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진태: 19. 세배대의 아들 야고보. 마20:20-28
"그 때에 세베대의 아들의 어미가 그 아들들을 데리고 예수께 와서 절하며 무엇을 구하니, 예수께서 가라사대 무엇을 원하느뇨 가로되 이 나의 두 아들을 주의 나라에서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주의 좌편에 앉게 명하소서,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 구하는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나의 마시려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느냐 저희가 말하되 할 수 있나이다. 가라사대 너희가 과연 내 잔을 마시려니와 내 좌우편에 앉는 것은 나의 줄 것이 아니라 내 아버지께서 누구를 위하여 예비하셨든지 그들이 얻을 것이니라. 열 제자가 듣고 그 두 형제에 대하여 분히 여기거늘, 예수께서 제자들을 불러다가 가라사대 이방인의 집권자들이 저희를 임의로 주관하고 그 대인들이 저희에게 권세를 부리는 줄을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아니하니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 종이 되어야 하리라.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마20:20-28)
믿음의 사람들(19) - 세배대의 아들 야고보
한국의 어머니들은 세계에서 보기 드물 만큼 자녀들의 공부와 출세에 대하여서는 상당한 관심과 집착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학교를 자주 찾아 선생님들과 상담도 하고 함께 자녀들의 진로에 대하여 고민하고 걱정하는 것을 자주 볼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조금, 아주 조금 도가 지나치니까 문제가 생기더라고요. 그 문제라는 것이 반장선거에 어머니가 개입을 하게 되고, 학교행사에 어머니들이 깊이 관여하다보니 붙여진 좋지 않은 이름이 치맛바람이라는 것이었지 않습니까?. 기억나십니까? 한때 대단하였죠?사랑하는 아들을 반장 시키고 싶었던 어머니의 마음 이해하고도 남습니다, 한때 우등 반과 열등 반으로 나누어 공부할 때 내 아이를 우등 반에 넣고 싶었던 어머니의 마음 이해하고도 남지 않습니까?. 참 대단했던 어머니들이었던 것 같습니다. 사실 이것을 긍정적인 면에서 살펴보면 자녀들의 공부에 대하여 깊은 관심과 배려를 가지고 있기에 참 좋은 것 같은데 이것을 부정적으로 보면 자녀들의 창의적인 선택과 자율적인 학습능력을 빼앗는 것이 되었고 또 자녀들이 자신의 적성에는 맞지 않지만 어머니가 좋아하는 학과를 택해서 진로를 선택해 불행해졌던 경우가 있었기에 치맛바람에 대한 이미지는 별로 좋지가 않았던 적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역사 속에서 볼 때 이 어머니들의 치맛바람이 유독 우리나라에만 있었던 것은 아니더라고요. 옛날 중국에 맹자라는 사람의 어머니도 자녀의 공부와 출세를 위하여 세 번이나 이사를 하였기에 거기에서 "맹모삼천지교" 라는 말이 나올 정도였지 않습니까? 사실 그것은 자녀에 대한 깊은 관심과 배려의 마음으로 학습분위기를 만들어준 지혜로운 어머니였음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자녀들의 문제에 있어서 이 어머니의 관심을 치맛바람이라고 표현하기에는 다소간 문제는 있겠습니다만 성경에도 어머니가 자녀들의 진로문제와 출세에 깊이 관여하는 경우를 볼 수가 있는데 에서와 야곱의 어머니인 리브가가 아들의 출세를 위해서는 남편을 속이는 일까지도 서슴치 않고 하였던 것을 봅니다. 유대나라에 여호람이라는 왕이 있었는데 이 왕의 부인이 아달랴입니다. 남편인 여호람이 죽자 아달랴는 아들 아하시야를 왕으로 내세웠는데 그가 1년만에 죽자 왕위를 이을 모든 손자를 죽이고 자신이 스스로 임금이 되어 6년간을 통치하였는데 이런 일은 유대왕국에 전무후무한 일이었습니다. 대단한 치맛바람이고 엄청난 일이었습니다.
또 어머니와 관계된 일 한가지를 성서에서 찾아본다면 바로 오늘 본문에 나타나는 야고보와 요한의 어머니인 살로메의 모습에서도 그것을 발견할 수가 있습니다. 이 야고보와 요한은 베드로와 같은 갈릴리 출신의 어부입니다. 그들은 함께 고기잡이를 하던 동료로서 주님의 부르심에 따라 가족과 배와 그물을 버려 두고서 주님을 따랐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주님께서 베드로 요한 야고보는 참으로 아낀 제자였지만 베드로와 요한에 비해 유독 성경은 이 야고보에 대한 기록은 그렇게 많지가 않습니다. 이 야고보는 지난주에 말씀을 드렸던 요한의 형으로서 또 다른 제자인 야고보와 구별을 하기 위해서 세베대의 아들인 이 야고보를 대 야고보로 불렀고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를 소 야고보라고 불렀던 것입니다. 그는 동생 요한과 함께 성격이 무척이나 급하고 강했기에 주님으로부터 우뢰의 아들이라는 별명을 얻었던 사람이었습니다.
특히 야고보의 어머니인 살로메라는 이 여인은 자녀들의 출세 문제에는 대단한 관심을 가지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어머니들의 자식에 대하여 갖는 집착에는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자신의 욕구를 충족하기 위해서 자식을 Push하는 경우도 더러 있습니다. 내가 이루지 못한 것을 자식이 이루어 주기를 바라는 대리만족의 기쁨을 얻기 위해서라는 것입니다. 지난주에 말씀을 드렸듯이 야고보와 요한의 어머니인 살로메가 예수님의 어머니인 마리아와 자매지간이 확실하다면 그 살로메는 지금 조카인 예수님에게 인사 청탁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참으로 대단한 어머니가 아닐 수 없습니다. 만약에 예수님께서 이모인 살로메의 요구에 따라 야고보와 요한을 예수님의 좌, 우편에 앉도록 하였다면 이것은 요즘 우리말로 하면 친인척 인사비리에 해당하는 것으로서 당연히 청문회를 열어야 하겠죠?
그런데 여러분!
우리가 믿는 예수님이 이모가 청탁을 한다고 마음을 움직여 어느 특정인을 그 자리에 앉힐 그 정도 밖에 그분의 인품이 안 된다면 그것은 우리 모두에게 엄청난 실망이며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모든 사람에게 큰 상처입니다. 예수님은 그 살로메의 요구에 대하여 이렇게 대답하십니다. "너희가 구하는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나의 마시려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느냐" 하십니다. 여기에 더 가관인 것은 "자기들이 마실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래 "너희가 이 잔을 마실 수 있다"라고 하자 그러나 "내 좌 우편에 앉는 것은 내가 줄 것이 아니라 내 아버지께서 누구를 위하여 예비 하셨던지 간에 그가 얻을 것이라" 하십니다.
성도 여러분 ! 이게 무슨 말인지 아시죠?
좌편과 우편의 높은 자리에 이미 눈이 어두워진 야고보와 요한이 주님께서 마시려는 잔을 자기들도 마실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주님이 마셔야 할 잔은 축배의 잔이 아닙니다. 혁명에 성공하여 기쁨을 나누는 그런 감격의 잔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이 야고보와 요한은 그 잔이 감격의 잔 인줄 알고, 기쁨의 잔인 줄 알고, 자신들도 마실 수가 있다고 고집을 부리는 것입니다. 그들의 이 말에 주님은 그래 너희가 나와 같이 이 고난의 잔을 마실 수가 있다고 하자 그러나 좌 우편에 앉힐 권한은 내가 아니라 내 아버지가 가지고 계시느니라 고 하십니다.
여러분!
우리는 야고보와 요한처럼 이런 유치한 기도는 하지 않는지 모르겠습니다. "주님! 주님의 나라가 이를 때에 내 큰아들은 오른쪽에 작은 아들은 왼편에 앉게 하여 주옵소서"라고 기도한 적은 없습니까? "주님 제가 수년동안 주님을 위하여 수고 한 것과 봉사 한 것을 주님 기억하여 주옵소서" 라고 기도한 적은 없는지요. 마25:31에 보시면 주님의 오른쪽에 앉을 사람과 왼쪽에 앉을 사람에 대하여 주님께서 말씀을 하시고 있습니다. 그 오른쪽에 앉을 사람에게 주님은 "내 아버지께 복 받을 자들이여 나아와 창세로 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 된 나라를 상속하라"고 축복을 하시는데 그 사람들은 어떤 사람인가? 하면 형제가 주릴 때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 영접하였고, 벗었을 때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 돌아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 와서 돌아보았던 사람들을 주님은 당신의 오른쪽으로 불러 세웠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 사람들이 한결같이 주님 우리가 언제 그런 일을 하였습니까? 우리가 그런 일을 한 기억이 도무지 나지가 않습니다. 우리가 언제 그런 일을 하였습니까? 라고 합니다.
그런데 왼쪽으로 세움을 받았던 사람들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우리도 형제가 주릴 때, 목마를 때, 나그네 되었을 때, 병들었을 때, 옥에 갇혔을 때, 벗었을 때 다 공양을 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때 임금은 지극히 작은 자에게는 하지 않았느니라 고 그들을 책망하고 있는 것을 봅니다. 그렇습니다. 주님의 나라가 이를 때 우리를 권세의 자리인 오른쪽과 왼쪽에 앉혀 달라고 하는 것은 잘못된 요구입니다. 우리가 주님을 위하여 봉사하고, 수고한 것 때문에 주님! 오른쪽에 앉혀 주십시오 라고 요구하는 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오늘 야고보와 요한이 하나는 오른쪽에 하나는 왼쪽에 앉게 해 달라고 하는 것은 그들이 주님을 위해 일한 수고를 기억해 주십시오. 사실 우리는 주님을 위하여 아비와 가족을 버리고 왔으니 보상해 주십시오. 라고 하는 것인데 이들의 요구 때문에 다른 제자들이 분노를 하였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사실을 보면 다른 열 사람의 제자들도 다들 한 자리에 대한 야망이 있었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마음속에는 이들이 모두 한 가지로 주님의 나라가 이를 때에 한 자리씩 차지하고 앉아서 그동안 서러움을 받으며 살아왔던 것에 대한 보상을 받으려고 하였다고 생각하니 참 끔찍합니다. 억눌려 살아온 만큼 그들도 그것에 논공행상으로서 보상을 받는다면 정말 큰일이 일어날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 주님은 이런 사람들을 제자로 부르셨습니다. 이런 사람들을 그의 동역자로 부르셨던 것입니다. 얼마나 마음이 아팠겠습니까? 얼마나 힘이 드셨을까요? 사실 제자들이 자리 때문에 싸운 이 상황은 주님께서 대 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고난을 받고 죽으셔야 한다고 말씀을 하신 바로 뒤에 이런 일로 제자들이 다툰 것입니다. 참으로 주님의 마음이 아팠을 것이고 힘들었을 것입니다. 주님은 제자들의 엉뚱한 마음을 아시고 이렇게 말씀을 하십니다.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너희 중에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 종이 되어야 하리라" 로 말입니다.
그렇게 주님의 오른편에 앉기를 원했던 야고보는 주님이 잡히시자 흔적도 없이 사라졌습니다. 베드로는 그래도 자기가 한 말이 있기 때문에 멀찍이 서나마 대 제사장 가야바의 집에까지 따라갔고, 야고보의 동생 요한도 십자가 밑에서 주님의 마지막을 지켜보았는데 유독 이 야고보 만은 이름이 기록되지 않습니다. 주님이 잡히시는 것을 보고서 야고보는 주님의 오른편에 앉았으면 큰일날 번하였다고 한숨을 지우며 안도의 한숨을 쉬었겠습니까? 야고보는 참으로 많은 생각을 하였을 것입니다. 이후에 야고보의 이름이 디베랴 바닷가에서 고기를 잡을 때 "세베대의 아들들"이라는 이름으로 다시 나타납니다. 거기서 주님께서 또 한번 그들에게 고기를 잡는 기적을 보여 주시고 베드로에게 "내 양을 먹이라, 내 양을 치라, 내 양을 먹이라고 하시는 당부의 말씀을 듣고서 그가 깨우친 바가 많았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의 이름이 행1:13절에 주님의 승천을 목격한 뒤 제자들이 마가 요한의 다락방에 기도하기 위하여 모였을 때 그의 이름이 기록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후에도 야고보의 이름은 그렇게 화려하게 나타나지는 않습니다. 아마도 야고보는 주님의 나라에서 주님 곁에 앉혀 달라고 간청을 하였다가 주님의 가르침 즉 높아지려면 남을 섬겨야 하리라고 하신 말씀이 마음 깊이 와 닫았는지 그 이후 이 야고보는 은인자중 결코 이름이 나타나지 않은데 그러다가 그의 이름이 마지막으로 기록되는 장면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행12:1절입니다. 헤롯이 교회의 지도자 중 몇 사람을 죽이려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유대지도자들에게 환심을 사고자 함이요 또 교회가 날로 성장하는 것에 대한 불안감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야고보를 잡아 먼저 죽였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제일 처음으로 순교를 당할 사람이라면 당연히 주님께 가장 많은 신뢰를 받았던 선임제자인 베드로여야 할텐데, 아니면 주님께 가장 사랑을 많이 받은 요한이어야 할텐데 왜 야고보였을까? 여기에서 우리는 참으로 하나님의 심오한 뜻이 있음을 발견해 봅니다. 지금 행12장의 상황은 초대 예루살렘 교회가 계속 성장하느냐? 성장하지 못하느냐? 하는 매우 중요한 갈림길이었습니다. 스데반집사의 순교 후에 많은 사람들이 사마리아 지역으로 피신을 하였고 그로 말미암아 안디옥에는 교회가 설립되는 등 참으로 활발하였지만 예루살렘은 사도들 외에는 남아있지 않아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런 형편에서 주님의 나라가 이를 때 오른편에 앉혀 달라고 간청을 하였던 야고보가 순교를 당하게 됩니다. 주님의 말씀처럼 섬기는 자가 되었고 교회의 종이 되었던 야고보의 삶이었습니다. 그러니 그의 순교가 갖는 의미는 참으로 컸다고 하겠습니다.
한번은 마귀들의 나라에서 회의가 열렸답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저렇게 확장이 되어가니 이것을 어떻게 막아야 하는가?가 회의의 주제였답니다. 많은 마귀들이 온갖 의견을 제시했지만 어느 것도 좋은 의견이 되지 못하였답니다. 그때 젊고 과격한 마귀가 그리스도인을 모두 죽여버립시다. 라고 하였답니다. 이때 한 늙은 마귀가 안됩니다. 그리스도인을 죽이면 그것은 교회성장의 기초가 되고 그들에게 순교의 영광을 주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라고 하였습니다. 또 다른 마귀가 그러면 전도하지도 못하고 봉사하지도 못하고 깊은 감옥에 가두어 버립시다라고 하였답니다. 이때 또한 노련한 마귀가 반대를 합니다. 감옥에 가두면 그들이 전도도 못하고 봉사도 못하는 줄 아는데 그들은 감옥에 가두어지면 바울과 실라처럼 찬송가를 부르고 기도를 하게 되어 더 성령충만케 됩니다. 라고 반대를 하였던 것입니다. 대책이 없습니다. 좋은 방법이 없습니다. 이때 거기에 참석하였던 아주 베테랑 마귀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이 전도하고, 기도하고, 봉사하고 싶으면 그렇게 하게 내버려둡시다 뭐 그렇게 막을 필요가 있습니까? 다만 그들의 마음에 이런 생각을 넣어 주면 됩니다. "내일 하자" "오늘만 날인가? 내일하면 되지" 이런 생각을 넣어 주자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제일 많이 속아넘어가는 것이 내일 하자는 것입니다. 전도? 내일 하면 되지, 봉사 그것도 내일 하면 되는 거야?
여러분! 마귀도 순교는 교회성장의 거름이 된다고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순교라는 것이 그렇게 쉽지가 않은 것입니다. 그런데 야고보는 초대교회 최초의 순교자가의 영광을 안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렇게 주님의 오른쪽자리에 앉고 싶어하던 야고보가 권력 지향적인 삶을 살던 그가 주님의 말씀처럼 먼저 하나님의 나라의 확장을 위해 자신의 목숨을 버렸고, 그는 하나님의 나라를 더 잘 섬기기 위해서 자신의 목숨을 하나님을 위해 헌신하였고, 또 많은 동역자들을 더 귀하게 섬기기 위해서 그는 교회를 위하여 죽었기에 하나님 나라에서 으뜸이 될 수 있는 귀한 은혜를 입었던 것입니다. 야고보. 그는 야망을 가진 주님의 제자였지만 그는 그 야망을 성취하기 위해서 세상 적인 방법이 아닌 하나님나라의 방법으로 그의 소원인 주님의 오른쪽에 앉을 수 있는 최초의 순교자가 되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저는 지난번에 하나님의 나라는 역설이다라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세상 적인 관점에서는 높이 올라갈수록 외롭습니다. 출세했다고 할 때부터 외롭습니다. 왜냐하면 높이 올라갈수록 혼자서 쓰는 방이 넓어지기 때문이고 많은 사람들을 만나지만 업무 적인 일 외에는 그들과 깊은 정감있는 솔직한 대화를 기대하기가 어렵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외롭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는 다릅니다. 높이 올라갈수록 즉 주님과 깊은 관계를 맺을수록, 신앙적인 은혜를 입은 사람일수록 신앙 안에서 바라볼 수 있는 시야가 넓어지면서 봉사할 기회가 많아집니다. 처음에는 교회에서 예배만 드리면 주일 날 내가 해야 될 일을 다한 것으로 여기고 집으로 돌아갔지만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주님과 교제가 깊어질수록 봉사의 영역이 넓어지고, 교회를 섬기는 시간이 많아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주님의 고난의 잔에 동참을 하면 할수록 더 아름다운 자리로, 더 귀한 자리로 옮겨서 앉을 수가 있을 것입니다. 야고보 그는 주님을 위하여 순교를 하였습니다. 정말 귀하게 아름답게 주님을 위하여 쓰임을 받았던 종이었습니다. 주님의 쓴잔을 마실 수가 있다고 말했던 그는 주님과 함께 그 잔을 나누어 마시고 하나님의 나라에서 주님 오른편에 앉게 되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야고보의 삶은 결코 화려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어느 누구보다 주님의 영광을 위하여 살았던 사람이고, 또 교회를 위하여 한 알의 밀알 과 같은 삶을 살았던 사람이었습니다. 우리는 시드니 영락교회를 사랑합니다. 하나님께서 뜻이 계셔서 이 땅에 교회를 세워 주셨고 지금까지 어려움 속에서도 안보 해 주셨다고 믿고있습니다. 이제 우리 교회는 새롭게 변화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할 때가 되었습니다. 우리에게도 야고보와 같은 믿음의 사람이 필요합니다. 결코 화려한 신앙생활은 아니지만 많은 사람들에게 깊은 감동과 도전을 줄 야고보와 같은 믿음의 사람이 필요합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 모두에게 큰 감동을 주실 길 간절히 소원합니다. 아멘!
♣ 은혜로운 찬양 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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