한 정도로 재산을 모았습니다. 재산 증식에는 아브람보다도 아버지 데라의 역할이 더 크지 않았겠습니까. 데라가 죽었지만, 아브람에게는 아버지의 기업을 물려받아서 이끌어갈 능력도 있었습니다. 당시 메소포타미아 문명권에서 중요한 도시였던 하란에 머물던 아브람에게는 부족할 게 하나도 없는 삶이 보장되었습니다. 다만 한 가지, 자녀가 없었을 뿐입니다. 그걸 어쩌겠습니까. 당시에 흔했던 양자를 들이면 됩니다. 하란을 떠나야 할 이유가 없었는데 떠나라는 말을 들었다는 게 무슨 뜻일까요?

우리는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이라고 말합니다. 유대교와 기독교와 이슬람교가 똑같이 그렇게 믿습니다. 유일신 여호와 신앙이 아브라함에게서 시작되었다는 뜻입니다. 그에게 인간적인 한계와 실수가 있긴 했으나 여호와 하나님을 향한 신앙에서만은 타의 추종을 불허합니다. 백 살에 얻은 아들 이삭을 번제로 바치라는 여호와의 명령을 그대로 순종하려고까지 했던 인물이니까요. 이삭을 바치라는 명령이 어딘가 해괴해 보이듯이 하란을 떠나라는 명령도 이상해 보이긴 매한가지입니다. 사람은 천사의 음성을 듣기도 하나 악령의 음성을 듣기도 합니다. 환청 현상도 있습니다. 아브람이 여호와의 말씀을 제대로 들은 걸까요? 하란을 떠나지 말고 그곳에서 여호와 하나님을 바르게 믿으면 안 될 이유가 있었나요?

이 질문의 대답을 찾는 데는 모세 이야기가 도움을 줍니다. 아브라함 후손은 야곱과 그의 열두 아들 시대에 대흉년이 들어서 이집트 고센 지역으로 이주했습니다. 고센은 나일강 유역의 비옥한 땅이었습니다. 거기에 정착한 지 수백 년이 흘러 유대인의 인구도 크게 늘었습니다. 거기서 그들은 잘 먹고 잘살았습니다. 그런데 모세는 유대 민족을 이끌고 이집트를 떠나라는 명령을 여호와에게서 듣습니다. 아브람이 하란을 떠나라는 명령에서 처음 여호와를 경험했듯이 모세도 역시 이집트를 떠나라는 명령에서 여호와의 말씀을 처음 들었습니다. 하란도 제국의 땅이었고, 고센도 제국의 땅이었습니다. 아브람이 들은 명령에서 믿음의 종교가 시작되었고, 모세가 들은 명령에서 율법 종교가 시작되었습니다. 그들은 왜 떠나야 한다고 생각한 것일까요?

 

제국에서의 삶

다시 아브람 이야기로 돌아갑시다. 아브람 이야기의 실제적인 역사적 배경은 기원전 6세기의 바벨론 유수입니다. 구약 신학계가 J 기자라고 부르는 어떤 선지자가 누란에 떨어진 유대민족이 나아가야 할 방향을 설득하려고 조상들의 전승을 끌어다 쓴 겁니다. 바벨론 제국만이 아니라 아시리아, 바빌론, 그리스, 로마를 비롯한 모든 제국의 종교는 다신론입니다. 여러 종족을 하나의 제국으로 묶어내야 했기에 제국은 여러 종족의 신들을 다 인정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또한 바빌론 신화에서 마르둑이, 그리고 그리스 신화에서 제우스가 최고 신으로 인정받듯이 제국의 최고 통치자도 절대적 권위를 인정받게 됩니다. 고대 유대 선지자들과 신학자들은 이런 제국을 중심으로 하는 다신론과 싸웠습니다. 바빌론 제국이 아무리 강력하고 멋지더라도 언젠가는 이곳 바빌론을 떠나야 한다고 말입니다. 떠남의 영성이 그들의 근본 정신입니다. 출애굽 이후 40년 광야 생활이 대표적입니다.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보여 줄 땅은 가나안입니다. 모세가 이집트에서 유대 백성을 이끌고 가야 할 땅도 가나안이었습니다. 누구도 그곳을 하란보다 더 좋은 곳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유프라테스강과 요단강은 비교의 대상이 되지 않습니다. 서울의 대치동과 경상북도의 봉화가 비교되지 않듯이 말입니다. 사람들은 모두 메소포타미아 문명권 언저리에서 살기 원합니다. 이집트의 고센을 떠나서 가나안으로 가라는 여호와의 명령을 들은 모세가 우물쭈물했듯이 아브람도 그런 주저하는 과정이 분명히 있었을 겁니다. 이미 75세가 된 그 나이에 하란에서 가나안으로 거처를 옮기는 건 지혜로운 선택이 아니니까요.

아브람이 하란을 떠나게 된 이유는 그가 메소포타미아 문명에서 만족하지 못했다는 데에 있습니다. 삶의 다른 차원이 그에게 절실했습니다. 그걸 본문은 여호와께서 주시는 복이라고 말했습니다. 본문 2-3절을 들어보십시오.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

 

여기서 언급되는 복은 멋진 인생을 살아내는 게 아닙니다. 그럴 거라면 굳이 하란을 떠날 필요는 없습니다. 복, 또는 행복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주어진다는 게 성경의 일관된 가르침입니다. 시 1:1, 2절이 그렇게 말합니다. 복 있는 사람은 악한 사람이나 오만한 자들과 함께하지 않고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고 그 율법을 밤낮 묵상한다고 말입니다. 이어지는 3절에서는 “그가 하는 모든 일이 다 형통하리로다.”라고 했습니다. 소원성취를 말하는 게 아니라 어떤 일이 일어나도 삶의 열매를 맺고 영혼의 평화를 누린다는 뜻입니다. 이런 삶은 다신론과 우상숭배에 기반한 제국에서 바랄 수 없기에 아브람은 지인 하나 없고 삶의 조건이 훨씬 열악한 낯선 땅 가나안으로 과감하게 떠날 수 있었습니다.

이런 이야기들이 오늘 우리의 현실과는 거리가 멀게 들릴지 모릅니다. 아닙니다. 고대 문명이나 현대 문명이나 본질은 비슷합니다. 행복한 조건을 향해서 돌진하게 만듭니다. 그런 삶이 멋져 보입니다. 아담과 이브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보았을 때 보암직하고 먹음직하고 지혜롭게 할 거 같다는 생각이 든 거와 같습니다. 제국 문명의 힘으로 학문도 발전시키고 과학도 발전시키고, 더 나아가서 복지도 상당한 수준으로 올려놓을 테니까요. 그래서 대중들도 제국을 좋아합니다. 문제는 옛날이나 지금이나 제국 체제를 유지하려면 결국에는 폭력을 행사하게 된다는 데에 있습니다. 지금 우리가 사는 이 시대가 얼마나 폭력적인지를 제가 일일이 설명할 필요가 없을 겁니다. 과학의 발전으로 인간은 더 손쉽게 사람을 죽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청소년들은 스마트폰의 폭력에 무방비로 노출되었습니다. 부동산 문제도 아주 폭력적입니다. ‘먹방’ 프로그램에서 보듯이 오늘날의 섭식 문제도 폭력적입니다. 그래도 재미있기만 하면 괜찮은 건가요?

 

약속의 하나님

아브람이 들은 복의 내용은 특이합니다. 아브람을 축복하는 자에게 복을 내리고, 저주하는 자에게는 저주를 내린다는 겁니다. 아브람에게 유별난 특권을 주겠다는 말씀이 아닙니다. 아브람에게 복의 근원이 달라졌다는 뜻입니다. 아브람이 경험한 것처럼, 그리고 이후에 그의 삶에서 드러난 것처럼 여호와 하나님의 약속을 영혼의 중심에 두는 것이 바로 복이라고 말입니다. 왜냐하면 여호와의 약속을 믿는 사람은 자기에게서 일어나는 모든 일을 복으로 받아들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세상을 바라보는 눈이 달라진 겁니다. 거꾸로 아브람의 경험을 실감하지 못하는 게 저주입니다. 세상을 바라보는 눈이 여전히 초라한데 머물기 때문입니다.

아브람은 하나님의 약속을 삶의 중심에 둔 사람입니다. 복을 주겠다는 약속, 복이 된다는 약속, 땅의 모든 족속이 아브람으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는 약속을 믿고 평생 그 약속에 온전히 기대서 살았습니다. 나그네를 환대하다가 천사를 만나기도 했습니다. 마치 톨스토이의 단편 <사랑이 있는 곳에 신도 있다>에 반지하에서 구두 수선공으로 살던 가난한 주인공이 일상에서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것처럼 말입니다. 자기 삶에서 천사를 만나는 것보다 더 복된 삶이 어디 있겠습니까. 매 순간이 아찔하게 경험될 겁니다. 이를 문학적으로 표현하면 모든 순간과 사건이 바로 시(詩)로 경험되는 거와 같습니다. 삶의 모든 순간을 약속의 하나님께서 내미시는 손길로 받아들이는 복된 삶을 위해서 아브람은 하란을 과감하게 떠났습니다.

약속의 하나님을 삶의 중심으로 삼는다는 게 무엇인지를, 그리고 그것이 왜 복된 삶인지를 조금 더 구체적으로 말씀드려야겠습니다. 이번 지방선거에서 대구시장에 당선된 사람이 있고, 시립 도서관 청소를 하는 비정규직 여자가 있다고 합시다. 누구의 인생이 더 복된지를 사람들은 다 알 것처럼 생각합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시장은 앞으로 더 높은 자리인 대통령이 되려고 온갖 노력을 다 기울 겁니다. 청소부는 청소 행위를 통해서 천사를 만나고 싶어 합니다. 청소부의 인생이야말로 복이 있습니다. 시장도 천사를 만나고 싶은 심정으로 시장직을 수행한다고 복이 있겠지요. 시장과 청소부 사이에 본질에서는 아무 차이가 없다는 뜻입니다. 이런 말이 어떤 이들에게는 비현실적으로 들릴 겁니다. 아직 삶에서 천사를 만나본 경험이 없기 때문입니다.

삶을 복되게, 그리고 천사를 만나고 싶은 심정으로 사는 사람들은 우리 주변에 많습니다. 그래서 세상이 이런 정도라도 돌아가는 겁니다. 교회에 다니지 않는 사람 중에도 그런 사람이 많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그들과 대립하지 않습니다. 가톨릭 신학자인 칼 라너의 표현대로 그들은 “익명의 그리스도인”이라고 할 수 있으니까요. 우리는 명시적인 그리스도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훨씬 더 생생하게 복의 근원이 되는 약속의 하나님을 알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예루살렘 성전과 율법의 절대화로 인해서 잊혔던 아브라함의 믿음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되살아났습니다. 그래서 제자들과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가난한 자에게 복이 있으리라!”는 삶의 차원까지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믿음의 의

이 문제를 바울은 오늘의 “둘째 말씀”인 롬 4장에서 자세하게 설명했습니다. 4:13절 말씀입니다. “아브라함이나 그 후손에게 세상의 상속자가 되리라고 하신 언약은 율법으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요 오직 믿음의 의로 말미암은 것이니라.” 부활의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그리스도인이야말로 아브라함의 믿음을 제대로 이어받은 사람들이라는 뜻입니다. 롬 9:8절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곧 육신의 자녀가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요 오직 약속의 자녀가 씨로 여기심을 받느니라.” 아브라함의 혈통을 자랑하는 유대인들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믿음의 본질을 알게 된 그리스도인이야말로 아브라함의 참된 후손이라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바로 우리가 아브라함처럼 복이 있는 사람이라는 말이 됩니다.

그리스도인에게 복은 믿음으로 의롭다는 인정을 받는 것입니다. 사람의 인정이 아니라 하나님의 인정입니다. 어떤 형편에서도 복되게 살아갈 수 있다는 사실을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에게서 허락받은 겁니다. 세상 사람은 늘 어떤 조건을 내세웁니다. 당신의 능력에 따라서 연봉을 주겠다고 말합니다. 유튜버들이 좋아요, 구독, 알림 설정을 반복해서 요구하는 이유도 그 숫자에 따라서 수입이 달라지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는 여호와 하나님을 옥황상제나 기업주 대표쯤 되는 분으로 말하지 않고 ‘아빠 아버지’라고 했습니다. 우리에게 일방적으로 내려주신 하나님의 은총을 보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평가하는 분이 아니라 사랑하는 분이니까요. 이런 말을 들어도 사람들은 여전히 불안하고 두려워하고 쫓깁니다. 자기 인생이 잘못될까, 왕따당할까, 비난받을까, 하고 말입니다. 이게 바로 죄입니다. 그래서 신약성경은 예수께서 우리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달리셨다고, 즉 십자가의 피로 우리의 죄가 씻겼으며, 그를 “믿으면 의롭다.” 인정받는다고 반복해서 말합니다. 이런 차원에 들어간 사람이야말로 복된 사람이 아닐까요?

조금 더 현실적으로 생각하면 이 세상은 위에서 말한 대로 돌아가지 않는 듯이 보입니다. 세상에서는 여전히 판단 받고, 때로는 추궁당하고 닦달당하니까요. 상대적인 빈곤감이 우리 영혼을 지배하기도 합니다. 특히 온라인 방식으로 너무 밀착된 현대 사회에서는 이런 상황이 더 가중됩니다. 스마트폰을 열기만 하면 부러워할 만한 소식들이 끊임없이 쏟아집니다. 여기저기 기웃하고, 다른 사람들이 기웃거려주기를 바라면서 자기 일상을 멋지게 연출해서 노출합니다. 이러니 영혼이 피곤하지 않을 리가 없습니다. 쫓기듯이 살아가는 오늘이야말로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라는 여호와의 명령을 실행에 옮겨야 할 순간이 아닐까요?

구체적으로 어떻게 해야 하는데, 하고 질문할 수 있습니다. 제가 정답을 드릴 수는 없습니다. 답을 찾는 하나의 기준은 익숙한 것과의 결별입니다. 이를 예배의 차원에서 말하면 일상과의 단절, 그리고 영적인 가나안으로의 순례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예기치 못한 기쁨과 복을 경험할 것입니다. 천사를 만나고, 홍해 갈라짐도 경험하고, 만나와 메추라기도 맛볼 것입니다. 하란에서는 상상할 수 없었던 경험이 주어집니다. 아주 낯선 경험이라서 놓치거나 실감하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부활의 주님을 보았을 때 제자들이 낯설어하고 두려워한 것처럼 말입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낯선 삶으로의 영적인 순례는 예수 그리스도를 참되게 만나는 데서 시작합니다. 용기를 내십시오. 믿음의 깊이로 더 들어가십시오. 아브람에게 주어진 복된 삶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할 겁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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