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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의 인물들

독일 민족의 사도 보니페이스(Boniface)

작성자스티그마|작성시간22.01.10|조회수58 목록 댓글 0

독일 민족의 사도 보니페이스(Boniface)

'강용원 교수의 글모음'에서 공유


보니페이스(Boniface: 680-754)는 영국계 앵글로색슨 족에 속한 사람이다. 그러나 그는 기독교가 크게 정착되지 못한 게르만 민족을 위한 선교에 헌신하였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를 바울 이후의 최대의 선교사라로 말한다. 특별히 그가 미신이 지배하는 곳으로 들어가서 기독교인이 섬기는 하나님이 참 신이라는 것을 보여준 행동은 잘 알려져 있다.

보니페이스는 영국 디본샤이어(Devonshire)의 크레디튼(Crediton)에서 태어났다. 그의 원래 이름은 윈프리드(Winfrid, Winfrith라고도 함)이나 후에 라틴어 이름인 보니페이스(La.: Bonifacius)로 바꾸었다. 그는 수도사가 되기 위해서 베네딕트계 수도원에 들어가서 모범적인 생활을 하였다. 후에 그는 너슬링(Nursling) 수도원으로 옮겨서 교사가 되었고 30세에 사제 서품을 받았다. 그러나 그는 조용히 지내는 생활에 만족하지 않고 대륙의 이방인 게르만 민족에게로 나갈 것을 결심하였다. 보니페이스는 716년에 열두 명의 동료와 함께 바다를 건너 오늘날 네덜란드 북부 해변인 프리시아(Frisia)에 도착하였다. 한 여름 동안 거기서 복음을 전했으나 그곳의 왕이 기독교를 반대하여 성공을 거두지 못하고 다시 영국으로 돌아갔다.

718년에 보니페이스는 로마로 가서 교황 그레고리 2세를 만났다. 교황은 그에게 독일 투링가(Thuringa) 지역에 가서 교회를 돌보라고 지시했다. 그는 알프스를 넘어 그곳에 이르러 약한 교회를 돕고 많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여 상당한 성공을 거두었다. 그때 기독교를 반대하던 프리시아의 왕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다시 그곳에 가서 영국인 선교사 윌리브로드(Willibrord)를 도와 3년 동안 머물렀다.

그는 723년에 로마로 돌아와서 게르만인들의 감독으로 세움을 받고, 이 때 보니페이스라는 새 이름을 얻었다. 보니페이스는 독일의 헤센 지방(Hessen, 그 당시는 Hesse라 부르기도 함)으로 갔다. 전해 오는 이야기에 따르면 가이스마(Geismar)에는 그곳 사람들이 신성시 여기는 아주 큰 떡깔나무(oak tree)가 있었다. 그들은 이 나무를 우레의 신 도나(Donar)에게 속한 것으로 믿고 섬겨왔다. 기독교로 개종한 사람들 중에도 여전히 이 나무를 섬기는 사람들도 있었다. 보니페이스는 이것이 거짓 신임을 보이기 위해서 도끼로 이 나무를 찍어 버렸다. 사람들은 두려워했다. 그러나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보니페이스는 이 나무를 후리츨라(Fritzlar)에서 성 베드로 교회당을 짓는데 사용하였다. 이 일을 통해서 그는 사람들에게 그들이 믿는 신보다 기독교의 하나님이 참 신임을 보여주었다. 이 결과 수천의 현지인들이 기독교로 돌아왔다.

732년에는 대감독이 되었다. 그는 영국에서 온 수도사들과 수녀들의 도움으로 지방 전체에 견고한 교회를 조직할 수 있었다. 특별히 게르만인의 복음화를 위해 여러 지역에 수도원을 세웠다. 헌신적인 수도사들이 자기 종족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이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가 세운 가장 중요한 수도원은 744년에 세운 풀다(Fulda) 수도원이다.

그러나 보니페이스는 처음 선교를 시작했다가 실패한 프리시아 지역을 잊을 수가 없었다. 그는 753년에 대감독직을 사임하고 다시 프리시아로 돌아갔다. 그곳에서 그는 자기의 복음증거를 듣고 개종했던 사람들이 다시 이방종교로 되돌아 간 것을 발견하였다. 그는 그들을 다시 돌아오게 한 후에 복음이 전해지지 않은 곳으로 옮겨갔다.

754년 성령강림주일에 보니페이스는 보르네(Borne) 강 옆에 있는 도쿰(Dokum)에서 노천예배를 드리고 세례를 베풀기로 계획하였다. 지금도 네덜란드 서북부에 같은 이름의 마을이 있다. 그가 강 옆에 이르렀을 때 이교의 불량청년들이 그에게 달려들었다. 주위 사람들이 그들에 맞서 싸우려 나서자 보니페이스는 말했다. “저들과 충돌하지 마시오. 몸은 죽여도 영혼을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마시오. 그리스도와 함께 살고 다스리기 위해 이 순간적인 죽음의 해를 받아들이시오.” 보니페이스는 그의 손에 성경을 쥔 채, 동료들과 개종하고 세례를 받으러온 사람들 50명과 함께 순교하였다. 그는 자기가 말한 것을 성취하였다.

“짓지 않는 개, 말없는 방관자, 늑대를 보고 도망가는 소년처럼 되지 맙시다. 양떼를 지키는 신실한 목자가 됩시다. 하나님의 거룩한 뜻을 높은 사람이나 낮은 사람이나, 부유한 사람이나 가난한 사람이나, 모든 계급과 연령을 초월하여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하나님이 힘을 주시는 한 전파합시다.”

그는 개인적인 헌신, 용기, 신실한 봉사로 기독교인들에게 본이 되었다. 유럽국가의 대부분이, 특히 독일은 보니페이스로 인하여 기독교의 터를 닦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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