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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남도

전남고창 원형이 가장 잘 남아 있는 고창읍성

작성자허수아비|작성시간26.06.08|조회수6 목록 댓글 0

일 시 :2026년 4월 24일

장 소 : 전북특별자치도 고창군 고창읍 읍내리 산 9

 

전남고창 원형이 가장 잘 남아 있는 고창읍성

 

고창읍성은 해미읍성, 낙안읍성과 함께 대한민국에서 원형이 가장 잘 남아 있는 읍성이기도 하다. '모양성'이라는 이름으로도 불리는데, 현지인들은 고창읍성이라는 이름보다 원래 이름인 모양성이라고 부르는 경우가 많으며 고창군민들 스스로도 고창군의 아이덴티티로 생각하는 듯한 장소다. 고창읍성은 1963년 1월 21일 사적 제145호로 지정되었다. 고창읍성은 조선시대 단종 원년(1453년)에 지어졌다고 전해지나 확실한 축조기록이 남아 있는 것은 아니라서 조선 전기에 만들어졌을 것으로 추정한다.
성벽의 둘레는 1,684m, 높이는 대략 4~6m이다. 성곽의 폭이 1m가 약간 넘는 곳도 있고 1m도 안 되는 곳도 대부분이다. 많은 읍성들이 평지에 위치한 마을을 둘러싸는 형태로 만들어진 것과는 달리 고창읍성은 방장산을 둘러싸고 있는데, 이로 미루어보면 아마도 성 안은 평상시의 주거지가 아닌 유사시의 피난처로 계획되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성 안에는 본래 22채가 있었다고 하나 모두 사라졌고 지금은 동헌, 군량고, 옥사(獄舍), 객사(客舍) 및 망루 등 15채의 건물들이 복원되어 있다. 성벽 위를 세바퀴 돌면 살아서는 무병장수하고 죽어서는 극락왕생한다는 전설이 내려온다. 매년 10월이면 지역축제인 '모양성제'가 이 고창읍성 앞에서 열리는데 지역축제로서는 상당히 규모가 있으며 사람들도 많이 찾는다. 고창읍성으로 들어가는 입구 옆에 판소리 여섯마당을 정초한 동리 신재효의 고택이 있으며, 바로 옆에 판소리 박물관이 있다.
성내에 흥선대원군이 세운 척화비가 있으며 공북루 근처에 위치한다. 현재는 군청 근처에 있는 자유고등학교가 예전에는 고창읍성 내에 위치했었다. 읍성 내에도 여고 터에 안내판이 있는데, 1986년에 성 보존을 위해서 현 위치로 이전하였다고 한다. 

 

고창 문화의 전당이다. 맞은편에 고창읍성 주차장이 마련되어 있다.

 

주차장에서 나서면 바로 고창읍성의 성곽이 보인다. 빨간 철쭉꽃이 예쁘게 피어있네요

 

고창읍성으로 들어가는 주변은 모양성공원이란 이름으로 불리는 공원이 조성되어 있다. 모양성은 고창읍성의 또 다른 이름이다.

 

모양성공원에 동락정(同樂亭)이란 정자 뒷편으로 고창읍성의 모습이 보인다.

 

 

고창평생학습관

 

입구에 고창신효재판소리박물관도 있다.

 

신채효생가고택이 있는데 이는 뒷편에서 따로 소개를 한다.

 

고창읍성으로 들어서는 출입문에 매표소가 있다. 입장료는 어른이 3천원인데 전액 지역상품권으로 되돌려 받는다. 경로는 무료입장이다.

 

우측으로 동리시네마가 있네요

 

고창읍성에 대한 상세한 안내표시가 되어있다.

 

고창읍성의 배치도이다.

 

입구에 답성놀이상이 세워져 있다.

돌을 머리에 이고 성을 한바퀴 돌면 다리병이 낫고, 두바퀴 돌면 무병장수 하고, 세바퀴 돌면 극락승천한다는 전설이 있다.

 

읍성으로 들어가기 전에 예쁜 화장실도 마련되어 있네요

 

고창읍성의 오른쪽으로 읍성벽 아래에 예쁜 철쭉꽃이 피어있는 아래에 비석군이 자리하고 있다.

이 곳은 고창현. 고창군과 인연을 맺은 역대 관찰사, 현감, 군수들의 선정비를 모아놓은 곳이다. 고창읍내 여러 곳에 흩어져 있던 것을 고창읍성 내부에 옮겨 졌다가 다시 이 곳에 옮겨놓았다. 비석의 건린연대가 조선중기부터 근대까지 다양하여 고창의 역사와 비석 제작의 변천과정을 엿볼 수 있는 자료이다.

 

고창읍성으로 들어서는 북문(공북루) 입구이다. 

 

성문안으로 들어가 보자. 입구에는 옹성이 만들어져 적의 침입을 막았다. 옹성이란 성문 앞에 설치되는 시설물로 모양이 마치 항아리와 같다고 하여 붙은 이름이다. 옹성(甕城)은 성문을 공격하거나 부수는 적을 측면과 후방에서 공격할 수 있는 시설이다. 적이 아무리 많아도 옹성 안에 들어 올 수 있는 인원이 제한되어 있기 때문에 아군쪽에서 공격하기가 쉽다.

 

성문의 북문인 공북루이다. 공북루(拱北樓)는 낮은 기단위에 전면에는 자연석 주춧돌을 사용하고 배면은 화강석 돌기둥 위에 둥근 기둥을 세워 만든 2층 문루이다. 고창읍성에는 정문(正門)인 공북루(북문)와 등양루(동문), 진서루(서문)등 3개의 성문이 있는데 성문앞에는 적으로부터 성문을 보호하기 위하여 옹성을 둘러쌓고 그 위에 여장(여담)을 만들어 놓았다. 공북루 전후 사저기와 상량문에는 순치 3년(인조24:1646) 병술(丙戌) 12월에 공북루를 소건하고 그 후 3회에 걸쳐 중수했다는 기록이 있다.

 

공북루 우측으로 넓은 마당이 있고 멀리 관리사무소가 보인다.

 

공북루의 좌측으로는 옥사가 있고 그 왼쪽으로는 답성놀이 시작점이다. 옥은 죄인을 가두는 곳으로 감옥(監獄) 또는 원옥(園獄)이라고도 한다. 조선시대의 옥은 대개 관아의 입구에다 짓고 동쪽 칸과 서쪽 칸에 남,여 옥을 나누어 만들고 높은 담장을 둥글게 둘러 쳤는데 그래서 생겨난 이름이 원옥(圓獄)이다. 이 자리에는 조선시개의 옥이 있었으나 건물은 없어지고 터만 남아있던 것을 1983년에 발굴조사하여 확인된 유구(遺構)와 각종자료를 참고하여 2000년에 원 모습으로 다시 지었다.

 

옥사에서 바라본 공북루의 모습

 

옥사 옆으로 성벽을 따라 성을 한바퀴 도는 담성놀이 시작점이다.

 

약수터가 있어 올라가 보았다.

 

수질검사 결과 불합격 판정으로 인해 음용이 불가 합니다. 

 

중간에도 이렇게 화장실이 마련되어 있어서 산책하는데 불편함이 없다.

 

읍성안의 산에는 이렇게 아름드리 나무들로 가득하여 산책하는 시원한 공간을 제공한다.

 

입구에서 조금 올라가면 풍화루(豊和樓)가 나온다. 

 

풍화루(豊和樓) 

이 건물은 고창읍성 연못(蓮池)옆에 세운 2층 누각(樓閣)이다. 문헌에는 성내에 빈풍루(豳風樓)와 광풍루가 이었다고 전해오고 있으나 건물과 연못은 모두 없어지고 터만 남아있던 것을 1988년에 발굴조사하여 확인된 유구와 각종자료를 참고하여 풍화루는 1989년에 연못은 1990년에 본래의 모습으로 복원하였다. 건물 정면에 있는 현판은 풍년과 마을의 평화를 기원하는 뜻으로 풍화루라 하였는데 글씨는 석전 황욱(石田 黃旭)선생이 92세에 쓴 글씨이다.

 

언덕위로 건물이 보여 올라가 보았다.

 

올라와 보니 이 건물은 장청(將廳)이다. 장청은 조선시개에는 왕궁(王宮)과 병영(兵營)및 진(陣)을 지키는 중앙군인과 지방의 군(郡), 현(縣)을 지키는 속오군(束伍軍)제도가 있었는데 장청은 속오군의 우두머리인 현감(縣監)과 병당(兵房), 군교(軍校)들이 군무(軍務)를 보살피던 청사(廳舍)이다. 이 자리에는 조선시대의 장청이 있었으나 건물은 없어지고 터만 남아있던 것을 1991년 발굴조사하여 확인된 육구(遺構)와 각종자료를 참고하여 2000년도에 원 모습으로 다시 지었다.

 

장청의 왼쪽 위로 고창내아 건물이 보인다.

 

고창내아(高敞內衙)

동헌은 외동헌(外東軒)과 내동헌(內東軒)으로 나뉘는데 외동헌은 사무처로 흔히 이를 동헌이라 불렀으며 내동헌은 수령(守令)이 기거하던 살림집으로 내아라고 불렀다. 이 자리에는 조선시대의 내아가 있었으나 건물은 없어지고 터만 남아있던 것을 1987년에 발굴조사하여 확인된 유구(遺構)와 각종자료를 참고하여 1989년 원 모습으로 다시 지었다.

 

 

 

 

고창객사(高敞客舍)

조선시대에는 각 고을에 객사라고 하는 관아가 있었다. 중앙의 몸채에는 임금을 상징하는 전패(殿牌)를 모시고 매월 초하루와 보름날 그리고 나라에 경사와 궂은 일이 있을 때 대궐을 향하여 예를 올렸으며 왼쪽과 오른쪽 방은 조성에서 파견된 과누 관원들의 숙소로 사용되었다. 본관은 현판에 쓴 모양지관(牟陽之館)의 모양은 예로부터 이 고장을 모양고을이라 하였고 이 성을 모양성(牟陽城)이라 불러온데서 비롯된 당호(堂號)이다. 이곳에는 조선시대의 객사가 있었으나 건물은 없어지고 터만 남아 있던 것을 1983년 발굴조사하여 확인된 유구와 각종 자료를 참고하여 1991년에 원 모습으로 다시 지었다.

 

 

 

멀리 동문인 등양루의 모습이다. 이 등양루는 성곽위를 한바퀴 걸으면서 다시 소개를 한다.

 

동문인 등양루 아래로 작청이 자리하고 있다. 작청(作廳)인 이 건물은 조선시대 지방관아의 작청 건물로 복원한 것이다. 작청은 질청이라고도 하였는데 이방(吏房)과 아전(衙前)들이 소관 업무를 처리하던 청사(廳舍)이다. 

 

이 자리에는 조선시대의 작청이 있었으나 고창읍성이 문화재로 지정되기 전에 고창여자 중학교를 건립하면서 작청을 다른 곳으로 이건(移建)하여 관리소로 사용하여 오다가 1986년에 학교를 성밖으로 이전하고 확인된 자료와 고증을 거쳐 1991년에 원 모습으로 다시 지었다. 

 

작청에서 바라본 풍화루와 예쁜 정원을 지나 멀리 공북문이 보인다.

 

관청(官廳)

관청은 관주(官廚)라고도 하였는데 지방 관아의 주방(廚房)에 관한 사무를 담당 하던 곳이다. 이 곳에서는 수령(守令)과 그 가족등의 식생활을 비롯한 빈객(賓客)의 접대와 각종잔치에 필요한 물품의 조달 및 회계 사무를 관장하였다..

 

 이 자리에는 조선시대의 관청이 있었으나 건물은 없어지고 터만 남아 있던 것을 1991년에 발굴조사하여 확인된 유구와 각종자료를 참고하여 1992년 원 모습으로 다시 지었다

 

 

연지와 풍화루의 모습이다.

 

공북루와 옥사 사이에서 성곽을 한바퀴 도는 출발지점이다. 이 곳에서 성을 한 바퀴 도는데 약 1.684m이며, 소요시간은 30분이다.

 

내려다 본 공북루와 그 앞의 옹성의 모습이다.

 

내려다본 고창읍성의 출입로이다. 멀리 매표소 앞에 사람이 많아 당겨보니 풍물패들이다.

 

읍성 매표소 앞에 풍물패들이 모여있다. 아마도 행사가 있나 보다.

 

 

성곽길에서 내려다본 공영 주차장의 모습이다.

 

성곽길을 따라 아래에 빨간 철쭉이 심어져 정말 아름답다.

 

성곽길을 걷다가 특별히 만들어진 넓은 곳이 있는데 이 곳이 "3.1독립운동만세 터"라고 적혀있다. 1919년 3월 21일 김승옥, 오동균, 김창규 등의 주도하에 고창청년회원, 고창보통학교 2백여명이 이곳 읍성 북치광장에 모여 대한독립만세를 불렀다.고 한다.

 

성곽길을 걸으며 아래 철쭉꽃을 감상하는게 또 다른 재미를 주고있다.

 

멀리 보이는 건물은 동문인 등양문의 모습이다.

 

동문인 등양문의 모습

 

등양루의 누각 바닥으로 그냥 건너간다.

 

동문인 등양문(登陽門)이다.

 

내려다본 등양문의 모습, 누각 앞에 둥글게 쌓여진 옹성이 아름답다.

 

 

소나무에 솔순이 예쁘게 자라고 있다.

 

 

이 모형은 아마도 성을 쌓을때 사용되었던 마차를 표현한게 아닐까?

 

소나무숲 가운데에 성황당이 보인다.

 

성황당(城隍堂)

성황신(城隍神)은 고을의 평화와 풍년을 지켜주는 수호신(守護神)으로 섬겨왔으며, 지금도 매년 중양절(重陽節 - 음력 9월9일) 모양성재(牟陽城祭)날에 이곳에서 제사를 올린다. 성황신은 서낭신이라고도 하는데 고을을 지켜주는 지신(地神)으로 풍수지리설과 더불어 민간신앙으로 발전되어 왔으며 그 지역에서 산세가 수려하고 하늘과 가까운 가장 높은곳에 모셔 왔다. 이 자리에는 조선시대의 성황사가 있었으나 건물은 없어지고 터만 남아 있던 것을 1991년에 발굴조사하여 확인된 유구와 각종자료를 참고 하여 원 모습으로 다시 지었다.

 

성황당 표지석 옆에 장대봉(將臺峰)의 사적(事蹟)비가 나란히 세워져 있다.

고창읍의 주산(主山:일명 남산,108m)인 장대봉은 진산인 방등산의 기맥이 취령산에서 북쪽으로 절절히 이어내린 맨 끝 봉우리다 이 등성이를 에워싸고 고창읍성을 쌓았다는데 그 정상에는 지휘 장수가 올라서서 명령하던 돌로 높게 쌓은 대지(臺址)가 있었다.

 

멀리 건너편으로 노동저수지가 한눈에 들어온다. 저수지 중간에 수중데크길이 만들어져 있다. 이곳 읍성에서 산책로로 서로 연결된다.

 

주변은 온통 소나무로 빽빽하다.

 

 

이제 성곽길의 좌측으로 내려 가는 길이다.

 

멀리 서문인 진서루가 아래로 보인다.

 

이 서문인 진서루에는 복원공사 중이라 바로 가질 못하고 우측으로 돌아 가야한다.

 

서문인 진서루(鎭西樓)의 모습이다.

 

"고창읍성 서문 복구사업"이란 공사표지판이 세워져 있어 이렇게 돌아가야 한다.

 

서북치 부근에 성벽보수공사 지역이다.

 

성곽길에서 산속으로 조금 올라가면 팔각정이 나온다.

 

여기다 팔각정을 왜 세웠을까? 사방이 소나무라 조망도 없는 이곳에...

 

이 곳에도 표지석이 세워져 있다. 이 곳은 읍성 북치광장으로 1926년 6월 10일 조선 순종 황제 인산일(因山日)에 추도식을 마친 고창청년회원과 고창고등보통학교학생, 고창보통학교학생 수백명이 강석영, 조관승, 임동섭, 김소자 등의 주도하에 독립만세를 외친 곳이다.

 

이제 북문인 출발지인 공북루앞 광장이 보인다.

 

성곽아래로 보이는 이 건물은 향청이다.

 

향청(鄕廳)

조선시대에는 대개의 고을에 향청이라는 관사가 있었다. 지방의 수령을 자문 보좌하던 자치기구로서 조선 초기에는 유향소(留鄕所)라고 하였는데 임진왜란 이후부터 향청이라고 불리워졌다. 향청의 설치목적은 지방의 향리를 규찰(糾察)하고 향풍(鄕風)을 바라게 하는 등 향총교화(鄕村敎化)를 담당하였다고 하다. 이 자리에는 조선시대의 향청이 있었으나 건물은 없어지고 터만 남아 있던 것을 1983년에 원 모습으로 다시 지었다.

 

공북루의 옹성이 보인다.

 

공북루 옹성위에서는 풍물패가 촬영을 준비하고 있다.

 

 

성곽을 다 돌고 공북루 마당으로 내려왔다. 앞의 건물은 고창읍성을 관리하는 관리소이다.

 

척화비(斥和碑)

이 비는 조선말기에 대원군이 펼친 쇄국정책의 상징이라 할 수 있는 것으로 병인년(1866)에 비문을 만들고 신미년(1871)에 세웠다. 당시 서양의 열강들이 무력을 앞세워 문호의 개방을 요구하고 엄청난 힘으로 밀어 닥치자 섭정(攝政)의 자리에 있던 흥선대원군은 이들의 위협에서 나라를 지키는 일은 쇄국정책을 펴는 일이라고 생각하고 이 비를 세웠다고 한다. 비문의 내용은 "서양 오랑캐가 침범하는데 싸우지 않는 것은 곧 화친을 하자는 것이고 화친을 하자는 것은 나라를 파는 것임을 온 백성에게 경계한다."라는 뜻이다. 이 비문을 지은 병인년에는 천주교에 대한 탄압이 도화선이 되어 병인양요가 발생하였고 비를 만드는 신미년에는 미군 군함이 강화도를 침입한 신미양요가 발생하였다.

 

 

 

공북루(拱北樓)

이 건물은 낮은 기단위에 전면에는 자연석 주춧돌(礎石)을 사용하고 배면(背面)은 화강석 돌기둥(石柱)위에 둥근기둥을 세워 만든 2층 문루(門樓)이다. 고창읍성에는 정문인 공북루(북문)와 등양루(동문), 진서루(서문)등 3개소의 성문이 있는데 성문앞에는 적으로부터 성문을 보호하기 위하여 옹성(甕城)을 둘러쌓고 그 위에 여장(여담)을 쌓아 성안에서 밖을 살필 수 있는 현관(懸眼)과 총을 쏠 수 있는 총안(근총안.원총안)을 만들어 놓았다. 공북루 전후 사적기와 상량문에는 순치(順治)3년(인조24년:1646) 병술(丙戌) 12월에 공북루를 소건(所建)하고 그 후 3회에 걸쳐 중수(重修)했다는 기록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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