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삼(金泳三) 대한민국의 제14대 대통령
김영삼(金泳三,
1927년 12월 20일 ~
2015년 11월 22일)은
대한민국의 제14대 대통령이다.
본관은 김녕(金寧)이며,
호는 거산(巨山)이다.
학력
1940년 장목국민학교 졸업
1941년 통영중학교 전퇴
(이후 1988년 통영중학교 명예 졸업)
1946년 경남중고등학교 졸업
1951년 서울대학교 철학 학사
개요
1954년
거제에서 만 27세로
제3대 민의원 선거에 출마해
당선되며
역대 최연소 국회의원이 되었다.
9선 국회의원을 지내며
유신정권의 야당 지도자로서
민주당 원내총무,
민정당 대변인,
신민당 원내총무로 활동하며
민주화 운동을 이끌었다.
박정희 정부로부터
질산 테러 등의
탄압을 받았다고 주장했다.
1979년 10월에는
YH 무역 여공 농성 사건 이후
타임과의 인터뷰에서
미국에 박정희 정권에 대한 지지를
철회할 것을 주장하였다.
유신정권은 이 발언을 문제삼아
의원직 제명 파동을 일으켜
부마항쟁을 촉발했다.
1983년에는
5.18 광주 민주화 운동
기념일을 기해
23일 동안 단식투쟁에 돌입했다.
6월 민주 항쟁 이후
통일민주당 총재로
민주화추진협의회를 구성해
민주진영을 구축했다.
1986년
대통령 직선제 개헌
1천만 서명운동을 전개하였다.
1990년
민주정의당-
통일민주당-
신민주공화당
3당 합당을 선언하여
민주자유당 대표최고위원으로
추대되었다.
1993년
제14대 대통령에 취임하며
32년만에 군사 정권의
마침표를 찍었고,
문민 정부를 열었다.
예술인과 작가들의
반정부와 사회비판을 허용하였다.
대통령 재임 기간 중
금융실명제(1993년)를 도입하고
차명 부정 계좌를 단속 및
처벌하였으며,
지방자치제를 전면 실시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법통 명문화 등
역사 바로 세우기 정책의 일환으로
옛 조선총독부 건물을
폭파 철거하였고,
국군 내 사조직인
하나회를 척결했다.
또한 전두환·노태우
두 전직 대통령의
비자금을 수사하여 처벌하였고,
군사반란과
5.17 쿠데타 및 5.18 민주화 운동
진압의 책임을 물어
군사 정권 관계자들을
사법처리하였다.
1997년 외환위기로
IMF에 구제금융을 요청하였다.
2015년 11월 22일 0시 22분
서울대학교병원
중환자실에서
혈액감염 의심 증세로
치료를 받던 중 서거하였다.
서울대학교병원 측에선,
김영삼 전 대통령 서거 후
기자회견에서
급성 패혈증과
심부전증이 사인이라고 밝혔다.
그의 장례는 대한민국 최초로
5일 기간의 국가장으로
거행되었으며,
장지는 서울특별시 동작구의
국립서울현충원에 안장되었다.
대통령이 되기 이전
출생과 가계
김영삼은
1927년 1월 14일에
경상남도 통영군 장목면
거제도(現 경상남도 거제시
장목면 외포리)에서
아버지 김홍조와
어머니 박부련 사이에서
1남 5녀 중
첫째로 출생하였으며
지난날 한때 경상남도 김해군
장유면 장유리에서
잠시 유아기를 보낸 적이 있는데
그가 출생할 당시
거제도는 통영군 소속이었다.
그는 김녕 김씨 28대손으로
사육신 사건 무렵 살해된
김문기의 후손이다.
임진왜란 때 계림에서
거제도로 터를 잡았다.
거제도에는 큰달섬과
작은달섬이라는
이름의 부속도서가 딸려 있는데,
그의 선조들은
거제도에 딸린 섬을
각각 나눠 차지하여 살았다하여
거제도에는 큰달섬과
작은달섬이라는
이름이 붙었다는 전설이 있다.
거제도 큰달섬에 정착한 이는
김영삼의 11대조 김복원이였다.
작은달섬에 정착한
11대 방조의 후손들은
번창했지만,
11대조 이후 김영삼의
증조할아버지 대까지
독자로 이어져 왔다.
그리고 10대조 김진손이
외포리 대계마을에 터를 잡았다.
김진손의 손자 8대조 김철명은
한성부 판윤을 지냈다.
큰달섬에 이주한
김영삼의 직계선조에게는
후손이 귀하여 번창하지 못했고,
할아버지가 7남매를 두게 되지만
형제가 모두 요절하여
아버지 김홍조는 유일한 독자였다.
그의 형제 둘은 어려서 요절하여
그는 사실상 외아들이 되었다.
그의 가계는 거제도에서
멸치어장을 소유하던
부유한 집안의 아들이었고,
할아버지 김동옥의 대에 이르러서
어업으로 가계를 다시 일으켰다.
어머니 박부련은
박침배의 2남 1녀 중 장녀로,
같은 마을에 살던
김홍조와 결혼하여
슬하에 1남 5녀를 두었다.
그러나 박부련은
1960년 무장공비 2명에 의해
살해되었고,
김홍조는 이후 최남순과
재혼하였으나
그녀 역시 일찍 세상을 떠났다.
그 후 김홍조는
1985년 74세에
13살 연하였던
이수남과 재혼하였다.
그가 태어날 무렵
김홍조는 어선을 10여 척 이상
보유하였으며
멸치 어장을 꾸려가는
인근 마을에서는
꽤 알려진 부자 집안이었다.
유년기와 소년기
그는 유년기 시절
할아버지의 영향을 받았다고 한다.
손이 귀한 집의 독자로 태어난
그는 할아버지를 따라
망망대해를 누비며
포부를 키웠다 한다.
그는 김영삼에게
사나이다운 배포와
우직하리만큼 강직한
성품을 심어주었다 한다.
늘 험한 바다와 싸우는 갯가에는
해신에게 무사를 기원하는
기도를 했지만
할아버지는 일찍부터
기독교에 심취,
사랑방을 기도실로 꾸며
외지에서 전도사나 목사 등을
자주 초청하여
예배를 보았고
숱한 동네사람들의
반발을 무릅쓰고
집 앞의 뽕밭을 기부하여
교회를 짓기도 하였다.
신문물에 일찍 눈을 뜬 할아버지는
마을 주민들에게
기독교를 전도하였고,
조부의 노력에 힘입어
기독교 신자들이
거제도의 다른 마을에서도
나타나기 시작했다.
교회는 이주하였지만
할아버지의 노력으로
섬마을 사람들 거의가
기독교를 믿게 되었으며,
아버지와 어머니는 물론
김영삼도 세례교인이 되었다.
8세에 면사무소 소재지에 있는
장목소학교에 입학했는데,
학급에서 그는 가장 어린
소년이었다 한다.
학급번호는 키순서로 32번이었고,
편도 20리의 고된 통학을 염려하여
그의 부모는 근처에
하숙을 마련해 주어
하숙생활을 하였다.
소년시절부터
일본인들의 강제적 식민통치에
반발하였으며,
일본인들이 거제도를
거지도, 거지 섬이라고
발음하는 것에
자존심이 상한 그는
일본인들을 못마땅하게 여겼다 한다.
중학교 진학 이후
사춘기 무렵부터는
같은 학교, 같은 반에 있는
일본인 학생들과
수시로 갈등을 빚기도 했다.
일제강점기 말기(1940년)
창씨개명이 강요되었던 시절에
(당시 13세),
가네무라 고유(金村康右)라는
이름으로 창씨개명을 했다.
청소년기
중학교 시절
1940년
통영중학교에 입학한 이후
계속 시비를 거는
일본 학생들과 마찰을 빚었다.
통영중학교의 키타지마 교장은
그를 혹독하게 대하였다.
2학년 무렵 교장은
진해중학교로 전근을 갔는데
이날 2학년생 전원이
선창가 배에까지
이삿짐을 나르는데 동원되었다.
당시 귀하던 설탕이
10여 부대나 쏟아져 나오자
그는 설탕을 나르면서
이빨로 부대종이를 뜯어
일부러 설탕을 흘리며 날랐다.
다음날 진해로부터
당장 범인을 조사해서
알려달라는 전보가
통영중학교로 날아들었고
이로 인해 김영삼은
무기 정학을 받았다.
그러나 일본인 교사 가운데서도
한국인 학생의 처지를
끔찍이 이해해주던
와타나베(渡邊) 교감은
누구의 소행인 줄 알면서도
전교생을 운동장에 모아
점잖은 훈시만으로 감싸주어
설탕 사건의 위기는 모면했다 한다.
중학교 3학년 때, 3학년생 전원이
사천의 비행장 공사장으로 끌려가
'노동보국'이라는 이름의
강제노동에 끌려갈 때
함께 끌려갔다.
그러나 비행장에서
사소한 시비로
일본인 학생들과 싸움이 붙어
무기정학을 당하기도 했다.
경남중학교 학생 시절의 김영삼
그 뒤 1945년 11월
김영삼은 경남중학교로 전학했다.
이때부터 그는
대통령이 되기로 결심하고
자신의 장래 희망을 물으면
대통령이라 대답하였다고 한다.
이때 자신의 책상에
'미래의 대통령 김영삼'이라는
글씨를 늘 써놓곤 했다.
그는 학교에서
경성제국대학 철학과를 졸업하고
윤리과목을 들고
직접 강단에 섰던
교장 안용백 선생의 감화를 받은
김영삼은 철학과 입학을
결심하게 되었다.
모든 학문은 철학에서 시작된다는
안용백 교장의 훈시에
자극을 받게 되어
1947년
경남중학교를 졸업한 후
서울대학교 철학과에 입학했다.
그러나 철학보다는
정치에 관심이 있던
그는 몽고메리 원수 등에 관련된
서적을 읽거나
주로 신문의 정치 관련
기사들을 읽었다.
이승만, 김구 등의
강연회를 찾아다니게 된다.
이때 우연히 이승만 박사를
멀리서 본적이 있었다 하며
김구는 한번도 보지 못했다고 한다.
후일 회고담에
이승만과 김구를 비교하면서
"나는 김구를 만나 본 적이 없다.
그 양반이 돌아간 다음에
서울대 학생들과 경교장에 가서
시신을 본 적이 있다.
그 양반을 만난 적은 없다"라고 했다.
또한 이승만에 대해서는
"이 박사가 정치적 감각은
있었던 것 같다.
그런데 김구 씨는
이북에 김일성을 만나러 갔다 왔다"며
"정치적 시각은
이 박사가 좀 더 높았다"고
평가했다.
대학생 시절편집
1948년에
서울대에 입학하여
1학년 때
김영삼은 전공 외에
헌법, 정치학 개론,
국제 공법, 현대 정부 형태론,
서양정치사상사,
구주외교사, 국제 관계론,
구주 정치사 등
정치관련 분야 8개 과목을
수강했고,
2, 3학년 때에도
국가론, 비교 정부론,
정치학 강독, 의회제도론 등의
과목을 수강했다.
성적은 B, C, D였고
유식철학과 노장철학
2개 과목만은 A였다 한다.
김영삼이 서울대학교 졸업 학력에 대해서
정식 입학생이 아니라
청강생이었다는 루머가 돌았지만
서울대학교에서는
정식으로 김영삼의
입학과 졸업을 인정했다.
김영삼의 생가에는
김영삼이 1948년 9월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철학과에 입학해
1951년 9월에
졸업했음을 보여주는
성적 증명서가 전시되어 있다.
대학 2학년에 재학 중
김영삼은 서울특별시 명동
시공관에서 있은
정부수립기념 웅변대회에 참가하여
2등을 차지,
외무부 장관상을 수상했다.
당시 외무부 장관은
장택상이었다.
김영삼에게는
장택상이 처음 직접 대하는
거물 정치인이었고
장택상은 곱상하고 총명한 청년을
마음에 두게 되었다.
2대 민의원 선거 무렵
장택상과 가까워지게 되었다.
제2대 민의원 선거에 출마할
결심을 한 장택상은
서울대 문리대 교정으로
지프차를 보내
김영삼에게 선거 도움을
요청해 왔다.
이에 김영삼은
서울대 학생 20여 명과 함께
경상북도 칠곡으로 내려가
이때부터 40여 일간을
장택상과 침식을 함께 하며
찬조연설을 하는 등
장택상의 당선을 위해 노력하였다.
김영삼의 서울대학교 졸업에 대해선
이견이 존재했다.
1947년 청강생 명부에
김영삼이 있어서
정식 입학생이 아니라는
소문이 돌았지만,
서울대학교에서는
당시의 청강생은
이후와 달리 입학하는
6가지 방법 중 하나였으며,
실력고사를 통과하거나
학업성적이 우수하면
정식 학생이 되어
졸업하였다.
김영삼의 생가에는
김영삼이 1947년 5월에
서울대학교에 입학하여
1951년 2월에
졸업했음을 보여주는
졸업증명서가 전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