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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과 산업 : (독일 공작연맹의 배경 및 기본이념)

작성자나무모아|작성시간03.05.25|조회수915 목록 댓글 0
예술과 산업: Deutsher WerkBund(German Work Union); 도이치 베르크분트

독일 공작연맹의 배경 및 기본이념

19세기 말과 20세기 초, 베르크분트는 산업사회로 접어 든 독일에서 건축과 디자인의 새로운 이
론의 중심이었다. 기술과 경제의 발전은 소위 모더니티를 나았는데 이에 걸맞는 건축과 디자인
의 새로운 이론을 모색하였던 것이다. 이미 살펴본 19세기 말에 새로운 근대 디자인 사상을 윌리
엄 모리스나 존 러스킨의 미술 공예 운동(Art & Craft Movement)에서 보았듯이 이들은 디자인과
건축에 있어 윤리감이나 이데올로기를 갖고 있었다. 아르누보 또한 단순한 장식 양식이 아니라
시대를 인식하고 표현하는 디자인 양식을 추구하였다. 이러한 때에 독일에서는 미술학교와 미술
공예학교의 개혁이 성행하였는데, ‘예술’과 ‘공예’와 ‘공업’의 통일을 실현하려는 목표로
실제 작업장에서의 교육을 구체화하여 이를 실현하려 하였다.
독일 프로이센 상무성의 명령으로 헤르만 무테지우스(Hermann Muthesius)는 영국의 눈부신? 산업
화(기계화의 가능성, 영국의 전원 주택 디자인 등)를 배워서 독일에서의 근대화 추진을 위한 실
천적 이론적 토대를 만들었는데, 이것이 기계 문명을 바탕으로 한 ‘합리주의 또는 합리적 유물
론’이다. 이것은 산업 혁명으로 인한 기계화 시대에 있어서 교육기관과 산업을 결합시키서 보
다 실질적인 근대화를 추진하려는 것이다. 이러한 시대적 배경 속에서 Werkbund, 독일공작연맹
은 1907년 10월 뮌헨에서 결성되었으며 즉물적인 조형운동을 추진하였다. 이 운동의 기본 이념
은 적극적으로 기계를 도입하고, 예술, 공업, 공예의 통합시켜서 독일 공업제품의 ‘양질화’와
‘규격화’를 이루고 이를 통해 제품의 품질의 향상은 물론 세계로 수출하는 것이다. 즉 공업제
품의 양적이고 질적인 발전을 실현하기 제품의 규격화와 디자인의 단순화를 추구하였다. 그리고
이를 위해 당시 선진국인 영국의 합리주의를 바탕으로 즉물적인 디자인을 추구하였다. 또한 당
시 여러 가지 장식 양식이 만들지고 있어 이러한 가운데 고유한 양식의 필료성을 주장하고 결국
‘양식’이야말로 ‘문화의 표명’으로 인식하였다.

비스마르크(Bismarck Ottovon, 1815 - 98)의 독일통일과 목적은 강력한 경제국가의 건설이었다.
즉 산업화를 통행 독일의 번영이었는데, 이것이 베르크분트의 핵심 철학이다. 따라서 헤르만 무
테지우스는 베르크분트를 ‘도이치 베르크분트’(the Deutscher Werkbund)라고 강조하고 예술가
와 기업가, 그리고 상인의 연합회로서 산업품의 수출하기 위한 선조건(preconditions)을 창출하
는 것에 집중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또한 베르크분트 주요 대상 계층은 산업을 이끄는 상위계
층인 “교육받는 산업 엘리트 집단”이었다. 예술과 산업을 결합하여 수출품을 개발 생산하자는
헤르만 무테지우수의 주장은 당시 급속도로 산업이 발전하던 미국과 경쟁할 수 있는 국가의 산업
능력을 성장시키는 것이다. 이를 위해 먼저 독일 사회의 산업품에 대한 취향 자체를 향상시키는
것이 중요하다고 판단하고 미국의 시카고 학교를 선공적인 모델로 삼았다. 따라서 베르크분트의
이념은 기능주의(functionalism)와 표현주의(expression‎ism)가 주요한 배경이념이 되었다. 이들
의 궁극적인 목적은 ‘독일의 역사와 국가 정신을 담고 있는 스타일’을 창조하는 것이었는데,
이러한 목적에는 국가주의(nationalism)라는 중요한 이데올로기가 전제되어 있다. 산업의 성장
과 강력한 해군력, 그리고 자국에 대한 정치적 사회적 우월감은 실제로 1910년대에 영국과 독일
간의 충돌로써 나타나고 결국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는 원인이 되기도 한다. 이러한 독일 국
가와 독일인의 우월감은 철학적으로 헤겔(Hegel)의 이상주의(idealism)가 뒷받침해 주었다. 즉
역사의 구조와 계획 내에서 이미 보다 상위적인 개념과 생각을 실현할 수 있는 사람 또는 인종
이 숙명적으로 정해져 있다는 것인데, 이러한 민족이 바로 독일인이라는 이데올로기이다. 베르크
분트에서는 이미 헤르만 무테지우스가 말한 “교육받는 산업 엘리트 집단”이 바로 그러한 운명
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고 이들이 이끄는 독일이 바로 세계의 경제 시장을 장악하고 이끌어 갈
수 있다는 신념이다.



규격화 디자인

무테지우스에 의해 작성된 베르크분트의 발족 취지문은 다음과 같다. "건축 및 그 밖의 모
든 베르크분트의 활동영역은 규격화를 향하여 나아간다. 그리하여 비로소 그들의 영역
은 예전의 조화롭던 문화시대에 갖추고 있던, 널리 일반적이었던 의의를 되찾게 될 
수 있을 것이다. 규격화는 유익한 통일의 성과로서 파악되어야 하며, 그리하여 비로
소 일반적으로 타당하며 보다 확실한 취미가 보급될 것이다. 규격화는 유익한 통일의
 성과로서 파악되어야 하며, 그리하여 비로소 일반적으로 타당하며 보다 확실한 취미
가 보급될 것이다. 일반인의 취미의 수준이 향상되지 않는 한 독일 공예품의 외국으
로의 효과덕인 확산도 기대할 수 없다." 기계화에 대한 경제적 변화는 대량 생산과 대량
소비에 적합한 제품을 생산하는 것 뿐만 아니라 그 제품이 당시의 사회적 사고과 이념을 반영하
고 이로써의 세계를 지배하는 국가적 발전을 꾀하는 것이다. 독일인의 일생 생활에서의 예술에
대한 생각과 취향 자체를 향상 시키는 것을 토대로 하여 독일의 제품의 질이 또한 향상되고 이로
써 세계로 수출하고 그들의 우수성의 세계에 알리는 것이 그 목적이었던 것이다. 이러한 것은 기
본적으로 규격화(standardization)를 통해 가능한 것이다. 규격화는 대량생산을 위한 가장 기본
적인 개념으로 제품과 작업의 규격화는 제품군을 유형적으로 분류하고 그것을 대량생산하기 위
해 규격화해야 한다. 베르크분트는 예술가들에게 기계화는 저항할 수 없는 현대 생활의 특징이라
는 것을 설득시켰으며, 만약 예술가들이 현대 산업과 효과적으로 협력하기 위해서는 그들 스스로
가 기계 테크놀리지와 새로운 재료에 대해 익숙해져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1910과 1911년에 있었
던 베르크분트 회의의 주요 논쟁점은 전통적인 제품 생산 방법과 재료에 대한 선호도를 예술가
들 사이에서 없애는 것이 어려운 문제이고 따라서 베르크분트 예술가들은 디자인 양식의 혁신보
다 제품과 그 재료의 질적인 향상시키는 것에 더욱 관심을 갖게 되었다. 결국 이들은 컬러의 사
용과 염색을 표준화하고 교육에 있어서 보다 전문화된 아트스쿨(Art School)을 다시 만드 것 등
의 개혁을 추진하였다


하지만 1914년에 규격화는 하나의 논쟁이 되었는데, 앙리 반 데 벨데 (Henry Van de Velde)
의 베르크분트의 규격화에 대한 반박문에서 비롯된다. 그는 "베르크분트 내에 예술가가 있는
 한 도한 그렇게 베르크분의 운영에 영향력을 가지고 있는 한 그들은 표준과 규격의
 제안에 대해 항의할 것이다. 예술가라고 하는 것은 본질적으로 불타오르는 개인주의
자들이며 자유의지를 가진 창조자이다. 그들은 일정한 틀이나 기준을 강요하는 원리를
 결코 자발적으로 따르지 않을 것이다... 아직 양식이 생성되지 않은 상태에서 일
정한 틀이 나타나기를 바라는 것은 그야말로 원인에 앞서 결과를 보고자 하는 것과 
마찬가지다...이러한 독일 공예를 효과적으로 외국에 널리 펼치기에는 외국이 예로부
터 취미나 전통, 그리고 문화에 있어서 우리를 능가하고 있는 만큼 이러한 시기상조
적인 방식을 통해서는 점점 더 그 가망성이 희박하다." 이것은 베르크분트의 ‘규격
화’와 반 데 벨데의 ‘개인주의’간의 논쟁이다. 결국은 베르크분트 내의 서로 다른 두 입장
이 존재하게 되었는데, 예술가의 무한한 자유를 보장을 요구하는 집단(이들의 대부분은 독일의
아르누보 예술가였던 유겐트스틸, Jugendsil, 가령 Walter Gropius, Bruno Taut 등)과 대량생산
을 위한 제품의 규격화와 판매를 위한 제품의 질의 향상을 꾀하는 집단이다. 무테지우스는 예술
가의 자유를 제한하려는 의도는 없다고 반대 집단을 설득하려 하였으나 결국 실패하고 말았다.
하지만 반 데 벨데 집단이 기계에 의한 디자인과 전형적인 양식 또는 스타일의 필요성 자체를 거
부한 것은 아니었다. 대다수의 베르크분트 예술가들은 예술과 산업간에 균형이 필요하다고 생각
하였다.

무테지우스나 반 데 벨데 양쪽 모두 생활환경의 변혁을 목표로 삼고 있었다.하지만 무테지
우스는 새로운 양식을 창출하기 보다는 현재의 양식을 규격화하여 대량 생산의 적합한 제품을
디자인하고 이를 통해 독일 산업 제품을 세계 시장을 장악하는 것이지만, 반면에 반 데 벨데는
아직도 혼란 상태에서 장식양식이 확산되어 가고 있는 가운데 새로운 양식을 창출해 내
는 것으로서 새로운 생활환경을 창출하려는 입장이다.기본적으로 베르크분트의 이념에 댜
햐서는 동의하지만 그 이념을 바탕으로 배르크분트를 운영하는 정책에 대하여 상이한 견해를 보
였던 것이다. 1914년 8월, 제 1차 세계 대전의 발발은 베르크분트에도 많은 영향을 미쳤는데, 결
국 대량생산과 규격화를 주장했든 헤르만 무테지우스가 환영받게 되었다.
피터 베렌스(Peter Behrens)와 앙리 반 데 벨데(Henry Van De Velde)의 디자인

베르크분트 내의 두 가지 입장은 그 디자인 양식에서도 다르게 표현되었는데, 그 대표적인 디자
이너가 바로 베렌스(Peter Behrens, 1868 - 1940)와 반 데 벨데였다. 먼저 베렌스의 디자인을 보
면, 베렌스는 1907년 AEG(Allegemeine Elektricitaets Gesellschaft)사(알게마이네 전기
회사)의 미술 고문이 되어 AEG사의 건물, 제품, 그리고 그래픽 디자인까지 담당하
게 되었다. 대표적인 작품은 1909년에 AEG사의 터빈 공장 디자인으로 이 공장은 철과 
콘크리트와 유리를 사용하고 장식성을 배제한 대표적인 디자인이다. 이 공장의 바닥은
 방음을 위하여 나무 블럭으로 되어 있고 작업의 흐름과 물건 운반 등의 요소를 전
제로하여 전체가 구성되어 있다.그의 디자인 특징은 이처럼 장식을 전혀 하지 않고 기능
에 필요한 부품만으로 만들어졌다는 것이다.베렌스는 장식이 아닌 물건의 기능과 시스
템에 의해 종합된 환경을 디자인하려고 하였다.그는 아르누보에 반대하면서도 미술 공예
운동의 정신을 받아들이고, 대량생산에 맞는 현대성을 표현하기 위한 디자인 양식을 추구하였
다. 그는 그래픽 디자인에 있어서도 같은 디자인 원칙을 적용하였는데, 가령, 타입스타일
(typestyles)의 사용과 그 유명한 벌집모양의 로고타입(Logotype) 등이 있다.

반면 반 데 벨데(Henry Van De Velde, 1863 – 1957)의 디자인은 규격화를 추구한 베렌스의 디
자인과는 달리 개인주의의 표명, 개성의 표현으로서의 디자인이였다. 그의 아르누보 디자인
은 미술 공예 운동 영향을 받았으며 아르누보의 곡선적인 유기체적 형태의 디자인을 추구하였
다. 베르크분트의 창립 구성원이었으며 현대 디자인은 생산의 방법과 그의 것에 재료에 충실해
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그가 말하기를 “만약 장식을 표명하는 당대의 회화나 조각에서의 많은
선언이 순진하고 단순한 환상이 아니라면, 그렇다면 그들이 어떻게 존재할 수 있는가만은, 통합
된 예술이 진행중에 있고 우리는 곧 그것을 인식해야 할 것이고 그리고 우리는 그것을 ‘산업의
예술, 건축의 예술, 장식의 예술’이라 이름 붙이게 될 것이다.” (“If the many
manifestations of (contemporary) painting and sculpture that purport to the ornamental
are not purely and simply illusions – and how could they be? – a unified art is under
way, soon we shall have to recognize it, and we shall label it ‘the arts of industry,
construction and ornament’.”) 반 데 벨데는 기능과 장식이 적절하게 조화된 디자인을 추구하
였던 것이다.


베르크분트의 영향과 평가

1930년 초반 나치에 의한 국가 사회주의는 침체된 독일의 경제의 회복과 독일인의 우수성에 지나
치게 강조하는 범국민적 운동을 전개하였다. 이에 베르크분트는 예술의 정치적 중심을 주장하지
만 결국 1933년 나치에 의해 해체되지만 나치는 베르크분트의 이념을 나치의 예술적 문화적 운동
에 적용시킨다. 그리고 전쟁 이후 1947, 베르크분트는 재건된다.
도이치 베르크분트는 20세초 독일 산업 사회 발전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그것은 예술과 산업
의 결합으로 통한 보다 질 좋은 제품을 생산하고 그 제품이 세계 시장을 장악하여 독일인의 우수
성을 세계에 알리는 일종의 국가 의식, 민족 의식을 반영한 운동이었다. 그리고 질 좋은 디자인
이 디자이너의 창의적인 노력에서 뿐만 아니라 독일 국민의 일상생활 자체의 질적인 발전, 즉 예
술에 대한 국민적 이해를 통해서 만들어 질 수 있다는 사회 문화 운동이기도 하였다. 예술과 산
업의 조화를 위해 그들의 디자인은 기능적이고 구조적이었으며, 더 나아가 기하학적인 디자인을
결합시켜 대량 생산 뿐만 아니라 질적인 우수성으로 시장 경쟁력을 갖는 제품을 디자인하고 생산
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이로서 예술과 산업이 밀접하게 결합되도록 실천하였으며, 자본주의 사
회에서의 예술가의 위상을 재정립하게 하였다. 그들의 이러한 이념을 바우하우스의 설립 이념
에 지대한 영향을 주었을 뿐만 아니라 산업 디자인이 예술의 한 분야로 정착시키는 것에도 중추
적인 역할을 하였다. 베르크 분트의 규격화는 한편으로는 대량생산과 산업의 합리화을 결합시키
고, 다른 한편으로는 사람들의 생활 또한 규격화함으로써 합리화시켜서, 결국 국가의 질적 양적
인 발전을 추구하였다. 이러한 사화 경제 시스템의 합리화는 산업의 합리화뿐만 아니라 사람들
의 생활을 균질화한 이른바 대중사회라는 개념을 구체화 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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