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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인물 (427)

배진태: 35. 이사야. 사6:1-8

작성자람미|작성시간16.10.21|조회수383 목록 댓글 0

 

***배진태: 35. 이사야. 사6:1-8

“(사 6:1) 웃시야왕의 죽던 해에 내가 본즉 주께서 높이 들린 보좌에 앉으셨는데 그 옷자락은 성전에 가득하였고 (사 6:2) 스랍들은 모셔 섰는데 각기 여섯 날개가 있어 그 둘로는 그 얼굴을 가리었고 그 둘로는 그 발을 가리었고 그 둘로는 날며 (사 6:3) 서로 창화하여 가로되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만군의 여호와여 그 영광이 온 땅에 충만하도다 (사 6:4) 이 같이 창화하는 자의 소리로 인하여 문지방의 터가 요동하며 집에 연기가 충만한지라 (사 6:5) 그 때에 내가 말하되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 (사 6:6) 때에 그 스랍의 하나가 화저로 단에서 취한바 핀 숯을 손에 가지고 내게로 날아와서 (사 6:7) 그것을 내 입에 대며 가로되 보라 이것이 네 입에 닿았으니 네 악이 제하여졌고 네 죄가 사하여졌느니라 하더라 (사 6:8) 내가 또 주의 목소리를 들은즉 이르시되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 그 때에 내가 가로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 (사6:1-8)

믿음의 사람들(35) - 이사야

믿음의 사람 이사야가 기록한 하나님의 역사와 섭리에 대한 성경의 기록은 실로 대단합니다. 이사야서가 분량 면에서도 66장에 달하는 것을 볼 때 구약에서 시편을 제외하면 가장 긴 책입니다. 이는 이사야를 통해서 주시는 하나님의 계획하심이 엄청나다는 것을 보여 주는 부분이며 말씀을 통한 하나님의 섭리가 무궁무진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대단한 책이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는 구약성경에서 선지자라는 말과 예언자라는 말을 많이 사용하고 있음을 봅니다. 여러분들은 이 선지자 또는 예언자라는 말의 뜻에 대하여 얼마나 알고 계십니까? 가끔씩 성경에 보면 선지자들이 점쟁이들처럼 미리 되어질 일들을 알고 이야기를 하는 것을 볼 수가 있는데 그렇다고 해서 선지자가 점쟁이는 아닙니다. 그가 장래에 되어질 일을 말하는 것은 자신의 능력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그에게 전달하라고 허락하신 장래에 대한 부분에 대해서만 그가 말할 수가 있기 때문에 그는 다만 전달자에 불과합니다. 즉 선지자는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을 자신의 생각에 의하여 더하거나 빼거나 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닙니다. 다만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있는 그대로 선포 할 뿐입니다. 신18:18절에 "내 말을 그의 입에 두리니 내가 그에게 명하는 것을 그가 무리에게 다 고하리라" 라고 기록된 것을 봅니다.

구약에서는 실제 선지자를 부를 때 "나비"라는 히브리말로 불렀는데 이 말은 "하나님의 뜻을 전달하는 대변자"라는 말로 사용이 되어 왔습니다. 그러면 선지자는 미리 하나님의 뜻을 다 알고 있을 만큼 뛰어난 영적인 사람인가? 하는 것입니다. 그렇지는 않습니다. 하나님의 역사 속에서 성령의 감동을 받아서 홀연히 나타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뜻을 전달하고는 또 홀연히 사라지는 그런 사람들이 대부분이었기에 그들은 철저하게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는 부분에 대해서만 하나님의 말씀이 가르침을 주시는 범위 안에서만 그가 선포를 하는 대언자였고, 또 대변자에 불과 했다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이와 함께 또 예언자라는 말이 있는데 이 말은 선지자라는 말과 같은 의미의 말로서 사용이 되었습니다. 다만 예언자라는 말을 한문성경에서는 기록하길 미리 豫자 아니라 맡을 預자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아주 중요한 의미의 이야기입니다. 왜 예언자라고 할 때 "미리 豫"자를 사용하지 않고 "맡을 預자"를 사용하는가? 이것은 예언자는 자신이 신의 능력을 입어서 뜻을 분별하며 장래 일을 환히 이야기하는 그런 점쟁이와 같은 사람이 아니라 다만 하나님께서 그에게 말씀해 주시고 그에게 선포하라고 하는 부분에 대해서만 그가 장래에 일어날 일을 말할 수가 있지 자신이 마음대로 장래의 일은 말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예언자라는 말은 선지자와 같은 의미로 사용된 말인데 이 말은 철저하게 하나님 중심이요, 말씀 중심에서 우러러 나오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이런 직분의 사람들은 우리가 이스라엘 역사에서만 볼 수 있는 독특한 제도의 사람입니다. 이스라엘이라는 신앙적인 배경이 있기에 가능한 존재의 사람들이고 또 이들이 있었기에 이스라엘 나라가 신앙 안에서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아갈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면 이런 선지자와 같은 사람들이 다른 국가 역사 속에서는 없는가? 라고 하면 다른 민족의 역사에는 선지자나 예언자가 아니라 지혜로운 사람이라든지 모사꾼 과 같은 사람은 있었음을 압니다. 삼국지라는 책에 보면 유비라는 사람에게 제갈공명이라는 사람이 있어서 전쟁이 일어나면 여러모로 유비라는 사람을 곁에서 돕는 것을 봅니다. 혹시 여러분들이 즐겨 보시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왕건이라는 드라마에 보면 "태평"이라는 사람이 늘 왕건 곁에 서 있는데 이를 부르기를 군사라고 부르는데 그것은 바로 참모 또는 작전 조력자라는 말로서 이해하시면 좋을 듯합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에 있는 선지자나 예언자는 결코 작전 조력자나 참모 정도의 역할을 하는 그런 사람은 아닙니다. 그들이 물론 전쟁을 할 때는 왕에게 충고도 하고 군사의 이동이나 여러 가지에 대하여 이야기는 하지만 그는 철저히 전쟁은 여호와께 속해 있다는 믿음의 고백 안에서 하나님이 주시는 지혜로 움직이기에 다른 민족이나 국가에서 나오는 그런 지혜로운 사람들과는 질적으로 다른 부분입니다. 이들은 이스라엘이라는 민족의 삶 한 복판에서 하나님을 향하여 부르짖는 행동하는 사람들이었고 백성들을 말씀 안에서 잘 인도하기를 원했던 그런 사명감이 있는 사람들이었음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예언자나 선지자와 같은 사람들이 나타나기 시작한 때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방황하던 때가 아니라 한 곳에 정착하여 살기 시작한 때 였고 하나의 집단으로 뭉쳐서 살던 때가 아니라 이제는 조직적인 사회의 모습을 갖추었을 때 나타나기 시작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므로 구약에 나타나는 선지자나 예언자들은 이스라엘 민족이 가지는 신앙적인 아픔의 한 가운데 서있었던 증인들이고 백성들의 삶 속에 깊이 관계된 그런 믿음의 지도자들이었습니다. 우리가 오늘 살펴보게 될 이사야라는 사람도 이스라엘이라는 나라가 한참이나 어려울 때 그 역사 한 가운데 서있던 외로운 선지자 중에 한 사람이었습니다.그가 가졌던 민족적인 고민과 갈등이 그의 글 이사야서 가운데 상세하게 기록 된 것을 봅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교독 한 본문의 말씀은 이사야가 그냥 한 말이 아닙니다. 깊은 고민과 번뇌 속에서 뜨거운 영적인 체험을 하고서 그가 내린 신앙적인 결단이었습니다. 그가 자신이 희생 함으로서 이스라엘 민족이 살아날 수가 있다면 그는 그런 결단을 하겠다는 것입니다. 이사야는 지난번에 말씀을 드린 것과 같이 주로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한 남 왕국 유다에서 활동을 하였으며 웃시야 왕이 죽던 해부터 요담, 아하스, 히스기야 때까지 예언 활동을 하였으며 므낫세가 임금으로 있을 때 톱에 켜여서 순교를 당했다고 전해집니다. 그는 아모스의 아들이었고 또 왕궁 출입이 자유로운 것으로 보아서 그가 귀족이거나 왕족 중의 한 사람이었다 라고 하는데 그래서 그를 요아스 임금의 손자요, 아마샤 임금의 형제가 아니겠는가? 라고 성경학자들이 추측을 하기도 합니다. 어쨌던 그는 사8:3절에 보면 결혼을 해서 아내가 있었고 또 그에게는 두 아들이 있었는데 그 아들들의 이름이 다 상징적인 이름이라는 것입니다. 맏아들의 이름은 사7:3절에 기록이 되어있는데 그 이름이 스알야숩-"남은 자가 돌아 올 것이다" 라는 뜻이고 둘째아들은 사8:3절에 기록이 되어 있는데 그 이름이 마헬살랄하스바스-"급히 노략하고 서둘러 강탈하라" 는 뜻입니다. 이름 자체가 매우 도전적이고 전투적인 이름인데 그것은 그 당시에 북 왕국 이스라엘이 앗수르 라는 나라에게 멸망 당 할 것을 예언한 그런 이름인 것입니다.

이 이사야서는 66장까지의 방대한 분량인데 이것을 3부분으로 나눠 보면 첫 번째는 1장에서 35장까지인데 이것은 이스라엘의 범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에 대한 예언이 주로 기록이 되어있고 두 번째는 36장부터 39장까지인데 히스기야 임금의 생명이 은혜로 연장되는 것이 기록되어 있고 세 번째는 40장에서 66장까지인데 이는 고통 속에 부르짖는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위로하심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속에는 포로에서 돌아 올 것에 대한 예언과 장차 메시야가 오셔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죄 가운데서 구원하여 주심과 장차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나라를 회복 하심에 대한 예언과 이로 말미암아 이루어지게 될 이스라엘의 영광스런 미래에 대하여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오늘 이사야를 통하여 살펴보아야 할 것은 그의 믿음과 삶의 모습입니다. 오늘 본문 6장에서는 이사야가 하나님께 소명을 받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때가 웃시야 왕이 죽던 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웃시야 왕에 대한 기록은 역대하 26장에 잘 기록이 되어져 있습니다. 그는 유다 나라의 10번째 임금인데 처음에는 참 겸손하게 하나님을 잘 섬겼고 그로 말미암아 나라가 강성해 지고 평안하였는데 나중에는 그가 교만하여 지니까? 제사장 외에는 할 수가 없는 성전의 향로를 자기 스스로 켜려고 하다가 하나님의 진노로 이마에 문둥병이 생겨나게 되고 그것으로 인하여 그가 별궁에 갇혀서 살게 되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바로 그 웃시야 왕이 죽던 해에 이사야가 환상 중에 하나님의 영광을 발견하게 되는데 하늘 나라의 존재요 또 천사와 같은 존재인 스랍들이 여섯 날개를 가지고 두 날개는 얼굴을 가리우고 또 두 날개는 발을 가리우고 나머지 두 날개로는 하늘을 날면서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라고 하였다는 것입니다. 

이 스랍들이 두 날개로 얼굴을 가린 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 볼 수 가 없어서 그런 것이고 두 날개로 발을 가린 것은 죄악 된 삶의 모습을 가리우려고 한 상징적인 행동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스럽들의 찬송하는 광경이 너무나도 황홀하고 힘이 있어서 문지방 터가 흔들릴 정도였다 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엄청난 광경을 목격을 이사야는 자기 자신의 죄악 된 모습과 경건치 못함을 발견하고서는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라는 고백을 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완전무결하심과 거룩하신 영광 앞에서 죄 된 인간이 스스로의 초라한 모습을 발견하면 죽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사야는 지금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나약하고 부정한 모습을 발견하는데 거기에서 그는 첫째 자신은 입술이 부정한 자라고 고백을 하고 두 번째는 자신의 삶의 모습이 죄악 된 것임을 고백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은혜는 스랍들을 통해서 제단의 불로 그의 입에 대면서 하시는 말씀이 "너의 죄가 사하여졌고 너의 악이 제거가 되었다"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으로부터의 죄 용서의 선포,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진 은혜 그것은 이사야가 경험한 참으로 엄청난 것이었고 실로 가슴 벅찬 일이 아닐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런 용서의 은총을 확인 한 다음에 그가 하나님의 거룩하신 부르심에 순종할 수가 있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 하실 때 이사야의 마음이 감격스러워 마음이 뜨거워져서 그가 대답하길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 라고 하는 것을 봅니다. 이사야의 이 말은 나를 보내십시오, 나를 보내십시오. 제가 준비가 되었습니다. 제가 하나님을 위하여 헌신할 준비가 되었습니다. 라는 이야기입니다. 그렇습니다. 

여러분! 
이것이 이사야의 믿음이요, 삶의 모습입니다. 어렵고 힘든 시대적인 상황 속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올바르게 듣고서 신앙적인 결단을 하게 되는 이사야는 참으로 귀한 믿음의 사람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의 일은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닙니다. 바로 하나님으로부터 죄 사함의 은총을 받은 자라야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한 자만이 하나님의 일을 할 수가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어떻습니까? 하나님으로부터 죄 사함의 은총을 받았습니까? 구원 받았음을 확신하고 있습니까?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하였습니까? 성경에는 이런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한 사람들이 하나님의 일을 위하여 불림을 받은 것을 찾아 볼 수가 있습니다. 이스라엘 역사에서 위대한 지도자인 모세는 출3장에서 그가 받은 소명을 확인 할 수가 있습니다. 특별히3:10절에서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너를 보내어 내 백성을 인도하여 내게 하리라" 하십니다. 왜 백성을 인도하여 내게 하리라 하시느냐 하면 "이스라엘 백성들의 고통이 극심하여 그들의 부르짖음이 내게 들렸고 또 하나님을 섬기도록 하기 위해서" 라고 말씀을 하십니다. 하나님께서 모세를 부르시기 위해서 광야에서 40년 동안 그가 겸손하도록 훈련을 하셨고 인내하도록 훈련을 시키셨습니다. 모세 그는 80년의 세월 동안 하나님께로부터 훈련을 받고서 하나님의 일을 감당하도록 불림을 받았던 것입니다. 

우리는 또 마4:19절에 나오는 베드로의 소명부분에 대하여서도 살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많은 학자들이 주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시면서 베드로를 만나서 "나를 따라 오너라 내가 너로 하여금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라고 하셨지만 베드로는 그 말씀을 듣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런 뒤 얼마의 시간이 흘렀는데 그가 여전히 갈릴리 바닷가에서 고기를 잡는데 그것이 눅5장의 모습입니다. 거기에 보시면 베드로가 밤이 새도록 그물질을 하였지만 고기를 한 마리도 잡지 못하였을 때 주님께서 "깊은 곳으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 고 하실 때 그가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깊은 곳에서 그물을 내려보니 고기를 심히 많이 잡았다는 것입니다. 이 상황에서 베드로가 주님 앞에서 이렇게 자신을 고백을 합니다. "주님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입니다" 즉 자신이 죄인임을 발견한 것입니다. 주님의 말씀을 듣지 아니하고 자신의 뜻대로 살려고 했던 자신에게 직접 찾아 오셔서 이렇듯 큰 은혜를 베풀어 주셨기에 그는 자기 자신을 죄인이라고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은혜는 여기에서 시작됩니다. 자기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죄인임을 알 때, 자기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부족한 사람임을 깨달을 때 여기에서 은혜가 시작이 됩니다. 하나님 앞에서 지금 우리의 모습은 어떻습니까? 자신의 모습이 한없이 작아지십니까? 자신이 허물이 많은 죄인임이 발견되어 지십니까? 그러면 우리는 하나님의 일을 감당할 준비가 된 것입니다. 이제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기만 하면 우리는 더욱 귀한 일을 감당할 수가 있게 된 것입니다. 행9장에 보시면 사울이라는 사람이 이방인들을 위한 하나님의 일꾼으로 세움을 받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는 핍박자였고 훼방자였지만 하나님은 그를 이미 택하셔서 그로 하여금 또 다른 복음 전파의 사역을 계획하고 계셨던 것입니다. 그가 다메섹에 있다는 그리스도인들을 잡기 위해서 대 제사장의 공문을 가지고 말을 타고 달려가다가 강렬한 빛에 의하여 말에서 떨어지게 되고 사흘을 암흑 가운데 있으면서 그가 금식하고 기도하니 하나님께서 그를 위하여 예비하신 아나니아를 통해서 안수 기도를 하게 한 뒤 건강을 되찾게 되니 그가 그 즉시로 예수는 그리스도라 증거 하게 되는 것을 봅니다. 

하나님은 사울을 이렇게 극적으로 부르셨습니다. 이방인들을 위한 하나님께서 예비해 놓으신 그릇으로 사울을 준비해 놓으셨음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우리는 주님으로부터 어떤 소명을 받았습니까? 우리는 주님으로부터 어떤 일을 하도록 위임을 받았습니까? 그러기에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어떤 모습으로 서 있어야 하겠습니까? 바로 이사야를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위하여 예비해 놓으시고 그가 스스로 하나님께 헌신하도록 하신 것을 봅니다. 우리는 오늘 이사야를 통하여 얻을 수가 있는 교훈이 있다면

첫째: 하나님의 부르심에 잠잠하지 말자는 것입니다. 실제로 한국교회 그리스도인들 중에서는 조용하게 예수를 믿고 싶다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서울 강남에서 목회를 하시는 유명한 어떤 목사님은 실제로 강남에서 교회를 지으려고 하면 “교회 안에 기둥을 많이 세워라" 라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기둥에서 예배만 드리고 가는 교인들이 많다는 이야기입니다. 오늘 이사야는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보내 달라고 정중하게 요청하는 것을 봅니다. 자신을 시켜서 하나님의 일을 감당하게 해 달라는 것 입니다. 목회자의 입장에서 이런 교인을 만나면 얼마나 반가운지 모릅니다. 예레미야는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 하지 않겠다고 하면 내 마음이 뜨거워 견딜 수가 없다고 고백하고 있지 않습니까? 사명을 받은 자는 열심히 주님의 일을 감당하여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 가운데서도 이사야와 같은 헌신된 자들이 많이 있어 지기를 원합니다.

둘째: 자신의 부족함과 허물을 하나님 앞에서 깨닫고 오히려 이것을 은혜로 삼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주님은 마7장에서 우리에게 형제의 눈에 있는 들보를 보기 전에 너의 눈에 있는 들보를 보라고 가르쳐 주셨습니다. 자신의 부족함, 자신의 연약함을 하나님께 은혜를 받는 기회로 삼고 오히려 자신이 신앙적으로 성숙하는 기회로 삼는다면 이것은 큰 은혜요 축복입니다. 여러분! 이사야와 같은 겸손한 마음이 우리에게 필요합니다. 이사야와 같이 은혜 받는 마음이 우리에게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럴 때 우리도 이사야와 같은 믿음의 고백을 할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 제가 준비되어있습니다. 제가 하나님께 충성할 마음이 준비가 되었습니다. 저를 사용해 주시옵소서 라고 말입니다. 

저는 우리교회가 하나님 앞에서 귀하게 사용되었으면 합니다. 남태평양지역의 수많은 선교지를 위해서 하나님은 우리 교회를 귀하게 사용하실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이사야 와 같이 헌신된 좋은 그리스도인이 많이 있어야 합니다. 여러분들 모두가 하나님 나라 사역에 귀하게 쓰임받는 아름다운 믿음의 사람들이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 은혜로운 찬양 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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