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후기의 실존 인물인 **구충당(求忠堂) 이의립(李義立, 1621~1694)**의 생애와 업적을 기록한 **『구충당집(求忠堂集)』**의 일부입니다.
제목인 **'세장시사(世掌是事)'**는 "대대로 이 일을 관장하다"라는 뜻으로, 이 글의 핵심적인 결말을 나타냅니다.
📜 본문 해석 (현대어 풀이)
공(公)의 이름은 의립(義立), 자는 예겸(禮兼), 성은 이씨(李氏), 본관은 경주(慶州)이다. 천계 신유년(1621년)에 경주부 남쪽 전읍리에서 태어났다.
나면서부터 성품이 효성스러워, 어버이가 병이 드시자 손가락을 베어 피를 먹여(단지혈서) 효험을 보았다. 어버이가 돌아가시고 상복을 벗은 뒤, 문득 눈물을 흘리며 말하기를 **"두 분 어버이가 모두 이미 돌아가셨으니, 비록 효도하고자 한들 누구를 위해 효도하겠는가. 효(孝)를 옮기면 곧 임금에게 충(忠)을 다할 수 있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그러나 나는 재주와 기예가 없으니 장차 어떻게 효력을 다할까."
생각건대 나라의 큰 업무는 군사와 농사보다 앞서는 것이 없고, 조총과 화약의 도구는 '유황'이 아니면 이룰 수 없으며, 농기구인 보습과 가마솥의 이로움은 '무쇠(수철)'가 아니면 이룰 수 없었다. 이 두 가지는 우리나라에서 나지 않아 몰래 상인들이 무역해 오는데, 청나라와 일본에 의해 곤란을 겪고 있어 조정에서 이를 근심하고 있었다.
"만약 이 두 가지 물건을 찾아내어 쓸 수 있게 한다면, 충성을 다하고 나라를 위하는 길이 될 것이다."
이에 병술년(1646년)에 일을 시작하여, 휴류령에 올라 띠풀을 베어 초막을 짓고 목욕재계하며 110일 동안 기도를 드리고 내려왔다.
마침내 먼저 서쪽 길에 오르고, 북관에 이르렀으며, 영남에서 돌아왔다. 백두산, 구월산, 묘향산, 삼각산, 지리산, 속리산 등은 모두 지나온 명산들이었다. 그 사이 호랑이와 표범의 굴을 평지 밟듯 하였고, 비바람을 맞으며 이슬을 잠자리로 삼은(풍찬노숙) 세월이 꼬박 10년이었으나 끝내 얻은 것이 없었다.
이에 탄식하며 말하기를, "예로부터 공을 이루지 못한 것은 중도에 포기했기 때문이다."라고 하고, 반대로 태백산에 올랐다. 산속을 샅샅이 뒤진 지 열흘째에 잘못하여 10장(약 30미터) 깊이의 계곡 구덩이에 떨어져 죽을 뻔하다 겨우 살아났다. 소백산에 들어가서는 사나운 멧돼지에게 쫓겨 고목에 매달려 화를 면하기도 하였다.
오히려 스스로 위로하며 말하기를, "사지(死地)에 빠진 뒤에야 산다고 하니, 어찌 병법에만 그러하겠는가? 굶주려도 병으로 여기지 않고 늙어도 피곤함을 알지 못하겠다."라고 하였다.
길을 걸어 경주와 울산의 경계에 이르러 저물녘에 여관에 묵었다. 베개를 베고 잠시 졸고 있는데, 홀연히 신선 같은 노인이 지팡이를 짚고 나타나 가르쳐 주며 말하기를, "이제 그대의 뜻이 이루어졌도다. 내일 반드시 기이한 일이 있을 것이니 그대는 그것을 기억하라."라고 하였다.
과연 권이(卷耳)에서 유황을 얻고, 달천(達川)에서 무쇠를 얻었으며, 또 반척동에서 **비상(砒霜)**을 찾았는데 이 또한 우리나라에 없던 것이었다. 또 산을 따라 동쪽으로 가고 바다를 따라 북쪽으로 가서 만후봉을 지나온 곳에서 **황석(黃石)**을 얻었다.
이에 먼저 유황과 무쇠를 다루는 두 점포를 설치하여 이익을 통하게 하고, 각궁 280통, 함석 100근, 연철 1,000근, 고운 면포 1,000필을 무역하였다. 또 쇠구슬(철환) 70만 개와 가마솥 440개를 주조하여 현종 원년 경자년(1660년)에 훈련도감에 실어 바쳤다.
임금(현종)께서 이를 크게 기뻐하시어 특별히 숙천부사(肅川府使)의 벼슬을 내리셨다. 그러나 그는 굳게 사양하며 받지 않고 아뢰기를, **"함부로 벼슬을 받는 것은 신의 분수가 아닙니다. 원하건대 대대로 이 일(유황과 철을 캐는 일)을 관장하게 하여(世掌是事 - 세장시사), 하늘의 은혜에 보답하게 해 주십시오."**라고 하였다.
임금께서 이를 의롭게 여겨 허락하시고, 사패문(賜牌文, 임금이 내리는 문서)에 이르기를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이후 수백 년 동안 무기가 풍족해지고 남쪽이 편안해지며 북쪽이 안정된 것이 어찌 이의립의 공인 줄 알았겠는가"라고 하셨다.
임금께서 직접 불러 위로하시고 술을 내려주시며 실직인 동지중추부사를 제수하시고 가선대부의 품계를 내리셨다. 돌아가신 뒤의 부의와 증직은 법전대로 하였다. 이 사실은 『삼강속록』과 『여지도』에 실려 있다.
공은 만년에 경주부 동쪽 효문동에 은거하며, 집(당)의 현판을 '구충(求忠, 충을 구하다)'이라 하였다.
👤 저자(주인공) 소개: 구충당 이의립 (1621~1694)
글의 주인공인 이의립은 조선 중후기의 무신이자 발명가, 광물학자에 가까운 선구적인 인물입니다.
효에서 충으로: 글에도 나와 있듯, 극진한 효자였던 그는 부모님이 돌아가시자 그 효심을 나라를 향한 충성심으로 바꿨습니다. 당시 조선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은 후 군사력을 키워야 했지만, 조총의 원료인 유황과 무기 및 농기구의 원료인 철을 전량 청나라와 일본의 수입에 의존하고 있어 국가적 위기 상태였습니다.
10년의 전국 탐사: 그는 자원 독립을 위해 무작정 전국 명산의 험지를 10년 동안 헤매며 광물을 찾아다녔습니다. 죽을 고비를 수없이 넘긴 끝에 결국 울산 등지에서 철광산과 유황광산을 발견해 냅니다.
울산 달천철장의 개척자: 글에 등장하는 "달천에서 무쇠를 얻었다"는 구절이 바로 현재 울산광역시에 있는 유명한 **'달천철장(達川鐵場)'**의 재발견을 의미합니다. 고대부터 철 산지였으나 잊혀졌던 곳을 이의립이 다시 찾아내어 조선의 국방력과 농업 발전에 지대한 공헌을 했습니다.
세장시사(世掌是事): 엄청난 공을 세우고도 그는 임금이 내린 높은 벼슬(숙천부사)을 거절했습니다. 대신 **"대대로 이 철장과 광산을 관리하며 나라에 보탬이 되겠다(세장시사)"**라고 청했습니다. 현종은 그의 뜻을 갸륵하게 여겨 달천의 철광산을 이의립 가문이 대대로 관리하고 채굴할 수 있는 독점권(사패지)을 내렸습니다.
구충당(求忠堂): 말년에 지은 그의 호 '구충'은 "평생 충성을 구했다(찾았다)"는 그의 일생을 아주 잘 요약해 줍니다.
요약하자면, 이 글은 국가의 자원 자립을 위해 평생을 바친 한 개인의 굳은 의지와, 벼슬 대신 실질적인 국익을 택한 선비의 꼿꼿한 정신을 보여주는 매우 가치 있는 역사적 기록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