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가 매일 틀어놓던 라디오"
매일 아침 6시. 똑같았다. 라디오에서 삐걱거리는 음악 소리.
엄마는 귀가 안 좋은데도 볼륨을 최대로 틀었다.
그가 매일 화를 냈다.
'좀 조용히 좀 해요, 엄마!'
그런데 엄마가 떠난 지 일주일.
라디오는 멈췄다.
집은 너무 조용했다.
그가 라디오를 만지작거리다가, 배터리 안쪽에서 작은 쪽지를 발견했다.
"민수야, 이 라디오는 니 아빠가 마지막으로 준 선물이란다. 아빠가 보고 싶을 때마다 이걸 틀어. 그러면 아빠가 옆에 있는 것 같아. 엄마도 이제 아빠 곁으로 간다. 너는 행복하게 살아라. 엄마 미안해, 너한테 자주 화내서."
그는 그 자리에 주저앉아 울었다.
라디오를 껴안고. 처음으로, 그 라디오 소리가 그리웠다.
엄마가 매일 틀어놓던 라디오
내가 가장 싫어했던 그 소리가, 지금은 내 전부야.
서울의 한 낡은 아파트. 3층.
37살, 민수는 매일 아침 짜증으로 하루를 시작했다.
딱 아침 6시.
거실에서 라디오 소리가 터져 나왔다.
삐——칙, 삐——칙.
"오늘도 맑은 날씨입니다. 서울 아침 기온은 2도..."
엄마는 귀가 많이 안 좋으셨다.
그래서 볼륨을 항상 최대로 틀었다.
아파트 전체가 울렸다.
옆집에서도 뭐라고 했을 정도다.
민수는 이불을 확 뒤집어쓰고 소리 질렀다.
"엄마! 좀 작게 틀어요! 아직 6시라고요!"
엄마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혼자 중얼거리셨다.
"아이고, 오늘도 춥겠네... 민수야, 두꺼운 옷 입어라."
"됐어요! 잠 좀 자게 내버려 둬요!"
민수는 베개로 귀를 막았다. 하지만 라디오 소리는 뚫고 들어왔다.
이게 벌써 5년째다.
엄마가 치매 걸리신 후로, 라디오는 엄마의 전부가 되었다.
민수는 엄마가 이해되지 않았다.
왜 그 옛날 라디오를 버리지 않는지.
왜 매일 아침 그 소리를 들어야 하는지.
엄마는 말했다.
"이건... 니 아빠가 사 준 거야."
"아빠는 10년 전에 돌아가셨다고요! 그만 놓아 주세요!"
엄마는 그냥 웃었다.
민수는 그 웃음이 더 짜증났다.
시간은 흘렀다.
엄마의 치매는 점점 심해졌다.
라디오 소리는 더 커졌다.
엄마는 같은 이야기를 반복했다.
"민수야, 너 아빠 닮아서 키가 크구나."
"민수야, 아빠는 라디오 고치는 걸 좋아했어."
"민수야, 아빠가 보고 싶다."
민수는 점점 집에 들어가기 싫어졌다.
회사 일이 바쁘다는 핑계로 늦게 들어왔다.
엄마는 그를 기다리다가 소파에서 잠들곤 했다.
라디오는 아직도 켜져 있었다.
어느 날, 민수가 밤늦게 들어왔다.
엄마는 소파에 누워 있었다.
라디오에서는 조용한 음악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민수는 엄마를 방으로 데려가려고 팔을 잡았다.
그런데 엄마의 손이 너무 차가웠다.
"엄마? 엄마!"
엄마는 의식이 없었다.
민수는 급히 119를 불렀다.
병원. 의사가 말했다.
"너무 늦었어요. 심장 마비였어요. 평소에 건강이 안 좋으셨나 봐요."
민수는 그 자리에 멍하니 서 있었다.
'엄마가... 아팠어? 나는... 몰랐어. 나는 엄마한테 화만 냈는데...'
장례식은 작게 치렀다.
왠지 이상했다.
평소에는 싫었는데, 엄마가 없으니 허전했다.
장례식이 끝나고, 민수는 집에 돌아왔다.
거실은 텅 비어 있었다.
라디오도 꺼져 있었다.
민수는 라디오 앞에 앉았다.
만지작거렸다.
배터리 칸을 열었다.
그 안에, 작은 쪽지가 있었다.
엄마의 글씨.
조금 흐트러졌지만, 알아볼 수 있었다.
"민수야, 미안하다. 엄마가 자꾸 라디오 크게 틀어서. 그런데 엄마는 말이야... 이 라디오를 틀면, 아빠가 옆에 계신 것 같아.
니 아빠가 이 라디오를 고쳐 주셨어. 엄마가 결혼하기 전에 갖고 있던 라디오였는데, 고장 났다고 버리려고 했거든. 그런데 아빠가 밤새 고쳐 주셨어. 그리고 말씀하셨어. '이 라디오처럼, 나도 영원히 네 곁에 있을게.'
민수야, 엄마는 아빠가 보고 싶어서 이 라디오를 틀었어. 매일 아침. 아빠가 나를 깨우는 것 같아서.
민수야, 엄마는 이제 아빠 곁으로 간다. 너는 혼자 남겠지만, 걱정하지 마. 엄마는 하늘에서 너를 지킬 거야.
민수야, 미안하다. 너한테 자주 화내서. 엄마는 너를 정말 사랑한단다.
엄마가."
민수는 쪽지를 읽고,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라디오를 껴안았다.
그리고 울었다.
소리를 내어. 아이처럼.
"엄마... 나는... 엄마가 왜 그런지 몰랐어... 나는 엄마한테 화만 냈어... 엄마가 아팠던 것도 몰랐어... 미안해... 미안해요, 엄마..."
라디오는 여전히 조용했다.
엄마의 목소리는 더 이상 들리지 않았다.
그날 밤, 민수는 라디오 배터리를 새 걸로 갈아 끼웠다.
그리고 전원을 켰다.
삐——칙, 삐——칙.
"안녕하세요. 오늘은 3월 15일, 일요일입니다..."
라디오 소리가 흘러나왔다.
민수는 눈물을 닦았다.
그리고 라디오 옆에 앉아서, 엄마처럼 중얼거렸다.
"오늘은 춥네... 엄마, 옷 따뜻하게 입고 계시죠? 아빠도... 잘 계시죠?"
며칠 후, 민수는 라디오를 버리지 않았다.
대신, 그 라디오를 침대 옆에 두었다.
매일 아침 6시. 라디오가 켜졌다.
민수는 더 이상 짜증 내지 않았다.
대신, 조용히 일어나서 라디오 소리를 들었다.
"오늘도 맑은 날씨입니다. 서울 아침 기온은 -3도..."
민수는 작게 말했다.
"엄마, 아빠, 오늘도 잘 지내시죠? 저는 괜찮아요. 걱정 마세요."
그는 라디오 소리를 작게 틀지 않았다.
엄마가 하던 대로, 그대로.
가끔 이웃이 찾아와서 말했다.
"민수 씨, 라디오 소리 좀 줄이세요. 너무 커요."
민수가 대답했다.
"죄송합니다. 그런데 이 소리는... 제 엄마 아빠 목소리라서요. 못 줄이겠네요."
이웃은 그 말에 더 이상 뭐라고 하지 않았다.
시간이 흘렀다.
민수는 결혼을 했다.
아내는 착했다.
아내가 물었다.
"여보, 왜 매일 아침 라디오를 그렇게 크게 틀어요?"
민수가 대답했다.
"내 엄마가 그렇게 하셨어. 엄마는 그 소리를 들으면서, 아빠와 함께 있다고 느끼셨대. 나는 이제... 그 소리를 들으면서, 엄마와 함께 있어."
아내는 그 말을 듣고, 라디오 옆에 작은 꽃병을 하나 놓아 주었다.
"그럼, 엄마한테 꽃도 좀 드려요."
민수는 웃었다.
눈물이 났지만, 웃었다.
민수는 이제 아빠가 되었다.
아이가 라디오 소리에 짜증 낼까 봐 걱정했다.
그런데 아이는 말했다.
"아빠, 이 노래 뭐예요? 할머니가 좋아하셨던 노래예요?"
민수가 깜짝 놀랐다.
"어떻게 알았어?"
"엄마가 말해 줬어요. 할머니가 이 라디오를 매일 들으셨다고. 할머니 보고 싶을 때, 이 라디오 틀면 된다고."
민수는 아이를 안았다.
"그래, 맞다. 할머니는 이 라디오 속에 살아 계셔."
지금도 그 라디오는 아침 6시에 켜진다.
삐——칙, 삐——칙.
소리는 여전히 크다.
이웃은 익숙해졌다.
민수 가족에게, 그 소리는 '엄마의 목소리'이자 '아빠의 약속'이기 때문이다.
가장 듣기 싫었던 그 소리가, 가장 듣고 싶은 소리가 되었다.
가장 슬픈 이별은, 소리가 사라지는 것이다.
하지만 가장 아름다운 기억은, 소리가 되어 남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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