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다움의 마지막 보루
교황 레오 14세가 발표한 새 회칙 『고귀한 인류(Magnifica Humanitas)』가 전 세계에 큰 파장을 일으키고 있다. 회칙은 그 시대의 중요한 영적·사회적 문제에 대한 교회의 공식 입장을 담은 문서이다. 『고귀한 인류』에 담긴 “AI를 무장해제해야 한다”는 선언은 다소 충격적으로 들리지만 과학기술에 대한 혐오를 선동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알고리즘의 완벽함에 길들여져 스스로 사유하고 행동하는 능력을 잃어가는 현대 인류를 향한 엄중한 경고이다. 무장해제라는 다소 자극적인 표현은 기술 권력자들이 호모 데우스가 되어 인류의 운명을 좌우하지 못하도록 해야 한다는 뜻이다.
AI 시대가 우리 삶 깊숙이 들어왔다. 아침에 눈을 떠 밤에 잠들 때까지 알고리즘은 무엇을 먹고, 무엇을 읽으며, 어떤 선택을 해야 가장 효율적인지 계산해 준다. 질문을 던지면 망설임 없이 즉각 답하는 이 시스템은 매력적이다. 트랜스휴머니즘도 더 이상 공상의 영역이 아니다. 지식을 얻기 위해 질문하고 자료를 찾으며 사유를 넓혀가는 수작업은 오히려 원시적으로 보인다. 여기서 떠오르는 질문은 ‘인간의 인간다움은 무엇인가?’이다.
캐나다에 잠시 머무는 동안 테리 팍스(Terry Fox)에 대해 알게 되었다. 그는 1977년 열아홉 살에 골육종으로 오른쪽 다리를 골반 아래 15cm만 남기고 절단했다. 절망의 심연에서 그가 바라본 것은 병실 안에서 신음하는 어린 암 환자들이었다. 그들에게 희망의 증거가 되겠다고 다짐한 그는, 의족을 찬 채 캐나다 대륙을 횡단하는 ‘희망의 마라톤’이라는 무모한 도전을 시작했다.
1980년 4월 12일, 테리는 캐나다 동쪽 끝 뉴펀들랜드주 세인트존스의 대서양 바다에 의족을 적시며 긴 여정을 시작했다. 거의 매일 마라톤 풀코스에 가까운 거리를 달리는 동안 그의 다리에서는 진물과 피가 멈추지 않았다. 무모하다 못해 어리석어 보이는 질주였다. 결국 같은 해 9월 1일, 온타리오주 선더베이 인근에서 그는 극심한 가슴 통증과 함께 쓰러졌다. 암이 폐로 전이된 것이다. 대륙 횡단은 5,373km 지점에서 멈췄고 그의 육체는 무너졌지만, 전 세계가 그의 멈추지 않는 의지에 감동했고 목표했던 기금은 마침내 모였다.
만약 그 시절, 지금과 같은 고도화된 AI가 존재했다면 어떤 판단을 내렸을까. 알고리즘은 의학적 데이터와 신체 조건을 분석해 ‘생존 확률 희박’, ‘신체 파괴 위험’, ‘극도로 비효율적인 행위’라는 진단과 함께 도전을 중단하라고 권고했을지 모른다. 그의 무모한 도전은 오류이자 비효율로 보였을 것이다. 그러나 인간의 위대함은 바로 그 ‘오류’와 ‘비효율’에서 탄생한다. 테리 팍스는 자신의 고통을 희망으로 전환하는 삶의 연금술을 보여주었다. 의족과 살점이 쏠리는 고통 속에서도 그를 지탱한 것은 누군가에게 희망을 전하고 싶다는 의지였다. 도전은 중도에 멈췄지만 그의 실패는 인간 정신의 숭고함을 보여준다.
AI는 원리상 고통을 느끼지 않으며 효율을 극대화하도록 설계된다. 반면 인간은 오류를 범하고, 쉽게 지치고, 상처받으며, 때로 무모한 선택을 한다. 교황 레오 14세가 AI의 무장해제를 말하며 되찾고자 한 인류의 고귀함은 바로 그 불완전함 속에 숨어 있다. 인간의 존엄성은 기계처럼 완벽해지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부서질 것을 알면서도 가치 있는 일을 위해 자신을 던지는 의지와 숭고함에 있다.
AI 시대의 도래를 종말론적인 공포로 바라볼 필요는 없다. 다만 우리가 경계해야 할 것은 기술이 우리 삶의 최종 결정권마저 찬탈하게 두는 태도다. 진짜 삶은 매끄럽고 차가운 스마트폰 모니터 속에 존재하지 않는다. 테리 팍스가 추위와 더위를 무릅쓰고 피를 흘리며 달렸던 그 거칠고 팍팍한 아스팔트 위, 바로 그 자리에 삶의 진실이 있다. 기술의 권능이 인간을 압도하는 시대일수록 우리가 붙잡아야 할 것은 기계의 완벽함이 아니라 고통 속에서도 한 걸음을 내딛는 인간 고유의 불완전한 의지다. 대지 위에 새겨진 인간의 발자국이야말로 그 어떤 인공지능도 모방할 수 없는 인간다움의 마지막 보루다.
(* 2026/06/12일자 경향신문 '사유와 성찰' 원고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