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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일반

만두이야기

작성자경아네|작성시간10.05.31|조회수140 목록 댓글 0

 

만두이야기

 

명화원의 찐만두

 

만두(饅頭).

무심코 지나치지만 상당히 복잡한 음식이다. 만두는 통칭하여 만두라고 하지만,

만두가 가장 발달한, 만두의 출발지라 할 수 있는 중국에서는

‘만두’를 만두饅頭, 교자餃子, 포자包子의 3종류로 나눠서 부른다.

중국의 만두는 속이 없이 찐 밀가루 빵을 부르는 말이다.

그리고 우리가 흔히 만두라고 부르는, 속이 들어 있고, 길이가 긴 것을 중국인들은 교자[자오츠],

그리고 위를 보자기 묶듯이 말아 올리거나 틀어 올린, 둥근 형태의 것을 포자[빠오츠]라고 한다.

우리는 둥글든, 길든 모두 만두라고 하지만 길이가 길고 속이 든 것은

중국과 일본 모두 교자餃子라고 하고 그 발음은 ‘자오츠(중국)’, ‘교자(gyoza 일본)’로 다르다.

 

명동취천루의 만두

 

한국의 만두는 한 번에 들어와서 바로 형태를 정한 것은 아니다.

잘 살펴보면 만두는 여러 번 전래되었다.

현재 한국에서 먹는 만두는 대략 3번에 걸쳐서 한반도로 유래된 것으로 추정된다.

고려시대 각종 기록에 이미 만두에 관한 내용들이 나타나고

특히 중국에서 온 사람들이 ‘고려의 만두가 맛있다’고 기록을 남긴 것을 보면,

만두는 적어도 고려시대 이전에 한반도에 전래되었을 것이다.

 

 명동취천루의 물만두

 

목은 이색牧隱 李穡의 시에도 만두를 노래한 것이 있고,

특히 영화 ‘쌍화점’으로 유명해진 고려 가사 ‘쌍화점’이 사실은 ‘상화점霜花店’으로 ‘만두가게’임을

나타낸다면 한반도의 만두 역사는 적어도 1천년을 넘겼다.

상화霜花는,

만두를 찌면 마치 “서리가 꽃을 피우듯이 하얗게 김이 서린다”고 해서 붙여진 만두의 별칭이다.

물론 당시의 만두의 재료는 흰 밀가루가 아니라, 검은 색깔의 메밀가루가 주 종목이었고,

일반인들이 흔히 먹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별식에 가까운 귀한 것이었다.

주로 고래시대 지배계층인 사찰 등에서 만두를 만들어 팔았다는 기록도 남아 있다.

고려 말기의 기록 중에는 궁중의 만두를 훔쳐가는 행위에 대해서 처벌했다는 ‘재미있는’(?)내용도 있다.

세상에 궁궐에 들어가서 만두를 훔치다니, 이제나 저제나 식탐은 어쩌지 못했던 모양이다.

결국 한반도의 만두는 고려 이전에 한반도에 전래되었고, 조선 시대를 거치면서 독자적으로 발달하였다.

 

강남신사동의 노독일처의 특이한 만두

 

만두가 다시 전래된 것은 1882년 임오군란 이후이다.

임오군란을 계기로 청나라 병사들이 대거 한반도로 몰려오고

이때 중국 산동성의 중국 민간인들이 군인들을 따라 한반도로 건너왔다.

한반도에 들어온 이들 청국인들은 상당수가 집 한 귀퉁이에 가게를 만들고 만두, 월병月餠 등을 팔았다.

월병은, 잘 알려져 있듯이, 호떡의 시작이다.

호떡은 ‘오랑캐 호胡+떡[병餠]’을 합쳐서 ‘오랑캐[청나라]가 먹는 떡’을 이르는 말이다.

 

매화의 만두(위)와 송림원의 만두(아래)

 

이들 중국인들은 처음, 작은 규모를 만두를 만들어 팔기 시작했고,

이런 중국인들의 만두가게가 오늘날까지 명맥을 이으며 서울 시내 ‘오래된 만두집’의 시작이 되었다.

현재 60-70년의 역사를 말하는 명동 ‘취천루’나 삼각지 ‘명화원’ 등의 만두집들은

당시 한반도로 유입된 사람들의 후손들이 경영하는 경우가 많다.

50년 이상의 역사를 가진 자장면집, 중화요리 집들은

상당수 당시 한반도로 건너온 중국인들의 후손들이 경영하고 있다.

 

명동에서 시작하여 연희동으로 옮긴 ‘3대 중국 요리집’ ‘매화’ 같은 경우도 마찬가지다.

만두 마니아들은 을지로 3가에 있는 ‘안동장’의 만두를 좋아한다.

‘안동장’의 만두는 12개를 제공하고 만두피가 상당히 두텁다는 점에서 한국의 만두와 차별화된다.

상당히 외진 곳에 있는 성북동 초입, 한성대 역 부근의 ‘송림원’의 물만두도

15개 정도를 주는 점이 상당히 이채롭다.

‘송림원’ 역시 화교가 운영하는 오래된 중화요리집이다.

 

딘타이펑의 소룡포

 

한반도의 3종류 만두 해방 후, 대만과 홍콩을 통하여 그리고 한중수교 후,

중국을 통하여 만두는 다시 한반도로 유입된다.

현재 명동과 강남에 있는 ‘딘타이펑’은 대만에서 시작된 집이고,

청담동에 있는 ‘난씨앙’ 같은 경우는 중국 상해에서 시작되어 일본과 한국에 분점을 낸 경우다.

뿌리를 따지자면 같은 중국 혹은 대만이지만,

고려시대 이전에 전래된 만두와 다르고

임오군란 시기 한반도에 건너온 중국인들이 운영하는 집과도 차별화 된다.

 

인사동 개성만두 궁의 만둣국

 

고려시대 이전 한반도에서 전래된 후, 조선시대를 거치며 발달한 ‘한반도식 만두’

역시 꾸준하게 명맥을 이었고, 또 상당 부분 새로운 만두의 형태를 보여주고 있다.

특히 한반도의 ‘전통적인 만두’는 한반도의 북쪽 평안도 일대에서 발달하였다.

만두는 ‘평안도식 만두=북한식 만두’와 더불어 ‘개성식 만두로 나눌 수 있다.

개성의 경우, 현재의 서울과 지척 간이므로

결국 만두는 평안도의 ’북한식‘과 서울, 개성의 ’중부식‘으로 분류할 수 있을 것이다.

만두 속도 일정 부분 차이가 있으며

특히 ‘북한식 만두’는 그 크기가 ‘한 입에 다 넣기 힘들 정도로 크다’는 점에서 차별화된다.

 

부암손만두의 편수

 

현재 개성식 만두 혹은 중부, 서울식 만두는

인사동 ‘개성만두 궁’과 부암동 ‘자하손만두’ 등에서 만날 수 있다.

‘자하손만두’에서는 ‘편수’를 만날 수 있는데,

편수는 개성, 중부 지방의 여름 만두이며 우리나라 특유의 만두이다.

흔히 사찰 등에서 먹는, 야채로 만든 만두를 소만두素饅頭라고 하는데,

편수는 여름철에 쉽게 상하지 않게 야채 등으로 만든 우리 고유의 만두다.

소만두에는 오이 등을 비롯하여 야채만 들어가는 채식 만두라는 점이 특이하다.

 

삼청동다락정의 만둣국

 

한반도의 북쪽 평안도 식 만두는 만두를 찌거나 굽는 방식 이외에

‘만두국’을 만들어 먹는 방식에서도 독특하다.

삼청동 ‘다락정’ 등에서 아주 썩 잘 만든 만둣국을 먹을 수 있다.

흔히, 만두를 “제갈공명이 남만정벌을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노수에서 제사를 지내고,

당시 제수로 남만인들의 머리 대신 밀가루에 고기를 넣어 사용했던 음식”에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대부분의 기록들이 그렇게 되어 있지만 과장이다.

 

안동장을지로의 물만두

 

기본적으로 제갈공명의 남만 정벌은 소설의 이야기이고, 정사正史로 보면 과장된 면이 강하다.

정사의 내용을 보면 제갈공명의 ‘남만정벌’은 채 1년이 되지 않는 짧은 기간이며,

소설 ‘삼국지연의’에 나오는 남만정벌, 칠종칠금, 노수대제 등은 아예 없다.

중국인들이 선호하는 인물인 제갈공명의 빛나는 전설에

‘만두의 유래’라는 이야기를 하나 더 얹은 것에 불과하다.

 

역삼동의 만두집 ‘월화당’에 가면 벽면에 이런 내용을 형상화한 글자들이 많이 적혀 있다.

그러나 사실은 그와 다르다.

우리가 읽는 소설 삼국지의 원본은 대략 15세기 이후에 완성된 것을 기본으로 한다.

즉, 제갈공명의 만두 이야기는 15 세기 이후에 누군가가 만들어낸 야사에 불과하다.

만두의 역사는 중국의 경우 이미 2천년을 넘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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