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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남도

경남거창 거창사건추모공원의 역사교육관과 박산합동묘역

작성자허수아비|작성시간26.06.22|조회수0 목록 댓글 0

일 시 :2026년 5월 5일

장 소 : 경남 거창군 신원면 대현리 506

 

경남거창 거창사건추모공원의 역사교육관과 박산합동묘역

박산합동묘역

위령비가 파괴되어 쓰러져 있는 까닭!

"거창양민학살사건"은 1951년 2월 9일에서 11일사이로 국군 11사단 9연대 3대대에 의해 덕산리 청연골에서 주민 84명, 대현리 탄량골에서 주민 100명, 과정리 박산골에서 주민 517명, 기타지역에서 주민 18명, 모두 719명의 주민이 학살되었다. 그 중에서 중유리 대현리 와룡리 주민 800여명을 신원초등학교에 감금하여 군인, 경찰, 방위대 가족을 제외시킨 517명을 박산골에서 끌어넣고 총으로 잔혹하게 학살을 하여 나무로 덮고 기름을 뿌려 태워 버리는 만행을 저질렀다. 천행으로 살아남은 유족들은 시신을 수습하려 하였으나, 군이 계엄령을 선포하여 현장접근을 못하게 막아 3년여를 방치하게 되었다. 3년이 지난 1954년 4월 5일에서 7일 사이 박산계곡에 방치되어 있는 시신들을 수습하려니 살은 녹아내리고 유골로서는 신원을 파악할 수 없으므로 큰 유골은 남자, 중간유고골은 여자, 작은유골은 소아로 분류하여 유족들의 애끓는 통곡속에서 화장하여 이곳으로 옮겨 남자지묘, 여자지묘, 소아지묘로 합동묘역을 조성하였다. 그 수 변영재 신원면장과 김희주 면의회 의장이 신도성 경남지사에게 진정을 하여 위령비 건립비로 도비 50만환을 지원받아 1960년 11월 18일 유족들과 면민 각계의 협조로 위령비를 제막하였다. 그런데 5.16군사 쿠데타 군은 유족회 간부를 반국가단체로 규정하여 잡아 가두고, 새로 부임한 최갑중 경남지사는 개장명령을 내려 거주지공동묘지로 이장하라하여 유족들이 부모, 형제유골 찾아달라는 요구에 묘역을 파헤쳐 뼈 가루가 섞인 흙 한줌으로 분배하였으며, 위령비를 철거하여 비문을 정으로 쪼아 땅속에 파묻어 버리는 제2의 만행을 저질렀다. 세월이 흘러 정권이 바뀌면서 왜곡된 역사는 조금씩 제자리를 찾기 위해 1967년 8월 20일 파헤쳐진 묘역 천수나 피하게 복구를 하였고, 1988년 2월 15일 땅속에 묻혀있는 위령비도 파냈다. 위령비 글자가 지워져 쓰러진채 현장 보존하는 것은 믿기지 않은 후대들에게 왜곡된 역사의 진실을 바로 알리기 위함이다.

(사)거창사건 희생자 유족회

박산골 희생자 합동묘역 경계구역

 

도로에서 높은 곳에 오일칠앙모루(五壹七仰慕樓)가 세워져 있다. 

 

오일칠앙모루(五壹七仰慕樓)의 현판이다.  오일칠은 이곳 박산골에서 희생된 517명을 의미한다.

 

오일칠앙모루 축대 아래에 문병현이 지은 한탄시비(恨歎詩碑)가 자리하고 있다.

 

한탄시(恨歎詩) - 문병현

春來僻野萬花芳(춘래벽야만화방) 我愛先親別絶蹤(아애선친별절종)

五百餘魂留二墓(오백여혼유이묘) 慰靈碑何地下藏(위령비하지하장)

嗟乎兩性同時窆(차호량성동시폄) 淚濕黃茅世血靑(루습황모세혈청)

其石複元長未了(기석복원장미료) 鳴呼不寐孤愁腸(명호불매고수장)

 

고향에 봄이 오면 온 들에 갖가지 꽃이 피건 만은

나를 사랑하시던 부모님은 이별 후 소식 없네.

(합동 묘) 오백여 혼이 두 무덤을 맴도는데

어찌하여 위령비는 땅 속에 묻혔는가?

슬프도다, 남녀가 동시에 묻혔구려!

눈물에 젖은 누른 잔디는 핏기 씻고 푸르건만

그 비석 다시 세울 날 언제나 올 것인가?

오호라 잠 못 이루며 홀로 슬퍼하노라!

 

- 1982년 봄날 문병현 유족회장이 합동위령제를 올리면서 어버이와 부인, 아들, 딸을 한 순간에 잃은 설움이 북받쳐 합동묘소 뒷녘에서 짧은 문장력의 부끄러움도 아랑곳 없이 한시를 지었다. –

 

누각 위로 올라가 보자

 

 

 

누각위에서 건너편 거창사건추모공원의 모습을 바라본다. 입구 좌측의 커다란 건물이 역사교육관이고 우측으로 묘역과 추모비가 보인다.

 

아래 좌측의 천유교를 건너 우측의 기와집이 역사교육관이다.

 

우측의 추모묘역을 당겨본 모습이다. 중앙에 우뚝선 상징탑이 추모탑이다.

 

거창추모공원 역사교육관을 지나 천유교를 건너오면 도로변 위로 위령비(慰靈碑)와 그리고 우측으로 신원확인이 어려워 화장후 남여를 구분하여 합장했다는 2기의 묘지가 보인다.

 

 위령비와 그 좌측에 바위에는 애절하고 애통한 유족의 추도사가 적혀있어 아래에 옮겨 적었다. 

 

추도사 

인생 백년이 자기 명대로 살고 죽어도 한이 되고 병이 되지 않는가? 애재로다. 잘먹고 잘입어서 호의 호식으로 살아가도 한이 없을진대, 내 고장 내 농촌 이 땅에 집집마다 불을 지르고 수다한 애국양민을 무차별하고도 무자비하게 학살하였음을 통탄치 않을 수 없습니다. 36년간의 일제 쇠사슬에서 벗어나 염언인 해방을 맞이한 이때의 역사적인 과오를 우리는 묵과할 수 없는 것입니다. 지하에서 고이 잠든 영령이시여! 이 싸늘하고도 비통한 성산 박산 제단앞에서 향불을 올리고 통곡하는 이 장면을 인명은 재천이라 하늘도 무심하고 천지신명도 무심하도다. 영령이시여, 제위의 천추원한을 길이 청사에 빛나고 만세에 불구하여 조국의 수호정신이 될것입니다. 애수에 잠겨 하늘도 땅도 산천초목이 다 슬퍼하는 이 식전제단에서 재천의 영령제위에 위로하고 명복을 비는 바입니다. 끝으로 천추한에 잠긴 유족제현들이여! 땅을 치고 통곡하도 소용없고, 불멸의 영령이 돌아올리 만무하고 원한은 정부가 해결지을것으로 믿고 위로하며 자유와 평화를 누리기를 기원하기 바랍니다. 오호 재천의 영령이시여 고이 고이 잠드소서!

1960년 11월 18일 합동위령식전에서 유족들이 낭송한 추도사

 

도로 바로 위에 묘역이 조성되어 있다.

 

 

천행으로 살아남은 유족들은 시신을 수습하려 하였으나, 군이 계엄령을 선포하여 현장접근을 못하게 막아 3년여를 방치하게 되었다. 3년이 지난 1954년 4월 5일에서 7일 사이 박산계곡에 방치되어 있는 시신들을 수습하려니 살은 녹아내리고 유골로서는 신원을 파악할 수 없으므로 큰 유골은 남자, 중간유고골은 여자, 작은유골은 소아로 분류하여 유족들의 애끓는 통곡속에서 화장하여 이곳으로 옮겨 남자지묘, 여자지묘, 소아지묘로 합동묘역을 조성하였다. 그 수 변영재 신원면장과 김희주 면의회 의장이 신도성 경남지사에게 진정을 하여 위령비 건립비로 도비 50만환을 지원받아 1960년 11월 18일 유족들과 면민 각계의 협조로 위령비를 제막하였다. 

 

그런데 5.16군사 쿠데타 군은 유족회 간부를 반국가단체로 규정하여 잡아 가두고, 새로 부임한 최갑중 경남지사는 개장명령을 내려 거주지공동묘지로 이장하라하여 유족들이 부모, 형제유골 찾아달라는 요구에 묘역을 파헤쳐 뼈 가루가 섞인 흙 한줌으로 분배하였으며, 위령비를 철거하여 비문을 정으로 쪼아 땅속에 파묻어 버리는 제2의 만행을 저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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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이 흘러 정권이 바뀌면서 왜곡된 역사는 조금씩 제자리를 찾기 위해 1967년 8월 20일 파헤쳐진 묘역 천수나 피하게 복구를 하였고, 1988년 2월 15일 땅속에 묻혀있는 위령비도 파냈다. 위령비 글자가 지워져 쓰러진채 현장 보존하는 것은 믿기지 않은 후대들에게 왜곡된 역사의 진실을 바로 알리기 위함이다.

 

훼손하여 쓰러진 위령비의 수난사

 

 

묘지 위로는 넓은 잔디광장이 만들어져 있었다.

 

 

최근에 새로 세운 위령비(慰靈碑)이다.

 

 

거창사건추모공원 역사교육관을 둘러 보다.

 

거창사건역사교육관은 거창사건희생자합동위령사업의 일환으로 2004년 4월에 완공되었으며, 주전시실, 시청각실 등 808.64㎡의 면적에 연출 모형류·기록물·신문자료·판결문·사진류·작전일지 등의 사료와 영상물·각종자료시스템·그래픽·일러스트·에니메이션 등으로 혼용 제작되었습니다.
거창사건역사교육관은 그 동안 수집되어온 자료를 보존·전시하고, 왜곡되고 억울하게 희생당한 영령들의 넋을 위로하며, 역사의 진실을 바로 잡아 이 땅에 이러한 비극이 일어나지 않도록 기억하고 교훈을 삼을 수 있는 역사 교육의 현장으로 거듭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소장하신 사료를 기증하시면 소중하게 전시 관람하도록 하겠습니다.

 

이곳은 거창사건추모공원 역사교육관이다.

 

교육관 앞뜰에는 모형 아치물들이 많이 있다. 아마도 가을에 국화축제를 할때 틀모형이 아닐까?

 

역사교육관으로 들어가 보자

 

거창사건 추모공원 방문 인증샷을 SNS에 올리면 포라로이드 사진을 찍어드려요

 

환영공간

거창사건 역사교육관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본 교육관은 거창사건 당시의 아픈 상처와 역사를 바로 알리는 교육의 장입니다. 우리는 거창사건에 대해 슬픔이나 절망으로 끝나지 않고, 학살의 기억을 넘어 어긋난 관계의 회복과 평화인권의 길로 함께 나아가야 합니다. 거창사건을 듣고 보고 체험해 보세요.

 

 

이제 역사관으로 들어가 보자

 

1951년2월 평범한 믿음이 깨졌다.

1951년 2월 얼어붙은 적막한 골짜기 사이로 누군가의 아버지, 누군가의 아내, 그리고 차마 피지도 못한 고사리 손들이 이유도 모른채 슬프고 처절하게 스러졌다. 그해 겨울, 평범한 이웃은 국가의 적이 되었고, 평범한 믿음은 대한민국에서 사라졌다.

 

거창사건 기억연표

그 날을 기억하다.

1951년 2월 빨치산을 쫒던 토벌대는 거창군 신원면 일대를 쑥대밭으로 만들어 민간인 학상을 자행했다. 거창사건 생존자와 유가족은 왜곡된 역사에 대한 진상규명과 명예회복을 위해 오늘날까지도 긴 싸움을 지속해 오고 있다.

 

 

거창 신원지서 습격 사건

1950년 12월 5일, 산청군 오부면을 점거하고 있던 빨치산이 거창군 신원지서를 습격했다. 당시 지서에는 8명의 경찰과 12명의 의용경찰이 있었으나 적은 400여 명의 남여 혼성 부대로 북과 꽹과리를 치고, 간헐적으로 총을 쏘며 3중 포위망을 형성했다. 이 습격으로 4~5명의 경찰이 사망하고 경찰은 이를 해결하기 위해 토벌 전담인 11사단에 지원을 요청했다.(사진속의 인물은 신원지서 습격사건을 증언하는 당시 지서주임 박대성)

 

11사단의 창설

1950년 8월 27일 국방부 일반 명령 제54호에 의거 경북 영천에서 창설되었다. 지리산 지구의 빨치산을 토벌하기 위해 11월 3일 3군단에 배속되었다. 11사단은 화랑부대로서 훈련을 제대로 하지 못하였고 작전지역에 비해 부족한 병력으로 공비토벌작전을 수행하기가 곤란하였다.(좌측 사진은 지리산 빨치산 토벌을 위한 백선엽(백마전 전투 사령관)과 참모회의 모습이고 우측 사진은 이승만 대통령이 빨치한 토벌대를 격려하는 모습이다.)

 

11사단의 토벌작전

1951년 2월 5일 9연대장 오익경으로부터 작전명령 제5호를 지시받은 3대대장 한동석은 신원면 일대로 진격했다. 3대대는 별다른 정항 없이 신원면을 수복한 후 인근 지역인 함양군과 산청군 경계로 전진했는데, 2월 6일 신원지서가 빨치산의 공격을 받는 사건이 일어났다.

 

 

감춰진 진시의 방이다.

 

1951년 2월 비정상적인 죽음

 

9일 창연마을 

거창사건 첫째 날

1951녀누2월 9일 거창군 신원면 청연마을이 초토화되었다. 11사단 9연대 3대대 한동석소령과 병력은 닥치는 대로 마을에 불을 지르고 주민들을 마을 앞에 눈이 쌓인 논으로 끌어내어 소총과 기관총을 난사했다. 한얀 눈이 소복히 쌓였던 논밭은 순식간에 붉은 피로 뒤덮였다.

 

 

학살 영상화면 

 

청연마을 학살 현장

 

10일 탄량골

거창사건 둘째 날

1951년 2월 10일, 11사단 9연대 3대대 군인들은 거창군 신원면 와룡리, 대현리, 중유리 마을에 불을 지른 뒤 가축과 양식을 강탈했다. 또한 주민들을 피난시켜 주겠다며 끌고 가던 중, 날도 어두워지고 교실도 꽉 차 더 이상 들어갈 수 없어 탄량골 골짜기로 몰어넣고 군.경찰.공무원.청년방위대 등 가족들을 선별한 후 나머지 주민들에게 총을 난사했다. 이후 시신 위에 나뭇가지를 덮고, 휘발유를 뿌려 불을 질러 태웠다.

 

 

 

 

 

탄량골 학살현장

 

11일, 박산골

거창사건 셋째 날

1951년 2월 10일 밤, 11사단 9연대 3대대 군인들은 신원국민학교 교실에 신원면 일대 주민 1,000여 명을 감금하고 밤새 괴롭혔다. 다음날 군.경찰.공무원.청년 방위대 등 가족들을 제외한 주민 517명을 박산골로 몰아넣고 학살했다. 이후 시신위에 장작을 올리고 휘발유를 뿌려 불로 태웠다. 

 

 

 

 

 

박산골 사건 경로

박산골은 2월 11일 신원면 일대 주민들을 학살한 마지막 장소로 가장 많은 사람들이 처참한 죽음을 당했다. 주민들은 자신이 살던 곳에서 신원국민하교로 끌려와 공포와 추위. 굶주림에 떨었으며 다음 날 박산골에서 집단 학살을 당했다.

☆10일 밤 신원국민학교 교실 안(4개리 주민 1,000여명을 교실 안에 가둠. 밤새 주민들에게 인공기 군가를 부르게 하고 협박함) 

11일 아침 학교 운동장(군.경찰. 공무원.청년방위대 등 가족들 제외. 주민 517명을 몰아 이동 시작.

11일 오전 박산골(청년 10여명 차출하여 구덩이를 파도록 함. 다시 장소 이동. 사람들을 박산골 계곡으로 몰아넣고 집단 학살. 시신 위에 장작을 올리고 휘발유를 뿌려 불태움)

 

생존자의 증언

 

1951년 학살당시 천운으로 생존하신 분들의 증언들

 

각지역의 생존자들이 증언하는 모습들이다.

 

 

폭로와 은폐

1951년 3월 사건의 폭로

거창사건, 세상에 드러나다.

1951년 3월 ... 신중목 거창군 국회의원은 거창사건이 발생한 사실을 재보 받고 이를 확인하기 위해 거창사건 현장으로 향했다. 이후 군경의 감시를 피해 제54차 국회 본회의장에서 이를 폭로하여 거창사건이 세상에 드러나게 되었다.

 

제54회 국회,

신중목 거창군 국회의원의 폭로

거창사건이 수면 위로 드러나다.

1951년 3월 29일 제54차 국회 본회의, 거창 출신 국회의원 신중목은 거창을 다녀온 후 거창사건의 심각성을 인식하고 회의를 비공개로 요청한 후 이를 폭로 하였다. 온 나라가 벌집 쑤셔 놓은 듯이 들끓었지만 정부에서는 아무런 공식발표도 하지 않았다.

 

 

 

국회 합동조사단 구성

거창사건에 한 발자국 다가가다.

거창사건의 진실을 알아내기 위해 내무부는 장영복 경무관이, 법무부는 김준연 장관의 지시로 부장급 검사 2명이 조사를 실시했다. 그러나 국방부를 포함해 조사내용은 모두 달랐다. 이에 국회에서는 1951년 3월 30일 거창사건특별조사위원회와 내무.법무.국방부가 국회합동조사단을 구성해 파견 하기로 의결했다.

 

언론에 실린 거창사건에 관한 기사들을 스크랩하였다.

 

유혈 - "터진11년만의 분노", 당시면장 돌로찍어 화장, 육백여명을 학살등의 기사가 1960년 5월 12일 신중목관련 신문스크랩이다.

 

거창학살사건의 진상 대부분 부녀자 16세미만 327명. 1960년 5월 14일 동아일보 기사 스크랩

 

1988년 3월 18일 르포 "이대로 눈을 감을 순 없다." 경남대 학보 제392호

 

1988년 4월 29일 르포 "이대로 "이대로 눈을 감을 순 없다." 경남대 학보 제395호

1988년 6월 3일 르포 "이대로 "이대로 눈을 감을 순 없다." 경남대 학보 제400호

 

증거를 인멸한 군, 사건을 왜곡한 국가

거창사건 폭로의 의미가 조각나다.

신중목 의원의 폭로 이후, 거창사건에 대한 증거를 인멸하고 축소하려는 움직임이 시작됐다. 거창사건이 폭로되기 전인 2월 28일 신성모 국방부장관은 헌병사령관과 경남경찰국장 등을 이끌고 비공식 현지조사를 실시했으며, 국회합동진상규명조사단이 거창에 도착하기 전부터 후까지 조작과 은폐, 왜곡으로 일관했다.

 

국회합동진상규명조사단 방해장소이다.

 

 

 

홀 중앙에 상징적인 박산골 합동묘역에 세워졌던 비석을 훼손하여 땅에 파 묻기까지 하였던 사실을 증명하기 위하여 전시한듯...

 

박산합동묘역위령비가 훼손되고 땅에 파 묻었던 것을 이렇게 전시하고 있다.

 

왜곡된 기억

1961년 6월 군사정권의 만행

군사정권의 등장, 계속되는 고통

1961년 5.16군사정변으로 군사정권이 들어섰다. 그러나 거창사건의 직접적인 피해를 입은 사람들과 그 유족들은 사과를 받기는 커녕 박영보 면장 타살사건, 합동묘역개장 명령과 훼손, 유족회 간부 구속 등 숱한 사건들을 겪으며 사건 왜곡과 만행으로 고통의 시기를 보내야만 했다. 

부관참시, 박산합동모역 개장

나라에서 파묻었으니, 나라에서 다시 세워라

1960년 유족들은 50만환으로 분묘 앞에 위령비를 세웠다. 그러나 1961년 박정희 정권이 들어서면서 경찰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유족들의 손으로 직접 위령비의 글귀를 정으로 쪼아내어 알아볼 수 없게 훼손한 뒤 땅속에 묻어야만 했다.

 

유가족의 증언모습

 

 

 

 

 

거창양민학살제2회 39주기합동위령제를 지내는 모습이다.

 

 

 

 

 

 

 

정면 화면에는 각 지역의 각계각층의 사람들의 추모글들이 소개되고 좌우에는 희생자들의 명단이 적혀있다.

 

 

거창사건추모공원을 둘러보고 이곳 역사교육관을 참관하니 내가 잘 몰랐던 거창사건의 진상을 이번에 재대로 공부를 하였다. 내 이웃에 이러한 곳이 있는데도 어렴푸시 있다는 사실만 알았지 이렇게 엄청난 사실을 간직하고 있음에 또 한번 자각하는 기회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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