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관광지] 중국 봉건지주 명문세가의 장원, 모씨장원(치샤)-牟氏庄园(栖霞)

작성자카페지기-양천삼|작성시간08.11.06|조회수49 목록 댓글 0
牟氏庄园(栖霞) móu shì zhuāng yuán (qī xiá)

* 주소:山东省栖霞市霞光路

* 전화번호:0535)5211694

* 입장료 : 50위엔(학생할인 없는 듯)

* 교통 : 연대장거리 버스정류장에서 승차 - 烟台长途汽车站 (cháng tú qì chē zhàn)
치샤 장원교에서 하차하여 - 庄园桥 (zhuāng yuán qiáo)
동쪽으로 300미터, 남쪽으로 50미터 가면 오른쪽 - 往东走300米再往南走50米左右即可到达

* 가는 길 :
초행인 분들을 위해서 상세하게 설명해봅니다.
연대 장거리 버스정류장은 빠이승 백화점과 싼잔시장 사이에 있습니다.
버스 배차는 아침 일찍부터 오후 4~5시까지 1시간 이내 간격으로 있고,
요금은 1인 편도 21위엔입니다.(시간이나 요일에 따라 다른지는 확인하지 못했습니다.)
소요 시간은 공식적으로 80분, 실제로 제가 도착한 시간은 50분 이후였습니다.
(평일 낮에는 차가 막히지 않았습니다만 러쉬아워라면 연대에서 빠져나가는 시간이 상당히 소모될 것입니다.)

승차 시 버스 차장에게 장원교에서 내릴 것이라고 말하면 인근에서 세워줍니다.
불가능하다고 하거나 의사소통에 실패하셨거나 차장이 깜빡 잊었다면... -_-;
치샤 버스정류장에서 택시를 타면 됩니다.(택시 기본요금 5위엔으로 기억합니다.)

* 장거리 버스에 관해 :
치샤 행 장거리 버스는 나름 깔끔하게 유지되는 듯 싶습니다.
어린 아이들과 동행하거나 어른들을 모시고 가기에도 괜찮은 분위기였어요.
우리나라 관광버스 정도를 기대하시면 곤란하지만 중국에서는 발군의 청결함이었습니다.
차장이 영어로 안내방송을 하는데(첨 듣고는 영어인줄 몰랐습니다만;;) 영어로 대화는 불가능했습니다.
그러나 저의 어리숙한 중국어도 열심히 알아들어 주려고 노력해서 의사소통은 가능했습니다.
(버스 차장이 너무나 친절해서 중국에서 흔하지 않은 친절과 배려에 당황스러울 정도였습니다.)
운전사의 매너 역시 중국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충분히 안전했다고 기억합니다.
시 외각으로 나가면 길이 거의 평탄한 일직선로라 이동 시 피로감도 없었습니다.

* 오는 길 :
치샤 버스정류장으로 돌아오셔서 (역시 택시 기본요금) 연대 행 버스를 탑니다.
막차는 오후 5시 30분 까지라고 합니다. 배차시간 역시 1시간 이내였습니다.

모씨장원 가는 길, 지도 참고하세요. (A4에 꼭 맞게 출력하시면 됩니다.)

첨부파일 모씨장원-태허궁-지도.jpg



* 개인적인 감상 :

중국의 전통가옥에 관심이 있는 분이라면 반드시 가보셔야 합니다.
중국 북방에서 가장 규모가 크고 보존이 잘 되어있는 건물이라는 말이 정말이더군요.
전통가옥군 내부를 박물관 식으로 전시실을 꾸며놓았는데
구석구석 중국풍이 느껴지고 볼거리도 제법 있습니다.
주요 전시물로는 모씨 가문의 주요 인물들 소개,
청나라 시대의 생활용품, 의복, 가구, 도자기, 그림, 목공예품 등....
중국에서 가장 크다는 벼루도 전시되어 있습니다.(벼루라기 보다는 연석으로 만든 조각품...)
이곳이 항일전쟁의 격전지였다는 역사적 사실을 보여주는 전시관도 있고
인근에서 발견된 고대 유물(토기, 돌바늘, 돌칼 등)을 전시한 곳도 있고...
전시물은 다소 난잡합니다만 볼거리가 한곳에 모여있다 생각하면 나름 장점이군요.

남방계열의 전통가옥과 비교해보면 큰 규모에 비해서 아기자기하고 장식적인 면은 부족합니다.
소박하고 검소했던 북방의 민가를 상상해보니 나름의 건축미가 느껴져서 충분히 만족스러웠습니다.
일부 새로 건축했거나 완전히 개보수한 건물도 있습니다.
그러나 수백년이 되었을 배수로를 보고 완전히 감동하고 말았습니다.
지금은 일개 관광지가 되었지만 그 배수로는 오랜 시간동안 여전히 그 기능을 계속하고 있었다니....
장원 안의 미로같은 길을 돌아다니면서 옛것과 새것을 구분해 보는 것도 재미있는 일이 될거라고 생각합니다.

화려하고 풍요로운 남방 풍의 전통가옥을 기대하신 분들은 실망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북방의 소박한 아름다움을 찾아보는 것도 즐거운 일이라고 추천하고 싶습니다.
전시장이나 전시품의 관리가 잘 되고있다고 말하기는 정말 정말 어렵지만....
중국의 다른 지역을 여행해보신 분이라면 이만하면 괜찮다고 생각하실 겁니다. -_-;

내부 가이드가 방문객을 일정수 모아서 이끌고 다니면서 설명을 해줍니다.
가이드를 따라다니며 설명을 들어도 되고 개별적으로 돌아다녀도 상관없습니다.
개별적으로 다니실 때는 내부에서 길을 잃지 않도록 방향에 신경쓰시구요.
저는 꼼꼼하게 돌아보고 사진을 찍느라 2시간 이상 소모가 되었습니다만
중국인 방문객들은 대체로 1시간 이내로 둘어보더군요.

신발은 걷기 편한 것으로 신고 가세요!
구두신고 갔다가 후회했습니다. 운동화끈 꼭 묶고 가세요. ^^

치샤라는 동네에 처음 가봤는데 완벽한 배산임수 지역이라 뒤로는 산, 앞으로는 강이 흐르더군요.
강바람 맞으며 강가를 따라 걷는 산책도 즐거웠습니다. ^^

아이들과 함께 방문하시겠다는 분이 많으셨는데요,
확실히 교육적인 답사가 되겠지만 아이들이 흥미를 느낄지는 모르겠습니다.
놀이동산 같은 요소는 전혀 없어서 지루해하지 않을까 걱정스럽네요.
숨바꼭질 하기는 좋은 장소라고 장담할 수 있습니다만 아이 잃어버리지 않게 조심하시구요. ^^
부모님들께서 모씨장원의 역사와 문화적 가치를 미리 공부하고 가시면 더욱 좋겠습니다.

아래에 관련 내용을 첨부합니다.

* 관련내용

개요: 중국 북방에서 규모가 가장 크고 보존이 제일 잘돼 있는 봉건 지주 명문세가의 장원이다. 시 북쪽에 위치한 도촌(都村)내에 자리잡고 있다. 건축 역사 상 중국 북방 민속 건축의 우수한 성과를 집중되어 있으며 높은 예술 가치와 역사 문화 내포를 가지고 있는 국가급 중점 문물 보호 단위이다.

역사: 모씨장원은 청나라 옹정(雍正) 연간 1735년에 처음 건립되었다. 모지의(牟之儀 모흑림의 조부)가 아우와 함께 고진도(古鎭都)에 고루(古樓) 한 동을 건축하였고, 그 후 1742년 고루의 동북쪽에 초당 4칸을 지어 이름하기를 '소해초당(小懈草堂)'이라고 하였다. 대지주였던 모흑림(牟黑林 또는 모묵림(牟墨林) 1789~1870)과 그의 후손들의 주택으로 끊임없이 증축되어 민국24년(1935년)에 현재의 규모가 형성되었다.

규모: 모씨장원의 규모는 전체 약 2만 평방미터가 된다. 동서의 길이가 158미터이고, 남북의 넓이가 148미터가 된다. 청(廳), 당(堂), 루(樓), 상(廂) 등이 모두 489칸이나 된다. 동쪽에 있는 일신당(日新堂), 서충래(西忠來), 동충래(東忠來)와 서북쪽에 있는 보선당(寶善堂)과 서남쪽에 있는 남충래(南忠來), 사고당(師古堂) 등 6개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각각에 속한 방, 침실, 객실, 소루와 동서에 있는 행랑채는 남북의 장방형으로 질서정연하게 배치되어 있다. 사합원(四合院), 월량문(月亮門), 병문(屛門), 수장문(隨墻門) 등은 정원과 외부 통로와의 적당한 곳에 설계되어 있다. 이 기본 구성에는 봉건지주 사회의 계급과 남존여비 사상이 반영되어 있다고 한다.

건물구도를 따지면 남북향의 축선을 따라 지어진 6대 뜨락 전체가 모두 중국 전통의 사합원 양식을 띠고 있으며 대들보 등에는 조각이 새겨져 있고 기둥에는 그림이 그려져 있으며 공간 배치에서도 여백 등이 중시되면서 단층 평지붕 건물과 그고 작은 층집들이 조화를 이루고 있다. 전형적인 북방지역 전통 민가의 건축 특색과 더불어 섬세한 강남지역의 민가 풍격도 느껴진다.
모씨 가족의 장례 문화를 알 수 있게 하는 빈의청(殯儀廳)도 있고, 부처를 모셔 둔 곳도 있다. 청나라 말기 모씨 집안의 딸들이 거처하였던 방에 놓여진 전시물들을 보니 굉장히 화려하여 누대에 걸쳐 얼마나 세도가였는지 쉽게 알 수가 있다. 또 이 장원 안에는 중화민국 초기에 건립된 약방이 있어서 그 당시 약방의 모습을 가늠할 수도 있다.

대문에는 '경독세업(耕讀世業), 근검가풍(勤儉家風)'이라는 큰 글씨가 있다. 장원의 기초를 닦은 모흑림이 평소에 즐겨 한 말은 '인불우무재(人不憂无財) 환불선용기재(患不善用其財)'라고 한다. 즉 사람은 재물이 없음을 걱정하지 말고 그 재물을 잘 운용하지 못하는 것을 근심하라는 뜻이다.

모흑림은 재물을 잘 운영하여 조상에게서 물려받은 1000이랑에서 무려 4만5000이랑의 대토지의 지주가 되었다. 모씨가 가장 번창하였을 때에 소유한 토지가 6만이랑에 이르렀으며, 산은 12만 이랑, 주택은 480여 칸, 소작을 둔 마을은 155개가 되었다고 한다. 부자는 삼대를 넘지 못한다고 하지만 5대가 지나도 쇠락하지 않고 가업을 번창시킬 수 있었다는 것은 나름의 경영원칙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첫째로 엄한 가정교육이 있었다. 유가의 사상으로 자손을 통솔하였고, 아무리 부유하여도 자손에게 일정한 액수의 생활비를 주어 엄격한 쓰임을 제한하였다고 한다.

둘째, 관리인을 따로 두어 재물을 관리하였다. 전문 경영인을 두어 효율적으로 자산을 관리 운영하였던 것이다. 또한 경영에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이 인사문제인데, 이들은 인재를 뽑는데 매우 엄격하여 3대에 걸쳐 인품이 훌륭한 사람을 먼저 기용하였으며 이미 사람을 썼으면 절대 의심하지 않고 전적으로 신뢰하였다고 한다.

셋째, 흉년에 백성들을 구휼하는 등 선행을 널리 베풀었다고 한다. 농민봉기군이 서하성을 공략하고 모씨장원에 들려 식사까지 하면서도 모씨 가문의 재물에는 손끝 하나 대지 않았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그후 1920년대에 들어서면서 당시 사회환경 때문에 모씨장원 역시 마적이나 군벌, 관청으로 인한 피해도 입게 되였으나 1947년 토지개혁 전까지는 여전히 산동성 내의 갑부로 유명했다.

* 참고자료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0403822
http://korean.cri.cn/1/2004/11/05/1@23947.ht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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