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의 파송 명령
마 9:35-10:8, 성령강림 후 3주, 2026년 6월 14일
마태복음 10장은 예수의 열두 제자가 파송 받은 이야기를 다루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열두 제자를 불러서 다음과 같은 권능을 부여했다고 합니다. 더러운 귀신을 쫓아내는 일,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는 일입니다. 이어서 베드로부터 가룟 유다까지 열두 제자의 이름이 나옵니다. 유다는 “예수를 판 자”라는 설명이 붙었습니다. 사도행전 1장에 따르면 훗날 교회는 유다 대신 맛디아를 열두 제자 목록에 올렸습니다. 여기서 열둘은 유대의 열두 지파를 연상시킵니다. 실제로는 남자 열두 제자만이 아니라 여자 제자들도 적지 않았습니다. 예수의 빈 무덤 전승에는 남자 열두 제자보다 여자들이 더 적극적으로 활동했습니다. 복음서는 유다만이 아니라 다른 제자들도 예수의 결정적인 운명에서 제자로서의 소임을 수행하지 못했다고 말합니다. 심지어 교회의 반석으로까지 추앙받은 베드로 역시 예수를 세 번이나 부인했습니다. 예수 부활 승천 이후 예루살렘 교회의 실제적인 지도자는 열두 제자가 아니라 예수의 동생 야고보였습니다. 바울은 열두 제자가 아닌데도 초기 그리스도교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위치에 올랐습니다. 신약 27편 중에서 10편 내외가 바울의 글로 채워질 정도였습니다. 본문의 파송 이야기에서는 거기에 거명된 사람이 아니라 예수로부터 파송을 받았다는 사실이 핵심입니다. 누구든지 예수의 파송에 붙들려 사는 사람이 바로 예수의 제자들인 겁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그대로 적용됩니다. 오늘 우리는 예수의 파송 명령을 진지하게 받아들이고 있을까요? 관심 없이 살고 있을까요?
하늘나라
예수의 제자로 산다는 것이 반드시 목사나 선교사가 되어야 한다는 뜻은 물론 아닙니다. 종교 개혁자들의 가르침에 따르면 모든 직업은 하나님으로부터의 소명입니다. 독일어 Beruf에는 직업, 사명, 소명이라는 뜻이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무슨 일을 하든지 자기 일을 하나님으로부터의 소명으로 생각합니다. 각자의 자리에서 예수의 파송 명령을 살아내는 것입니다. 그렇게 사는 그리스도인이면 누구나 다 예수의 제자입니다. 예수의 파송 명령에는 두 가지 내용이 담겨 있습니다. 한 가지를 7절이 이렇게 전합니다.
가면서 전파하여 말하되 천국이 가까이 왔다 하고 …
천국은 ἡ βασιλεία τῶν οὐρανῶν이라는 그리스어의 번역입니다. 우리말에 어울리는 번역으로는 하늘나라입니다. 의역으로는 하늘의 다스림입니다. 예수께서는 출가 랍비로 활동을 시작할 때 천국을 선포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때부터 예수께서 비로소 전파하여 이르시되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하시더라.”(마 4:17) 마가복음은 이렇게 전합니다. “이르시되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ἡ βασιλεία τοῦ Θεοῦ)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하시더라.”(막 1:15) 하늘나라와 하나님 나라가 동의어로 사용되었습니다. 고대인들에게 하늘은 생명의 원천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생명 창조주이기에 하늘이 곧 하나님이라는 말이 됩니다.
그들의 생각은 일단 직관적으로 일리가 있습니다. 현대 천체 물리학이 상당한 정도로 발전했으나 하늘이 가리키는 우주에 관해서 아는 게 별로 없습니다. 암흑에너지와 암흑물질이 우주의 대부분이지만 그게 뭔지 감춰져 있습니다. 자연과학의 본질이 원래 그렇습니다. 우주에 관해서 알면 알수록 모르는 게 더 많아집니다. 자연과학의 발전은 곧 앎과 모름의 경계선만 옮기는 것입니다. 태양계 안에서 지구는 특별한 행성입니다. 지구에만 생명이 가득합니다. 생명 현상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는 하늘에서 내려오는 태양 빛과 비입니다. 지구는 태양 에너지에서 분출되는 에너지의 20억분의 1만 받는다고 합니다. 0.00000005%입니다. 이 중에 30%는 지표면에 닿지 않고 대기권 밖으로 흩어집니다. 그런 정도의 에너지만으로 지구에서 수많은 생명체가 살아갑니다. 한 시간 동안 지구에 쏟아지는 태양 에너지의 양은 세계 모든 사람이 1년 동안 사용하는 에너지와 맞먹습니다. 태양 에너지를 활용할 수만 있다면 에너지 문제가 근본에서 해결될 겁니다. 고대인들도 태양의 위력을 실감했습니다. 태양을 신으로 섬기던 고대 문명이 많았던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성경은 그런 태양마저도 하나님이 창조했다고 선포합니다. 하늘나라나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말은 그 무엇으로 대체될 수 없는 생명의 힘이 바로 우리 곁에 있다는 뜻입니다. 실제로 햇빛과 비가 우리를 살리듯이 말입니다.
우리의 생명이 가능하게 하는 것들은 햇빛과 비만이 아닙니다. 흙도 우리 생존의 토대입니다. 공기도 그렇고 불도 그렇습니다. 돈으로 살 수 있는 게 아니라 주어진 것입니다. 6월 중순으로 접어든 한반도는 “온 세상에 하나님의 영광이 가득하다!”라는 찬송에 어울립니다. 들과 산이 온통 푸른 잎과 줄기로 가득합니다. 눈을 두는 곳마다 자연이 빚어내는 아름다움으로 가득합니다. 저는 지난봄에 ‘다이소’에서 천 원을 주고 산 백일홍 씨앗을 정원에 뿌렸습니다. 5월 하순부터 꽃대가 올라오더니 지금은 각양각색의 꽃을 피워내고 있습니다. 씨를 뿌리지 않아도 곳곳에 풀과 꽃이 환희의 송가를 부르듯이 생명 충만하게 세상을 채우고 있습니다. 이런 현상에서 우리는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말씀을, 즉 생명이 충만하다는 사실을 실감할 수 있습니다.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고 전파해야 할 이유는 사람들이 하늘나라를 실감하지 못(않)하기 때문입니다. 돈벌이만 생각하는 사람에게는 돈만 눈에 들어옵니다. 부동산이나 주식에만 정신을 파는 사람은 야생화에 마음이 가지 않습니다. 정치권력만 생각하는 사람에게는 정치권력이 그들의 세계입니다. 컴퓨터 게임에만 빠져 있는 사람은 그게 그의 삶입니다. 그런 일들이 우리에게 필요 없다는 뜻이 아닙니다. 돈도 가능한 한 넉넉하게 벌고, 취미생활도 잘하면 좋습니다. 문제는 그런 데만 정신을 팔기에 정작 우리 삶에서 절대적으로 중요한 생명 현상이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는 겁니다. 이미 주어졌는데도 느끼지도 못하고 실감하지도 못합니다.
다시 햇빛과 구름과 비와 흙과 이족보행과 숨쉬기를 생각해 보십시오. 아무리 가난해도 이런 삶에서 배제되는 일은 없습니다. 사랑과 평화와 기쁨과 만족감을 생각해 보십시오. 가난하다고 해서 사랑의 능력에서 배제되지 않습니다. 가난하지만 사랑의 능력이 있는 사람과 부자지만 사랑의 능력이 빈곤한 사람 중에서 여러분은 어느 인생을 선택하겠습니까? 자신이 소유한 수천억짜리 빌딩을 자랑스러워하는 사람과 뻐꾸기나 산비둘기 소리에 귀를 기울일 줄 아는 사람 중에서 여러분은 어느 인생을 선택하겠습니까? 빌딩 주인이면서 자연 현상에 감동하는 사람이 되고 싶겠으나, 그게 쉽지 않습니다. 그중 하나를 선택할 수밖에 없습니다.
삶의 방향 전환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사실을 어떻게 실감할 수 있을까요? 앞에서 태양계와 햇빛과 비와 야생화 등등을 제가 말했기에 자연주의자가 되어야 하나, 하고 생각할 분들이 있을 겁니다. 그것도 좋습니다. 무위자연의 상태에 들어가는 겁니다. 무위이무불위(無爲而無不爲)라는 경지에 들어간 사람들도 있습니다. 다 좋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창조를 믿기에 자연주의자들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거기에 머물지 않습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과 운명을 통해서 하늘나라를 실감하는 사람들입니다. 예수의 십자가와 부활은 죄에 대해서 죽고 의와 생명에 대해서 사는 겁니다. 이를 한마디로 압축한다면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이제 자기를 성취하라는 세상의 요구를 거부하고 생명의 근원인 하나님과의 관계에 집중하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초기 그리스도인은 로마 황제를 부러워하거나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오늘날 국내외 슈퍼리치나 최고 정치권력자들을 두려워하거나 부러워하지 않는 거와 같습니다. 그래서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주변 세계로부터 이상한 사람들로 비쳤습니다. 어딘가 모자라 보인다고 말입니다. 바울은 오히려 그렇게 무시하는 사람들을 초등학문에(골 2:20) 사로잡힌 자들이라고 비판했습니다.
어떻게 요즘 같은 세상에서 로마 황제와 슈퍼리치들을 부러워하지 않고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느냐, 너무 비현실적인 말이라고 생각할 분들이 있을 겁니다. 맞습니다. 우리는 늘 그런 생각이 지배하는 세상에서 삽니다. 거기서 벗어나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예수께서 하늘나라를 선포할 때 “회개하라!”(마 4:4, 메타노이아)라고 말씀하신 겁니다. 로마 황제가 제공하는 로마의 평화(Pax romana)가 아니라 그리스도가 제공하는 그리스도의 평화(Pax Christina)로 방향을 바꾸라고 말입니다. 방향 바꾸기가(paradigm shift) 정말 어렵습니다. 우리 삶도 관성의 법칙을 받기에 로마 황제의 신민으로 살다가 갑자기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기는 어렵습니다. 구도적인 자세로 신앙의 깊이로 조금씩이라도 들어가는 게 최선입니다. 이런 점에서 그 길을 함께 가는 도반이 중요합니다. 도반의 모임이 곧 제자 공동체, 즉 교회입니다.
인간의 품위, 하나님의 형상
본문은 말하는 파송 명령의 두 번째 항목은 바로 제자 공동체에 속한 이들이 행해야 할 일들에 관한 것입니다. 8절이 이렇게 전합니다.
병든 자를 고치며 죽은 자를 살리며 나병환자를 깨끗하게 하며 귀신을 쫓아내되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라.
여기 열거된 병과 죽음과 나병환자와 귀신 들림은 인간의 품위를 파괴하는 세력들입니다. 몸과 정신의 질병을 가리킵니다. 이어지는 마 11장2절 이하에는 세례 요한이 감옥에서 자기 제자들을 예수께 보내서 “당신이 그리스도냐?” 하고 묻는 장면이 나옵니다. 예수께서는 요한에게 가서 이렇게 전하라고 이릅니다. “맹인이 보며 못 걷는 사람이 걸으며 나병환자가 깨끗함을 받으며 못 듣는 자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 죽은 자를 살린다는 말이 특이합니다. 어떤 현상을 죽음이라고 보는지에 따라서 의미가 다릅니다. 대개는 임사체험입니다. 의료 수준이 열악했던 고대인들에게는 그런 일들이 흔했습니다. 여기에 열거된 항목들은 오늘날 의료진들이나 정부나 시민 단체가 감당합니다. 교회가 인권과 복지와 구제 등등의 문제에서 정부나 시민 단체와 경쟁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이 NGO나 정부 기관에 들어가서 그런 역할을 감당하면 됩니다. 핵심은 인간의 품위와 존엄성이 훼손되지 않는 세상이 되도록 최선을 다한다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제자로서의 삶입니다.
창세기의 창조 전승에 따르면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로 창조”(창 1:27)하셨습니다. 사람에 대한 찬사 중의 찬사입니다. 성경이 인간의 죄를 매우 심각하게 다루고 있으나 근본에서 인간 자체는 아주 높게 평가합니다. 거의 신처럼 봅니다. 시 8:5절에서 아주 구체적인 언급이 나옵니다. “그를 하나님보다 조금 못하게 하시고 영화와 존귀로 관을 씌우셨나이다.” 여기서 예외는 없습니다. 가난한 자들이나 장애인이나 성소수자들이나 공산주의자들도 인간답게 살아갈 권리가 있습니다. 모든 사람이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이들이니까요.
그런데 실제 역사에서 인간의 존엄성은 무참히 훼손됩니다. 악랄하다고 말할 수밖에 없는 일들이 일어납니다. 전쟁으로 인간다움은 무너집니다. 당연히 갖춰야 할 안전 장비를 갖추지 않아서 일어나는 산업재해도 많습니다. 재정 파산으로 가족 동반 자살도 일어납니다. 이런 일이 벌어지지 않도록 여려 차원에서 우리는 저항해야 합니다. 제가 보기에 교회가 저항해야 할 가장 큰 질병은 귀신 들림입니다. 귀신 들림이 생명을 파괴하는 근원이니까요. 귀신 들린 사람은 정신병원에 가야만 만날 수 있는 게 아닙니다. 제가 종종 언급한 우리나라의 교육 현실은 귀신 들림이라는 말을 빼놓고는 설명이 힘듭니다. 개인들이 거기에 저항하기가 너무 어렵습니다. 서울대학교 합격생 숫자로 고등학교 서열이 매겨지는 나라가, 중고등학교 점수로 인생 전체가 결정되는 나라가 대한민국 외에 어디에 있는지 저는 모르겠습니다. 공부는 대학교에 들어가서 잘 하면 되고, 고등학교까지는 전인 교육이어야 한다고 많은 사람이 생각합니다. 그래도 경쟁과 입시 중심의 이런 교육 제도는 변하지 않습니다. 우리 모두 귀신 들린 거 아닐까요? 누가 이런 귀신을 쫓아낼 수 있을까요? 교회가 그런 노력을 합니까? 수능 시즌이 되면 새벽기도회에 평소보다 더 많이 나올 겁니다. 신통력으로 소문이 자자한 대구 팔공산 갓바위에도 그런 기도를 올리는 불교 신자들이 몰립니다.
저는 그리스도인만이라도 이런 귀신 들림과 같은 시대정신에 저항해야 한다고 말하기가 망설여집니다. 약간 가난해도 괜찮으니까, 출세하려는 욕망에 떨어지지 말라고 말하기도 어렵습니다. 우리는 출가 수도승으로 사는 게 아니니까요. 어떻게 사는 게 옳은지를 정확하게 판단하기가 어렵습니다. 이럴 때일수록 우리는 신앙의 깊이로 더 들어가는 수밖에 없습니다. 가까이 온 하늘나라를 일상에서 실감하는 겁니다. 그게 잘 보이면 누가 옆에서 말하지 않아도 귀신 들림의 현상에서 조금씩이라도 벗어날 수 있을 겁니다. 그런 사람이 많아지면, 그러니까 영혼이 건강한 사람들이 많아지면 실제로 세상이 달라질 겁니다. 어느 정도로 달라질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예수 그리스도 이후 2천 년이 흘렀는데도 인간의 품위와 존엄이 높아졌다고 확실하게 말할 수 없으니까 말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느끼지 못할 뿐이지 결정적으로 새로운 세상이 이미 아주 가까이 온 건 아닐까요? 그런 세상이 오기를 간절히 기다리면서 오늘을 살아내는 사람들이 바로 그리스도인이 아닐까요?
제자들과 초기 그리스도인들이 왜 예수의 재림을 기다렸는지 이제 조금 더 분명하게 알 거 같습니다. 사람의 노력만으로는 “새 하늘과 새 땅”이라고 부를만한 세상을 만들 수 없으니까, 주의 재림을 대망할 수밖에 없었다고 말입니다. 대림절 신앙이 그것입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똑같습니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사람의 품위와 존엄성이 훼손되지 않는 세상이 오리라는 꿈을 꾸는 겁니다. 그런 꿈이 현실이 되도록 치열하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바로 그런 꿈을 제자들에게 심어주었습니다. 단지 심어준 것만이 아니라 그런 꿈을 궁극적인 생명으로 경험하게 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를 그리스도이며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할 수 있었습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예수의 파송 명령 두 가지를 영혼의 중심에 두고 일상을 살아가십시오. 그럴 때 예수의 제자가 될 것입니다. 첫째, 가까이 온 하늘나라를 일상에서 살아내십시오. 둘째, 생명을 파괴하는 악한 귀신 현상에 저항하십시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