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진태: 29. 예레미야. 렘1:11-19
(렘 1:11) 여호와의 말씀이 또 내게 임하니라 이르시되 예레미야야 네가 무엇을 보느냐 대답하되 내가 살구나무 가지를 보나이다 (렘 1:12)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네가 잘 보았도다 이는 내가 내 말을 지켜 그대로 이루려 함이니라 (렘 1:13) 여호와의 말씀이 다시 내게 임하니라 이르시되 네가 무엇을 보느냐 대답하되 끓는 가마를 보나이다 그 면이 북에서부터 기울어졌나이다 (렘 1:14)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재앙이 북방에서 일어나 이 땅의 모든 거민에게 임하리라 (렘 1:15)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가 북방 모든 나라의 족속을 부를 것인 즉 그들이 와서 예루살렘 성문 어귀에 각기 자리를 정하고 그 사면 성벽과 유다 모든 성읍을 치리라 (렘 1:16) 무리가 나를 버리고 다른 신들에게 분향하며 자기 손으로 만든 것에 절하였은즉 내가 나의 심판을 베풀어 그들의 모든 죄악을 징계하리라 (렘 1:17) 그러므로 너는 네 허리를 동이고 일어나 내가 네게 명한 바를 다 그들에게 고하라 그들을 인하여 두려워 말라 두렵건대 내가 너로 그들 앞에서 두려움을 당하게 할까 하노라 (렘 1:18) 보라 내가 오늘날 너로 그 온 땅과 유다 왕들과 그 적장들과 그 제사장들과 그 땅 백성 앞에 견고한 성읍, 쇠기둥, 놋 성벽이 되게하였은즉 (렘 1:19) 그들이 너를 치나 이기지 못하리니 이는 내가 너와 함께 하여 너를 구원할 것임이니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렘1:11-19)
믿음의 사람들(29) - 예레미야
한국의 경제 기획원의 통계에 따르면 한국인들의 평균연령 중에 남자보다 여자가 보통 8년 - 10년 정도는 더 오래 산다는 통계가 있습니다. 그 이유에 대해서는 많은 이야기가 있습니다만 가장 많은 의견은 여자들의 감정표현이 솔직하다고 하는데 그 이유가 있다고 합니다. 슬픈 것을 보면 같이 슬퍼하고 울기도 하고 기쁘고 좋은 일을 만나면 마치 나의 일처럼 기뻐하고 즐거워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그 여자들이 남자보다 더 오래 산다고 합니다. 대부분의 남자들은 좀 경직되어 있습니다. 좋아도 좋은 표현을 잘 안 하려고 하고 슬퍼도 억지로 참고 그렇습니다. 슬픈 일이 있어서 울려고 하면 남자가 눈물을 흘리면 안 된다고 좋은 일이 있어서 좀 좋아하려고 하면 남자가 가볍게 그러는 것이 아니라고 야단을 칩니다. 그러니 남자들의 감정 표현이 둔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감정 표현을 솔직하게 하십시오. 롬12:15절에서도 "즐거워 하는 자들로 함께 즐거워 하고 우는 자들로 함께 울라" 라고 말씀 하셨습니다. 성경에서도 우리에게 감정 표현을 잘 하라고 가르쳐 주고 있지 않습니까? 그러면 사람에게 있어서 가장 솔직한 감정의 표현이 있다면 그것은 무엇일까요? 눈물과 웃음입니다. 한번 웃을 적마다 보약 한첩씩 먹는 것과 같다고 하죠? 많이 웃으시기 바랍니다. 그런데 이 웃음은 세계적으로 거의 비슷한 것 같은데 이 눈물을 흘리는 것도 민족성에 따라 다릅니다.
우는 모습에 따라 동양인들과 서양인들의 삶의 차이점을 발견할 수가 있습니다. 한문을 우선 살펴보면
누 - "눈물 누" (눈 주위에 눈물이 고여 있는 것) - 서양인들..
淚 - "눈물 누" (눈물이 줄줄 흘러내리는 것) - 동양인들 특히 한국인
소리 없는 눈물(오열, 애간장을 끓이는 눈물)
痍 - "콧물 이" (눈물, 콧물이 범벅이 된 울음) - 한국인들의 울음
泗 - "콧물 사" (얼굴 테두리를 벗어나지 않는 눈물) - 동남아 사람들 아주 감정적이고 열정적이다. 다혈질적인 사람들이지만 울고 그치면 그만이다
특히 한국사람들이 우는 눈물은 염분 농도가 아주 많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모든 음식을 다 짜게 먹는데 그 짠 염분을 눈물로 쏟아내기 때문에 실제로 한국인들의 눈물에는 염분의 농도가 진한데 더구나 한번 울기 시작하면 눈물 콧물 한데 엉겨 붙어서 엉망진창이 되지 않습니까? 이런 눈물의 울음을 우리는 통곡한다고 말합니다. 이 통곡한다는 말에는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대성통곡과 방성대곡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창45:2 요셉이 "방성대곡"하니 애굽사람에게 들렸다고 하였는데 이것은 요셉 자신이 감정을 억누르고 억누르다가 터져 버린 울음을 말합니다. 왜 그가 그렇게 감정을 억제하고 억제하였는가? 하면 성경을 찾아보면 창42:24 요셉이 그들을 떠나가서 "울고" 창42:30절 안방에 들어가서 "울고" 이렇듯 요셉은 형제들에게 눈물을 보이지 않으려고 참고 참았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 요셉이 형 유다가 베냐민의 자루에서 나온 은잔으로 인하여 동생을 변호하고 지난 날의 그들의 잘못을 고백하니 요셉이 그 뜨거운 마음에 그가 방성대곡을 하였다고 하는데 그것은 절제된 울음이지만 뼈에 사무치는 간절한 울음을 울었다는 것입니다. 그런 그가 아버지 야곱을 만났으니 얼마나 더 가슴이 아팠을 것이고 서러움이 복받쳐 올랐겠습니까? 그래서 창46:29절에 보면 아버지를 만난 요셉이 울음을 터뜨리는데 서로 목을 어긋 맞겨 안고 울었다고 합니다. 이 울음은 정말 하염없이 흘러내리는 눈물이요 구구절절 한 맺힌 울음이 아닐 수가 없습니다. 정말 방성대곡이라고 할 만한 울음입니다.
눅7:13절에 보시면 나인 성의 과부의 아들이 죽었는데 그 과부가 울면서 그 상여 뒤를 따라간 것입니다. 그 어머니를 향하여 주님께서 울지 말라 하십니다. 얼마나 가슴아픈 일입니까? 그런데 이 여인의 울음과 요셉의 울음을 영어성경은 다르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요셉의 울음을 Weap라 하였고 그 과부의 울음을 Don't Cry라고 하였습니다. Cry는 큰 소리로 외치거나 뜻 모를 소리를 지르는 것입니다. 즉 인사불성의 정신적으로 혼란한 가운데 울음을 Cry라고 하였고 요셉의 울음은 지극히 절제된 울음이지만 가슴 깊은 곳에서부터 우러러 나오는 그런 눈물과 통곡을 말합니다.
그때 그 과부의 울음을 성경의미에서는 대성통곡이라는 말로 표현을 해야 하지 않겠는가 생각합니다. 자식의 죽음 앞에 어머니의 울음은 체면과 격식을 따져 울지는 않습니다. 하늘이 무너지는 듯한 슬픔일 것입니다. 아마도 이것을 대성통곡이라고 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영어에서는 눈물을 Tear, Cry, Weap 라는 단어들이 있는데 그 중에서 Tear라는 단어는 단순한 눈물을 가르치는 것입니다. 그런데 Cry 라는 단어는 감정이 담긴 울음이기는 하지만 절제되지 않은 그런 울음을 말합니다. 또 Weep라는 단어는 가슴 깊은 곳에서 나오는 한 맺힌 울음을 말할 때 사용하는 단어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타난 예레미야도 눈물이 많은 사람입니다. 예레미야라는 뜻은 "여호와께서 던지신다"는 뜻이며 또는 "여호와께서 심판하신다"는 뜻입니다. 그는 베냐민 땅 아나돗의 제사장 힐기야의 아들이라고 성경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이 아나돗이라는 마을은 예루살렘에서 북쪽으로 대략 한 4.8Km 정도에 있는 마을입니다. 이 마을은 주로 아론의 자손들이 거주하는 마을이었는데 그들은 따로 기업의 땅을 받지 못하였기에 이곳 베냐민 지파의 땅에 살았던 것입니다. 아마도 본문의 말씀을 살펴 볼 때 예레미야는 아직 제사장의 직무를 감당하고 있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그런 예레미야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임하였는데 그때가 요시야 임금13년째라고 합니다. 이 요시야임금은 유다의 17번째 임금입니다. 8세에 임금이 되어 31년간 통치한 임금인데 우상을 없애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백성들을 다스린 훌륭한 임금이었습니다. 이때 에례미야가 소명을 받는데 그것이 1:5절 말씀입니다. "내가 너를 복중에 짓기 전에 알았고 네가 태에서 나오기 전에 너를 구별하였는데 그 이유는 열방의 선지자로 세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예레미야를 짓기 전에 어머니 태에서 나오기 전에 구별하여 세운 이유인 것입니다. "열방을 위한 선지자" 이것이 예레미야의 소명입니다.
그런데 그는 말하기를 "나는 아이라 말할 줄을 모릅니다" 라고 하였던 것입니다. 여기서 아이라는 말은 자신을 낮춤인데 그 의미는 경험 없는 젊은이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거절하는 이유가 "말 할 줄을 모른다" 는 것입니다. 즉 말의 의미를 깨달아 잘 전달 할 수가 없습니다라는 말입니다. 출4:10절에 보면 모세가 하나님께 "나는 본래 말에 능치 못한 자라 주께서 주의 종에게 명하신 뒤에도 그러하니 나는 입이 뻣뻣하고 혀가 둔한 자니이다" 라고 말합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너에게 말 잘하는 형 아론이 있지 않느냐? 염려하지 말아라 하시는 모습을 찾아 볼 수가 있습니다.
오늘 이 예레미야도 자기 스스로를 아이라고 표현합니다. 그 아이라는 표현에 하나님은 아이라 하지 말고 내가 너를 누구에게 보내든지 너는 가며 내가 네게 무엇을 명하던지 너는 말할지니라 라고 하시는 것을 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것 그것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님을 알았던 예례미야가 아이라고 말할 줄을 모른다고 그가 그 직무를 감당하지 않으려고 하였으나 하나님의 계획은 한번 택정함을 입은 사람은 어느 누구라도 하나님의 일을 감당하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에게 내 말을 너의 입에 두었으니 라고 하는 것을 보면 하나님께서 이 예레미야를 사용하시기 위해서 얼마나 적극적인 지 우리는 알게 됩니다.
그러면 왜 예레미야라는 선지자가 그렇게 울어야 했던가? 라는 것입니다. 그가 하나님의 말씀을 가슴으로 받고 보니 그가 눈물을 아니 흘릴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한 사랑과 열정이 너무나도 크시기 때문에 그가 그렇게 울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사랑하셨음에도 불구하고 그 백성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떠나 방탕한 삶을 살아가고 돌이킬 줄을 모르니 하나님께서 그들을 깨우치고자 이웃의 큰 나라를 통하여 그들을 경고하시는데 그것이 이스라엘의 멸망이라는 것입니다. 그런 경고와 싸인을 하나님께서 많은 선지자들을 통하여 보내셨지만 백성들은 그것을 알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여 더욱 타락하고 정치와 종교 지도자들은 자신들의 이익을 챙기기에만 바쁘니 어찌 그 나라에 하나님의 은혜가 임할 것이며 그들의 믿음이 회복되겠습니까?
오늘 본문에 예레미야가 본 환상이 있는데 그것은 살구나무가지를 보았습니다. 또 그가 환상을 보는데 끓는 가마를 보았다는 것입니다. 예레미야가 본 환상은 매우 중요한 환상입니다. 먼저 살구나무의 환상은 하나님의 말씀이 그대로 성취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 살구나무라는 말의 어원에는 아몬드나 밤이나 호도 등의 껍질이 딱딱하게 된 나무를 의미합니다. 이스라엘에서는 이 아몬드 나무가 제일 먼저 싹이 돗고 잎이 피어난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아몬드 나무에 새싹이 돗는다는 것은 봄이 왔다는 것을 가르쳐 줍니다. 즉 이 말은 아몬드 나무가 봄이 온 것을 가장 빨리 가르쳐 주듯이 하나님의 말씀이 신속하게 성취된다는 것을 가르쳐 주는 것입니다.
또 끓는 가마는 큰 가마솥을 말하는데 그 가마솥이 북쪽에서부터 기울었다고 하기에 그것은 임박한 재앙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그러니 살구나무에 새싹이 돋고 잎이 피는 것 처럼 하나님의 말씀이 이스라엘 나라에 성취될 것인데 그것은 바로 북쪽에서부터 기울어진 큰 가마가 곤 재앙이라는 것입니다. 이 엄청난 재앙을 하나님께서는 예레미야에게 허리를 동이고 일어나서 내가 네게 명한 그 모든 것을 다 전파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두려워 말라고 용기를 주십니다. 그래서 그들을 바라보는 예레미야의 마음이 아파서 견딜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뜨거운 사명감을 가지고 이스라엘 백성들을 깨우치려고 하면 그들이 반대하고 심지어는 예례미야에게 하나님의 뜻을 전하지 말라고 하면서 감옥에 집어넣으니 어찌 그가 울지 않을 수가 있었으며 어찌 그의 마음이 뜨겁지가 않았겠습니까?
이 예레미야와 같은 시대의 선지자들로서는 스바냐, 에스겔, 다니엘 등이 있었는데 에스겔과는 특별한 관계가 있음이 짐작됩니다. 흥미로운 것은 이 다니엘, 에스겔, 예러미야가 다 같이 바벨론 포로에 관해서 예언을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에 세 선지자들의 예언을 한 마디로 말하면 하나님 말씀을 거역하고 이제 멸망을 받기에 이른 조국 이스라엘을 향한 슬픈 눈물을 흘린 사람들이 바로 이 사람들입니다.
눅19:41절 이하에 보시면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이 이르러서는 성을 보시고 우셨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왜 우셨을까요?
첫째: 이제 주님께서 죽으실 날이 얼마 남지 않아서
둘째: 하나님의 거룩하신 뜻에 따라 모든 것을 자신의 책임으로 하여 죽어야 하기 때문에
셋째: 자신이 죽음의 자리에 이르렀지만 그것을 알지 못하는 어리석은 제자들 때문에 속이 상하여...
넷째: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한 이스라엘 백성들의 죄악으로 인하여 머지 않아서 예루살렘 성이 멸망당할 것이기 때문에
자! 답이 어느 것일까요?
예 네 번째가 답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죄악 즉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지 아니하고 자신들이 가진 독선과 아집으로 인하여 하나님의 거룩하신 뜻을 좇지 아니하여 교만한 상태를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오늘 믿음의 사람 예레미야를 통하여 얻을 수가 있는 교훈이 있다면
⊙ 첫째: 소명감을 가진 사람들이 되자 라는 것입니다.
예레미야 그는 소명감이 분명한 사람이었습니다. 오늘 예레미야가 이스라엘을 보면서 눈물을 흘렸던 것처럼 우리도 수많은 영혼들을 보면서 눈물을 흘려야 할 것입니다. 구원 받아야 할 수 많은 백성들이 아직도 많이 있는데 왜 우리는 그들을 보면서 예레미야 처럼 눈물을 흘릴 수가 없을까요? 열방의 선지자로 소명을 받지 못해서 입니까?
행1:8절은 우리에게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고 말씀을 하셨고 막16:15 절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증거하라 고 하였고 딤후 4:2 절에는 "때를 얻든지 못 었든지 항상 힘쓰라"고 하고 계심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 둘째: 마음이 뜨거운 사람이 되자 라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예레미야는 하나님을 향하여 마음이 뜨거운 사람이었고 수 많은 영혼들에 대하여 마음이 뜨거운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도 예레미야 처럼 뜨거운 마음이 있는 그런 믿음의 사람이 필요합니다. 예레미야의 각오와 결단과 헌신이 필요합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이 시대에 수많은 영혼을 향한 간절하고 뜨거운 믿음이 우리에게 있어지기를 소원합니다.
시드니 영락교회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사명은 말씀 증거입니다. 말씀을증거 할 능력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전하지 않았던 초대교회는 환란과 어려움을 당했습니다. 우리는 말씀을 증거해야 합니다. 선포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위하여 말씀을 증거하십시다.
하나님의 은혜가 함께 하시길 소원합니다. 아멘!
♣ 은혜로운 찬양 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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