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려움의 정체
마 10:24-39, 성령강림후 4주, 2026년 6월 21일
“진노의 날”
지난 주간에 저는 베르디의 <레퀴엠> 연주를 관람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Requiem aeternam(영원한 안식을 주소서)로 시작해서 Libera me(나를 구원하소서)로 끝납니다. 전체 곡 중에서 <진노의 날>(Dies irae)이 아주 인상적입니다. 현악기와 관악기와 타악기와 합창단이 한데 어우러지면서 쏟아내는 강렬한 불협화음이 마치 지축을 흔드는 벼락처럼 연주장 가득 채웠습니다. 합창단이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진노의 날, 바로 그날, 세상은 잿더미로 변하리라. 얼마나 큰 두려움으로 다가올 것인가. 심판관이 오실 그때 모든 것을 엄격히 심판하시리라!” 그 곡을 들으면서 저는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린 장면을 떠올렸습니다. 막 15:34절은 예수께서 마지막 순간에 이렇게 외쳤다고 전합니다.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이 문장은 복음서에 드물게 나오는 아람어입니다. 아람어는 당시 유대 지역 인근 사람들이 사용하던 말입니다. 이 문장의 뜻은 놀랍게도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입니다.
예수께서 체포당하던 날 밤 기도하러 겟세마네 동산에 갔을 때도 비슷한 장면이 나옵니다. 막 14:33절에 따르면 예수께서 “심히 놀라시며 슬퍼하셨다.”라고 했으며, 이어지는 34절에서 다시 반복해서 “내 마음이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 너희는 여기 머물러 깨어있으라.”라고 말씀하셨다고 합니다. 예수께서 실제로 죽음을 두려워한 것일까요? 소크라테스 같은 철학자는 사약을 받으면서도 유유자적하는 태도를 보였고, 종교적 신념이나 애국심으로 죽음을 대담하게 받아들이는 이들도 적지 않은데 말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자 그리스도이신 예수는 왜 마지막 순간에 이렇게 흔들리는 모습을 보인 걸까요?
예수님은 십자가의 죽음이라는 마지막 순간만이 아니라 길지 않은 한평생의 삶도 순탄하지 않았습니다. 아주 일반적인 관점으로 말씀드리는 겁니다. 결혼도 하지 않았고 당연히 자식도 없었습니다. 나사렛 촌놈이라는 말도 들었습니다. 유대교 고위층으로부터 감시 대상에 올랐습니다. 당시 주류가 아니라 철저하게 비주류였습니다. 오죽했으면 공중의 새도 깃들일 곳이 있고 여우도 굴이 있으나 본인은 머리 둘 곳마저 없다고 토로하셨겠습니까. 불교 창시자인 석가모니는 비록 출가 전이지만 결혼도 했고 자식도 있었고 천수를 다했습니다. 생전에 주변에서 존경을 한 몸에 받았습니다. 마찬가지로 이슬람교의 무함마드도 많은 이에게 존경받으면서 60대 초반까지 살았습니다. 아내도 여럿이 있었고, 자녀들도 많았습니다. 한마디로 석가모니나 무함마드는 누구나 부러워할 만한 인생을 살았으나 예수는 누구나 부담스럽게 생각할 만한 인생을 산 겁니다. 예수의 삶은 겉으로 보면 분명한 혼란이고 두려움입니다. 남이 부러워할 만한 인생이나, 좋은 게 좋다는 식으로 사는 인생만 생각한다면 굳이 그리스도인이 될 필요는 없습니다. 더구나 예수의 제자는 언감생심입니다. 예수님이 우리가 원하는 행복한 인생살이에 실제로 도움이 된다고 생각하시나요? 아니면 종교적 장식품 정도일까요?
초기 그리스도교의 실존
이런 영적 고민을 제자들과 초기 그리스도인들도 피할 수 없었습니다. 마 10:1-15절에는 예수의 파송 명령이 나옵니다. 파송 명령을 받은 제자들의 길은 대접이 아니라 미움입니다. 그래서 16절에 따르면 예수께서는 “양을 이리 가운데로 보냄과 같도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17절은 이렇습니다. “사람들을 삼가라 그들이 너희를 공회에 넘겨 주겠고 그들의 회당에서 채찍질하리라.” 실제로 초기 그리스도교는 박해를 많이 받았습니다. 유대교 회당에서 쫓겨났고, 로마 권력의 희생양도 되었습니다. 60년대 네로 황제의 박해와 80-90년대 도미티아누스 황제의 박해는 유명합니다. 당시의 위기감이 오늘 설교 본문에 반영되었습니다. 마태복음이 기록된 시기는 예루살렘이 로마 티투스(Titus Flavius Vespasianus) 장군에 의해서 함락된 70년 이후입니다. 34-36절입니다.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화평이 아니요 검을 주러 왔노라 내가 온 것은 사람이 그 아버지와, 딸이 그 어머니와, 며느리가 시어머니와 불화하게 하려 함이니 사람의 원수가 자기 집안 식구리라.
표현이 너무 살벌합니다. 평화의 왕이신 예수께서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 왔다고 말씀하셨다는 겁니다. 칼을 쓰는 자는 칼로 망한다고 분명히 말씀하신 분인데 말입니다. 속옷을 가지려고 하는 자에게는 겉옷까지 주고, 억지로 오 리를 가게 하거든 십 리를 동행하라고 하셨고, 구하는 자에게 주며 꾸고자 하는 자에게 거절하지 말라고 하신 분인데 말입니다.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마 5:44) 오늘 본문 말씀과 서로 반대처럼 들리는 말씀이지만 근본에서는 같은 의미입니다. 당시에 원수를 사랑할 만한 영적 내공이 없으면 그리스도인은 제대로 세상을 버텨낼 수 없었습니다. 그리스도인이 처한 실존이 칼과 같았으니까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식구들도 한 사람 그리스도인의 영적 세계를 이해하지 못하는 일까지 벌어질 수 있으니까 “사람의 원수가 자기 집안 식구”라고 말씀하신 겁니다.
어떤 그리스도인은 이런 구절을 근거로 신앙을 반대하는 남편이나 아내, 또는 시어머니 등을 실제로 원수라고 여깁니다. 요즘이야 그런 일이 없겠으나 30-40년 전만 하더라도 그렇게 생각하는 그리스도인들이 있었습니다. 그건 오해입니다. 그리스도교 신앙을 이해하지 못하는 그들을 실제적인 원수로 대할 게 아니라 가능한 한 사랑해야겠지요. 그게 바로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씀의 본질이 아닐까요? 어쨌든지 마 10:36절에 나오는 원수라는 말은 은유적 표현입니다. 이런 표현이 실제로 말하려는 핵심은 그리스도교는 좋은 게 좋다는 식으로 삶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겁니다. 그게 진리의 길이고, 좁은 문의 길이고, 깨어서 기도하는 삶의 길이기 때문입니다.
이를 조금 더 구체적으로 설명하면 이렇습니다. 그리스도교 신앙을 삶의 바탕에 둔 사람과 그리스도교 신앙에서 벗어난 사람과는, 인격적이고 사이가 좋은 부부나 형제나 친구라 하더라도 참된 의미에서 대화가 쉽지 않습니다. 소소한 일상의 대화는 가능합니다. 이번 주말 외식 때 어떤 맛집으로 갈지, 꽃구경을 어디로 갈지, 카페는 어디가 좋은지, 외국 나들이는 어디로 할지, 무슨 영화를 볼지는 서로 대화를 나눌 수 있습니다. 그런 대화가 통하는 것만도 우리 삶에 활력소가 되어서 다행이긴 합니다. 그러나 죽음과 죽음 이후, 그리고 하나님 나라와 종말, 영생 등등에 관해서는 말할 게 없습니다. 가장 궁극적인 것에 관해서 대화를 나눌 수 없는 사태를 가리켜서 원수라고 말하는 겁니다. 여러분은 가족이나 친구들이나 지인들과 어느 정도의 차원에서 대화를 나누고 사는지요? 삶의 어떤 부분을 공유합니까? 외로움을 느끼지는 않으시나요? 그게 두렵지는 않나요? 여러분만이 아니라 예수도 두려워했고, 초기 그리스도인들도 두려워했습니다. 그런 두려움에 대한 경험이 없으면, 그러니까 어디서나 적당하게 인기를 끌면서 고독도 없고 두려움도 없다면, 다시 말해서 원수가 없다면 그는 그리스도인이 아닐지 모릅니다.
“두려워하지 말라.”
오늘날 우리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교 신앙과 점점 더 멀어지는 세상을 살고 있습니다. 종교 이후의 세상이 열립니다. 인생살이에서 즐길만한 것들이 지천입니다. 저의 중고등학교 시절만 하더라도 교회가 재미있었는데 말입니다. 특히 AI가 거의 신처럼 받아들여집니다. 이런 세상에서 그리스도인은 소외와 불안과 고독과 두려움을 느낄 수도 있습니다. 세상물정에 빨리 반응하는 젊은 그리스도인들이 더 그런 거 같습니다. 요즘 같은 세상에 예수 믿는 청년들은 희귀종으로 비칠지 모릅니다. 유대 회당에서 쫓겨나고, 로마 제국으로부터 박해를 받던 그리스도인들의 실존과 비슷합니다. 오늘 설교 본문은 “두려워하지 말라.”라는 말을 반복합니다. 어떻게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나요? 10:28절을 기억해 두십시오.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실 수 있는 이를 두려워하라.
이런 문장을 교회 밖에 있는 사람들은 기분 나쁘게 생각할 겁니다. 아니면 비웃을 겁니다. 오해받을 수 있는 단어를 먼저 설명해야겠습니다. 먼저 지옥(게헨나)입니다. 그리스도인도 마찬가지인데, 지옥을 늘 불구덩이나 구더기가 들끓는 장소쯤으로 여깁니다. 그런 표현은 모두 은유입니다. 지옥은 완전한 절망과 허무가 지배하는 곳입니다. 그래서 단테 알리기에리는 <신곡> 지옥 편 제3곡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여기 들어오는 너희들은 모든 희망을 버릴지어다.”(24쪽) 부자나 권력자가 되어 거들먹거리고 널리 이름을 떨치면서 지금 여기서 잘 먹고 잘사는 일에만 관심이 있는 사람에게는 성경이 말하는 영원함에 대한 희망이 없습니다. 그래도 상관없다고 여깁니다. 영원한 생명을 외면하고 비웃습니다. 자기 인생을 자기식으로 마음껏 즐기면서 사는 것으로 만족하겠다는 겁니다. 그럴듯해 보이지만 그게 바로 지옥입니다. 왜냐하면 자기 스스로 하나님의 사랑에서 배척당하는 삶이기 때문입니다. “지옥에 멸한다.”라는 말은 하나님이 그들을 지옥에 던지는 게 아니라 사람이 자기 스스로 거기에 빠지는 겁니다. 21세기를 사는 현대인은 아주 멋진 인생을 연출하는 듯이 보이나 실제로는 지옥에서 사는 건 아닐까요?
다음은 몸과 영혼입니다. 몸은 죽이지만 영혼은 죽이지 못하는 세력을 두려워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몸은 아주 명확합니다. 지금 우리의 모든 일상은 몸으로 이뤄집니다. 로마 황제는 그리스도인들에게 몸으로 사는 일상에서 불이익을 줄 수 있었습니다. 아주 심하면 마녀사냥하듯이 그리스도인을 조리돌림을 했습니다. 예수까지 죽인 그런 세력은 오늘도 우리의 삶을 좌지우지합니다. 거칠 게 없다는 식으로 몰아치는 오늘의 자본주의가 우리의 일상을 완전히 지배합니다. 여기서 자유로운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그런 세력이 우리 영혼을 죽이지 못한다는 말은 무슨 뜻일까요? 그들이 죽이지 못한다는 영혼은 무엇일까요? 플라톤은 영육이 원론으로 이런 문제를 풀었습니다. 육은 유한하고 악하며 영만 무한하고 선하다고 말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교 신앙에서 영육 이원론적 인간론은 자리가 없습니다. 영과 육은 유기체인 한 사람에게서 결속되어 있습니다. 영은 육과 함께, 육은 영과 함께 살아야 합니다. 그런데 오늘날은 플라톤과 정반대로 몸만을 절대화합니다. 정신(영혼)도 결국은 몸의 속성일 뿐이라고 주장하는 자연과학자들도 있습니다. 인간 정신은 뇌의 작용에 불과하다고 말입니다. 만약 그런 주장이 옳다면 몸은 죽이나 영혼은 죽이지 못하는 자들이라는 본문의 말씀은 공허한 겁니다. 몸을 죽이는 자들을 두려워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본문은 그들을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합니다. 도대체 그들이 죽이지 못하는 영혼이 뭘까요?
영혼의 깊이
제가 다른 설교에서도 종종 짚은 것처럼 세상에서 큰소리를 치는 이들이 손을 댈 수 없는 우리 삶의 깊은 차원이 무엇인지를 구체적으로 살펴보십시오. 구름을 보고 새로운 세상을 꿈꿀 수 있습니다. 한밤중 빗소리에 귀를 기울일 수 있습니다. 예배 모임에 현장이나 온라인으로 참여할 수 있습니다. 이런 일에는 요즘 왕처럼 행세하는 돈의 허락을 받지 않아도 됩니다. 대화할 때 상대방의 말에 귀를 기울일 수 있습니다. 예수의 말씀대로 하늘을 나는 새와 들의 백합화를 보는 데는 법무부 장관의 허락이 필요 없습니다. 아무리 가난해도 사과를 먹으면서 그 깊은맛에 놀라워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삶에서 정말 중요한 일들은 세상의 그 어떤 세력으로부터도 방해를 받지 않습니다. 이처럼 우리 삶에서 “정말 중요한 일들을” 분별하고 거기서 삶의 충만을 경험하는 능력이야말로 영혼의 능력입니다. 그 능력의 최고 높은 경지가 바로 하나님 경험입니다. 그것은 롬 6:8이 가리키듯이 죽음이 무효가 되는 경지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하나님 안에 영원한 생명이 있다고 말합니다.
마르쿠스 가브리엘은 <인간은 동물이다> 320쪽 이하에서 인간의 정신(영혼)은 자연의 범주에 제한받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정신은 자연화될 수 없다. 즉 정신은 완전히 자연과학적으로 설명될 수 없으며, 따라서 수학적인 형식 언어로 해독될 수 없다.” 만약 인간이 다른 동물처럼 순전히 몸으로만 해석되는 존재라면 윤리는 들어설 자리가 없습니다. 사자나 호랑이처럼 자연의 포식자들은 어미가 배가 고프면 새끼보다 자기가 먼저 먹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아무리 배가 고파도 자식에게 먼저 먹입니다. 인간은 자기에게 경제적인 손실이 오더라도 이웃을 보살필 줄 압니다. 인간만이 윤리적인 동물이라는 사실은 인간만이 고유한 정신으로 산다는 뜻입니다. 가브리엘이 말하는 그 인간의 정신은 오늘 본문이 말하는 영혼입니다. 이 세상의 그 어떤 세력도 우리의 영혼을 지배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뚫어봐야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오해는 마십시오. 몸은 병들거나 학대당해도 된다는 말씀이 아닙니다. 무조건 가난하게 살아도 된다는 말이 아닙니다. 몸을 지배하는 세력만을 두려워하는 게 문제입니다. 거기서 자유로운 영혼의 삶을 소홀하게 여깁니다. 그러다 보니 걱정거리가 한둘이 아닙니다. 아이들을 유치원 시절부터 닦달해야 합니다. 대한민국이라는 국가 차원에서도 그렇습니다. 전자 제품이나 자동차만이 아니라 군사 무기를 팔아서라도 부자 나라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방식이라면 개인도 그렇고, 국가도 마찬가지로 무한경쟁이라는 메커니즘에서 모두 희생자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두려움의 방향을 바꿔야 합니다. 몸만 지배하는 세력이 아니라 몸과 영혼까지 지배하는 하나님께로 말입니다. 즉 영혼의 자유를 소중하게 여기는 삶으로의 방향 전환입니다. 클릭 하나로 상품을 구매하는 온라인 쇼핑몰 방식이 아니라 하나님을 신뢰함으로써 선물로 주어지는 차원으로의 방향 전환 말입니다.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라고 불렀던 예수께서는 무엇을 먹을까 마실까 입을까를 염려하지 말라고, 우리 아버지 하나님께서 그것이 우리에게 필요하다는 사실을 이미 다 아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돌보시며 사랑하신다는 사실이 일상에서 느껴지나요?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이미 충분하게 받았으니, 삶을 두려워하지 말고 여러분의 영혼을 더 세심하게 돌보십시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