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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일반

트윈폴리오 / 통기타 세대의 아이콘, 파릇한 추억을 깨우다

작성자경아네|작성시간10.08.30|조회수74 목록 댓글 0

 

통기타 세대의 아이콘, 파릇한 추억을 깨우다

 

 

 

이른바 ‘통기타 세대’ ‘청바지 문화’라는 문화적 신조어를 만들어낸 윤형주와 송창식의 만남은 그 자체가 파격이었다. 구태를 답습하기보다는 변화와 자유를 과감히 선택한 그들의 문화적 코드만큼이나 둘의 만남은 신선했다.

 

윤형주는 부잣집 아들이자 서울대 치의대에 다니는 명문대생이었고, 송창식은 방 한 칸 없이 떠돌이 생활을 하던 고교 중퇴생이었지만 그 같은 배경의 차이는 그들에게 그리 중요한 요소가 아니었다. 다만 음악이 좋아서 뭉쳤고 서로의 생각이 같아 화음을 맞췄다. 이들이 대중에게 선보인 첫 번째 화음은 ‘하얀 손수건’이었다.

 

윤형주는 깨끗하고 상큼한 보이스를, 송창식은 텁텁하지만 넉넉한 음색을 지녔다. 이런 둘의 하모니는 놀라웠다. 조금 과장하면 여성의 미성과 남성의 중저음의 조화라고 할까. 그리하여 당시 트윈폴리오는 여대생뿐 아니라 남자 대학생들에게도 대단한 인기를 누렸다.

 

아직도 사람들이 트윈폴리오라는 이름을 기억하며 그들이 무대에 나서기를 기다리는 것은 그 시대를 추억하는 당시의 청년이었던 지금 기성세대에게는 그들의 존재가 하나의 정체성으로 남아 있기 때문이다.

이후 ‘축제의 밤’ ‘고별’ ‘웨딩 케익’과 같은 감미로운 곡들이 크게 히트했으며 당대 최고 인기를 구가했다. 그러나 새로운 문화적 지평을 열었던 이들이 겨우 듀오 결성 1년여 만에 갑작스럽게 해체를 선언했다. 집안의 반대로 짬짬이 활동하던 윤형주가 학업을 위해 경희 의대 본과로 학교를 옮겨야 했기 때문이었다.

이들의 해체 선언은 당대 서구의 비틀스나 ‘사이먼 앤 가펑클’의 해체와 맞먹는 큰 사회적 파장을 일으켰다.

 

1969년 12월, 화려한 불꽃처럼 타올랐던 이들은 갑작스러운 해체 이후에도 틈틈이 신곡을 발표했다. 이후 이들은 무려 여섯 차례나 비공식적 고별 공연을 했고 당시 방송사들은 고별 공연을 다섯 차례나 기획할 정도로 이들의 떠남을 아쉬워하는 팬들의 마음을 대변했다.

 

은퇴 공연 직후 <트윈폴리오 리사이틀>이란 음반을 발표했다. 해체 후 송창식은 솔로 가수로 국내 최고 가수 반열에, 윤형주는 최고의 작곡가 입성에 성공해 인기 스타로서 시대를 풍미했다. 송창식과 윤형주는 개별적으로도 대스타이다.

 

하지만 지금의 40대 후반 이상 기성세대에게는 송창식·윤형주라는 각각의 이름보다 둘의 신선한 결합인 ‘트윈폴리오’가 더 아련한 추억 속 빛바랜 사진으로 남아 있다. 젊었을 적 추억은 참으로 오래간다. 그리고 아름답다. 트윈폴리오가 지나간 역사에 묻히지 않고 살아 숨 쉬는 것은 바로 그 추억의 구심력에서 비롯된다.

 

그것은 기성세대가 트윈폴리오의 음악과 함께 젊은 시절, 그 순수한 청춘을 그들과 함께했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이번 포스코에서 마련한 무대에는 송창식과 윤형주, 그리고 ‘시인과 촌장’의 기타리스트 함춘호(트윈폴리오 결성 전 ‘세시봉’ 트리오 멤버)가 옛 추억을 함께 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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