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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연극배우 "앙트완느"와 "자유극장" (서양연극사)

작성자박재홍|작성시간01.05.21|조회수417 목록 댓글 0

* 앙트완느(Andre' Antoine)

 

 1858∼1943. 프랑스의 배우, 제작자, 매니저. 근대 연극의 개척자 중 하나. 1887년 가스회사에 근무하면서「테아트르 리브르」를 창단했다. 졸라 같은 작가의 도움을 받으며 코메디 프랑세즈의 관습과 불르바르극장의 천박성을 공격하였다. 발자크·베크·모파상·톨스토이·하우프트만·스트린드베리·뵈른손·투르게네프와 특히 입센 등의 작품들을 제작하였다. 극단의 아마추어 배우들에게 자연스러운 연기술을 가르쳤고, 평면적인 무대장치를 입체적인 무대장치로 대치했다. 1888년 브뤼셀에서 마이닝겐극단의 앙상블을 본 후, 1897년「테아트르 앙트완느」를 창단했다. 1906년 오데옹의 연출자로 임명, 1914년 퇴직한 후, 연극비평과 영화 등에 종사했다. 프랑스의 자연주의 연극을 확립, 전통이나 극적 효과보다 연극의 본질과 실제 생활과의 관
계에 바탕을 둔 연극을 지향했다. 그에게서 영감을 받은 브람은 1889년 베를린에 프라이에 뷔네를 설립하였으며, 그린은 1891년 런던에 인디펜던트 디어터 클럽을 만들었다. 2권의 회고록,「테아트르 리브르에 대한 회고 Mes Souvenirs sur le Theatre Libre」(1921)와「앙트완느극장과 오데옹에 대한 회고 Mes Souvenirs sur le Theatre Antoine et sur l'Odeon」(1928)가 있다.

 

* 프랑스의 사실주의: 앙트완느와 자유 극장
 

 앙드레 앙트완느(Andre Antoine 1858∼1943)는 프랑스에서 졸라와 입센을 지지한 인물이었다. 1887년에 이 무명의 가스회사 점원과 일군의 아마추어 연기자들은 수수한 단막극 4편으로 자유 극장(Theatre-Libre)을 열었는데 작품 중의 하나는 졸라의 단편「쟈크 다무르」Jacque Damour의 각색이었다. 앙트완느는 첫 시즌을 위해서 3,500프랑의 예약금을 모아 극장을 개시했다. 이 가운데 1,000프랑 가량은 리허설 장소 대여비로 지불했는 바, 뤼 레픽의 한 바에서 몇 차례 리허설을 가졌다. 무대 세트를 조립하기 위해서 그는 어머니 집에서 가구를 날라 왔으며(자기 소유의 소품들을 날라 오는 일은 여전히 아마추어들 사이에서 일반화되어 있다), 우편요금을 절약하기 위해서 동료들은 연극 초대장을 직접 전달했다. 그러나 곧 극장은 매 공연마다 바닥부터 천장까지 관객이 들어찼으며 그 결과로 두 번째 시즌을 위한 예약금은 40,000프랑에 달했다. 앙트완느는 무대장치를 들여놓고 배우들한테 급료를 지불할 수 있었다.
 극장 자체는 소도로인 예술의 엘리제 가() Passage de I' Elysee des Beaux Arts끄트머리의 계단참에 위치한 어두침침한 목조 홀에 불과했다. 343개의  좌석이 있을 뿐이며, 앙트완느가 선택한 작품의 스케일이 작은 환경에 적합한 미니어츄어 무대를 갖추고 있었다. 파리 연극의 주도적 비평가 쥘로 르매트로 Jules Lemaitre는 저서 [연극 감상] 속에서 극장의 규모를 어렴풋하게나마 묘사하고 있다.

 

 사람들은 각광(脚光) 너머로 배우들한테 손을 뻗을 수 있으며 저들의 발을 프롬프터 좌석 위에 올려놓을 수도 있다. 무대는 너무 좁아서 단지 가장 기초적인 무대 장치만을 설치할 수 있을 뿐이며, 우리와 무대 사이와 너무 가까운 까닭에 극적 환각은 불가능하다.

 

 사실주의자에 대한 의외의 도전이 이미 그러한 극장 속에 존재하고 있었다. 자유 극장은 근대 유럽의 첫 번째 실험극장이었으며 예약 판매를 통해 수지를 맟추는 체제는 관객으로 하여금 새로운 방법과 새로운 제재를 무대 위에서 테스트하는 실험에 동참하도록 강제하는 부수적인 장점을 지니고 있었다. 이후 7년동안 앙트완느는 마이닝겐 극단이 결코 행하지 못했던 정도도 자연주의 연기 및 연출의 기법을 탐구했다. 또한 비록 그의 목표가 전적으로 자연주의적인 것은 아니긴 했지만 그는 사실주의 운동의 마법적인 새로운 이름들한테 세계 연극의 수도 내에 자리한 자신의 무대를 제공했다. 이들은 톨스토이([어둠의 힘], 1888년 공연), 입센([유령], 1890. [들오리], 1891년), 스트린드베리([쥴리에 양], 1893년), 하우프트만([직공들], 1893년)등이었다.
 [어둠의 힘] The Power of Darkness은 러시아에서는 공연이 금지된 작품이었지만 자유 극장 공연은 첫 시즌 중에서 가장 중요한 이벤트였다. 이 톨스토이의 냉혹한 작품은 러시아 농민 사회의 타락을 다루었다. 뒤마와 오지에, 사르두, 저명한 비평가 프란시스크 사르세 등은 이 작품은 지나치게 음울하다고 생각했으며 이의 공연을 반대하는 충고를했다. 공교롭게도 앙트완느의 공연은 성공이었다. [ 뒤 몽드 평론]자는 이렇게 적고 있다.

 

 그곳은 오스터리쯔(체코슬로바키아 중부 도시로 나폴레옹이 1805년에 러시아 오스트리아 연합군을 격파한 곳. 비유적 표현: 역자)였다. 마지막 장에 박수갈채의 태풍 속에 막이 내려졌을 때 관객들 모두는 도취되어 있었다. 나는 전체 4시간 동안 긴장 이완이나 방심의 순간을 결코 느끼지 못했다. 실제의 러시아 일상 풍속에서 빌은 의상과 무대 배경이, 코믹 오페라의 장식이나 우리의 연극조 분위기에 고유한 듯이 여겨지는 저 번쩍거리는 장식과 허위에의 편중없이 처음으로 프랑스 무대에 등장했다.

 

 이 공연 이후에 자유 극장의 이름은 유럽 전역으로 울려 퍼졌다. 앙트완느의 [유령]공연은 기록으로 남아 있는 프랑스에서의 첫 번째 입센극 공연이었다. 이 작품은 이에 앞서 베를린 자유 무대와 런던 독립 극장 운동 속에서 발사된 개막탄이었다. 조지 무어가 [인상과 견해]지에서 말한 바에 따르면 예술적 문예적 도시 파리는 관람석에 자리하고 있었으며 다소 큰 편인 극장 무뉘 플레지르 Menus Plaisirs는 어떤 경우에는 초만원이었다. 그러나 프랑스인들은 이 공연은 '화려한 실패'일 뿐이라고 생각했다. 그들은 작품의 도덕적 쟁점들에 마음을 쓰는 일은 없었으
며, 입센은 냉담하고 불명료하며 심지어는 따분하기까지 하다고 생각했다. 입센은 프랑스적인 명료함이 결여된 '목발을 짚은 졸라'로서, 분명하게 전달되리라 기대되는 요점이나 견해를 전혀 지니고 있지 않았다. 그러나 프랑스의 모든 비평가들이 의견이 일치를 본 것은 아니어서, 쥘르 르매트르는 이 작품을 '아름답고 강렬한 비극'으로 보았으며 폴 데자르댕 Paul Desjardins.은 이 공연에 의지해서 입센을 '현존하는 가장 위대한 극작가' 로 간주했다. 이 작품을 가장 어려움없이 이해한 사람은 외국인 조지 무어로서 그는 '인생이 실을 짜낸 냉혹한 함정과 거기에 말려든 불쌍한 소년'에 대해 언급했다. 앙트완느 자신이 연기한 오스발트가 어머니한테 자신을 독살시켜 줄 것을 요구하는 대목에서 무어는 견딜 수 없는 공포가 '관객들 사이에서 요동하는'것을 느꼈으며, '병든 사내의 신경병적인 초조감이 실수없이 표현되고 있는 것을 알아챘다. 또한 오스발트가 레지나한테 키스하는 것을 알빙 부인이 바라보는 장면이 '더없이 무시무시하고 놀랍도록 박진감이 있다'고 생각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령]은 실패로 선언되었으며, 보다 불가해한 [들오리]는 사르세에 의하면 이 또한 보다 더한 실패작이었다. 이러한 모든 산맥들 가운데서 단지 [직공들]The Weavers만이 다소 성공을 거둔 것으로 비쳤던 바, [자유 극장 회고록]에서 앙트완느는 제4막 중의 공장주 가정 습격 장면은 모든 가정을 갑자기 공포로 몰아넣었다고 적고 있다. 그러나 그는 입센에 대한 일반의 평가는 수긍할 수 없었다. 
 오스발트 역을 연기하면서 그는 배우로서의 새로운 경험을 했다. 그에 의하면 이는'(그 자신의) 개성의 완전한 상실'이었다. 우리는 당시의 재미있는 그의 반응을 좋게 해석할 수도 있고 나쁘게 해석할 수도 있다. '제2막 후에 나는 관객도 공연의 효과도 그 어떤 것도 기억하지 못했다. 나약해져서 벌벌 떠는 채로 나는 마지막 막이 내려간 이후에 다시 얼마간 나 자신을 부여잡고 있었다.
 1897년에 앙트완느는 앙트완느 극장 Theatre Antoine의 연출가가 되었으며, 이 극장을 새로운 연극에 열광하는 모든 젊은이들의 본부로 만들었다. 마침내 그는 1906년에 오데옹 Odeon의 연출가로 지명되는 영광을 누렸다. 그는 프랑스 초유의 연출가 metteur en scene이자 프랑스에서 아마츄어 연기를 주목할 만한 행위로 만든 최초의 인물이었다. 그는 또한 스타 제도를 와해시키는 과정을 개시했는데, 이 제도를 그는 파리 연극 발전 최대의 장애물로 보았다.
 앙트완느는 파리 콩세르바트와르 Paris Conservatoire와 코메디 프랑세즈 Comedie-Framcaise 연기 학교, 고전 프랑스 연극 등의 전반적인 기존 연기 스타일에 정면으로 도전했다. 이러한 기존 연기 스타일은 배우들을 불구로 만든다고 그는 믿었다. 프랑스 고전 배우는 레퍼토리의 요구를 충족시키기 d위해 '전형'을 발달시키도록 조장되었다. 그는 웅변술 교육을 받았으며 완전히 자신의 배역이 돼 버리기보다는 배역을 '낭송'하는 데 익숙해졌던 바, 자연스럽게 말하기보다는 대사를 낭독하고 요점이 되는 대목을 강조해서 말했다. 그는 어떤 인물을 연기하든지 간에 동일한 제스처를 사용하려 했으며, 동작을 취하는 순간에는 결코 말을 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는 이와 더불어 또다른 수많은 법칙을 마스터해야 했다. 이러한 기존 방식에 대한 앙트완느의 공격의 결과로서 앙트완느의 배우들은 이제는 관객의 존재를 의식하지 않는 듯이 비쳤으며, 목소리와 제스처가 아니라 온몸으로 연기했다. 앙트완느는 배우가 프롬프터를 힐끗 쳐다보거나 포즈를 취하거나 또는 효과를 노리는 연기를 펼침으로써 인물 성격을 파괴하는 것을 결코 용납치 않았다. 배우는 또한 각각의 개별적인 배역의 요구에 부합되도록 자신의 연기를 다양화시킬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는 자연스러운 제스처를 사용했으며, 관객한테 등을 돌리고 연기하는 순간조차도 일상 생활 속에서 행동하는 듯이 비쳤다. 실로 자유 극장은 곧잘 '앙트완느의 등'Antoine's Back 극장'으로 불렸으며, 한 익살꾼은, 만일 앙트완느가 무대에 있는 걸 보게 된다면 앙트완느와 절연하겠노라고 어느 부유한 삼촌이 일찍이 위협했었다고 익살을 떨었다.
 연출가로서 앙트완느는 말과 제스처와 무대 동작의 가장 간단한 세목들을 숙달시키는 일의 가치를 믿었으며, 이런 세목들의 효과를 종합시키기 위해 애썼다. 그는 '연필을 돌려주거나 컵을 뒤집는 행위는 낭만 연극의 과장된 부절제 행위만큼이나 의미 깊을 것이며 관객의 생각에 그만큼은 심오한 영향을 미칠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배우들이 실제 가구와 실제 소품들을 갖춘 상태로 하나의 앙상블로서 리허설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했다. 그는 연출가란 무한한 관심과 인내심을 지니고, 관객으로 하여금 관객 자신이 바라보고 있는 것이 실제라고 생각하도록 속이는 일에 전적으로 기여해야 한다고 믿었다.
 그는 무대 장치로 해서 특히 유명해졌다. 그의 무대 장치는 삶의 완벽한 재생을 목표로 했다.  주도적인 젊은 극작가 장 줄리앙 Jean Julien의 불후의 슬로건의 의하면 이는 '인생의 단면'tranche de vie이었다. 무대 장면은 마치 제4의 벽이 제거된 방안에 설치된 것처럼 보여야 했다. 1903년 4월 1자[파리 평론]에 기고한 <무대장면 설치에 관하여>라는 글에서 앙트완느는 이렇게 설명했다.
  
 독창적이고 인상적이며 신빙성을 지니기 위해서는 무대 세트는 그것이 풍경이건 실내 건간에 우선 눈으로 보아온 것과 일치되어야할 것이다. 만일 그것이 실내라면 네 개의 면-네 개의 벽-을 함께 세워야 했다. 제4의 벽에 관해서는 걱정할 것이 없다. 이 벽은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를 관객이 볼 수 있게 하고자 이후에 제거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는 입센으로부터 출발한 또 하나의 자연주의극 기초이론, 즉 '제4의벽' 개념이다. 실내 세트는 그 방이 마치 어떤 완전한 집의 일부인 양 설계되어야 하며, 견고함을 부여하고자 천장이나 대들보를 갖추고 있어야 한다. 이어서 디자이너는 사람이 살고 있다는 느낌을 주기 위해 수많은 작은 소품으로 무대를 채워야 한다. 무대는 실제 공간의 모사품이어야 했다. 앙트완느는 종국에는 푸트라이트(각광)를 거부했는데 이는 일찍이 졸라와 스트린드베리가 제의한 바 있었다. '실생활에서 빛은 밑이 아니라 위로부터 온다.'
 무대 장치에 대한 이러한 유별난 강조의 이유는 간단하게 설명되었다. 만일 환경이 신연극에 영감을 불어넣은 자연주의에 있어 본질적인 것이라면, 그러할 때 등장 인물들이 살고 움직이는 바로 그 무대 세트 또한 마찬가지로 중요한 것이었다. 그런 까닭에 앙트완느는 무대 세를 먼저 만들고 그러한 위에서 리허설을 갖는 쪽으로 점차 나아갔으며, 그 결과로 무대 세트는 인물들의 행위를 부분적으로 결정지을 수 있었다. 그는 자신의 빠른 성공의 비결은 무대 디자인에 있다고 생각했는데, 그의 무대 세트가 그 자체 바라보기에 얼마나 매혹적인 것으로 변해갔을까 하는 것을 상상하기란 쉬운 일이다.
 오데옹 극장에 있는 동안 앙트완느는 자신의 새로운 무대 철학을 새로운 사실주의 연극 운동 뿐만이 아니라 애쉴러스, 소포클레스, 셰익스피어, 칼데롱 Calderon, 라신느, 몰리에르, 괴테, 쉴러 등의 고전에 대해서도 적용시키고자 노력했다. 그는 자신의 목적은 그들 작품의 무대를 근대화시키는 걸 통해서 그들 작품의 원기를 회복시켜주는 데 있다기보다는, 마치 그들 자신의 시대인양 그들 작품에 보다 간단하고 적절한 세트를 제공하는 데에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사람들이 말하듯이 연기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몰리에르의 주장을 즐겨 인용했으며, 라신는 같은 형식적인 고전은 자연스러운 단순성을 통해 연기하는 것이 관객을 이전보다 더욱 감동시키는 효과를 낳을 것이라고 믿었다. 고전을 동시대의 것인양 다루려는 이러한 생각은 실상 금세기에 세계 전역에서 채택되어 왔는데, 어떤 이들은 이를 달가와했고 또 어떤 이들은 이에 대해 분
개했다.
 앙트완느의 공연물은 유명해졌으나 그의 명성의 궁극적인 자격은 그가 수많은 새로운 극작가들을 고무한 데에 있었다. 그를 통해서 파리는 프랑소아 드 퀴렐 Francois de Curel의 심리극과 지오반니 베르가 Giovanni Verga의 문제극, 앙리 베크 Henry Becque의 후기 작품, 조르쥬 드 포르트-리쉬의 희극 등을 관람할 수 있었다. 그러나 앙트완느의 피후견인 가운데 가장 직접적인 성공을 거둔 이는 으젠느 브리유 Eugene Brieux였다. 언젠가 버나드 쇼는 특유의 화려한 문체로 그에 대해 말한 적이 있었다. '오늘날 유럽은 으젠느 브리유의 모습을 한 소포클레스를 가지고 있다.' 쇼는 브리유의 소문난 희곡[훼손품] Les Avaries을 언급하고 있었던 것인 바, 이 작품은 소포클레스가 오이디프스를 발가벗기고 남의 이목을 꺼리는 덜 모범적인 비밀 몇 개를 휘저은 바로 그와 같이, 존경할 만한 부르조아 주인공 로슈Loches의 환각을 벗겨버린다. 쇼는 실상 브리유를 자연스러운 입센 후계자로 생각했으며, [브리유의 희곡 세 편](1911) 서문에서 그의 '과학적 정신'에 경의를 표했다. 모름지기 쇼한테 주로 어필했던 것은 공개 무대에서 모든 금기 제재, 즉 매독, 유가 프랑스 검열관한테 거듭 도전했다는 점일 것이다. 그러나 앙트완느 자신은 이 모든 문제들은 다소 지나칠 만치 교묘하게도 도덕과는 무관하다고 생각했다. 공교롭게도 브리유의 작품들을 작품의 교훈주의로 해서 다소 빠르게 진부한 것이 되었다. 2류의 자연주의보다 더 2류인 것은 없다는 건 하나의 진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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