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후기의 학자 **외와(畏窩) 최림(崔琳)**의 생애와 학문적 태도, 그리고 그의 시를 기록한 문헌입니다.
크게 상단의 행장(일대기 기록) 부분과 하단의 자경(自警, 스스로를 경계하는 시) 부분으로 나누어 해석과 저자 소개를 정리해 드립니다.
1. 본문 해석
상단의 산문은 최림의 출생 일화부터 학문에 임하는 자세, 노년의 삶과 인적 교류까지를 요약하고 있으며, 하단은 그가 스스로를 채찍질하기 위해 지은 시입니다.
[상단: 외와 최림의 생애와 학문]
83. 응연소인(凝然塑人) - 외와 최림(1779-1841)
정조 기해년(1779년)에 공(公)은 견곡(見谷) 구산(龜山) 아래의 옛 집에서 태어났다. 그날 밤 구산이 세 번 울자, 마을 사람들이 말하기를 "옛날 정무공(貞武公) 선생이 태어나실 때도 이 산이 울었다고 하더니, 오늘 밤 또 울었으니 참으로 기이한 일이다"라고 했다.
7~8세에 이미 경서와 역사를 통달하여 마치 자신이 늘 말하던 것처럼 외웠다. 10세 때 여러 글을 쓰다가 자리 한구석에 적기를 "효(孝)와 제(悌) 두 글자는 글자는 비록 다르나 하나의 도리이다. 효라는 글자는 자식이 자식 도리를 따르는 것이요, 제라는 글자는 아우가 아우의 도리를 따르는 것이다. 오직 그 베푸는 바가 같지 않아서 그 이름이 다를 뿐이다"라고 했다.
계미년(1823년)에 어머니의 상(外艱, 실제로는 부친상 또는 모친상을 뜻하나 문맥상 상례)을 당하여 장례를 마칠 때까지 모든 구비를 문공(朱子)의 가례를 따랐다. 상기를 마친 후 마침내 과거 공부를 포기하며 말하기를 "내가 그동안 머리를 숙이고 수레(과거 시험)를 따랐던 것은 오직 어버이를 위해서였다. 이제 바람이 궁벽하게 부는 듯한 슬픔(부모를 잃은 슬픔)을 당했으니, 후일에 고관대작의 반열에 오른들 무엇 하겠는가? 내가 좋아하는 바를 따르는 것만 못하다"라고 했다.
서산(西山) 운문산(雲門) 북쪽에 공암(孔巖)이 있고, 붉은 절벽과 푸른 벽이 깎아지른 듯 우뚝 솟아 있으며, 얕은 흐름과 깊은 못이 맑고 아스라히 멀리 이어진다. 그 위에 구멍이 하나 있는데 마치 수레상자의 축과 같아서 이름을 '공암'이라 한 것이다. 마침내 가솔을 이끌고 이곳에 점쳐 살며 말년을 보낼 계획을 세우니, 사방에서 배우러 오는 학자가 몹시 많아 다 수용하지 못할 정도였다.
일찍이 말하기를 "무릇 사람이 당연히 알아야 할 일은 또한 알지 못해서는 안 된다. 만약 알지 못하다가 마땅히 알지 못해서는 안 될 때를 당하면 그 후회를 어찌 감당하겠는가"라고 했다. 이 때문에 음양의 술수나 병가의 지략에 관한 설까지도 모두 관통하였고, 팔진(八陣)의 천지와 풍운육화(風雲六花)의 원방(圓方)에 이르기까지 정신으로 모으고 마음으로 계합했다.
바야흐로 그가 홀연히 묵묵히 앉아 깊이 연구하고 기미를 살필 때면, 눈은 깜빡이지 않고 귀는 듣지 못하여 의연히 마치 하나의 흙으로 빚은 사람(塑人, 소인) 같을 뿐이었다. (※ 이 글의 제목인 '응연소인'이 나온 배경입니다.)
공은 일찍이 강재 송선생(宋稺圭, 송치규)의 문하에서 노닐며 연원(淵源)에서 전해진 말을 들었고, 후학들에게 들어가는 방법을 가르쳐 줌에 숨김없이 다 털어놓았으며 밤낮으로 게을리하지 않았다. 공은 정시우(鄭時愚), 홍직필(洪直弼)과 모두 도의(道義)의 사귐을 맺었다.
정 정승(鄭相公)이 글을 써서 '모성암(慕聖巖)' 세 글자를 사모하여 바위 전면에 걸었고, 강재(송치규) 선생은 더욱이 손수 '심안모언(尋顔慕彦)' 네 글자를 써서 부쳐 주었다. 이른바 '모언'이란 주자가 일찍이 봉록을 털어 서원의 은거하는 자 최가언(崔嘉彦)에게 와룡암을 지어준 고사를 말한다. 또한 '반구재(反求齋)'라는 현판을 걸었고, 그 당(堂)의 이름을 '외와(畏窩)'라 하였는데, '외와' 두 글자 역시 선생(강재 송치규)이 손수 쓰신 것이다. 선생은 일찍이 '외우(畏友, 경외하는 친구)'로 그를 칭찬했다.
여러 번 도천(조정의 추천)에 올랐으나 마침내 선공감 감역(繕工監 監役)에 임명되었어도 나아가지 않았다. 공의 성은 최씨이고 휘는 림(琳)이며, 자는 찬부(贊夫)이고, 본관은 월성(月城)이다. 『외와집(畏窩集)』에서 발췌.
[하단: 자경(自警) - 스스로를 경계함]
최림 선생이 평소 자신을 다잡기 위해 지은 시입니다. 게으름을 경계하고 학문에 집중하고자 하는 의지가 돋보입니다.
盡日甘眠仍臥榻 (진일감면잉와탑)
날이 다하도록 달게 자며 여전히 침상에 누워 있다가,
片時移步忽登山 (편시이보홀등산)
잠시 걸음을 옮겨 문득 산에 오른다.
登山眼豁高明處 (등산안활고명처)
산에 오르니 눈이 탁 트여 높고 밝은 곳이 보이건만,
臥榻神迷咫尺間 (와탑신미지척간)
침상에 누우면 정신이 아득해져 지척 분간도 못 하는구나.
2. 저자 소개: 외와(畏窩) 최림(崔琳)
생몰연도: 1779년(정조 3년) ~ 1841년(헌종 7년)
본관 및 자: 본관은 월성(경주) 최씨. 자는 찬부(贊夫), 호는 외와(畏窩).
💡 주요 생애 및 특징
신동과 효행: 어려서부터 경서에 밝아 천재성을 보였으며, 부모에 대한 효심이 지극했습니다. 어머니(혹은 아버지)의 상을 당했을 때 주자가례를 철저히 지켰으며, 상을 치른 후에는 "부모님이 계시지 않는데 입신양명이 무슨 소용인가"라며 과거 시험을 과감히 포기하고 산림에 은거했습니다.
학문적 태도 (의연수인): 학문에 몰두할 때의 집중력이 엄청났던 인물입니다. 한번 책을 보거나 사색에 잠기면 눈도 깜빡이지 않고 귀도 들리지 않아, 마치 **'흙으로 빚은 인형(塑人)'**처럼 가만히 있었다고 전해집니다. 유학뿐만 아니라 주역, 음양, 병법 등 다방면의 학문에 통달했습니다.
학맥과 교류: 당대 영남의 저명한 성리학자인 **강재 송치규(宋稺圭)**의 문하에서 수학했습니다. 스승인 송치규는 그의 학문과 인품을 높이 사서 '경외하는 친구(畏友)'라 불렀고, 직접 집의 당호인 '외와(畏窩)'를 써주기도 했습니다. 또한 당대의 석학인 홍직필(洪直弼) 등과 깊이 교류했습니다.
청빈한 삶과 은거: 학행이 뛰어나 조정에서 선공감 감역 등의 벼슬을 내렸으나, 모두 사양하고 제자들을 기르는 데만 전념했습니다. 그의 문집으로 『외와집(畏窩集)』이 전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