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증: 1448. [역경의 열매] 이용만 (1-20) 실탄 2발이 급소 피한 건 전우의 기도 덕분
전쟁으로 가족 잃고 홀로 남으로…17세 때 국군 자원입대 총상 입어, 5공 때 아픔 있었지만 은혜로웠던 삶
이용만 전 재무부 장관이 지난 14일 서울 강남구 자신의 사무실에서 85년 인생을 회고하고 있다. 이 전 장관은 “하나님 은혜의 강물이 흘러 오늘에까지 이르렀다”고 말했다. 강민석 선임기자
한국전쟁 때 만 17세로 국군에 자원입대해 어깨와 척추에 총상을 입었다. 어깨의 총알은 빼냈지만 척추의 탄환은 그대로 남아있다. 엑스레이를 찍으면 의료진들이 지금도 놀란다. 그러면서 꼭 한마디씩 한다. “당신은 럭키 가이군요.”
단 몇㎜만 총알이 빗나갔어도 신경을 건드려 하반신이 마비될 수 있었다. 지금도 그 위험 때문에 제거 수술을 하지 못한다. 왼쪽 어깨에 박힌 총탄도 심장과 한 뼘 거리였다. 군대 막사에서 동료가 노획한 소련제 권총을 잘못 겨눠 귓불 옆으로 총알이 스쳐 지나간 적도 있다. 그러면서 나는 깨달았다. 살아있는 것 자체가 기적이구나. 당시 나는 미군 2사단 38연대 록 레인저 중대에 배치된 국군 수색대였다. 미군과 인민군 사이에서 적정을 수색하고 적을 유인하는 작전을 했다.
매일 밤 막사에서 잠을 청할 때 옆자리 이언상 전우는 성경을 읽고 찬송을 부르고 기도를 했다. 본인과 가족뿐만 아니라 나를 위해서도 기도했다. 그가 찬송 “며칠 후, 며칠 후 요단강 건너가 만나리”를 부르면, 옆에서 나는 “며칠 후, 며칠 후 검정 콩알 먹고 죽으리”라고 놀렸다. 그땐 예수를 몰랐다. 나중에 알았다. 실탄 2발이 급소를 피한 건 매일 밤 간절히 두 손을 모은 전우의 기도에 하나님이 응답해주신 것이라고.
내 이름은 본래 이승만(李承萬)이다. 용만(龍萬)이가 아니다. 해방 전까진 모두 나를 승만이라 불렀다. 1933년 8월 29일 38선 이북이었던 강원도 평강군에서 태어났다. 일제 강점기엔 이름이 괜찮았는데 북한에 공산정권이 들어서고 나서부터 괴로움이 시작됐다. 연일 “이승만 김구 타도!”가 끊이지 않았다. “이승만 김구 타도! 스탈린 원수 만세, 김일성 장군 만세!”가 공식 구호였다.
부친은 생각이 깊으셨다. 하루는 나를 불러 “승만아, 아무래도 이름을 잠깐 동안이라도 바꾸는 게 좋겠다. 승용이로 할래, 용만이로 할래?” 항렬자가 ‘승’자여서 되찾을 이름과 헛갈리지 않게 ‘용만’을 선택했는데, 남한에 넘어와서도 이승만 대통령 때문에 영영 이름을 되찾지 못했다. 이름뿐만이 아니다. 전쟁으로 가족들을 잃었다. 미군의 융단 폭격으로 어머니와 동생이 방공호에서 폭사했다. 1950년 10월 우리 집을 불과 300m 앞에 두고 인민군의 기관총 공격을 받아 남한으로 향했다. 혈혈단신 남한으로 내려와 국군에 입대했고 총상으로 명예제대한 후 내 힘으로 대학에 갔다.
1962년 관료 생활을 시작해 재무부 이재국장을 거쳐 차관까지 역임했는데 1980년 5공화국 권력층의 친인척에게 찍혀 옷을 벗었다. 너무도 분했다. 경기도 의정부 암시장에서 소총을 구입해 복수한 뒤 세상을 뜨자는 생각까지 했다. 하지만 주님이 만류하셨다. 젊었을 때는 무서운 것 모르고 나 혼자 힘으로 살아왔다고 믿었지만 이제 와서 생각하면 그게 아니었다. 은혜의 강물이 흘러 오늘까지 이르렀다. 은혜의 첫 단추는 부지런한 부모님 밑에서 태어난 것이었다.
약력=1933년 강원도 평강군 출생, 51년 육군하사 명예제대, 59년 고려대 법대 행정학과 졸업, 62년 내각수반 기획통제관실 계획관, 71년 재무부 이재국장, 77년 재무부 재정차관보, 80년 경제과학심의회의 상임위원(차관), 85년 신한은행장, 88년 외환은행장, 90년 은행감독원장, 91년 재무부 장관, 2009년 대통령 자문 국민원로회의 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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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리=우성규 기자 mainport@kmib.co.kr
***[역경의 열매] 이용만 (3) 공비 수색 나선 아들 붙잡고 찰떡 먹이던 어머니는…
1950년 김화군 학도대 지원 ‘다녀오겠다'는 말이 마지막 인사… 17세에 고향 떠나 혈혈단신 월남
1951년 군복 차림으로 포즈를 취한 이용만 장로. 남한에 내려와 처음 찍은 사진이다.
“배고프지? 잠시 기다려라. 떡을 구워줄 테니 먹고 가려무나.”
어머니는 콩고물을 버무린 찰떡 3개를 구워주셨다. 나는 부엌에 서서 얼른 먹고 “다녀오겠습니다” 인사한 뒤 집을 떠났다. 그것이 어머니와의 영원한 이별이었다. 나는 지금도 길을 걷다가 콩고물 떡을 보면 그냥 지나치지 못한다.
1950년 10월이었다. 가을로 접어들면서 강원도 김화군에선 인민군이 패퇴하고 국군과 연합군이 밀고 올라왔다. 국군의 북진이 워낙 빨라서 김화군과 강원도 일대 산악지대엔 주력 부대를 따라가지 못한 인민군 패잔병들이 아군을 불시에 습격하는 일이 잦았다. 인민군 징집을 피한 나는 국군이 북진한 뒤 동네 치안을 위해 학생들로 구성된 학도대에 들어갔다. 학도대원 30여명과 함께 김화 북쪽 금성 방면으로 공비를 수색하라는 명령을 받고 잠깐 집에 들렀다. 곧 돌아오겠다고 인사하는데 어머니가 굳이 붙잡고 떡을 먹고 가라 하셨다. 3개의 떡은 어머니가 해주신 마지막 음식이었다.
금성에서 김화로 돌아오니 마을이 쥐죽은 듯 조용했다. 굴뚝에서 밥 짓는 연기가 전혀 나지 않았다. 시내를 지날 때 ‘드르륵’하고 기관총이 불을 뿜었다. 우리를 인민군으로 착각했나 싶어서 “학도대, 학도대”라고 외쳤는데 총을 더 강하게 쏴댔다. 하루 사이 인민군이 다시 김화 시내를 장악한 것이다. 우리가 보낸 척후병 2명은 즉시 체포돼 총살당했다는 사실을 나중에 알게 됐다.
부모님이 계신 집을 300m 앞에 두고 눈물을 흩뿌리며 남쪽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당시 학도대를 이끈 사람은 소위 출신이었는데 미리 서울로 월남한 사람이었다. 그의 인솔로 인민군의 포위 공격을 뚫고 산길을 통해 서울로 향했다. 경기도 포천에 이르러 치안대에 무기를 반납하고 포천 일동중학교 건물에 있던 피란민수용소에 들어갔다. 내 나이 만 17세에 고향을 떠나 단신으로 월남한 것이다.
학도대원 대부분은 가족과 재회했다. 김화 사람들 다수는 인민군 패잔병이 시내를 점령하기 전에 피란길에 올랐다. 우리 가족은 그렇지 못했다. 어머니는 “승만(당시 내 이름)이만 남겨두고 우리만 떠날 수 없다”고 반대하셨다. 나를 기다리다 가족이 미처 피란길에 오르지 못한 것이다.
어머니는 내가 집을 떠난 후 미군 폭격으로 돌아가셨다고 들었다. 1896년생이니 만 54세였다. 훗날 수소문 끝에 찾아낸 앞집 옹기장사 아주머니가 전한 이야기다. 아버지는 폭탄이 한 번 떨어진 곳은 재차 폭격 받지 않는다는 이야기를 듣고는 폭격으로 불탄 큰아버지댁에 철도 침목용 목재를 구해와 튼튼한 방공호를 지었다. 하지만 융단 폭격엔 당해낼 재간이 없었다. 어머니와 동생은 폭격으로 방공호가 무너지며 참변을 당했다. 아버지는 마침 인민군 노력동원에 끌려가 목숨은 구했지만 폭격 직후 돌아와 방공호의 흙을 손수 파내 시신을 수습했다고 들었다. 이후 부친의 생사는 확인하지 못했다.
옛날 우리 집엔 양이 많았다. 어머니는 보드라운 양털을 물레에 돌려 두둠한 양털 스웨터를 만들어 주셨다. 그 옷으로 포천중 피난민수용소에서 서울로, 서울에서 다시 대구까지 행군을 해내며 유난히 추웠던 그해 겨울을 버텼다. 1950년 12월 30일 밤 12시쯤 대구로 와서 만 17세 나이로 국군 신병 훈련소에 입대했다.
***[역경의 열매] 이용만 (4) 총 맞고 위기일발… 한·미 전우 도움으로 목숨 건져
美 2사단 배치돼 국군 부대서 활동… 춘천 가리산에서 인민군 공격 받아 김창조 소대장·미군 4명이 은인
1951년 5월 11일 강원도 춘천 가리산 전투에서 나의 생명을 구해준 김창조 소대장(왼쪽 세 번째).
어디든 살길은 있었고 무엇이든 자기 하기 나름이었다. 1951년 1월 대구 육군훈련소를 그런 생각으로 이겨냈다. 기상나팔이 울리기 30분 전에 일어나 취사반에서 장작을 한 아름 옮겨준 뒤 누룽지를 얻어왔다. 안주머니를 비롯해 쑤셔 넣을 수 있는 모든 곳을 누룽지로 꽉꽉 채웠다.
보충대 훈련은 늘 배고픔이 함께했다. 전방에서 보충병을 뽑으러 오면 먼저 가겠다고 손드는 사람들이 많았다. 총에 맞는 두려움보다 당장의 배고픔이 더 큰 고통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미군 GMC 트럭이 도착해 “중학교 이상 재학했거나 졸업한 사람 손들어”라고 외쳤다. 얼른 손을 들고 앞으로 나섰다. 즉석에서 100여명이 모여 3개 소대로 1개 중대를 편성하고 중대장 소대장 선임하사가 배치됐다. 경북 상주를 거쳐 최전방인 강원도 횡성으로 이동했다. 미 2사단 38연대 록 레인저 수색중대에 배치돼 적을 유인하는 국군 부대에서 활동했다. 횡성으로 가는 트럭 안에서 전우들과 누룽지를 아낌없이 나눠 먹었다.
51년 5월 11일을 잊을 수 없다. 강원도 춘천 가리산 전투 때다. 능선을 따라 걸어가는데 인민군이 남긴 옷가지와 불붙은 담배꽁초가 보였다. 급하게 도망갔구나 생각할 무렵 산 위 쪽에서 기관총 공격이 시작됐다. 드르럭 드르럭 소리가 귓전을 진동하고 흙먼지가 일었다. 실탄 300발을 몸에 걸치고 있던 나는 총열이 과열돼 소총에서 연기가 날 때까지 사격하다가 총열을 식히느라 잠시 물러섰다. 그때 갑자기 왼쪽 어깨를 도끼 같은 것으로 내려치는 통증이 느껴졌다. 몸이 왼쪽으로 뒤틀려 몇 바퀴 구르다가 불타다 만 나무 등걸에 몸이 걸렸다. 정신을 차려보니 아래쪽은 천길 낭떠러지였다. 화강암 절벽 끝 나무에 걸리지 않았다면 시신조차 찾을 수 없을 뻔했다.
총에 맞았으니 바로 죽을 줄 알았다. 정신이 몽롱해졌지만 전우라도 살려야겠다는 생각에 일어서서 피신하라고 소리를 질렀다. 인민군 총알은 계속 내 옆으로 드르륵 먼지를 내며 땅을 때렸다. 그때 김창조 소대장이 한달음에 달려와 나를 어깨에 끼고 바위 뒤로 옮겼다. “임마, 남자가 총 한 발 맞고 뭘 그래. 나는 총알을 여덟 발이나 맞고도 살았어.” 그 말이 잊히지 않는다.
당시엔 몰랐지만 척추에도 역시 총알을 맞았다. 정밀 수술이 불가능한 야전병원 환경 탓인지 이건 빼내지 못해 여전히 몸속에 남아 있다. 지금도 전신마비 우려 때문에 수술하지 못한다.
총에 맞았을 때 매일 밤 나를 위해 중보기도를 해준 이언상 전우가 생각났다. 총탄이 쏟아지는 상황에서 달려온 김 소대장 역시 벌집이 되기 직전의 나를 구했다. 미군 4명은 가리산의 저 험한 계곡에서 들것으로 나를 후방까지 나르며 페니실린 주사를 놓고 물도 먹여 주었다. 이들 덕분에 나는 목숨을 건졌다.
김 소대장은 훗날 중령으로 전역한 뒤 주택은행에 다녔다. 내가 재무부 이재국장으로 있을 때 알게 돼 여러모로 도왔다. 위생병이 포함된 미군 4명은 끝까지 찾지 못했다. 재무부 장관 시절 미 8군 사령관을 통해 수소문했으나 이어진 중공군 기습 때 전사했을 것이란 답을 받았다. 나는 그들을 기억하며 2014년 서울 마포구 스탠포드호텔에서 미 8군을 초청해 추수감사절 만찬을 함께했다.
***[역경의 열매] 이용만 (5) 명예 제대 후 대학 합격했으나 돈 없어 등록 못해
이용만 장로의 척추 좌측에 박힌 인민군 총알(점선 원내). 1951년 왼쪽 어깨 총상 당시엔 몰랐고 20년쯤 지나 재무부 이재국장 시절 발견했다. 2014년 촬영한 엑스레이 사진.
‘자유는 공짜가 아니다(Freedom is not free).’
이 명언을 반드시 기억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1951년 5월 강원도 춘천 가리산 전투에서 총상을 입은 나는 미군 수송기에 실려 부산 15육군병원으로 이송됐다. 총상을 입은 왼쪽 어깨엔 깁스를 했다. 나중에 척추에도 인민군 총알이 박혀 있는 걸 발견했지만 이때는 몰랐다.
병원에는 쉴 새 없이 부상 장병이 몰려들었다. 깁스를 푼 직후 병원 마당에서 배구를 하기 위해 팔을 들어 올렸지만 왼쪽 손이 올라가지 않았다. 지금도 똑바로 서면 왼쪽 어깨가 더 낮다. ‘장애인이 됐구나’란 생각이 들어 낙담하기도 했지만 열심히 재활 훈련을 했다.
사실 부상보다 앞으로 살 길이 더 막막했다. 부대가 내 집이었고 전우가 내 가족이었다. 51년 9월 명예 제대를 한 후에도 갈 곳이 없어 중대장의 허락을 받아 잠시 보급중대에서 군인들과 같이 군복무를 했다. 그러다 경기도 수원에서 우연히 고향 후배를 만났는데 나의 6촌 형님이 대전에 있다는 소식을 접했다.
북에 있을 때 아버지는 “사람은 배워야 하고 배움을 통해서만 일어날 수 있다”고 말씀하셨다. 혈혈단신으로 바닥에서 다시 일어서기 위해서는 배워야 했다. 대전에서 만난 6촌 형님 이승선은 개성 송도고보 출신으로 당시 대전체신청 인사계장으로 일하고 있었다. 형님의 배려로 대전우체국 서무과에서 근무를 시작했다. 낮에는 일하고 밤에는 대학입학을 준비하는 생활에 돌입했다.
영어는 퇴근 후 학원을 다니며 공부했고 수학은 입시문제집을 사서 공부했다. 때마침 명예 제대한 상이군인에게는 학비를 면제해준다는 병무청 고시가 발표됐다. 북에서의 바람대로 이공계 진학을 위해 성균관대 화학과 시험을 보았고 5대 1의 경쟁률을 뚫고 합격했다.
대학 등록을 위해 당시 부산에 있던 성대 대학본부로 향했다. 일반석 차표를 살 형편이 못돼 대전발 부산행 야간 화물열차에 몸을 실었다. 부산에서 고향 친구 김해영을 만나 동대신동 성균관대에 가자고 했다. 친구와 함께 대학본부에 합격증을 내니 등록을 위해선 돈을 내라고 했다. 내가 “저는 돈이 없어요”라며 병무청 고시를 언급하자 “무료는 아니다. 50% 감면이다”란 답이 돌아왔다. 극심한 재정난에 명예 제대 군인을 위한 학비 지원 제도가 부실하게 운영됐던 것이다. 50%는커녕 10%의 등록금도 낼 돈이 없던 나는 낙담했다. 마침 그날이 합격자 등록 마감 전날이라 대학본부 밖에는 돈을 싸들고 와서 미등록자가 나오기만을 기다리는 사람들이 많았다. 나는 대학 진학을 포기한 채 밤늦게 대전으로 올라오는 화물차에 가마니를 깔고 누웠다. 얼마나 서럽던지 눈물이 흘러 내렸다.
그래도 배움의 꿈을 놓지 않았다. 서울이 수복되고 난 다음 6촌 형님 가족들은 서울로 올라왔고 나는 1년여간 홀로 대전에서 자취를 하다 다시 한 번 형님 댁에 신세를 졌다. 서울 종로구 연지동 체신청 관사에 입주한 형님네 앞마당 연탄창고를 방으로 꾸며 기거했다. 우체국에 다니며 100% 야간 학과만 있던 한국대학(현 서경대학)에 합격했다. 역시 학비가 없어 등록은 않고 1년 가까이 청강만 했다. 이후 성균관대 법과대학을 1년 다녔고 다시 시험을 봐서 고려대 법대 행정학과 55학번으로 편입했다.
***[역경의 열매] 이용만 (6) 겨울에는 백열전구에 손 녹이며 책 읽어
고려대 들어가서도 일하면서 공부, 국제우체국 번역 일 돕다가 행운…美 우표 수집상과 거래 큰 돈 벌어
1957년 고려대 교정에서 친구들과 함께한 이용만 장로(왼쪽).
고려대에 들어간 후에도 일하며 공부하는 생활이 계속됐다. 나 혼자 모든 것을 다 해결해야 했기에 남보다 조금이라도 다르게 해야 했다. 똑같이 하면 뒤쳐질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나는 아버지로부터 부지런함을 물려받았다. 이남으로 내려오면서 아버지의 생사를 확인할 수 없게 됐지만 항상 아버지의 바람을 만족시켜야 한다는 염원이 있었다. 아버지가 북에서 보여준 교육열을 떠올리며 척박한 환경에서도 굴하지 않고 대학에 가자고 결심했다. 추운 겨울 연탄창고를 개조한 방에서 이불 속에 들어가 백열전구로 몸을 덥히며 책을 봤다.
중앙우체국에서 국제우체국으로 자리를 옮겨 간단한 번역 업무를 했다. 국제우체국은 주야 교대로 일을 해야 했는데 가족이 없는 나는 국제우체국 숙직실을 집으로 삼아 남의 숙직을 도맡아 했다. 다른 직원들은 숙직을 하지 않아 좋았고 나는 낮에 학교를 다닐 수 있어서 좋았다. 하나씩 하나씩 나만의 성채를 구축해 나갔다.
국제우체국에서 번역 일을 돕다가 행운이 찾아왔다. 당시 우체국에는 미국의 우표 수집가들이 펜팔 상대를 찾기 위해 보낸 편지들을 자주 볼 수 있었다. 우표는 국제통화처럼 투자 대상으로 여겨졌다. 전쟁을 치른 한국의 희귀 우표를 구하기 위해 미국을 비롯한 세계 우표수집가들이 눈과 귀가 쏠려있던 상황이었다.
나는 번역 업무를 맡다가 미국 우표 수집가들의 편지를 이것저것 읽어보게 됐다. 편지마다 간절하게 한국 우표 수집을 위해 펜팔을 원한다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이들이 편지를 보내 놓고 답장이 없으니 얼마나 맘을 태울까.” 가족이 없어 외로웠던 나는 이들의 애타는 마음을 조금이라도 덜어주고자 임자 없는 편지 가운데 몇 가지를 골라 영어로 답변을 보냈다.
그런데 예상치 못한 일이 일어났다. 편지를 보낸 곳 중에 미국 뉴욕의 전문 우표 수집상 ‘파툴라 앤 라자(Fatoullah and Lazar)’가 있었다. 이들은 단순히 취미로 펜팔을 하자는 게 아니고 한국 우표를 지속적으로 보내주길 원했다. 그저 펜팔 상대나 되어 볼까 하는 맘으로 시작했는데 이게 돈벌이 수단이 됐다.
고려대 2학년 때부터 우표 거래를 시작했다. 수집상은 발행이 제한된 기념 소형 시트를 주로 보내달라고 했다. 내가 10센트를 달라고 하자 1달러를 보내줬다. 10배였다. 학교와 중앙우체국에 사서함을 만들어 놓고 시내의 우표상을 돌아다니면서 내가 구하는 것을 말해두면 사람들이 경쟁하듯 나에게 우표를 보내줬다. 가격을 정확하게 지불했고 약속 날짜도 정확하게 지켰다. 그리고 이걸 다시 미국 우표 수집상에게 수출했다. 성실함 근면함 치밀함으로 승부했다. 기념세트 1장 가격이 당시 돈으로 40원이었는데 1달러(당시 500원) 정도를 받고 보냈다. 상당한 돈을 벌 수밖에 없었다.
대부분 사람들이 우표를 취미로 수집할 때 나는 사업으로 나선 셈이다. 나는 지금도 한국 제일의 우표 수출업자였다고 자부한다. 이 우표 거래로 대학 등록금을 해결했고 서울에 집을 마련했으며 한때는 뉴욕 수집상의 재정 보증으로 미국 유학까지 꿈꿨다. 우표 수출은 내가 공직에 들어가 청와대 비서실에서 일하게 됐을 때 접었다. 교회 성가대에서 아내를 만나 결혼하면서 미국 유학 꿈 역시 접었다.
***[역경의 열매] 이용만 (7) 친어머니 같았던 권사님 덕에 옆길로 새지 않아
친구 어머니인 김병인 권사, 나를 주님께 인도하고 보살펴 주셔…교회에 살다시피하며 외로움 달래
친구 김해영의 어머니 김병인 권사. 김 권사는 나를 교회로 이끌고 반듯하게 살아가도록 도와주셨다.
나는 전쟁 중에 친어머니를 잃었지만 서울에서 친어머니나 다름없는 교회 권사님을 만나 젊은 날 옆길로 새지 않았다. 나의 제일 친한 친구인 김해영의 어머니 김병인(1909~2008) 권사였다. 나를 주님께 인도한 은인이기도 하다.
김 권사도 나의 고향인 강원도 평강읍 출신이다. 아버지가 말을 타고 읍내에 나갈 때면 자주 그 집에 들렀다. 김 권사의 남편은 해방 후 북에서 신탁통치에 반대하는 연설을 했다는 죄목 때문에 소련으로 끌려가 가족들과 인연이 끊어졌다. 전쟁 통에 김 권사는 아들 셋과 딸 하나를 데리고 남편 없이 남쪽으로 내려왔다. 혼수품이던 싱거(Singer) 미싱 한 대로 자녀들을 모두 대학까지 마치게 한 분이다.
김 권사는 서울의 을지로 4가에 있던 동광교회에서 봉사하셨다. 친구 김해영이 교회에 매여 있으니 불러내기 위해 드나들다가 나도 열심히 다니게 됐다. 교회에 출석하는 나를 김 권사는 많이 사랑해 주셨다. 김 권사는 나를 볼 때마다 다른 교인들에게 “내 아들이다”라고 말했다. 그러면 다른 할머니들이 “그 집은 아들이 몇 명인데 그렇게 많으냐”고 묻곤 했다.
젊은 시절은 복음에 빚진 삶이었다. 대학에 다닐 때도 주말이나 주중을 가리지 않고 절반을 교회에서 살다시피 했다. 전쟁 와중에 홀로 남한에 떠밀리듯 내려와 숱하게 많은 날을 외로움에 지치고 배움을 갈망했다. 그때 교회가 내 가족이 됐다. 요한복음 7장 37~38절의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 말씀처럼 외로움과 마음의 상처를 교회에서 치유 받았다.
이 교회엔 두 분의 나이 지긋한 권사가 있었는데 한 분은 김 권사이고 다른 한 분은 김우중 전 대우그룹 회장의 어머니 전인항 권사였다. 두 분 모두 남편 없이 아이들을 홀로 키워냈으며 고향이 이북이어서 친하게 지냈다. 고려대를 다니던 나는 연세대를 다니던 김우중을 교회에서 봤으나 얼굴만 알 뿐 깊은 이야기를 나눌 정도는 아니었다.
나는 동광교회에서 세례를 받고 청년회 회장과 성가대장으로 활동했다. 성가대장으로 있으면서 평생 함께할 반려자를 성가대 반주자로 만난다. 당시 김석홍 담임목사는 나를 친동생처럼 챙겨 줬고 과분할 정도로 위해 줬다. 결혼식 때 가족이 없던 나를 위해 김 목사가 대표로 친족 감사 인사를 했다. 훗날 김 목사가 건국대 교목으로 옮겨가면서 나도 건국대 근처로 거처를 옮기고 화양감리교회에 나가게 됐다.
김 권사는 1969년 이민 간 아들을 따라 미국으로 갔다. 재무부 시절 미국에 출장을 가면 바쁜 일정에도 꼭 시간을 내서 LA에 있는 김 권사를 뵈러 갔다. 찾아 뵐 때마다 김 권사는 우선 성경을 펼쳤다. 그리곤 말씀을 찾아 읽고 기도를 해 주셨다. 미국 출장 일정을 쪼개 갔기에 주변 가족들이 ‘어머니, 형님 바쁜데 이제 그만 하시지요’ 말해도 끝까지 말씀과 기도를 잊지 않았다. 김 권사는 100세를 5개월 앞두고 돌아가셨다. 이후 더 이상 LA에 갈 일이 없어져 너무도 아쉬웠다. 남한에서 혈혈단신 살면서도 생활을 단정하게 할 수 있었던 것은 김 권사의 보살핌과 기도의 힘이라고 지금도 생각한다.
***[역경의 열매] 이용만 (8) 성가대장 맡다가 성가대 반주자와 결혼
아내의 내조로 일에만 몰두… 남덕우 장관이 초청한 식사 자리서 아내 “주일에 교회 나가게 해줘야”
1991년 태국에서 열린 국제통화기금(IMF) 연차총회에 참석한 이용만 장로와 아내 주경순 권사.
나는 1961년 4월 13일 결혼했다. 4·19의거 1년 뒤였다. 동광교회 청년회장과 성가대장을 맡다가 성가대 반주자였던 주경순과 결혼했다. 1남 4녀를 낳아 키웠다. 아들은 내가 1951년 춘천 가리산 전투에서 총을 맞던 날과 같은 5월 11일에 태어났다.
아내를 만난 과정도 특별했다. 내가 국제우체국 김포공항 사무실에 다닐 때 그곳에 출입하던 KBS 주창순 기자와 친해졌다. 아내의 큰오빠였다. 그에게 “우리 교회에서 피아노 반주할 사람을 찾는데 어디 그런 사람 없을까”라고 묻자 그는 “내 동생이 이화여대에 다니는데 피아노를 아주 잘 친다”고 했다. 결혼식은 교회 교인들의 축복 속에 건국대 총장을 역임한 정대위 목사님의 주례로 진행됐다. 김석홍 목사님은 가족 없는 나를 위해 친족 대표로 인사를 해줬다.
결혼할 때는 아내를 위해 야마하 피아노를 선물로 준비했다. 우표 수출로 번 돈이 있어 집을 장만해 결혼 생활을 시작했다. 결혼 전 아내는 학교의 연습용 피아노를 선점하기 위해 새벽 5시면 등교했다고 한다. 다른 것은 못 해줘도 결혼하면 집에서 피아노는 칠 수 있게 해주겠다고 다짐했다. 아내는 집에서 걸어다닐 수 있는 수도여자사범대(현 세종대)에서 교편을 잡고 있었는데 아이 셋을 낳은 뒤에는 일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중앙부처 공무원 과장 월급보다 아내의 월급이 더 많던 시절이었다.
아내 덕분에 피아노 연주회는 열심히 따라다녔다. 한번은 이화여대에서 열리는 피아노 연주회를 보러 가자고 집사람이 권해서 따라갔다. 중간에 답답해서 나와 어두컴컴한 계단에 앉아 있었다. 당시 이한빈 전 부총리가 들어가다가 나를 보더니 “어, 강릉에 호텔 잘 지었습디다” 하고 말했다. 나를 정주영 회장인 줄 착각한 거다. “전 정 회장이 아닌데요”라고 말하기가 뭣해서 “아, 네 고맙습니다”하고 답하고 말았다.
사람들이 나보고 정 회장과 비슷하다고 말하긴 했다. 강원도 북부 출신의 장신이면서 홀쭉한 얼굴이었던 게 비슷했다. 곰탕에 밥을 통째로 말아 먹곤 하는 모습도 닮았다. 훗날 정 회장을 산업시찰 때 만나 강릉호텔 일화를 말했더니 정 회장은 “그러면 당신이 가져”라고 말해 웃었다.
인생에서 희비와 영욕의 세월은 누구에게나 있게 마련이다. 나의 경우 욕(辱)은 내가 만든 것이며 영(榮)은 아내의 도움으로 이루어졌다. 공직에 나가 일에 몰입해 살았기에 아침 7시 이전에 출근해 통행금지 시간에 맞춰 겨우 귀가하곤 했다. 밤샘 작업을 일주일에 2~3차례 할 정도로 정신없이 질주하던 삶이었다. 딸이 “아빠, 이화여대에 합격했어요” 하면 “그래, 잘됐네” 하고는 돌아서버리는 아버지로 살았다. 마음 놓고 일에만 열중할 수 있었던 데는 아내의 내조가 큰 역할을 했다.
재무부 시절 남덕우 장관이 고생하는 부하들의 아내들을 초청해 식사 자리를 만들었다. 아내는 장관 앞에서 당차게 “주일에는 교회에 나가게 해주셔야 합니다. 주일도 못 지킬 정도로 일만 만날 시키면 어떻게 합니까”라고 말했다. 남 장관은 “나라 경제가 어려울 때는 하나님도 용서하실 겁니다”라고 답했다.
***[역경의 열매] 이용만 (9) 공직 초기부터 ‘약속은 무조건 30분 미리’ 지켜
정일권 전 총리 이야기 듣고 실천, 청와대 내각기획통제관실 뽑혀 박정희 대통령 처음으로 만나
이용만 장로(오른쪽)가 이북에서 피난 나온 평강고급중학교 동기동창이자 단짝 친구인 김해영씨와 함께 했다.
1962년 6월 서울 세종로에 있는 중앙청으로 처음 출근했다. 나의 공직 생활이 시작된 날이다. 북쪽 하늘을 바라보며 “아버지, 제가 서울에서 중앙정부 공무원으로 출근을 합니다”라고 속삭였다. 북에 있을 때 친척들이 “우리 승만(옛 이름)이는 이다음에 도지사 정도는 할 거야”라는 이야기를 자주 했다. 도지사는 아니고 장관이 되긴 했지만 이 말이 늘 힘이 됐다.
살면서 몇 번 감격의 순간을 느낀 적이 있었다. ‘곁에 부모님이 계셨으면 얼마나 기뻐하셨을까’하고 생각되던 날들이다. 중앙청으로 처음 출근하는 날 이전엔 1956년 4월 혈혈단신 주경야독으로 고려대에 들어갔을 때가 그랬다. 1971년 9월 재무부 이재국장에 오를 때도 감사기도를 드렸다.
5·16 이후 박정희 장군은 신정부조직법을 발표했다. 이 법에 따라 내각 수반 밑에 내각기획통제관실을 설치하고 각 행정부처에 기획조정관을 뒀다. 이 기관은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담당하는 지휘부였다. 행정 각 부처의 기획, 예산집행 및 전용, 사업별 심사 분석 업무를 맡았다. 분석 결과 문제점과 건의사항을 국가재건최고회의 박정희 의장에게 보고하는 기구였다.
폭주하는 업무 때문에 일손이 달린 내각기획통제관은 주변에 인물을 수소문했다. 이북 출신에 자원입대 경험이 있고 대학을 졸업한 내가 추천받았다. 중앙청 출근 몇 개월 뒤인 11월에는 서기관 사무관을 선발하는 고등전형시험이 있었다. 나는 이 시험에 합격해 행정사무관 4호봉으로 임명됐다.
내각기획통제관실에 들어간 지 2년 만에 야간을 이용해 서울대 행정대학원에 나가기 시작했다. 이때 남덕우 이승윤 등 쟁쟁한 교수진으로부터 경제발전론을 배우고 경제개발계획에 대한 평가를 들을 수 있었다. 경제학 행정학 등을 체계적으로 배웠다. 훗날 업무를 수행하는 데 큰 도움이 됐다. 1966년 2월 행정학 석사학위를 받았는데 논문 주제는 공기업 문제로 했다. 우수 졸업 논문 4편 가운데 1편으로 선정됐다.
약속은 무조건 30분 미리 지켰다. 공직 생활 초기부터 몸에 밴 습관이다. 재무부 장관을 할 때도 이 원칙을 준수했다. 청와대에서 오전 10시 회의가 열리면 정부과천청사에서 좀 일찍 출발해 9시 30분 정도면 서울 세종로 조선호텔에서 커피를 마시며 기다렸다. 시간을 칼같이 맞추고 미리 약속 장소에 나오는 것은 정일권 전 총리와 장덕진 전 농림부 장관에게 배웠다.
장 장관이 이재국장이던 시절 정 총리에게 세배를 갔다가 들은 이야기가 있었다. 정 총리의 영어 실력은 군인 출신 가운데 최고였는데 그게 그냥 된 것이 아니었다. “장 국장, 난 말이요 술을 마시고 온 날도 집에 들어오면 1시간 정도 AFKN을 듣거나 타임지를 읽고 자요. 우리가 서양 사람들한테 ‘코리안 타임’이라고 비난을 받지 않소. 그러니 무슨 약속이든 15분 전에 가는 것을 습관화하기 바라오.” 장 국장이 내게 들려준 이 이야기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
1966년 7월 청와대에서 내각기획통제관실로 사무관을 차출하라는 지시가 내려왔다. 내가 뽑혀 청와대 비서실로 가게 됐다. 그곳에서 나는 처음으로 박정희 대통령과 만났다.
***[역경의 열매] 이용만 (10) 청와대 근무하며 경제개발계획 한눈에 익혀
정무비서관 보좌… 박정희 대통령 온통 경제개발만 생각, 말석 사람 챙기고 야근자에 밤참 보내
박정희 대통령(오른쪽)이 1970년 청와대에서 열린 수출확대회의를 마치고 재무부 이재1과장이던 이용만 장로를 격려하고 있다.
1966년 7월부터 청와대 비서실에서 일했다. 당시 청와대 비서실 조직은 비서실장 밑에 정무비서관이 있고 그 밑에 비서관(지금의 수석비서관)들이 소속된 체계였다. 오늘날엔 정무비서관이 국회와 정당 관계만 조율하지만, 그땐 모든 비서관을 통제하는 국정 총괄 기능을 맡았다.
재무부 차관을 지내고 막 청와대에 발탁된 서봉균 정무비서관을 보좌하는 게 내 역할이었다. 나는 청와대에서 열리는 대통령 주재 회의의 안건, 참석자 선정과 연락, 회의 후 속기록 작성 등을 맡았다. 가장 중요한 일은 회의 결과를 대통령 지시 각서 형태로 정리해 정무비서관과 비서실장을 거쳐 대통령의 결재를 받은 다음 각 부서에 전달하는 업무였다. 박정희 대통령이 일하는 모습을 가까운 거리에서 지켜봤다.
박 대통령은 ‘기획 및 계획, 집행, 평가와 분석’ 이라는 공식에 입각해 일했다. 체계적·과학적·능률적 프로젝트 수행을 강조했다. 나는 대통령 집무실 바로 옆에 있는 상황실에서 높이 5m, 길이 8m 되는 직사각형 상황판을 통해 부처별 주요 프로젝트의 완공 계획, 진행 실적, 문제점을 일목요연하게 표시하고 관리하는 일을 했다. 수출입 동향, 세수 현황, 산업시설 건설 현황 등을 담은 통계와 도표뿐 아니라 완공된 공장, 건설 중인 공정, 건설 계획 중인 공장을 표시하는 굴뚝 그림으로 지도 곳곳이 가득 찼다.
나는 대통령이 상황실에 들어올 기미가 있으면 언제든 답할 준비를 하면서 대기했다. 덕분에 리더의 입장에서 문제를 바라봤고 경제개발계획을 한눈에 익힐 수 있었다. 박 대통령은 상황실에 들어와 빨간 줄이 길게 늘어나지 않은 프로젝트에 대해 “왜 이렇게 더디게 진행되고 있나”라고 물었다. 그러면 나는 주저 없이 “네, 이 프로젝트는 이런저런 이유로 지체되고 있습니다”라고 답할 수 있어야 했다. 이때 박 대통령은 그 이유를 메모로 남겼다. 장관을 채근하고 독촉하기 위해서였다. 놔두면 알아서 할 리가 없다고 그는 생각했다. 점검하고 독려하는 게 몸에 뱄다.
박 대통령은 1년 열두 달 스물네 시간을 경제개발과 수출만 생각하는 것 같았다. 자기 일에 전부를 걸고 사는 분이었다. 보통사람 같으면 큼직한 상황판에 적힌 작은 숫자가 눈에 들어올 리 없는데, 대통령의 머리엔 깨알 같은 숫자가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듯했다. 항상 숫자 중심으로 질문을 던졌다. 대충 답하고 슬쩍 넘어갈 수가 없었다.
회의가 시작되기 전엔 이후락 비서실장이 상황실에 들어와 점검하는데 박 대통령의 키가 작으니까 자리에 두꺼운 방석을 갖다 놓고 나갔다. 그러면 박 대통령은 들어와서 착석하기 전에 방석을 치워버리곤 했다. ‘키가 작으면 작은 대로 앉으면 되지, 이런 게 왜 필요해’ 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내가 인상 깊었던 점은 박 대통령의 인간적 모습이다. 박 대통령은 보고만 받은 뒤 휑하고 나가지 않았다. 말석에 앉은 사람들과도 일일이 악수를 하며 “수고가 많네”라고 격려했다. 각 부처 직원들이 상황실 정리를 위해 야간작업을 하는 것을 보면 경호실에 지시해 국수와 커피 등 밤참을 보내주는 것도 잊지 않았다. 사람을 어떻게 움직여야 하는지 알고 있었다.
***[역경의 열매] 이용만 (11) 재무부 과장 부임, 하나님 섭리이자 은혜
남덕우 당시 부총리 겸 경제기획원 장관(오른쪽 세 번째)과 함께 1978년 산업시찰을 위해 율산그룹을 방문한 이용만 장로(오른쪽 두 번째).
1967년 7월 나는 재무부 이재2과장으로 부임했다. 상사로 모시던 서봉균 청와대 정무비서관이 재무부 장관으로 영전하며 같이 가자고 강권했다. 재무부에 들어간 것 자체가 하나님의 섭리이고 은혜였다.
이재2과는 저축을 독려하는 부서였다. 저축과 또는 은행과로 불렸다. 경제개발을 제대로 추진하려면 재원이 있어야 하는데 우리나라는 극심한 재원 부족에 시달렸다. 내자(內資)를 동원할 수 있다면 무슨 일이든 다 하라는 게 지상명령이었다. 저축기관다운 저축기관도 부족했다. 먼저 지방은행 설립을 도왔다. 대구은행 부산은행 충청은행 광주은행 제주은행 등 10개 지방은행이 이 시절 집중 설립됐다.
나는 오늘날 대기업의 성장 이면에 저금리를 통한 정부 혹은 납세자의 지원과 은행의 희생이 있었음을 기억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당시 지도층은 “기업에 좋은 것이 나라에 좋은 것”이란 시각으로 기업 지원을 위해 기꺼이 은행권을 희생시키는 쪽을 택했다. 고금리로 예금을 받아 저금리로 기업을 지원하다 보면 은행이 부실해진다. 이를 만회하기 위해 은행이 한국은행에 예치하는 지급준비금에 이자를 매겨주는 방식까지 동원해 지원책을 마련해 나갔다.
1969년엔 재무부 이재1과장으로 자리를 옮겼다. 이재1과는 우리나라 금융기관 전반을 다루며 부실기업 정리도 해야 했다. 서울대 행정대학원에서 만났던 남덕우 교수가 재무부 장관으로 부임했다. 남 장관은 엄격한 계수 관리를 강조하면서 금융정책의 판을 처음부터 새로 짜기 시작했다.
이재1과장을 거쳐 1971년 곧바로 이재국장으로 승진했다. 재무부 핵심 요직인 이재국장을 3년 5개월 역임하며 최장수 재임 기록을 세웠다. 사심 없이 정책에 몰방하던 나날이였다. 나는 이때 사금융 양성화를 위해 부단히 노력했다. 모든 자원이 대기업에 집중됐던 경제 개발기에 은행 문턱이 높았던 중소기업과 서민에게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길 바라는 마음이었다.
먼저 은행권에서 흡수하지 못한 기업 자금이 고금리 사채로 운영되고 있는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단기금융업법’을 제정했다. 매일 ‘일수’를 찍는 서민 사채시장 자금을 양성화하기 위해 온갖 모함과 모략을 무릅쓰고 ‘상호신용금고법’으로 결실을 보았다. 상호 유대관계를 맺고 있는 사람들 사이에 융통하면서 저축도 하고 필요한 곳에 쓰는 ‘신용협동조합법’도 만들었다. 비은행 금융기관의 기틀이 다져진 때였다.
중화학공업 개발을 위한 국민투자기금 제도도 마련했다. 이 역시 정부와 한국은행의 이자 보전으로 인한 재정과 통화 정책 지원으로 가능했다. 경공업 중심에서 중화학공업 중심으로 전환 역시 대규모 내자 조달이 관건이었다. 수출산업의 고도화를 위해 불가피했지만, 이 역시 은행과 국민의 희생 덕에 가능한 일이었다.
포항제철(현 포스코) 박태준 회장이 고생하고 기여해 영일만 신화를 이룩한 게 사실이지만, 포철 출범 당시 자본금 140억원은 정부와 은행의 출자금이었으며 다른 기업이 25%의 고금리에 시달릴 때 포철은 이자 없는 돈을 은행에서 가져다 썼다. 한국 대기업의 대주주 경영자가 2세나 3세로 넘어가더라도 다른 나라보다 사회에 더 큰 부채의식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역경의 열매] 이용만 (12) 재무부 이재국장 맡아 최장수 재임 기록
고려대 자력 졸업 등은 北 고향 가면 조상께 자랑거리… 승진에 언론서도 호평
현확 국무총리(오른쪽)가 1977년 당시 재무부 기획관리실장이던 이용만 장로에게 홍조근정훈장을 수여하고 있다.
가끔 이런 생각을 했다. 언젠가 통일이 돼서 내가 이북의 고향에 가면 조상님께 자랑할 일이 무얼까. 재무부 장관에 오르기 전까지는 3가지가 있었다.
첫째는 고려대를 내 힘으로 졸업했다는 것이다. 둘째는 5·16 이후 시험을 쳐서 당당히 중앙청에, 그것도 국무총리의 내각수반기획통제관실이라는 핵심부처에 다니게 된 것이다. 셋째는 재무부 이재국장을 맡아 최장수 국장을 했다는 사실이었다. 재무부에서 이재국장이란 일류대 학부를 나와서 행정고시에 합격한 사람도 앉기가 힘든 자리였다.
1975년 2월 나는 재무부 기획관리실장으로 승진했다. 당시 한 신문은 나의 승진을 이렇게 보도했다. “직업 관료가 승급하는 최고 직급인 1급 공무원직에 승진된 이용만 재무부 기획관리실장은 이번의 영전이 지난 3년 반 동안 난적된 재정·금융 업무를 무난히 수행해온 논공행상이라고 주위에서 평가한다.… 그는 대인관계가 폭넓고 시원시원하여 앞으로 부내 각국 간의 조정역을 잘 해낼 것이라는 평이다. 취미는 장기, 운동 등 다양하며 게임에 승부욕이 강하다.”
기획관리실장은 부서 내 업무조정이 중요하고, 그다음으로는 국회와 언론 관계를 능숙하게 처리해야 했다. 철두철미한 업무 처리로 유명한 당시 김용환 재무부 장관도 외부 활동에는 일부 어려움이 있었다. 이를 보완할 적임자로 나를 배치했고 나는 성심을 다해 일했다.
구원투수로 국회에 파견돼 의원들의 협조를 구하고 특히 야당을 설득하는 일을 도맡았다. 때로는 이른 아침에 의원 댁 방문을 감행했다. 엘리트 관료 중에는 조금이라도 굽히는 걸 어려워하는 경향이 있었는데 나는 다른 모습을 보이려 노력했다. 국회의원의 입장이나 체면을 살려가며 설득하면 대부분 “그렇게 하지”라고 답해줬다. 1977년에는 재정차관보로 전보돼 재정·금융 업무를 총괄하는 역할을 맡았다.
돌이켜보면 한국 경제는 항상 위기였다. 늘 좋았다는 말로 과거를 치장하는데 쉽게 넘어간 적이 한 번도 없었다. 1970년부터 경제성장률이 한 자릿수로 뚝 떨어져 위기감이 커졌다. 1971년에는 베트남 휴전 협정 및 인근 국가 공산화로 인해 자주국방과 중화학공업 육성 필요성이 대두됐다. 재원 마련이 골머리였다. 1973년에는 1차 석유파동의 충격으로 세계 경제가 급락해 국내 경기도 냉각됐다.
1975년 하반기부터 세계 경제가 석유파동의 충격을 벗어나며 활기를 띠었고 막대한 오일머니를 벌어들인 중동 국가들이 의욕적 경제개발을 시도하며 중동 건설 붐이 나타났다.
연간 10억 달러의 외화가 국내로 쏟아져 들어와 구조적 흑자 경제를 꿈꿀 수 있었지만, 통화가 팽창돼 부동산 투기가 기승을 부렸다. 부동산 투기 억제책 시행으로 이번엔 시중 유동자금이 한꺼번에 증권시장으로 몰려 증시 안정화 대책을 내놓아야 했다. 1978년 8월 이후엔 타오르던 증시가 건설주 하락을 필두로 끝없이 하락했다. 많은 건설업체가 중동에서 받은 선수금을 공사하는 데 쓰지 않고 국내로 들여와 아파트 부지 매입에 사용하고, 재무부의 반대에도 이들 건설업체에 무차별 은행 지급보증을 해준 대가였다.
***[역경의 열매] 이용만 (13) ‘전두환 처삼촌’ 면담 거절했다는 죄로 해직돼
이용만 장로가 모은 공무원증과 정부청사 출입증.
1980년 공직사회 분위기는 흉흉했다. 박정희 대통령 시해 사건이 터지고 12·12로 권력을 잡은 군인들은 80년 5월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국보위)를 발족했다. 전두환 보안사령관 겸 중앙정보부장이 상임위원장으로 전권을 장악해 각 부처의 공직자 숙청, 정치 활동 정화, 언론 통폐합, 삼청교육대 등 초헌법적 조치들을 기획했다. 당시 나는 재무부 재정차관보에서 경제과학심의회의 차관으로 자리를 옮긴 직후였다.
같은 해 7월 갑자기 “사표를 내라”는 통보를 받았다. 20년 이상 몸 바쳐 국가를 위해 일해 왔는데 이유라도 알고 떠나야 할 것 같았다. “이유가 뭐라고 합니까” 물었지만 돌아온 대답은 “이유를 모르겠다고 하네. 다만 내일 자로 사표를 받으라는 지시뿐이네”였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장관 1명, 차관 6명, 청장 5명, 지사 3명, 교육감 3명 등 총 232명이 옷을 벗었다. 나는 고위공무원 명단 맨 끝에 ‘추가’로 적혀 있었다.
재무부 엘리트들이 줄줄이 잘렸다. 금융정책과장이었던 김중웅(전 현대경제연구원장)은 김정렴(전 청와대 비서실장)의 사위라는 이유로, 이재2과장인 김인열은 김치열(전 법무부 장관)의 친동생이어서, 이재3과장이던 이한구(전 새누리당 대표)는 김용환(전 재무부 장관)의 동서란 죄목이었다. 얼토당토않은 일이었다.
내가 옷을 벗은 이유는 나중에 알게 됐다. 80년 5월 18일로 추정된다. 그날 오후 3시 서울 종로구 삼청동 총리공관에서 신현확 국무총리 주재로 긴급경제장관회의가 열렸고 이튿날엔 부총리 주재로 재무 농수산 상공 건설 등 경제장관회의가 예정돼 있었다. 급하게 재무부 안을 만들어 오후 2시까지 장관이 갖고 가야 한다는 지시가 떨어졌다.
눈코 뜰 새 없이 점심도 거른 채 자료를 작성하고 있는데 이규광 대한광업진흥공사 사장이 인사를 왔다고 했다. 재무부 유관 기관도 아닌 상공부 산하 기관장이었다. 당시 관행은 퇴임의 경우 노고와 위로의 말을 나누며 잠시 만났지만, 취임 인사 때는 명함만 놓고 갔다. 다음에도 만날 기회가 있기 때문이었다. 관례대로 이 사장에게 면담이 어렵다고 통보했는데 여직원에게 호통을 치고 나가버렸다고 한다. 이 사장은 전두환 당시 국보위 상임위원장의 처삼촌이었다.
난세엔 신중했어야 했다. 정권이 바뀔 때면 기강을 확립하기 위해 공직자들에 대한 쇄신 작업이 상시로 일어나기 마련이다. 이때 조그만 실수라도 하면 일이 크게 된다는 것을 체험했다. 훗날 이장규 경제전문기자는 나의 낙마에 대해 ‘경제는 당신이 대통령이야’ 책에서 이렇게 썼다.
“장인뿐 아니라 처삼촌인 이규광씨 또한 무시 못 할 영향력을 행사했다. 광업진흥공사 사장에 앉은 그의 면회 요청에 제때 만나주지 않은 이용만 재무부 재정차관보는 이른바 괘씸죄에 걸려 관에서 쫓겨나야 했을 정도였다.… 권토중래로 6공 들어 재무장관으로까지 명예를 회복한 이용만은 당시 자신의 죄목을 일컬어 ‘대통령처삼촌 면회요청 거절죄’라고 했다.”
해직은 엎질러진 물이었고 나는 다시 일어서야 했다.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겠다는 각오로 금융계에서 내 명예 회복의 발판을 마련하겠다고 작정했다.
***[역경의 열매] 이용만 (14) “은행장 이용만입니다, 저를 이용만 하세요”
중앙투자금융 거쳐 신한은행장으로…웃음 선사하며 고객에 가까이, 동화증권 인수 등 성장 초석 놓아
신한은행이 1986년 5월 경기도 용인 연수원에서 개최한 체육대회의 부장·지점장·임원 800m 달리기에서 1위로 들어오는 이용만 장로.
인생은 계획대로 척척 돌아가지 않는다. 역경이 있어야 열매가 있다. 공직에서 쫓겨난 뒤 금융계에서 다시 시작하자고 결심했다. 어디든 주인의식을 갖고 일하다 보면 많은 걸 배울 수 있는 게 인생살이라고 생각했다.
1982년 2월 중앙투자금융 사장으로 가게 됐다. 주위에선 “차관까지 지낸 사람이 종업원 100명 남짓한 금융기관에 취직하는 게 말이 되느냐”고 했다. 중앙투자금융은 제1금융권도 아니고 제2금융권이었다. 당시 서울엔 7개 투자금융회사가 있는데 후발주자 1곳을 빼고 6등이었다.
나 스스로 영업맨이 돼야 했다. 매출을 올리려면 사장의 역할이 직원들을 독려하는 것에 그쳐선 안 됐다. 영업제일주의를 모토로 내걸고 창구 직원을 최소화한 뒤 모두 현장에 나가게 했다. 성과급도 도입했다. 상여금을 차등 지급한다는 건 상상하기 어려운 시절이었다. 그해 하반기부터 성과가 나타나 1983년 6월에는 업계 1위를 차지했다. 내가 회사를 떠난 뒤 7년이 지난 1992년에 발간된 ‘중앙투자금융 20년사’는 이렇게 평가했다.
“이용만 사장의 취임은 만년 중하위권에 위치하던 당사의 영업을 상위로 부상시키는 데 일대 전환점이 되어… 1984년 3월 업계 최초로 수신액 4000억원을 달성하여, 당사의 사세는 이때부터 도약의 길로 접어들었다.”
기회는 준비된 자의 몫이었다. 1985년 2월에는 2대 신한은행장으로 취임했다. 당시 신한은행은 지금처럼 규모 있는 종합금융그룹이 아니고 신생은행에 불과했다. 하지만 프런티어 정신으로 성장에 대한 열의가 가득한 기업이었다. 훗날 재무부 장관으로 복귀하기 전까지 신한은행에서 보낸 3년이 가장 보람 있었다. 은행장이 직원들과 함께 거리로 나가서 캠페인을 벌였다. 나는 새 지점이 문을 열기 전날이면 현장으로 달려가 주민들과 잠재 고객을 초청해 조촐한 리셉션을 가졌다. “저는 은행장 이용만입니다. 앞으로 저를 이용만 하십시오”라고 외쳤다. 참석자들의 웃음과 박수가 터져 나왔다.
서울 남대문 바로 옆에 있는 신한은행 본점 건물도 내가 행장 때 매입한 것이다. 남서울골프장 목욕탕에서 대왕흥산 김치곤 회장을 우연히 만나 벌거벗고 환담을 하다 그곳 건물과 땅이 시세보다 월등히 싸게 나왔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즉시 사무실로 돌아와 신한은행 재일동포 주주들에게 연락해 긴급이사회를 소집하고 차트를 준비했다. 당시 라응찬 전무와 함께 일본 오사카로 날아가 이사회에 안건을 보고하고 승인을 받았다. 남대문 1번지에 신한은행 본점이 들어서게 된 사연이다.
행장에 취임하자마자 동화증권을 인수해 신한증권으로 출범시킨 일도 기억에 남는다. 신한종합연구소 설립과 더불어 오늘날 종합금융그룹으로서 성장하는 데 초석을 놓았다. 신한은행 창립자 이희건 회장과의 신뢰도 차곡차곡 쌓여갔다.
신한은행 시절 체육대회도 즐거운 추억으로 남아있다. 당시만 해도 규모가 크지 않아 부장 지점장 임원 전원이 참가하는 800m 달리기가 있었다. 공직에서 쫓겨난 뒤 남산체육관에서 절치부심하며 체력을 키웠던 노력이 빛을 발했다. 2년 연속 행장인 내가 1등을 했다.
***[역경의 열매] 이용만 (15) “나라의 재무 행정 맡아줘야겠어요” 대통령 전화
외환은행장으로 88올림픽 도와 은행감독원장으로 일하다가 친정 재무부 11년 만에 재입성
노태우 대통령(왼쪽)이 1991년 5월 이용만 장로에게 재무부 장관 임명장을 수여하고 있다.
최고경영자(CEO)는 말이 아니라 숫자로 말하는 사람이다. 신한은행장으로 오기 직전 은행의 총수신고는 5000억원이었는데 내가 근무를 마치고 떠났던 3년 뒤엔 1조7000억원으로 늘었다. 3배 이상 증가했다. 영업이익은 같은 기간 4배로 늘었다. 여한 없이 뛰던 시절이었다.
1988년 2월에 외환은행장으로 자리를 옮겼다. 사공일 당시 재무부 장관이 추천했다. 민주화 여파로 국회의 국정감사권이 부활했다. 외환은행은 한국은행과 정부가 주식을 가지고 있는 국책은행이어서 국정감사 대상이었다. 재무부 기획관리실장 시절 국정감사를 경험해 보고 의원들과 스킨십을 다졌던 경력 때문에 호출됐다. 민영화를 추진 중인 외환은행의 여러 난제도 날 기다리고 있었다.
외환 관련 업무에 특화된 외환은행은 국책은행이기 때문에 ‘고객을 모셔야 한다’거나 ‘수익을 내야 한다’란 인식이 약했다. 시중은행과 실적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선 직원들의 의식개혁이 먼저였다. 2년여 재직하면서 매주 두 차례 연수원을 빠지지 않고 방문해 의식 개혁을 독려했다.
본점 12층 구내식당에서 한 번에 12~15명씩 책임자를 불러 ‘당신이 행장이면 어떻게 하겠는가’ 묻는 대화 모임을 가졌다. 총 300건 남짓 개선안을 모아 ‘즉시 시정’ ‘연차적 반영’ ‘받아들일 수 없는 사안’으로 구분해서 추진했다. 신속한 의사결정을 보여주기 위해서였다. 덕분에 88 서울올림픽 주관은행으로 성공적 대회 진행을 도울 수 있었다.
돌이켜보면 주님의 이끄심이다. 90년 3월 재무부에서 오랫동안 호흡을 맞춰왔던 정영의 산업은행 총재가 재무부 장관에 취임했다. 그는 나를 곧바로 은행감독원장으로 전보했다. 80년 7월 영문도 모른 채 쫓겨난 공직으로 10년 만에 다시 돌아온 것이다.
재벌들의 비업무용 부동산 매각조치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한국 경제는 86년부터 88년까지 연평균 12%의 고성장을 달성하며 이른바 ‘단군 이래 최대 호황’을 누렸다. 89년부터는 경기가 후퇴하기 시작하는데 여기에 고성장의 후유증으로 부동산 투기가 극성을 부렸다. 정부에선 대기업과 금융기관들이 경쟁적으로 부동산 보유액을 늘림으로써 부동산 시장 과열을 주도했다는 인식이 강했다.
은행감독원장으로서 금융기관에 ‘재벌 기업의 보유 부동산을 전산 입력해 이들 기업의 부동산 변동 상황을 관리하라’고 독려했다. 일시에 부동산 매물을 처분하기는 어렵기에 어떻게든 정부와 재계 사이 불협화음을 줄여가며 업무를 처리했다. 눈앞에 다가온 금리 자유화를 위해 미국과 일본의 은행 감독기구를 방문해 장단점을 파악하고 한국에서의 단계적 도입 방안을 마련했다.
은행감독원장으로 분주할 때 인생에서 잊을 수 없는 전화를 받았다.
“대통령 각하 전화입니다. 기다리세요.”
“은행감독원장 이용만입니다.”
“아, 이 원장이오?”
“네, 각하.”
“앞으로 나라의 재무 행정 좀 맡아줘야 하겠어요.”
이렇게 제36대 재무부 장관이 된다. 91년 5월부터 93년 2월까지 재임했다. 언론에선 나의 재무부 장관 기용을 놓고 ‘친정 복귀’ ‘오뚝이 인생’ 등 헤드라인을 달았다. 11년 만의 재무부 재입성이었다.
***[역경의 열매] 이용만 (16) 11년간 현장 경험한 게 장관 수행 큰 도움
사람 많이 만나고 긍정적으로 생각 이상주의적 인사와는 갈등 빚기도… 증권시장 정상화 시킨 게 보람
1991년 10월 국제통화기금(IMF) 연차총회에서 재무부 장관 자격으로 연설하고 있는 이용만 장로.
공직 생활을 하면서 사무관 서기관 이재국장 기획관리실장 재정차관보 등을 역임했지만 재무부 장관(1991년 5월~93년 3월)은 특별한 지위였다. 재무 금융 행정과 관련해 내가 모든 최종 책임을 져야 했다. 책임을 질 만큼 실력이나 경험이 없으면 고전할 수밖에 없다. 무엇이 문제인지 알아야 하고, 그 가운데서 중요한 것과 아닌 것을 구분해야 하고, 정책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가능한 수단과 방법을 충분히 검토해 선택해야 했다. 더불어 관련 부처와 국회의 적극적 협조까지 끌어낼 수 있어야 비로소 정책으로 실행할 수 있었다.
다행히 인생에서 버릴 만한 경험은 하나도 없었다. 공직을 떠난 11년간 현장 경험을 한 게 장관직 수행에 큰 도움이 됐다. 중앙투자금융에서는 사채시장을 알게 됐다. 신한은행에선 시중은행의 영업 고민을, 외환은행에선 국책은행의 제반 문제를 파악했다. 은행감독원에선 감독업무 전반을 꿰뚫게 됐다. 1980년의 해직이 내겐 전화위복의 계기가 된 것이다.
나의 이야기를 평전으로 옮긴 공병호 박사는 장관 시절 나의 업무 스타일을 네 가지로 분석했다. 첫째 사람을 많이 만나고 많이 들었다는 점이다. 식사를 하루에 몇 끼씩 했는지 분간 안 될 정도로 인연을 가진 사람들을 자주 접촉했다. 둘째 온몸을 던져서 일했고 셋째 중요한 일은 치밀하게 준비했다. 넷째는 뭐든 되는 쪽으로 생각한 것이다. 안 되는 쪽으로 생각하면 자꾸 안 되니까 “그건 할 수 없습니다”가 아니고 “잘 해낼 수 있을 겁니다”라고 답하는 것이다.
장관 시절 정책의 우선순위는 첫째 물가 안정이었다. 부동산 투기 억제 등 경제 안정의 기조를 유지해야 했다. 둘째는 제조업 경쟁력 강화였다. 셋째는 대외 개방에 능동적으로 대처하되 소탐대실을 피하고 국익에 우선을 두고 개방한다는 원칙이었다. 넷째는 우리 경제의 소화 능력을 고려해 금리 자유화를 단계적으로 추진한다는 점이었다. 금융시장 충격을 최소화하기 위함이었다. 마지막은 공평 과세였다.
현실주의자였던 나는 이상주의 면모의 다른 인사들과 갈등을 빚기도 했다. 조순 한국은행 총재와 금리 인하 및 주식시장 안정화 대책에서 의견이 갈렸다. 평생 상아탑에 있던 인사들이 명분에 집착할 때 나는 당장 시장에 미칠 영향을 고려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되돌아보면 걱정거리였던 증권 시장을 정상화한 것이 가장 보람 있었다. 92년 전례 없던 3조원 규모의 한국은행 특별금융 지원과 일명 ‘빨리 사!(8·24)’ 정책으로 불린 ‘8·24 증권시장 부양 대책’을 발표해 환매 사태를 막고 증시를 정상 궤도로 끌어올렸다. 91년 연 19% 선이었던 시중금리를 93년 연 12%대로 떨어뜨리는 작업도 난제였지만 기업 투자 활성화를 위해 꼭 필요한 일이었다.
한국은 빈손으로 시작한 경제 성장이었기 때문에 서구 선진국과 확연히 달랐다. 금융이 재정을 보완한 덕에 오늘의 한국 경제가 가능했다. 관치에 대한 비판이 많지만 당시 우리 상황을 잘 이해해야 한다. 모든 은행의 대주주는 정부였다. 관 주도로 금융자금이 소비자금으로 쓰이는 걸 막고 산업자금으로 가도록 한 것은 지금 생각해도 적절한 판단이었다고 생각한다.
***[역경의 열매] 이용만 (17) 부시·대처 등 각국 정상들과 만남은 특별한 체험
재무부 장관직 잘 마무리했지만 선거 때 정치인 도움 준 게 문제 돼 유죄판결 받았다가 곧 사면복권
이용만 장로(왼쪽 두 번째)가 1992년 9월 재무부 장관 자격으로 미국 워싱턴 백악관에 초청돼 조지 H 부시 대통령 내외와 환담하고 있다.
장관 재직 중엔 정상의 자리에 오른 사람들을 많이 만날 수 있었다. 특별한 체험이었다. 1992년 9월 조지 H 부시 미국 대통령이 국제통화기금(IMF) 총회에 참석한 IMF 이사국 재무부 장관들을 백악관으로 초청했다. 당시 한국은 비이사국이었는데도 초청 명단에 들어갔다.
나의 경우 미국 재무부 재정차관보가 방한했을 때 금리 자유화를 두고 설전을 벌인 게 초청 이유가 아니었는가 추측한다. 한국 금융시장에 미칠 충격파를 최소화하면서 단계적으로 금리를 자유화하는 우리 논리를 설득하려 노력했다. 나는 부시 대통령에게 두 달 후 다가올 연임을 위한 대통령 선거에서 꼭 당선되리란 덕담을 건넸다. 그는 기분이 좋아져 왼손 주먹을 불끈 쥐며 자신감을 보였다.
마거릿 대처 전 영국 총리와의 오찬도 잊을 수 없다. 대처 총리가 퇴임 후 사적 용무로 한국을 방문했을 때 서울 신라호텔에 초청했다. 건강하고 활달하며 시종일관 분위기를 끌고 가는 여걸의 모습이 엿보였다. 하타 쓰토무 일본 대장성(현 재무성) 장관과는 술로 맺어진 인연이었다. 그가 한·일각료회담 이후 술자리에서 우리나라 안동소주를 컵에 가득 따르고선 “맛있다, 맛있다” 하길래 더 센 폭탄주를 선보였다. 이후 일본에 갈 때마다 친분을 나눴다. 하타 장관은 훗날 일본 총리도 역임한다.
인생의 정점에서 장관직을 보냈다. 노태우정부의 말미도 잘 마무리했고 고금리 해소와 투신사 재건, 증권시장 부양 등의 굵직한 성과도 냈다. 더 이상 인생의 굴곡이 없을 줄 알았다. 하지만 사람의 앞날은 누구도 알 수 없다. 김영삼정부로 정권이 바뀌면서 시련이 다시 찾아왔다.
1992년 9월 김영삼 당시 민주자유당 대표에게서 연락이 왔다. 새벽에 조찬을 하자고 했다. 식사 전 김영삼 대표는 장로로서 긴 시간 동안 기도를 했다. 나는 당시 집사 직분이었다. 여당 대통령 후보라는 점보다 장로 직분이란 게 내게는 더 높아 보였다. 그런 그가 선거자금을 모으는 데 도와달라고 부탁을 했다. 대통령 선거 경쟁자인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의 막대한 자금조달에 대한 불만도 털어놓았다.
의례적인 답변만 하고 나왔는데 며칠 뒤 김 후보의 아들인 김현철 측 인사가 찾아와 재촉하기 시작한다. 정치자금 모금에 도움을 줄 수 없겠느냐는 부탁이었다. 당시는 공직선거법이 강화되기 전이었고 선거는 돈이 많이 드는 일이었다. 나는 자금에는 일절 손을 대지 않고 김현철에게 연결하는 일만 도왔다. 다만 안영모 당시 동화은행장이 선거자금에 쓰라고 가져온 5000만원을 정치인들에게 전액 배분한 게 문제가 됐다.
정치인에게 도움을 준 내가 오히려 수사 대상에 올랐고 휴가차 떠난 해외에서 돌아오지 못했다. 몇 차례 귀국 의사를 통보했는데도 청와대가 입국을 막았다. 훗날 귀국해 수사와 재판을 받고 2심에서 유죄 판결을 받은 뒤 3개월 만에 사면 복권됐다. ‘내가 헛살았구나’ 후회하며 참회했다. 다만 재판 과정에서 안영모 은행장에게 한 건의 특혜도 주지 않았음이 입증됐다. 판결문은 “개인적인 축재에 사용하지 아니했고 은행감독원장과 재무부 장관으로 재직하면서 우리나라 경제의 안정 및 발전을 위해 많은 기여를 했음을 감안한다”고 밝혔다.
***[역경의 열매] 이용만 (18) 병중 하용조 목사, 나라의 불안 예견하고 기도
혈혈단신인 나에게 교회는 가족, 많은 목사님들 만나 큰 은혜 받아… 우리집서 갈보리교회 창립예배
이용만 장로가 2017년 일본 도쿄에서 열린 러브 소나타 10주년 행사에서 신앙 간증을 하고 있다.
사람이 살면서 완벽하면 좋겠지만 그렇지 못한 경우가 많다. 재판이 진행되는 동안 척추에 박힌 총알이 신경을 압박해 고통의 시간을 보냈다. 건강을 회복하는 데 시간이 걸렸다. 주변에서 걱정을 많이 해줬다. 신한은행 창업자 이희건 회장이 재기를 위해 도움을 줬다. 1997년 3월부터 신한종합연구소 회장으로 외부활동을 재개했다.
혈혈단신으로 남한에 내려온 내게 교회는 가족이었다. 고난 속에서 하나님의 뜻하신 바가 무엇인지 알게 됐다. 신군부가 등장하고 ‘대통령 처삼촌 면회 거절죄’로 공직에서 물러나게 됐을 때, 어려움을 통해 회개할 기회를 얻었다. 주님은 고난을 통해 잘못을 고쳐 주셨고 교만한 마음을 바로잡아 주셨고 겸손한 자세를 갖도록 만들어 주셨다. 그동안 나랏일을 하느라 소홀히 했던 성경공부와 기도 모임에 참석하게 됐다.
시편 119편 71절 “고난 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말미암아 내가 주의 율례들을 배우게 되었나이다”와 고린도후서 12장 7절 “내 육체에 가시 곧 사탄의 사자를 주셨으니 이는 나를 쳐서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려 하심이라”와 같은 말씀을 떠올렸다.
청년기 시절 동광교회를 거쳐 장년기엔 영락교회에 다녔다. 한경직 목사의 설교로 많은 은혜를 받았다. 예기치 않은 일로 박조준 목사가 영락교회를 떠나 갈보리교회를 개척할 때는 지성한 한성실업 회장, 백성학 영안모자 회장 등과 함께 교회 건물 구입을 도왔다. 갈보리교회 창립예배는 우리 집에서 드렸는데 개척에 동참한 교인들이 이후 흩어지게 됐다.
어느 교회에 가야 할까 고민하고 있을 때 서울 용산구 서빙고동에 있던 온누리교회에 나갔다. 2층 구석에서 예배를 드리고 나오는데 대학 동기인 송영언 전 총무처 국장에게 발각됐다. 즉시 하용조 목사에게 안내됐다. 하 목사는 “정말 오랜만입니다”라고 환대했다. 내가 총각 시절 성경공부를 할 때 몇 번 만난 적이 있기 때문이었다.
하 목사는 특별한 능력이 있었다. 따듯한 성품과 친화력은 기본이었다. 이를 바탕으로 모든 교인이 자신이 제일 사랑받는다고 느끼도록 배려해줬다. 성경 중심 설교도 가슴에 와 닿았다.
2010년 11월 23일로 기억한다. 글로벌 금융위기도 잘 대처하고 G-20 정상회의 역시 순조롭게 마쳐 분위기가 좋을 때였다. 청와대에서 열린 국민원로회의에 참석해 이명박 대통령과 환담을 하는데 그가 하 목사의 안부를 물었다. 일본에서 병 때문에 요양을 하시는데 병약한 몸으로 40일 새벽기도를 한다고 전했다. 그러자 이 대통령은 장로들이 안부를 더 적극적으로 챙겨야 하는 것 아니냐고 물었다.
차를 타고 광화문으로 나오면서 일본에 전화했다. 오후 2시로 정확히 기억한다. 하 목사는 “기도를 덜 하시더라도 건강에 유의해야 한다”는 대통령 걱정을 듣고는 “아니야, 기도해야 해. 나라가 편치 않고 걱정이 많아”라고 답했다. 나라 걱정이 좀 뜬금없이 들렸는데 아니나 다를까 45분 뒤에 연평도 포격이 시작되면서 난리가 났다. 하 목사는 병중에도 불안한 나라를 예견했고 기도로 대비해야 한다는 점을 알고 있었다.
***[역경의 열매] 이용만 (19) 장로 직분 맡고 말씀따라 ‘크리스천 CEO 포럼’ 결성
하용조 목사가 직접 일곱가지 소명 당부… 초대 회장으로 리더들과 기독 비전 공유
이재훈 온누리교회 목사(앞줄 왼쪽 다섯 번째)와 성도들이 2013년 서울의 한 호텔에서 이용만 장로(앞줄 왼쪽 여섯 번째)의 80세 생일을 축하는 모임을 열고 있다.
2006년 4월 온누리교회 장로가 됐다. 그냥 장로가 아니고 ‘명예’ 장로다. 1년간 장로사관학교 과정을 이수했는데 노회의 절차를 거치지 않아 ‘명예’다. 청년 시절부터 교회의 어른인 장로가 매우 높아 보였고 어려워 보였다. 아무나 될 수 없는 것으로 생각했다. 나는 지금도 장로 직분을 명예롭게 생각한다.
2007년 1월 하용조 목사님이 나를 불러 당부했다. 세상의 소금이 되기 위한 크리스천의 소명을 이야기하며 최고경영자(CEO) 네트워크를 만드는 게 어떻겠냐고 제안했다. 일곱 가지를 고민해 보자고 했다. 당시의 메모를 나는 지금도 소중히 간직하고 있다.
첫째, 나라를 걱정하는 CEO 포럼이었다. 둘째, 평신도로서 주요 교회 간 관계망이 필요하다고 했다. 셋째, 젊은 목회자들과 비전을 공유하자고 했다. 넷째는 글로벌 포럼이 되고자 하는 확장 노력, 다섯째는 재정적 구축, 여섯째는 원로들과의 네트워킹, 일곱째는 품격있는 문화를 창조하는 것이었다. 이 당부가 밀알이 돼 구성된 것이 오늘날 ‘크리스천 CEO 포럼(CCF)’이다.
2007년부터 2009년까지 내가 CCF 초대 회장을 맡았다. 한·일리더십포럼을 일본의 후쿠오카 오사카 도쿄 삿포로 센다이 등지에서 개최했다. 크리스천 리더들이 세상 속에서 기독교적 세계관을 품고 사랑을 실천하며 비전을 공유하는 공동체로 거듭나는 동시에 일본 복음화에도 도움이 되자는 취지였다. 포럼과 세미나뿐 아니라 ‘The 멋진 당신’과 같은 문화 프로그램도 성대하게 시작했다.
프로골퍼 최경주가 생각난다. 그는 미국프로골프(PGA) 투어 경기에 나갈 땐 세계 어디에 있든지 목사님께 전화해 기도를 받고 출전했다. 그런 인연으로 CCF 행사에도 적극적으로 나섰다. 자신과 함께 라운딩할 기회를 경매에 부쳐 CGNTV의 재정도 후원했다. 본인이 쓰던 장비도 아낌없이 기부했다. 최근엔 하림 김홍국 회장이 포럼에 나와 병아리 몇 마리로 시작해 30대 대기업에 오르기까지의 역경을 간증하기도 했다. 씨를 심으면 30배, 60배, 100배 결실을 본다는 말씀처럼 CCF는 10년 넘게 탄탄한 명맥을 유지해오고 있다.
CCF 초대 회장을 맡을 때 나는 이렇게 취임 인사를 했다. “제 나이가 이제는 일선 활동을 정리하고 뒤에서 열심히 응원해야 할 입장인데 하 목사님께서 ‘나이 먹었다고 말하지 말라’ ‘기억력 없어 못 한다 하지 말라’ ‘능력 없어 못 한다 말하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게 놓고 보면 나머지 갈 길은 ‘하라면 하는 것’이란 한길뿐이었습니다. 능력 없으면 ‘능력의 은사’를 구하고 지혜 없으면 ‘지혜의 은사’를 구하고 모르면 배우라 하시니, 빠져나갈 곳이 없어서 맡게 됐습니다.”
후임 이재훈 목사님은 요즘 40일 특별 새벽기도회 ‘성령의 바람 불게 하소서’를 진행하고 있다. 지난해 12월 10일부터 오는 19일까지 40일간 매일 새벽 5시 20분부터 7시까지 진행되는 새벽기도회를 이끌고 있다. 하 목사님이 생전에 늘 강조했던 말씀 중심의 사도행전적 교회를 꿈꾸며 후임 승계도 다른 교회의 모범이 되고 있음에 감사하며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역경의 열매] 이용만 (20·끝) 생사 고비 넘나들 때마다 구원의 은혜 받아
크게 감사할 일만 해도 열 가지, 모든 것 하나님께 맡겨서 가능
이용만 장로가 지난달 16일 서울 강남구 자신의 사무실에서 두손을 모은 채 기도하고 있다. 이 장로는 “모두 다 주님의 은혜였다”고 말했다. 강민석 선임기자
실패는 인생의 끝이 아니다. 또 다른 시작이다. 실패에서 새로 출발하는 불굴의 재기가 훨씬 자랑스럽다고 생각한다.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겨야 가능한 일이다.
1933년 강원도 평강군에서 태어나 편안하고 넉넉했던 부모님 밑에서 살던 삶은 한국전쟁과 함께 산산조각이 났다. 열일곱 나이로 혈혈단신 월남했다. 한국전쟁 참전과 춘천 가리산 전투에서의 총상, 그리고 명예제대라는 불확실함 속에서도 더 나은 날을 향해 전진했다. 50년대 너나없이 어려운 시절에도 벽돌을 쌓듯 하나하나 삶의 토대를 만들어 나갔다. 밑바닥에서 시작했지만, 희망과 낙관을 잃지 않았다. 내 힘으로 학비를 벌어 고려대를 졸업했다.
60년대와 70년대 산업화의 대장정을 거치며 공직자로 살아왔다.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었기에 윗사람을 믿는 구석으로 삼고 살아갈 수밖에 없었다. 서봉균 남덕우 김용환 장관을 모시고 여한 없이 뛰던 시절이었다. 80년대 뜻하지 않은 일로 공직을 떠났지만, 그것이 다른 기회를 줄지 누가 알았겠는가. 지금 내가 서 있던 바로 그 자리에서 늘 사심을 버리고 조직을 위해 힘껏 내달렸다. 이는 90년대 11년 만의 재무부장관 복귀로 이어진다.
돌이켜보면 나는 은혜를 참 많이 받은 사람이다. 단순히 운이 좋다는 말로는 설명이 안 된다. 생사의 고비를 넘나들 때마다 누군가 나를 도왔다. 은혜의 강물이 흘러 여기까지 오게 됐다.
첫째, 한국전쟁 직전 강원도 평강군 고향 땅에서 인민군에 끌려갔다면 100% 죽었을 것이다. 둘째, 강원도 춘천 가리산 전투에서는 실탄이 급소를 관통할 수 있었다. 왼쪽 어깨 쪽 총을 맞은 자리에서 한 뼘만 옮겼어도 심장을 관통했을 것이다. 또 총을 맞고 낭떠러지에 떨어질 수도 있었지만, 나뭇등걸에 걸려 살아났다. 셋째, 함께한 전우가 얼굴 정면에 총을 오발했을 때도 귓불을 스치며 총상을 면할 수 있었다. 넷째, 남한 땅에 혈혈단신 남겨졌을 때 젊은 혈기에 방탕할 수도, 반대로 낙담할 수도 있었다. 다섯째, 외로움에 힘들어했던 나를 김석홍 목사님과 교회는 한 가족처럼 받아들이고 보살펴 줬다. 여섯째, 세계 최빈국에서 원조 수혜국으로 급성장한 한국 경제를 이끄는 주역으로 일할 기회를 얻었다. 일곱째, 고속 승진으로 자칫 교만해질 수 있었는데 삶을 되돌아볼 기회를 얻었다. 여덟째, 관가는 떠나면 그만인데 금융계 현장을 경험한 뒤 11년 만에 재무부 장관으로 다시 나라를 위해 봉사할 기회를 얻었다. 아홉째, 몇 년 전엔 대리석 계단에서 발을 헛디뎌 두세 바퀴 굴렀다. 머리나 뼈를 심하게 다칠 수 있었는데 크게 다치지 않았다. 열째, 이 나이까지 건강을 주셔서 작은 일이라도 주변에 봉사하며 살 수 있고 젊은 사람들을 도울 수 있게 해주셔서 감사드린다.
이 모든 사건에서 누가 나를 보호해 줬을까. 어떤 분이 이 모든 일을 가능하게 했을까. 답은 하나님 그분이시다. 이 모든 게 하나님의 은혜와 도우심이 함께해 온 결과다. 여러 차례 죽을 고비를 넘기고 수많은 역경을 딛고 여기까지 온 내 결론이다. 내가 한 일이 아니라 그분이 하신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