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27년(태조 10) 대구 공산 동수 전투에서 견훤군의 포위로 전세가 위급해지자 태조와 용모가 비슷한 그는 태조를 피신케 하고 대신 어거를 타고 출전하여 전사하였다.
태조는 그의 유해를 춘천에 예장케 하고 벽상호기 태사 개국공 삼중대광 의경 익대광위 이보지절 저정공신에 추봉화고, 시호를 장절로 내렸다.
성종 때 태조 묘정에 배향되고 예종은 그와 김락(金樂)을 추도하여 <도이장가(悼二將歌)>를지었다.
또 조선 문종 때는 숭의전에 배향되고 평산의 대백산성 대사사, 동양서원, 곡성의 덕양사, 대구의 표충사, 춘천의 도포서원 등에 제향되었다.
묘소는 강원도 춘성군 서면 방동리에 있고 매년 음력 3월 3일과 9월 9일에 향사한다.
평산신씨는 조선 후반기에 세를 떨친 명문으로 상신 8명, 대제학 2명, 공신 11명, 문과 급제자 186명을 배출했다.
파계는 시조의 14대손에서 19개파로 갈리는데 그 중 문희공<개>파, 정언공<효>파, 사간공<호> 파에서 많은 인물이 나왔다.
특히 문희공파는 임진왜란 때 명장 신립(申砬) 장군을 대표로 하는 <무신 집안>으로 특징지어진다.
문희공파의 벼슬 열력을 살펴보면, 문희공 신개는 세종 때 예문관 대제학을 지내고, <고려사(高麗史)>수찬에 참여했고, 우의정을 거쳐 좌의정에 이르렀다.
그의 증손 신상은 중종 때 호당을 거쳐 판서를 지냈는데 이 파의 주요 인물은 모두 그의 후대에서 나왔다.
상의 손자 신섭은 선조 때 호성공신으로 평천부원군에 봉해졌고, 그의 아우가 임진왜란 때 명장인 충장공(忠壯公) 신립이다.
신립의 아들 경진(景色)촵경유(景裕)촵경인 3형제가 모두 무과 출신으로 인조반정에 공을 세우고 정사공신이 되었다.
특히 충익공(忠翼公) 신경진은 병자호란 때의 명장으로서 인조 때 영의정에 올랐다.
조선조에서 무과 출신으로 영의정까지 오른 사람은 그와 순천박씨의 박원종(朴元宗) 두 사람뿐이다.
문희공파에서만 장신이 14명이 나왔으며, 숙종 때 영의정을 지낸 문장공(文莊公) 신완(申琓), 조선 후기의 서화가인 자하(紫霞) 신위(申緯)촵애춘(靄春) 신명연(申命衍) 부자도 문희공파의 인물이다.
정언공파에서는 문정공(文貞公) 신흠(申欽)이 대표적인 인물이다.
그는 인조 때 영의정을 지냈는데, 이정구(李廷龜), 장유(張維), 이식(利殖)과 함께 조선 4대 문장으로 꼽힌다.
그의 아우 감(鑑)은 임진왜란 때 불타 버린 왕조실록 복간에 공이 컸고, 흠의 아들 문충공(文忠公) 신익성(申翊聖)은 인조 때 <병자 척화 5신>의 한 사람으로 청나라 심양에 잡혀갔었다.
그의 아우 익전(翊全)은 김상헌(金尙憲)의 문인으로 이름난 당대의 문한이었다.
이 밖에 숙종 때의 명신 문숙공(文肅公) 신정(申晸)은 익전의 아들이고, 고종 때 좌의정을
지내고 봉조하가 된 문경공(文敬公) 신응조(申應朝)는 정의 6대손이다.
사간공파의 인물로는 세종 때 호조판서를 지낸 사간공(思簡公) 신호(申浩)의 6대손 신점(申點),신암 형제가 있는데, 점은 임진왜란 때 명나라의 구원병을 끌어들이는 데 성공하여 선
무공신이 되었다.
그러나 그의 직손인 신율(申慄)이 광해군 때 대북파에 가담, 소북파를 숙청하는 옥사에 관여하여 인조반정 이후로는 쇠퇴했다.
반면 신암의 후대에서는 많은 인물이 나왔다.
그의 아들 민일(敏一)은 대사성을, 현손 사철(思喆)이 영중추부사를 지냈으며, 사철의 아들만(晩)촵회(晦) 형제는 영조 때 영의정을 지냈다.
역사상 형제 영의정은 그들과 안동김씨의 김수흥(金壽興), 수항(壽恒) 형제, 김병학(金炳學), 병국(炳國) 형제 등 셋뿐이다.
근세 인물로는 고종 때 참정대신을 지낸 문헌공(文獻公) 신기선(申箕善), 독립운동가로 건국후 국회의장을 지낸 해공(海公) 신익희(申翼熙)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