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 6. 16. 자액이사 自縊而死
조선 시대 일가의 충효(忠孝)와 정절(貞節), 그리고 지혜로운 고사를 기록한 문헌입니다.
질문하신 내용 중 한 가지 먼저 짚어드리면, **'손봉선'은 이 글의 저자가 아니라 본문에 등장하는 주인공(인물)**입니다. 본문의 두 기록은 각각 후대의 기록(旌閭實記, 정려실기)과 조선 후기 학자 정종로의 문집(立齋別集, 입재별집)에서 발췌된 것입니다.
원문의 뜻을 매끄럽게 풀이한 해석과 인물들에 대한 설명을 정리해 드립니다.
1. 사진 속 원문 해석
84. 자액이사 (自縊而死: 목을 매어 죽다) — 손봉선(孫奉先, 1566-1592)
{ 목맬 액 縊}
소재지: 경주시 건천읍 대곡리
공(公)의 이름은 봉선(奉先)이고 자(字)는 성부(誠夫)이며, 그 선조는 밀양 사람이다. 시조는 순(順)이다. 명나라 신종 병인년(1566년)에 경주부 서쪽 대곡리에서 태어났다.
어릴 때부터 성품이 본래 진실하고 효성스러웠다. 그의 아내 최씨(崔氏) 또한 시부모를 극진히 봉양하여 며느리의 도리를 다했다. 임진왜란의 난리가 일어나자 봉선은 그의 새어머니를 모시고 귀미산(龜尾山) 파촉동(巴蜀洞) 깊은 산속으로 피란했다가 갑자기 도적(왜군)을 만났다.
도적이 그의 어머니를 칼로 치려 하자, 봉선이 가로막으며 말하기를 "원컨대 나를 죽이고 나의 어머니를 해치지 말라"고 하였다. 결국 어머니와 자식이 한 칼에 함께 죽었다. 아내 최씨는 몸으로 남편을 엄호하고, 손으로 칼날을 막다가 손이 부러지고 몸을 상해 피를 흘리며 거의 죽게 되었다. 도적들이 마침내 버려두고 떠나니, 이때가 바로 4월 22일이었다.
최씨는 정신을 차려 남편과 시어머니의 시신을 손수 거두어 장사 지낸 후, 자식들에게 말하기를 "남편이 이미 어머니를 위해 죽었으니 내가 어찌 차마 홀로 살겠는가" 하고는 마침내 목을 매어 따라 죽었다.
이 사실이 조정에 알려져 정려(旌閭)를 내리도록 명하셨다. 특히 최씨의 열렬함과 봉선의 효성을 기리는 포상의 은전이 내려졌으나 공(손봉선)에게는 미처 다 미치지 못했다. 그 행적은 《동경잡기(東京誌)》에 자세히 실려 있다. 정문(旌門)은 부(府)의 서쪽 계림학원(鷄林學院)에 있었고, 또 다른 정문은 마을 서쪽 큰길가에 있었다.
이백여 년 동안 정문이 자주 무너지고 황폐해졌으나, 봄가을로 보수하고 비바람을 겨우 막아낸 것은 실로 동네 주민들의 보호 덕분이었으니, 이 또한 우순(虞舜)의 감화가 미친 결과가 아니겠는가?
경자년(1780년)에 이공 진익(李公鎭翼)이 지주사(知州事)로 부임하여 정문이 기울고 무너진 것을 안타깝게 여겨 독려하여 중수하였다. 그 후 정문이 또 무너지려 하자, 임자년(1972년)에 후손 정화(貞和)가 기꺼이 스스로의 힘으로 대곡마을 앞으로 옮겨 세우고 먼저 비석을 세워 그 행적을 기록하였다.
《정려실기(旌閭實記)》
○ 좌처당상 (坐妻堂上: 아내를 당상에 앉히다)
임 효자(林孝子)는 단밀(丹密) 사람이다. 성품이 돈독하고 효성스러워 어머니를 섬김에 기쁨을 다했고, 조금이라도 어머니의 뜻을 상하게 할까 늘 두려워했다.
하루는 효자가 집을 비웠을 때, 그의 아내가 기름을 가득 담은 대야를 대청 아래에 놓아두었다. 그런데 눈이 어두운 노모가 그것을 소변(오줌)으로 착각하고 들고 가서 채소밭에 주려 하였다.
효자의 자식이 당시 겨우 다섯 살이었는데, 곁에 있다가 기름을 버리는 것이 안타까우면서도 할머니가 깜짝 놀라실까 봐 감히 말을 못 하고, 달려가 어머니(임 효자의 아내)에게 고했다. 어머니가 가서 보니 이미 기름의 절반을 밭에 쏟은 상태였다. 아내는 즉시 무릎을 꿇고 고하기를, "며느리가 있는데 어찌 직접 힘을 쓰십니까. 청컨대 제가 대신 붓겠습니다."
하고는 대신 남은 기름을 마저 다 쏟아부으며 조금도 아까워하지 않았다. 대개 시어머니로 하여금 그것이 기름인 줄 눈치채지 못하게 하여 무안해하거나 후회하는 마음이 들지 않도록 하려는 배려였다.
무릇 효라는 것은 능히 아내로 하여금 이와 같게 만들 수 있어야 하니, 이 또한 지극하지 아니한가! 효자가 돌아와 이 이야기를 듣고는 아내를 대청 위(당상)에 앉히고 아래에서 절을 하며 말하기를, "당신이 나의 어머니를 섬겨준 덕분입니다" 하고 감사를 표했다. 아내 역시 참으로 기이하고 훌륭하며, 당시 다섯 살 난 아이 또한 매우 기특하다.
《입재별집(立齋別集)》 권4 기문(記聞), 입재 정종로(鄭宗魯, 1738-1816)
2. 인물 설명
① 손봉선 (孫奉先, 1566~1592)
저자가 아닌 본문의 인물: 글 상단에 적힌 이름 때문에 저자로 오인하기 쉬우나, 임진왜란 때 목숨을 바친 조선 중기의 효자입니다.
행적: 밀양 손씨로 경주 대곡리에서 살았습니다. 1592년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왜군(도적)의 칼날 앞을 가로막으며 "나를 대신 죽이고 어머니를 살려달라"고 부르짖다 새어머니와 함께 동시 순절하였습니다. 남편의 뒤를 따라 정절을 지킨 아내 최씨와 함께 조선 시대가 지향한 충효·열녀의 표본이 되어 경주 지역의 읍지인 《동경잡기》 등에 기록되었습니다.
② 정종로 (鄭宗魯, 1738~1816)
두 번째 글의 저자: 조선 후기의 저명한 영남 남인 학자이자 문신입니다.
생애와 학문: 본관은 단양(丹陽), 자는 성중(聖仲), 호는 **입재(立齋)**입니다. 영남학파의 거두인 대산 이상정(李象靖)의 문하에서 수학하여 퇴계 이황의 학통을 이어받았습니다. 정조와 순조 연간에 관직에 나아가 사헌부 지평, 장령, 병조 참지 등을 지냈습니다.
사상적 특징: 유학의 도덕적 실천을 매우 강조했습니다. 사진 하단에 출처로 적힌 《입재별집(立齋別集)》은 그가 남긴 문집의 일부로, '좌처당상' 이야기처럼 일상 속에서 유교적 효(孝)와 가족 간의 존중을 실천한 감동적인 일화들을 수집하고 기록하여 세상의 도덕을 바로잡고자 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